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김동리(오른쪽 두 번째)와 함께한 정주영(오른쪽에서 세 번째). 아산은 한국 문단의 원로작가들과 문학과 인생 이야기를 같이 나누며 오랜 친분을 유지했다. photo 정주영닷컴 |
“저 아래 초입에서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는 정주영이란 분이에요. 문인 선생님들께 문학과 인생에 대해 배우고 싶다더군요. 그 뜻이 가상해서 참석을 허락했지요.”
이헌구, 김광섭, 서정주, 이하윤, 구상 등 문단의 쟁쟁한 인물들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이때부터 정주영은 자신의 고향과 가까운 원산에서 내려온 구상에게 두터운 친근감을 느끼고 가까이 지냈다. 나이는 정주영이 네 살 위였다. 수필가 전숙희나 성악가 김자경과도 그때부터 교류해 왔다. 김자경은 음악도이면서도 자주 문인들 모임에 끼곤 했다. 모임이 끝나면 으레 김자경이 노래를 맡아 했고, 정주영도 유행가를 즐겨 불렀다. 정주영은 춤도 한국춤, 서양춤 할 것 없이 고루 추며 흥을 돋우었다. 정주영은 문인들을 특히 좋아하여, 그들의 시(詩)라든가 소설의 명문장들을 줄줄 외며 그들을 즐겁게 하고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가 모윤숙의 ‘렌의 애가’를 줄줄 외우고 시 낭송을 하자 모두들 놀라워하며 박수를 쳤다.
훗날 정주영은 1985년부터 여름철마다 경포대에서 열린 ‘해변 시인학교’에 참가해 문인들과 어울리며 문학과 인생에 대해 토론을 즐겼다. 수강생들과 시 강의도 듣고 낭독회에도 참여하고, 주최 측 요청으로 특강에 나서서 자신이 좋아하는 한시(漢詩)를 풀이하기도 했다. 일과를 마치고 나서는 황금찬 교장을 비롯한 참가 시인들과 어울려 바닷가 주막에서 이슥하도록 술판을 벌였다. 그 뒤 10여년간 여름이면 거의 거르지 않고 해변 시인학교를 찾아 시인들과 바다를 즐겼다. 정주영이 그저 교양 있어 보이려고 겉멋으로 문인들과 어울리며 모임에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문학적 감수성과 글솜씨가 뛰어났으며, 어린 시절 신문 연재소설 이광수의 ‘흙’과 박화성의 ‘백화’ 등을 읽으면서 문필가의 꿈을 키웠었다. 정주영이 쓴 ‘새봄을 기다리며’라는 수필에서 로맨티스트 정주영의 문학적 재능을 엿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새봄을 기다리며
‘창밖으로 내리는 부드러운 함박눈은 오는 봄을 시샘하는 것인가? 예로부터 입춘 지나서 오는 눈은 꽃을 시샘하여 내린다 하여 꽃샘 눈이라고 부른다. 초봄의 여신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마음속에 흐뭇하게 안겨 준다. 인왕산 골짜기엔 해빙의 물소리가 졸졸 흐르며 삼라만상을 에워싼 대기에는 약동하는 새봄의 기운이 서렸음을 알려 준다. 춥고 지루하던 겨울은 지나가고 깊고 깊은 겨울밤의 사색에서 깨어나 긴 기지개를 켜는 봄을 바라본다. 이른 봄 먼 곳에서 동경의 여인이 살며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새봄을 기다리며 인왕산 음지의 잔설에 아쉬움을 보낸다. (중략) 봄기운은 생명 속의 오염된 찌꺼기를 씻어 내는 맑은 냉수와도 같다. 새벽녘 경복궁의 중후하고 긴 돌담장 옆을 달리며 아직은 찬 침묵 속이지만 봄의 태동을 곳곳에서 느낀다. 조춘의 감격을 가슴 그득히 들이마시며 아직 밝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사무실에 들어서면 봄은 간 곳 없이 사라진다. 비단 봄뿐이 아니고 모든 절기의 변화에 대하여 그 반사감각은 무디어지고 어린 시절의 먼 감상을 되씹는 일밖에 없다. 계절이나 자연은 그때에만 민감할 수 있고 유정(有情)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린 날의 순박한 자연은 어느새 멀리 뇌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고향을 등진 도시의 유랑민처럼 거북한 긴장 속에서만 살아온 일을 되돌아본다. 이러한 세월이 ‘제2의 천성’으로 화하여 다년간의 생활 감정도 이런 습관에 이어져서 바람직하지 못한 개별의 나를 형성해 놓았다. 오늘의 현실은 4·4분기제의 소득확대 추구를 위한 치열한 적자생존 투쟁으로 채워지는 4계절뿐이다. 기업인에게는 환희의 4계절이나 낭만적 4계절은 연분에 닿지 않고 대자연이 가까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심정에 다가서지 않아 멀고 먼 데에 있는 것과 같은 실정이다. 가난하고 어리석은 젊은 계절에 궁핍에서 헤어나기 위하여, 굶주림과 헐벗음을 딛고 일어서기 위하여, 그리고 구멍가게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기업인으로서 불안한 첫발을 내디뎠을 때, 또한 그 일을 기점으로 하여 내 생애의 발목이 잡힌 후 오늘까지 모험과 투쟁 속을 헤쳐 나왔다. 나로서 최선을 다하는 그 혼신의 집중과 정열과 전심전령(全心全靈)을 소진하는 질주의 기나긴 행로만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형편이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지는 아니한다. 기업의 대열에 서 있는 여러 기업 동지들이 이와 같은 형편에 놓여 있을 것이다. 남이 잘 때 깨고, 남이 쉴 때 뛰어가지 않으면 기업의 육성은 불가능하다. 처절하다고 할 만큼 각박한 경합 사례들을 수없이 치러 내면서 달리고 있다. 그러므로 봄이 와도 봄의 줄 밖에 서서 혼미한 어둠에 몸을 적시고 있는 수가 많다. 경쟁에 이기는 것만이 삶의 전부로 생각해 온 폐쇄적 열기에 갇혀 지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봄은 환상 속에만 있는 관용의 여인과 같다. 봄은 만인이 듣는 복음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봄은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온다. 춥고 음침한 긴 겨울을 힘겹게 견디어 낸 사람들에게 봄은 더욱 따스하다. 살며시 스며드는 봄은 자애의 어머니 같은 성품 그대로이다. 포근하고 훈훈하다. 언제나 긴장하고 서두르면서 마음의 안식이라곤 없는 기업인들은 하늘의 별을 딸 듯한 기세로 달려가지만 정치가나 공직자 또한 성직자들의 비판 앞에서는 자라목같이 움츠러들기를 잘한다. 그 허약한 기업 군상들. 유구한 유교의 사상이 그러했고 사농공상의 선조들이 실정이 그러했거니와 제아무리 천만금을 손에 잡은 사람이라도 봄바람에 녹은 잔설과 같은 인간적 허약의 일면을 숨길 수 없다. 기업의 사무실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화려한 순환도 속절없이 스쳐 지나가며 다시 새봄이 와도 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때가 많았다. ‘空地에 無花草하니 春來不似春이다.(빈 대지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다.)’ 기업인들이 봄을 기다리는 건 하늘에 별을 붙이고 돌아오는 여인을 기다리는 바나 다름없이 공소(空疎)한 경우가 되곤 했다.
그런데 봄이 또 왔다. 인왕산의 잔설을 밟으며 계절의 은혜를 새삼 되뇐다. 봄별이 하루하루 짙어져 간다. 천지가 새봄이다. 이제부터 기업의 단하(壇下)에서 봄을 만끽하고 싶다. 경제단상(壇上)에서 호기 있게 일하는 연출자들의 화려한 무대를 바라보면서 오랜만에 심정의 여유를 가지고 이 봄을 즐기리라. 봄눈이 녹은 들길과 산길을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 걸으면서 위대한 자연을 재음미하고 인정의 모닥불을 피우리라. 천지의 창조주 앞에 경건한 찬미를 바치리라. 인생은 여러 가지이다. 온화한 삶과 질풍처럼 달리는 삶이 있으나 궁극의 염원은 한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평화와 자족을 느끼는 마음이다. 봄이 온다. 마음 깊이 기다려지는 봄이 아주 가까이까지 왔다.’ (서울신문 1981년 2월 25일자)
어휘 선택이나 문장 표현에서 섬세함이 가득 느껴지는 글이다. 구상은 정주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산은 문인들과 사귀기를 좋아한다. 아니, 그는 스스로 시문(詩文)을 사랑하고 즐긴다. 그는 천성 시심(詩心)의 소유자이다.” 위 글을 보면 이 평가가 빈말이 아님을 더없이 잘 깨달을 수 있다. 정주영은 그 뒤에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문인들과 교류를 넓혀 나갔다. 조경희, 박경리, 김남조 등과도 인연이 있었다. 이화여대 총장이던 김옥길과도 자주 만나 냉면을 앞에 놓고 세상살이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영원한 문학청년이었다.
“신이 미처 다 못한 일 마무리하는 것”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한 1960년대 중반, 정주영은 여러 남녀 문인들을 그 꿈의 현장으로 초청했다. 모윤숙, 전숙희 등은 처음으로 머나먼 나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한국 여성이 되었다. 황사를 날리며 끝없는 사막을 달려 이른 곳은 푸른 지중해변이었다. 바닷가에는 ‘현대’라는 큰 간판이 붙은 영빈관이 있었다. 일행은 그곳에 짐을 풀고 하룻밤 묵은 뒤 이튿날부터 사막을 달렸다. 이 황무지에서도 쉼 없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삶의 신비와 끈질김에 모두는 큰 감동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풍부한 원유를 바탕으로 막 경제성장의 첫걸음을 떼고 있었다. 현대건설은 기술자·전문가·노동자 수만 명을 총동원해 그 선봉에 서 있었다. 정주영이 직접 안전모를 쓰고 현장을 지휘했다. 다음 날 정주영은 일행과 함께 큰 배에 올라 지중해로 나아갔다. 부둣가에는 배로 싣고 온 철골이며 건설장비들이 산더미처럼 늘어서 있었다. 전숙희가 정주영에게 다가와 말했다.
“회장님, 현대건설이 많은 일을 하는 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버려진 사막과 바다와 사람들을 위해 헌신 봉사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햇볕을 가리려고 농사꾼처럼 벙거지를 쓴 정주영은 이렇게 말했다.
“그저 신(神)께서 미처 다 못하시고 버려두신 세상을 제가 좀 정리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정주영은 자연을 사랑하고, 신을 존경하고, 인간의 삶을 위하는 마음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몸소 노무자들과 함께 일하며 뛰었다. 정주영은 어쩌다 고려대학교 이야기가 나오면 늘 이렇게 말했다.
“뭐, 고려대학교요? 그거 내가 지었지요.”
그러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럼 회장님이 설립자이신가요?” 하고 우문을 하기 일쑤였다. 그러면 정주영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닙니다. 거기야 다 임자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고려대학교가 지어질 때, 하얀 돌덩이를 한 장 한 장 내가 이 어깨에 가마니를 펴고 얹어 날라다 지었습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내가 지은 학교이지요.”
농담이 아닌 눈물 겨운 진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정주영은 솔직하고도 지혜가 많은 사람이었다.
“도와 줄 때는 조건 없이”
1967년 태평로에 있던 조선일보 사옥이 도시계획으로 철거되었다.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은 차관 도입으로 호텔을 짓기로 했는데, 20층짜리 건물을 지을 자금이 한 푼도 없었다. 여러 경로로 자금조달 교섭을 벌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마침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한 현대건설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우영은 정주영을 찾아갔다. 초면이었으나 건장한 체구에 부리부리한 관상이 눈에 띄었다. 성격이 당차기로 이름난 방우영은 이런 사람에게는 사무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탁 털어놓고 통사정하는 것이 상책일 듯싶었다.
“아시다시피 당장 돈이 없습니다. 신문사 하나 살려주는 셈치고 건물을 지어주신다면 신문을 팔아가며 갚아 나가겠습니다.”
정주영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방우영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나도 어려서부터 민족지 조선과 동아를 꽤 애독했지요. 바로 일을 시작합시다.”
아무 조건 없는 수락이었다. 코리아나호텔이 완공된 뒤 정주영은 방우영에게 약속했다.
“앞으로 조선일보 건물은 내가 맡아 지을 테니 그리 아십시오.”
그 약속대로 1987년 조선일보 정동 별관, 1990년에는 평촌 공장이 지어졌다. 그 의협심은 참으로 기업인의 귀감이라 할 만했다.
1983년 연세대학교 동문회장을 맡고 있던 방우영은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을 짓기 위해 모금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한 번 더 정주영을 찾아가 부탁했다.
“연세대, 고려대는 우리나라 인재를 키우는 명문이지요. 나는 배우질 못했으나, 내 아들 몽헌이가 연세대를 나왔으니 고맙다는 생각에서 기꺼이 동참하겠습니다.”
정주영은 바로 비서실장을 불러 5억원 약속어음을 떼 주었다. 얼마 뒤 연세대 이사회에서, 한국경제발전 공로로 정주영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정주영이 웃으며 방우영에게 농담을 건넸다.
“이봐요, 방 사장. 돈 적게 기부했다고 상 주는 게 아니죠?”
1968년 봄 성악가 김자경은 한국 최초 오페라단을 세울 결심을 했다. 그러나 주위의 만류가 극심했다. 돈 좀 있다 하는 남자들이 해도 집까지 날릴 판에 여자 혼자 어떻게 해나가겠냐는 것이었다. 김자경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정주영이 선뜻 손을 내밀었다. 김자경은 모윤숙 문인 모임에서 그를 만나 친분이 있었다. 정주영은 장소와 준비 비용은 물론, 차량과 기름과 인력까지 대주었다. 김자경은 그 차에다 포스터를 붙이고 오페라단 기를 달아 전단을 뿌리며 서울을 누비고 다녔다. 오페라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때라 사람들은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마침내 1968년 5월 1일, 한국 최초 오페라 ‘춘희’가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 정주영은 자신이 도왔다는 것을 생색내기 싫어서 굳이 오페라를 관람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자경이 하도 졸라서 한번 관람하게 되었다.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주영은 말했다.
“손뼉을 하도 많이 쳐서 손바닥이 아파 혼났습니다.”
김자경과 배우들은 웃으며 감사해 했다. 그런데 정주영이 물었다.
“내가 왜 그리 손뼉을 많이 쳤는지 아십니까?”
“좋은 공연 즐거워서 그러신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끝나는 게 좋아서 쳤지요.”
그 말에 모두들 크게 웃었다. 그처럼 정주영은 유머가 넘쳤다.
첫댓글 ‘시인학교’ 찾아다니던 영원한 문학청년 정주영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또 다시 오셨으면.....
에깨에 돌덩이를 한장 한장 가마니를 덮고 나르던 회장님께서 문학청년 이셨다니, 대한민국을 위해 평생을 애쓰고 수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애국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