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핀치히터에서 명(名)총리로-.
이명박(MB) 정부 5년간 최고로 잘한 인사로 꼽히는 김황식 국무총리 인선. 김 총리는 2010년 10월, 위기 국면에서 총리가 됐다. 당시엔 대타(代打)쯤으로 치부됐다. 정운찬 총리의 사퇴, 그리고 김태호 총리 후보자의 낙마 이후 뚜렷한 적임자를 찾지 못한 MB가 궁여지책으로 골랐다는 관측이 많았다.
김 총리도 처음엔 고사했다고 한다. 시력이 나빠 병역 면제를 받은 이력 탓에, 병역 면제자 투성이인 MB 정부에 추가로 부담을 줄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초의 광주·전남 출신 총리가 돼 잘했다는 것을 보여달라”는 MB의 설득이 거듭되자 총리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후보자 지명 뒤 야당에서는 그의 무색무취함을 빗대 ‘또 한 명의 대독(代讀)총리’가 될 거라는 혹평을 내놨다.
MB “내가 사람을 잘 고른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기우는 인사청문회 때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야당 의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회피하지 않고 소신껏 받아 넘겼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간단치 않은 사람”이라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최장수 총리 출현의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요즘 MB는 김황식 총리에 대해 상당히 자부심을 갖는다고 한다. 공·사석에서 “어려울 때 국정의 중심을 잡고 잘 이끌어 줘서 고맙다. 내가 사람을 잘 고른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는 것이다.
김 총리의 리더십은 크게 두 가지에서 비롯된다. 탁월한 국정 장악능력과 자신을 낮추고 약자를 아우르는 겸손함, 소탈한 성품이 그것이다. 먼저 국정 장악력과 관련해선 “판사 시절의 수많은 재판 경험이 큰 도움을 주는 것 같다”고 총리 주변에선 말한다. 총리 업무 중 가장 중요한 게 업무 조정능력이다. 우리 사회는 직능 간, 업종 간, 계층 간, 지역 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정부 부처 간 업무에서도 이견과 갈등을 노출하는 게 태반이다. 이를 국가 차원에서 생산적으로 조정하고 다독여 나가는 게 총리의 역할이다. 그런데 김 총리는 이를 잘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현안별로 정책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꿰뚫어 보고 뚝심 있게 조정자 역할을 해야 가능한 일이다.
판사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재판서류와의 싸움이 일과다. 소송 당사자들의 주장과 사연을 정확히 파악해야만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 총리는 준비된 총리였던 셈이다. 1974년부터 판사·대법관으로 35년간 일하며 갈등 조정 업무를 체질화해 왔다. 총리가 된 후 산더미처럼 쌓이는 각종 보고서를 숙지하고, 이해집단 간 충돌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 문제를 해결했다.
대표적 사례가 지난해 불거졌던 검찰·경찰의 수사권 다툼이다. 갈등이 끊이지 않자 김 총리는 권재진 법무부 장관과 맹형규 행안부 장관을 불러 ‘부처 간 밥그릇 싸움’으로 비치는 데 대해 강한 유감을 표시하고 갈등을 봉합 했다.
거지를 손님으로 대접한 모친 본받아
현장 중심의 행정도 국정 장악력을 높이는 포인트다. 요즘 총리실에서는 ‘우문현답’이란 말이 유행이라고 한다. ‘우둔한 질문에 현명한 답’이라는 고사성어가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해답이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며칠 전 총리실 사무실에는 경기도 화성의 한 농촌 마을에서 보낸 떡이 돌려졌다. 가뭄이 극심했던 지난해 여름, 김 총리가 화성의 한 마을을 시찰했고, 여기서 살수차가 논에 물을 뿌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때 주민들은 “수리시설이 안 돼 관정을 몇 개 뚫어주면 해마다 물 걱정을 안 할 것 같다”는 민원을 제기했다. 김 총리의 지시로 4개의 관정을 파게 됐다. 관정에서 물이 터질 확률이 30% 미만이라는 통계를 뒤엎으며 4곳 모두에서 물길이 열려 풍년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주민 대표들이 직접 떡을 싸 들고 총리실을 찾은 이유다.
김 총리의 리더십을 얘기할 때 따뜻한 인간미와 조용한 카리스마를 빼놓을 수 없다. 김 총리는 작고한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을 자주 나타내곤 한다. 그가 광주지방법원장 시절이던 2004년 5월, 직원들과의 소통 공간으로 활용하던 ‘지산통신’이란 내부통신망엔 이런 글이 나온다.
“어릴 적 마루에서 놀고 있노라니 거지가 구걸을 하러 대문간을 들어섰다. 이때 ‘어머니, 거지 왔어요’라고 소리쳤다. 어머니는 쌀 한 움큼을 그릇에 담아 나오시며 나직하게 ‘다음부터는 손님 오셨다고 해라’ 하시는 것이었다. 어릴 적이었지만 제 마음에는 그 말씀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느 책이나 강의에서 그보다 더 강렬한 인간존중의 교육을 만난 적이 없다.” 김 총리는 “생활에서 언뜻언뜻 보여주신 (어머니의) 처신이나 말씀 한마디가 세상의 어느 위대한 선생에 못지않았다”고 회고하곤 한다.
그래선지 총리직을 맡은 뒤 국민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해외건설·플랜트의 날’ 기념식 자리였다. 그해 6월 페루 댐 건설공사 사전조사차 헬리콥터를 타고 나섰다 목숨을 잃은 7명의 해외건설 역군에게 훈·포장을 추서할 때였다. 시상대에는 고인을 대신해 아들·딸, 부인들이 나란히 섰고 김 총리는 이들을 위로하던 중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함께 울먹였다고 한다. 총리실 관계자는 “처음엔 마이크가 고장 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총리님이 마이크를 돌리고 흐느끼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2011년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숨진 전사자 1주기 추모식(대전현충원)에 참석했을 때도 김 총리는 연민과 공감의 행보를 보였다. 경호원의 우산을 뿌리친 채 유족들과 같이 장대비를 맞으며 40분간 희생 장병의 묘역을 찾아 비석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김 총리는 취임 초 “이슬비 같은 총리가 되겠다. 조용히 내리지만 땅속에 스며들어서 새싹과 꽃을 피우고 싶다”고 말했다. 조용한 행보지만 꼼꼼하게 국정을 챙겨 국리민복을 도모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소나기처럼 요란하지 않지만 꼭 필요한 자리에서 자기 일을 챙기는 스타일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는 2004년 10월 ‘지산통신’에서 스스로를 중도저파(中道低派)로 일컬은 적이 있다. “기득권에 연연한 우파, 현실을 무시하고 꿈만 꾸는 좌파 대신 소외계층을 보듬어야 한다”는 뜻에서라고 했다.
이명박(MB) 정부 5년간 최고로 잘한 인사로 꼽히는 김황식 국무총리 인선. 김 총리는 2010년 10월, 위기 국면에서 총리가 됐다. 당시엔 대타(代打)쯤으로 치부됐다. 정운찬 총리의 사퇴, 그리고 김태호 총리 후보자의 낙마 이후 뚜렷한 적임자를 찾지 못한 MB가 궁여지책으로 골랐다는 관측이 많았다.
김 총리도 처음엔 고사했다고 한다. 시력이 나빠 병역 면제를 받은 이력 탓에, 병역 면제자 투성이인 MB 정부에 추가로 부담을 줄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초의 광주·전남 출신 총리가 돼 잘했다는 것을 보여달라”는 MB의 설득이 거듭되자 총리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후보자 지명 뒤 야당에서는 그의 무색무취함을 빗대 ‘또 한 명의 대독(代讀)총리’가 될 거라는 혹평을 내놨다.
MB “내가 사람을 잘 고른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기우는 인사청문회 때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야당 의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회피하지 않고 소신껏 받아 넘겼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간단치 않은 사람”이라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최장수 총리 출현의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요즘 MB는 김황식 총리에 대해 상당히 자부심을 갖는다고 한다. 공·사석에서 “어려울 때 국정의 중심을 잡고 잘 이끌어 줘서 고맙다. 내가 사람을 잘 고른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는 것이다.
김 총리는 MB 정부가 끝나는 2월 중순이면 재임 기간 2년5개월을 기록하게 된다. 정일권(6년7개월), 김종필(두 차례 합쳐 6년1개월), 최규하(3년10개월)에 이어 역대 네 번째 장수총리가 된다. 그 비결은 뭘까.
김 총리의 리더십은 크게 두 가지에서 비롯된다. 탁월한 국정 장악능력과 자신을 낮추고 약자를 아우르는 겸손함, 소탈한 성품이 그것이다. 먼저 국정 장악력과 관련해선 “판사 시절의 수많은 재판 경험이 큰 도움을 주는 것 같다”고 총리 주변에선 말한다. 총리 업무 중 가장 중요한 게 업무 조정능력이다. 우리 사회는 직능 간, 업종 간, 계층 간, 지역 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정부 부처 간 업무에서도 이견과 갈등을 노출하는 게 태반이다. 이를 국가 차원에서 생산적으로 조정하고 다독여 나가는 게 총리의 역할이다. 그런데 김 총리는 이를 잘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현안별로 정책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꿰뚫어 보고 뚝심 있게 조정자 역할을 해야 가능한 일이다.
판사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재판서류와의 싸움이 일과다. 소송 당사자들의 주장과 사연을 정확히 파악해야만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 총리는 준비된 총리였던 셈이다. 1974년부터 판사·대법관으로 35년간 일하며 갈등 조정 업무를 체질화해 왔다. 총리가 된 후 산더미처럼 쌓이는 각종 보고서를 숙지하고, 이해집단 간 충돌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 문제를 해결했다.
대표적 사례가 지난해 불거졌던 검찰·경찰의 수사권 다툼이다. 갈등이 끊이지 않자 김 총리는 권재진 법무부 장관과 맹형규 행안부 장관을 불러 ‘부처 간 밥그릇 싸움’으로 비치는 데 대해 강한 유감을 표시하고 갈등을 봉합 했다.
거지를 손님으로 대접한 모친 본받아
현장 중심의 행정도 국정 장악력을 높이는 포인트다. 요즘 총리실에서는 ‘우문현답’이란 말이 유행이라고 한다. ‘우둔한 질문에 현명한 답’이라는 고사성어가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해답이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며칠 전 총리실 사무실에는 경기도 화성의 한 농촌 마을에서 보낸 떡이 돌려졌다. 가뭄이 극심했던 지난해 여름, 김 총리가 화성의 한 마을을 시찰했고, 여기서 살수차가 논에 물을 뿌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때 주민들은 “수리시설이 안 돼 관정을 몇 개 뚫어주면 해마다 물 걱정을 안 할 것 같다”는 민원을 제기했다. 김 총리의 지시로 4개의 관정을 파게 됐다. 관정에서 물이 터질 확률이 30% 미만이라는 통계를 뒤엎으며 4곳 모두에서 물길이 열려 풍년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주민 대표들이 직접 떡을 싸 들고 총리실을 찾은 이유다.
김 총리의 리더십을 얘기할 때 따뜻한 인간미와 조용한 카리스마를 빼놓을 수 없다. 김 총리는 작고한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을 자주 나타내곤 한다. 그가 광주지방법원장 시절이던 2004년 5월, 직원들과의 소통 공간으로 활용하던 ‘지산통신’이란 내부통신망엔 이런 글이 나온다.
“어릴 적 마루에서 놀고 있노라니 거지가 구걸을 하러 대문간을 들어섰다. 이때 ‘어머니, 거지 왔어요’라고 소리쳤다. 어머니는 쌀 한 움큼을 그릇에 담아 나오시며 나직하게 ‘다음부터는 손님 오셨다고 해라’ 하시는 것이었다. 어릴 적이었지만 제 마음에는 그 말씀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느 책이나 강의에서 그보다 더 강렬한 인간존중의 교육을 만난 적이 없다.” 김 총리는 “생활에서 언뜻언뜻 보여주신 (어머니의) 처신이나 말씀 한마디가 세상의 어느 위대한 선생에 못지않았다”고 회고하곤 한다.
그래선지 총리직을 맡은 뒤 국민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해외건설·플랜트의 날’ 기념식 자리였다. 그해 6월 페루 댐 건설공사 사전조사차 헬리콥터를 타고 나섰다 목숨을 잃은 7명의 해외건설 역군에게 훈·포장을 추서할 때였다. 시상대에는 고인을 대신해 아들·딸, 부인들이 나란히 섰고 김 총리는 이들을 위로하던 중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함께 울먹였다고 한다. 총리실 관계자는 “처음엔 마이크가 고장 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총리님이 마이크를 돌리고 흐느끼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2011년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숨진 전사자 1주기 추모식(대전현충원)에 참석했을 때도 김 총리는 연민과 공감의 행보를 보였다. 경호원의 우산을 뿌리친 채 유족들과 같이 장대비를 맞으며 40분간 희생 장병의 묘역을 찾아 비석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김 총리는 취임 초 “이슬비 같은 총리가 되겠다. 조용히 내리지만 땅속에 스며들어서 새싹과 꽃을 피우고 싶다”고 말했다. 조용한 행보지만 꼼꼼하게 국정을 챙겨 국리민복을 도모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소나기처럼 요란하지 않지만 꼭 필요한 자리에서 자기 일을 챙기는 스타일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는 2004년 10월 ‘지산통신’에서 스스로를 중도저파(中道低派)로 일컬은 적이 있다. “기득권에 연연한 우파, 현실을 무시하고 꿈만 꾸는 좌파 대신 소외계층을 보듬어야 한다”는 뜻에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