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디자이너들이 자동차 디자인은 예술이라고 말한다. 쉽게 생각해 보기 좋고 멋진 것이 예술이라면 그들의 생각이 틀리진 않다.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해당 브랜드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트렌드를 접목해 어떻게든 멋진 차를 그리기 위해 노력하니까. 하지만 그들이 예술이라 칭송하며 그려낸 자동차는 더 많이 팔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예술적 가치보다는 상업적 성격이 더 농후하다. 예술을 상술로 표현한 것을 두고 예술적 심미안이 없어서 하는 소리라고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자동차 브랜드가 있다. 애스턴마틴이다.
DB11은 미끈하면서 농염한 보디라인만으로 예술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서 있어도 달리는 것 같은 속도감을 지녔고 팽팽한 긴장감 같은 것도 차체에 흐르는 듯하다. 디자인만으로 여러 감성이 느껴지니 이 차는 예술적 가치를 논하기에 충분하다. 어차피 예술은 감성의 자극 정도에 따라 가치를 평가받는 것이니까.
애스턴마틴은 이런 디자인을 위해 엔지니어링 측면에서 과감한 결정을 했다. 미려한 실루엣을 해치지 않기 위해 리어 스포일러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다운포스는 필요했고 앞바퀴 옆에 인테이크를 뚫고 공기가 차체를 흘러 뒤로 빠져나가게 했다. 뒤에 작은 날개 하나 붙이면 되는 쉬운 길을 놔두고 고행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건 오로지 ‘멋짐’을 위해서다. 그런데 스포일러가 없는 게 아니다. 고속에서 아주 작고 얇은 바가 리어 데크에서 올라온다. 보닛은 알루미늄이다. 그릴부터 휠하우스까지 원피스로 만들었다. 세계 모든 자동차 중에서 가장 큰 알루미늄 조각이다. 차체를 조각조각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내는 우아하고 고급스럽다. 가죽시트 문양과 타공, 스티치만 보더라도 얼마나 공들였는지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가죽과 알루미늄이다. 대시보드와 천장까지 가죽으로 감쌌다. 어쩌면 이 차는 금속보다 가죽을 더 많이 사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종종 플라스틱으로 보이는 게 있는데 탄소섬유다. 이 차의 모든 것은 최상의 럭셔리로 귀결된다. 단 하나, 나이키 운동화에 유니클로 티셔츠를 입은 내가 이 차의 고귀함에 흠집을 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송구함이 든다.
두툼한 시트가 몸을 포근히 감싸고 볼륨을 넣은 운전대는 감촉이 좋다. 기분이 좋아진다. 우렁찬 시동 소리도, 노면을 부드럽게 누르는 승차감도, 노면을 타지 않고 자연스럽게 도는 운전대도, 모든 게 완벽하다. 안락하다. 어쩌면 나른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른함도 잠시, 오른발 움직임에 따라 또는 주행 모드에 따라 차의 성격이 극명하게 달라진다. 당연하다. 대부분의 영국 자동차 브랜드가 그러하듯 애스턴마틴도 그 근본 뿌리는 레이싱이다. 엔진 모드를 스포츠(엔진, 서스펜션을 각각 GT, 스포츠, 스포츠 플러스로 따로 조절할 수 있다)로 올리니 RPM이 훅 올라가고 배기음이 뻥뻥 터진다. 나른함이 일순간 긴장감으로 바뀐다. 510마력의 4.0리터 V8 트윈터보는 메르세데스 AMG에서 가져왔는데, 배기 매니폴드를 따로 디자인해 소리가 다르다. AMG는 날카롭고 애스턴마틴은 저음에 무겁다.
DB11 V8은 0→시속 100킬로미터 가속을 4.0초에 달리니 엄청나게 빠른 차다. 그 빠름 안에서 안정감을 전혀 잃지 않고 언제나 노면에 착 붙어 가속한다. 특히 서스펜션이 가장 부드러운 GT 모드에서의 움직임이 가장 안정적이다. 그립이 더 좋기 때문이다. 스포츠, 스포츠 플러스 모드는 차체 흔들림을 줄이기 위해 서스펜션이 많이 움직이지 않는다. 노면 충격이 많고 노면이 좋지 않은 곳에선 그립이 떨어졌다.
코너에서도 흔들림 없이 빠름을 유지한다. 뒷바퀴를 조향하는 등의 복잡한 기계장치 없이도 이런 훌륭한 코너링을 내는 것을 보면 기본기가 얼마나 잘된 차인지 알 수 있다. 더불어 이런 기계장치가 없으니 코너링이 자연스럽고 움직임도 예측하기 쉽다. 레이싱 트랙에선 훨씬 더 빠른 움직임을 낼 것이 분명하다.
DB11 V8은 우아하고 맹렬하다. 애스턴마틴 역사에서 멋지지 않은 차가 없었고 빠르지 않은 차가 없었으니 당연하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애스턴마틴을 타면 나이키를 신고 유니클로를 입어도 멋지다. 어쩌면 애스턴마틴의 디자인과 퍼포먼스는 운전자의 멋짐을 위한 가장 그럴듯한 변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