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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창작 연구 스크랩 * 김선우 시인 ( 시모음 )
은하수 추천 0 조회 99 16.03.05 14: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선우
1970  강원 강릉 출생.

강원대 국어교육과
1996년 『창작과비평』겨울호에 「대관령 옛길」등 10여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함.
        현재 '시힘' 동인.
시  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동화집 : 『바리공주』
산문집 : 『물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 시인 ( 시모음 )

 

간이역

 

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 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썹처럼 나타나던 좋.아.해 

얼레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흙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오고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 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철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든가 용접봉, 불꽃, 희망 따위 

어린날 알지 못했던 말들 

어느 담벼락 밑에 적고 있을 그애 

한 아이의 아버지가 가끔씩 생각난다 

당두마을, 마른 솔가지 냄새가 나던 

맴싸한 연기에 목울대가 아프던  

 

 

관계 

 

(고백할 게 있어 어떤 벌레에 관한 얘긴데 말야

달팽이 몸 속에서 알을 까고 자라난대)

두려워하진 마 암세포처럼 무식하게

숙주를 절명시키진 않아 기어다니거나

교접하는 데에도 아무 문제 없어 넌 열심히

먹이를 찾아다니고 나는 무럭무럭 커가는 거야

(놀랍지 않아? 몸 속에 뭔가 기르고 있다는 거)

근데 말이지 난 이제 다 커버렸고

장년기를 보내기에 넌 너무 작고 초라해

좀더 쾌적한 새의 창자 안에서

말년을 보내는 게 내 운명이야

네 여린 눈으로 침입해 들어갈 거야 고통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네 머리는 영롱한 빛을 뿜어내겠지

넌 이제 한가롭게 마지막 산보를 즐기면 돼

멀리서 아름다운 새의 발톱이

빛나는 네 등짝을 찍으러 날아올 테니까

한평생 배밀이로 기어다니다

무덤도 없이 가랑잎 위에 뒹구는 걸 생각해 봐

쓸쓸한 죽음은 질색이야 구름은 흩으며 날게 해줄께

따뜻하게 버무려지는 네 육즙을 맛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송곡을 들려주겠어

새로운 내 집이 맘에 들 거야 짓이겨지면서,

그때야 넌 모든 걸 깨달을지 모르지만

모든 끝장은 단호한 거야 난 네게 빚 없어

(놀랍지 않아? 날 키운 건 너야)

 

 

 

그 많은 밥의 비유

 

 

밥상 앞에서 내가 아, 입을 벌린 순간에

내 몸속이 여전히 깜깜할지 어떨지

희부연 미명이라도 깊은 어딘가를 비춰줄지 어떨지

아, 입을 벌리는 순간 췌장 부근 어디거나 난소 어디께

광속으로 몇억 년을 달려 막 내게 닿은 듯한

그런 빛이 구불텅한 창자의 구석진 그늘

부스스한 솜털들을 어루만져줄지 어떨지


먼 어둠 속을 오래 떠돌던 무엇인가

기어코 여기로 와 몸 받았듯이

아직도 이 별에서 태어나는 것들

소름끼치게 그리운 시방(十方)을 걸치고 있는 것


내 몸속 어디에서 내가 나를 향해

아, 입벌리네 자기 해골을 갈아 만든 피리를 불면서

몸 사막을 건너는 순례자같이


그대가 아, 입을 벌린 순간에

내가 아, 입 벌리네 어둠 깊으니 그 어둠 받아먹네

공기 속에 살내음 가득해 아아, 입 벌리고 폭풍 속에서

비리디 비린 바람의 울혈을 받아먹네

그대를 사랑하여 아, 아, 아, 나 자꾸 입 벌리네

 

 

 

 

꿀벌의 열반 

 

 

어느 굽이 긴 터널을 통과해왔는지

꿀벌 한 마리,

내 방 쪽창 벤자민 화분에 떨어졌네

찢어진 날개 허공을 움켜쥐어

대기권 밖이 찰나, 수런거리는데


(얘야 석류꽃 피는구나…… 빨래 널던 어머니)


기일게 담배 한 개비 태워 무는 동안

허공이 몇백번 움켜졌다 놓여나고

나 생각하네

괴롭구나 이제 그만 끝내줘야겠구나

벤자민 나무 아래 무명지로 무덤을 파고

꿀벌을 옮겨 넣었네 조용히

흰구름 몇천번 스쳐지나고 뭉치는데


(얘야 석류꽃 지는구나…… 뜰을 쓸던 어머니)


아니었나 괴로운 게 아닌지도 몰라

생애 단 한번 저이는

단 한번 내 방 쪽창 벤자민 나무 아래에서

햇살이라든가 공기라든가 공기 속에 흩어진

몇 생애 전 꽃가루를 만나는가

가쁜 호흡, 운우지정을 나누고 있는 것도 같아

쥐었던 흙 한줌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배냇적 네 잇몸 같은, 얘야 이 석류알 좀 보려무나)

 

 

 

낙화, 첫사랑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그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내력 

 

 

몸져누운 어머니의 예순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 소변을 받아드리다 보았네

한때 무성한 숲이었을 음부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에

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있었네

비탈진 밭에서 젊음을 혹사시킨

산간 마을 여인의 성기는 비탈을 닮아간다는,

세간의 속설이 내 마음에 천둥 소낙비 뿌려

어머니 몸을 닦아드리다 온통 내가 젖는데

겅성드뭇한 산비알

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

되돌아가는 소슬한 평화를 보았네

부끄러워 무릎을 끙, 세우는

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아이의

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네

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었네

 

 

 

 대관령 옛길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火酒 -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거니?

 

 

맑은 날  

 

 

동사무소를 지나다 보았다

다리가 주저앉고 서랍이 떨어져나간 장롱

누군가 측은한 눈길 보내기도 했지만

적당한 균형을 지키는 것이

갑절의 굴욕이었을지 모른다

물림쇠가 녹슬고

문짝에서 먼지가 한웅큼씩 떨어질 때

흔쾌한 마음으로 장롱은 노래했으리

오대산의 나무는

오대산 햇살 속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살이었던

못들은 광맥의 어둠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뼈였던

저의 중심에 무엇이든 붙박고자 하는

중력의 욕망을 배반한 것들은 아름답다

솟구쳐 쪼개지며 다리를 꺾는 순간

비로소 사랑을 완성하는 때

돌팔매질당할 사랑을 꿈꾸어도 좋은 때

죽기 좋은 맑은 날

쓰레기 수거증이 붙어 있는

환하고 뜨거운 심장을 보았다

 

 

 맑은 울음 주머니를 가진 밤

 

 

집 앞 밭들 사이에 조그만 논이 있었다는 걸

개구리 울음소리 들려와 비로소 눈치챈다
 

어느 외로운 식물이 터뜨린

비린 씨앗 같던 올챙이들 어느새 자라

밤에게 둥근 울음주머니를 달아준다

떨어져 구르는 제 몸 어딘가에

울음주머니 하나씩 매달고

더러워진 봄꽃들이 맑은 하늘로 올라간다
 

부풀어오른 둥근 울음주머니 저편으로

새로 생긴 잔별들이 보리잎처럼

까끌까끌 내 손끝을 찌르며 지나간다

지나온 길들로부터

도대체 나는 어떤 피를 수혈받은 걸까

열망이 사라지고

다만 이 괴이한 평화로움
 

모든 오늘이

울음주머니 속에 숨고 싶다고 내게 말한다

더러워진 꽃들이 모두 승천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세상은 더러울 텐데. 

 

 

목포항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 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 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 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팍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 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물로 빚어진 사람

 

 

월경 때가 가까워오면

내 몸에서 바다 냄새가 나네

 

깊은 우물 속에서 계수나무가 흘러나오고

사랑을 나눈 달팽이 한쌍이 흘러나오고

재 될 날개 굽이치며 불새가 흘러나오고

내 속에서 흘러나온 것들의 발등엔

늘 조금씩 바다 비린내가 묻어 있네

 

무릎베개를 괴어주던 엄마의 몸냄새가

유독 물큰한 갯내음이던 밤마다

왜 그토록 조갈증을 내며 뒷산 아카시아

희디흰 꽃타래들이 흔들리곤 했는지

푸른 등을 반짝이던 사막의 물고기떼가

폭풍처럼 밤하늘로 헤엄쳐 오곤 했는지

 

알 것 같네 어머니는 물로 빚어진 사람

가뭄이 심한 해가 오면 흰 무명에 붉은,

월경 자국 선명한 개짐으로 깃발을 만들어

가우제를 올렸다는 옛이야기를 알 것 같네

저의 몸에서 퍼올린 즙으로 비를 만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이야기

 

월경 때가 가까워오면

바다 냄새로 달이 가득해지네

 

 

 

민둥산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 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 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 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 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 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를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 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은 천 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봄날 오후

 

 

늙은네들만 모여앉은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그.러.바.서,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바른다 

봄날 오후 세시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놓은 젖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 싶다

 

 

빈집 

 

 

불현듯 강바닥으로 내려앉는

빈집

황지였나 사북이었나

고분처럼 폐석더미 쌓인 마당

발가벗은 아이 혼자 놀고 있었다

무엇이 고팠던 걸까

어린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토닥토닥 흙집을 만들던 마당가

이따금씩 개미가 손등을 타오르고

폐석더미 옆 고즈넉이 깨꽃 붉었다

흰 구름 데리러 간 엄마는 왜 안 오나

깨꽃 입술만 흙집 싸리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빌려 줄 몸 한 채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

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

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

그 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

마음이 이미 길 떠나 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걸

처음 자리에 길은 없는 거였다

 

 

 

숭고한 밥상 

 

 

밥 잡채 닭도리탕 고등어자반 미역국

이토록 많은 종족이 모여 이룬

생일상을 들다가 문득, 28년 전부터

어머니를 먹고 있다는 생각이

 

시금치 닭 고등어처럼 이 별에 씨뿌려져

물과 공기와 흙으로 길러졌으니

배냇동기가 아닌가,

내내 아버지와 동침했다는 생각이

 

지금 먹고 있는 닭 한마리

내 할아버지를 이루었던 원소가

누이뻘인 닭의 깊은 곳을 이루고

누이와 살을 섞은 내 핏속엔 지금....

 

누대에 걸친 근친상간의 밥상

비켜갈 수 없는,

무저갱의 밥상 위에

발가벗고 올라가 눕고 싶은 생각이

 

어머니가 나를 잡수실 수 있게 말이지요

 

 

 

 완경  ( 完經 )

 

 

수련 열리다

닫히다

열리다

닫히다

닷새를 진분홍 꽃잎 열고 닫은 후

초록 연잎 위에 아주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선정에 든 와불 같다

 

수련의 하루를 당신의 십년이라고 할까

엄마는 쉰살부터 더는 꽃이 비치지 않았다 했다

 

피고 지던 팽팽한

적의(赤衣)의 화두마저 걷어버린

당신의 중심에 고인 허공

 

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삭인다

폐경이라니, 엄마,

완경이야, 완경!

 

 

점 

 

 

나는 지금 애인의 왼쪽 엉덩이에 나 있는 

푸른 점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오래 전 내가 당신이었을 때 

이 푸른 반점은 내 왼쪽 가슴 밑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구과학 시간 칠판에 점 하나 쾅, 찍은 선생님이 

이것이 우리 은하계다! 하시던 날 

솟증이 솟아, 종일토록 꽃밭을 헤맨 기억이 납니다 

한 세계를 품고 이곳까지 건너온 고단한 당신, 

당신의 푸른 점 속으로 내가 걸어들어갑니다 

푸른 점 속에 까마득한 시간을 날아 

다시 하나의 푸른 별을 찾아낸 

내 심장이 만년설 위에 얹힙니다 

들어오세요 당신, 광대하고도 겨자씨 같은, 

당신이 내 속으로 들어올 때 나, 시시로 사나워 지는 것은 

불 붙은 뼈가 물소리를 내며 

자꾸만 몸 밖으로 흘러나오려 하는 것은 

푸른 별 깎아지른 벼랑 끝에서 

당신과 내가 풀씨 하나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실 ( 胎室 )

 

 

춘분 지난

부석사 사과밭

이른 나비 날았지만

사과나무들은 아직

겨울 쪽에 기울어 있네

새로 돋은 붉은 가지

그림자 닿는 곳

지난 해의 사과 한 알

아랫도리가 썩고 있네 황홀한

출혈,

뭉크러지며

지난해의 사과 한 알

낭떠러지를 향해 가는 사이

사과꽃 피네

겨울 쪽에 기대어

새로 돋은 이로 탯줄을 갉고 있는

꽃자리, 꽃자리들

 

 

 

피어라, 석유!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

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앞에

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온몸으로 꽃이어서 꽃의 운하여서

힘이 아닌 아름다움을 탐할 수 있었으면

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

차라리 나를 향해 저주의 말을 뱉으세요

포화 속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의 발 앞에

검은 유골단지를 내려놓을게요

목을 쳐주세요 흩뿌리는 꽃잎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의 상한 발을 덮을 수 있도록

꽃잎이 마르기 전 온몸의 기름을 짜

어머니, 낭자한 당신의 치욕을 씻길께요

 

 

 

사랑의 거처


살다보면 그렇다지
병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지 

치료하기 어려운 슬픔을 가진
한 얼굴과 우연히 마주칠 때 

긴 목의 걸인 여자 -
나는 자유예요 당신이 얻고자 하는
많은 것들과 아랑곳없는 완전한 폐허예요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눈
나는 텅 빈 집이 된 듯했네

살다보면 그렇다네 내 혼이
다른 육체에 머물고 있는 느낌
그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네 

 

 

얼레지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그런 것이다 사랑은
입동 무렵의 동백꽃
드레지게 들여다보다
눈물,
예각 둔각으로 마음을 찔러
활활 눈두덩이 뜨거워져오는 것이다
머릿속 온통 붉어오는 것이다

밤 내내 꽃잎 떨게 하던 별빛
무서리 맞은 그것이
마음을 스윽, 베고 들어온다
나의 주파수가 들켜버린 것이다


 

 나팔꽃  
         

十字路

수벌 한마리 그 길에 접어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기다려보자

언젠가 나도
저 문을 통해 나온 적이 있다

 

돌에게는 귀가 많아 
 
 
귀가 하나 둘 넷 여덟
나는 심지어 백 개도 넘는 귀를 가진 돌도 보았네
귀가 많은데 손이 없다는 게 허물 될 것 없지만
길 위에서 귀 가릴 손이 없으면 어쩌나
나도 손을 버리고 손 없는 돌을 혀로 만지네
이 돌은 짜고 이 돌은 시네
달고 맵고 쓴 돌 칼칼한 돌 우는 돌
단 듯한데 실은 짜거나
쓴 듯한데 실은 시거나
혀끝을 골고루 대어보아야
돌이 자기 손을 어떻게 자기 몸속에 넣었는지
알 수 있네 무미무취라니!
무취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귀가 많으니 돌이야말로 맛의 궁전이지
당신이 가슴속에서 꺼내 보여준
막 쪼갠 수박처럼 핏물 흥건한 돌덩이
맵고 짜고 쓴데 귀 가릴 손이 없으니
내 입술로 귀를 덮네
입술 온통 붉은 물이 들어
어떻게 자기 귀를 몸속에 가두는지 보라 하네

 


 

 매발톱  

      

야생화 전시장에서 산 거라고, 먼 곳에서
자그만 매발톱풀을 공들여 포장해 보내왔습니다
그 누구의 살점도 찢어보지 못했을
푸른 매발톱
한 석달 조촐하니 깨끗한 얼굴이더니
깃털 하나 안 남기고 날아가버렸습니다
매발톱풀을 아랫녘 밭에 묻어주러 나간 날은
이내가 파근하게 몸 풀고 있는 저물 무렵이었는데
거름이나 되려무나
밭 안쪽에 화분 속을 엎었습니다
화분 흙에 엉겨 있는 발톱의 뿌리는
보드라운 이내 속 깊은 허공 같아서
여리디여린 투명한 날개들이
그제야 사각대며 일제히 날아올랐습니다
아주 오랜동안 내 꿈속을 찾아왔으나
한번도 내게 얼굴을 보여준 적 없는 바람을 타고
반짝이는 수천의 실잠자리떼
이내 속 깊은 허공으로 날아갔습니다

사람에 의해 이름 붙여지는 순간
사람이 모르는 다른 이름을 찾아
길 떠나야 하는 꽃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리고 푸른 어미꽃 


사람이 하려면 어림없는 것인데
봐라, 하늘이 하시는 일인 거라.
마당에 내려선 어머니가 합장을 하였습니다
가뭄 끝에 단비 땅을 적시어
땅냄새 물큰하니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봉인을 풀듯 나직한 그림자 적시며
생땅 냄새,
푸른 꽃내음이 훅 끼쳐 왔습니다

50억살 먹은 어리고 푸른 꽃이
50억년 찰나 동안 피워올린 몸의 향기

라일락이랄지 감꽃이랄지
이윽한 것들의 향기 속에 배어 있던 흙내음이
어린 어미꽃의 몸냄새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가뭄 끝이었습니다

 

왕모래 

       
강릉 정동 봄바다
오랜 지병의 어머니와
달마중하러 나왔는데
모래 한 줌 쥐니 솨아아, 봄날은 가고
모래 한 줌 속에 일곱 남매 눈망울이 영글어

"이쁘쟈?"
왕모래 몇 알갱이 손에 건네주신다
안 하던 일을 하면 북망이 멀지 않다는데
틀니 달칵거리며
소녀처럼 "이쁘쟈?"
가슴이 출렁한다

모래는 조약돌을 기억하고 있을까
조약돌은 바위였을 때를 그리워할까

봄바다 아득하게 밤은 깊은데
솨아아, 한 생애를 키질하는 어머니

늑골에서 울던 무엇의 뼈가 닳아져
손바닥 위에 반듯하게 누었나

대관령 고갯마루
속금 터지는 바위 한 채 달을 이고 섰다

 

연밥 속의 불꽃 


연탄을 때는 집이었다
사북, 1989년이었고 갓스물이 된 나는
여인숙 방에 누워 겨울 연못
얼음장 위로 비죽 솟아 있던 딱딱하고 검은
연밥을 생각하였다 오래 퇴적되어 석탄처럼 시커메진
연밥 한덩이, 땅 밑이 얼마나 추웠으면
그렇게 많은 구멍을 지니게 된 걸까
삼월에도 사북은 춥고
연밥이 지닌 숨구멍은 난사당한 과녁처럼 위태로웠지만
기이한 평화에 소리없이 문이 생기고
주인 할머니가 들어와
방바닥을 만져보고 나가는 것이었다
라면도 팔고 소주도 파는 간판 없는 여인숙
다리를 저는 할머니는 광주 사람이라 하였다
광주,라는 말이 누란이라는 말처럼 아득하였다
그날밤 나는 달의 어두운 저편으로 누란을 떠올리고
보이지 않는 누란을 향해 타박타박
낙타를 타고 걷는 꿈을 꾸었다
낙타 발자국이 만드는 모래구멍
사막은 전부가 길이어서
발자국은 금새 모래로 채워지고 금 간 유리창에
눈보라가 불꽃처럼 타닥타닥 부딪쳤다
얼음연못에 지펴진 모닥불꽃 타는 소리
사북도 광주도 얼음연못이었지
얼음장 위로 비죽 솟은 연밥 한점은
기이한 평화 속에 납골처럼 차가웠고
내가 던진 투석은 얼음을 지치며
모서리로만 날아갔지만,
연탄이 사위는 시간 할머니는 어느새
숯 지피는 처녀로 돌아가 있었다
사위는 연탄구멍 속에 얼음연못이 따뜻하였다
1989년 나는 스물이었고
빈혈을 앓는 역사가 그 곁을 지나갔다
연밥 구멍 속으로 누군가 고요히
수혈하는 밤이었다

귤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골목길 돌아 나오다 누가 나를 불러
잠시 눈길 준 폐타이어 쌓인 창고 앞
조붓한 담장 아래 아기 어금니처럼 돋아 있는
귤싹 하나 만난다 지난 겨울 어느 늦은 밤
소주를 사러 점방 가는길에 아무 생각 없이 뱉어낸
귤씨 하나가, 아니겠지 설마 그 귤씨 하나가
 
큰맘 먹고 사놓은 백개들이 귤 한상자
한겨울 밤 야금야금 까먹던 그 귤들이
더러는 맑은 오줌으로 몸 밖을 흘러나가고
사는 일이 서리 앉은 빨랫줄 같아,
푸념하면서도 하루를 견디게 한 어떤 열량이 되고
잔주름 생기기 시작한 눈가
지친 세포의 자살을 지연시키는 비타민이 되고
어두운 상자 속에 얼마 남지 않은 귤 몇알이
그래도 천연스럽게 댕글댕글 빛나던 힘!
귤껍질에 빼곡히 열린 구멍이란 게 실은
저의 중심을 향해 세상의 향기를 흐르게 한

통로는 아니었을까


보이지 않는 중심을 향해 몸을 맞대고
껍질을 벗겨내도 흩어지지 않던 귤조각
시고 달고 아린 저마다 다른 맛들이
열어둔 통로를 지나 중심으로 모이듯
귤 한상자 놓여 있던 겨울의 귀퉁이가 문득 밝아지고
알전구같이 흐릿한 창밖의 그늘이
외로운 귤알들로 빚어지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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