【이병채 李秉埰 (1875 ~ 1929)】 "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참모로 전투에 참여"
1875년 (음)10월 21일 전라남도 고흥군(高興郡) 과역면(過驛面) 백일리(白日里)에서 이중한(李重漢)과 김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조부는 진사 이대진(李大震)이다. 호는 백남(伯南)이다. 1886년 (음)4월부터 1894년 7월까지 고흥 여도(呂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신기선(申箕善)에서 수학하였으며, 마을에 서당을 개설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1896년 민용호(閔龍鎬)의 주도로 결성된 관동구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義所)의 강릉유진장(江陵留陣將)을 맡아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여러 자료에 강릉의진의 이병채는 춘천인(春川人) 혹은 목천인(木川人)으로 기록되어 있어 동명이인으로 보인다. 1953년 고흥 과역에 건립된 기적비에도 강릉 의병부대에 참여한 내용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
1907년 8월 2일 “간신과 왜적들이 횡행하며 나라를 어지럽히므로, 오로지 초야에 있는 우리가 의리로써 나라를 구할 적개심이 없다면 짐승과 같다”고 말하며 가묘와 부모님께 하직인사를 올린 후 가족들과 작별하고, 서울로 가서 허위(許蔿)·신응휴(申應休)와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후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여 선봉진에 들어가, 경기도의 철원(鐵原)·마전(麻田)·연천(漣川)·포천(抱川)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이때 허위의 참모로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고 경기도 양주(楊州)로 진군하다가 다리에 총을 맞기도 하였다. 이후 양주에 주둔하며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던 중, 임금의 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국가적 위기를 평정할 수 있는 상소를 올려 충분(忠憤)의 뜻을 피력하였다.
1908년 3월 일제가 마쓰이 시게루(松井茂) 경무국장 및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 명의의 쪽지를 보내 회유하려 하자, 통감부의 공식서류로 발송하라고 물리쳤다. 1907년 (음)11월 초 허위로부터 신무기 구입 지시를 받고 김규식과 동분서주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08년 전라도에서 의병 모집 활동을 벌였다. 같은 해 2월 4일경 서울로 와서 지방을 오가며 의병 규합에 힘쓰다가, 3월 10일경 귀경하였다. 이후 신기선이 주관하는 대동학회(大東學會)의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나, 학회 회원 대부분이 의병 활동이 무모하다고 질책하였다. 양주로 내려가 김규식과 허위에게 귀순을 권하였으나, 허위는 “고종의 조칙을 받았으니 단연코 의병활동을 그만둘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1908년 3월초 이순하의 주선으로 경시청에 귀순한 다음 대한매일신보사 기자로 입사하였지만, 1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허위와 함께 의병 활동을 펼칠 때 작성한 격문이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었는데, 이를 읽고 의병에 투신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1909년 12월 12일 전남의 순천·보성·고흥 출신의 유학자 12명의 이름으로 「자치동맹취지서」를 발표하며 일제의 강제 합병에 반기를 들었다. 1910년 4월에도 순천의 안규휴(安圭休) 등 85명의 이름으로 국민대연설회를 개최하여 ‘합방’에 찬성하는 일진회를 성토하였고, 합방을 반대하는 장서운동(長書運動)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4~5월에는 통감부·일본내각·내각총리대신 등에게 합방 반대 서간을 보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13년에는 독립의군부의 전라남북도 순무중군(全羅南北道) (巡撫中軍)에 임명되어 비밀결사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듬해 발각되고 말았다.
1919년 3월에는 1910년 장서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을 규합하여 벌교지역 만세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말부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참모로 활동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독립군의용대장 홍범도와 동원(同員) 박경철(朴景喆)·이병채’의 명의로 발표된 유고문(諭告文)이 『독립신문』에 실렸다. 유고문에서는 독립군의 이름을 빙자하여 민폐를 끼치는 무뢰배들에게 엄중 경고하는 한편, 만주의 한국인들에게 적극 대응할 것을 요망하였다.
1920년 6월 일본군 월강추격대가 허룽현(和龍縣) 봉오동(鳳梧洞)에 침입하였다. 그러자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의 참모로 전투에 참여하였고,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등과 연합하여 봉오동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이 자행한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 이후 홍범도 등과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만주,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합류
이병채는 더 이상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이 어렵게 되자 만주로 건너가 홍범도가 이끌던 북로제일군사령부에 참여하여 참모로서 봉오동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청산리전투 후 일제의 무분별한 탄압으로 만주지역에서도 활동이 어렵자 독립군들은 러시아 연해주 이만지역으로 넘어갔다. 이병채도 연해주로 이동하여 1923년 5월경 이만에서 조선독립단군정서(朝鮮獨立團軍政署) 의회에 참여하였다. 이 의회에는 김좌진(金佐鎭)·홍범도(洪範圖)·이청천(李靑天) 등이 참석하여 독립군의 모집과 무기·군복·식량 등의 준비, 국내침투방법 등을 협의하였다. 이후 이병채의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고흥 이병채 기념비
고흥 이병채 기념비
1923년 4월에는 연해주 우수리[(烏蘇里)]에서 소집된 조선독립단군정서(朝鮮獨立團軍政署)의 ‘이만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김좌진(金佐鎭)·홍범도·이청천(李靑天)·김규린(金奎麟)·안무·정일무(鄭一武) 외 10여 명의 독립운동단체 대표들과 독립군 모집, 무기 및 군수물자 준비, 국내진공작전 등에 관해 협의하였다. 이때 이후 1925년 초까지 연해주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친필로 격문·상소문·우국시·독립군 투쟁기록 등을 기술한 『북래산록(北來橵錄)』을 남겼다. 1953년에는 독립운동 행적과 희생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과역면 과역리에 ‘의사 백남이공 기적비’가 건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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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채가 작성한 『독립신문』의 「유고문」 [판형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