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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밤 얼란 김일현 아오스딩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살기 위하여 피로 우리 한국천주교회를 세우신 순교자들을 기리고 그 얼을 본받아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한 순교자의 밤이 1.이준섭 보좌신부님의 집전 미사 2.영광스러운 순교자 찬미예식이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이신부님은 미사 강론을 통해서 본당 설립 정신으로 기도해온 하느님의 종 직암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순교 영성을 공부하여 강론 하라는 송주임신부님 말씀 따라 신바람 나게 열정적으로 순교사를 피력해주신 내용을 요약합니다. 한국천주교회를 처음 세우신 평신도 직암 권일신은 이벽,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이 함께 진리의 길을 택한 자생교회의 주역이었다.이벽의 설교로 세례를 받았고 녹암 권철신과 형제이며, 학식과 덕망이 높았고 가족을 먼저 입교시켰으며 충남 이존창과 전라도 유항검을 입교 시켜 호남천주교회를 처음 일으켰다. 문인으로 잘 알려진 다산 정약용은 정약종의 아우이다. 1785년 을사박해에 이벽성현이 주도한 명례방 집회 사건으로 김범우와 교우들을 체포했을 때 관아에 찾아가 신자들을 석방하고 성물과 책도 내놓으라 호통쳐 양반 자녀들은 석방하고 중인 역관 김범우만 귀향 보냈다. 하여 명례방 집회가 중단 되고 이벽이 가정박해로 순교하여 천주교의 태동이 사그러들 때 직암은 유스띠노와 함께 용문산에 들어가 침묵과 잠심으로 8일간의 자발적 피정을 한 후 대학자 권일신을 중심으로 이승훈, 정약용, 정약전등은 효율적 선교방법을 모색, 주교 신부등 준 성직자제도를 세워 직암이 주교 역활을 하였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가톨릭 성무집행을 본대로 신도들의 성사등을 2년간 돌보아 교세가 급증하였다. 이때 이승훈,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등이 사제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789년 서적을 통해 이 임시 성직제도가 문제가 있음을 알고 이승훈과 편지를 작성, 북경 주교에게 문의한 결과 신품성사를 받지 않아 성무집행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이를 즉시 중단하고 이 조선교회에 신부가 필요함을 알게되었고 제사행위도 금기임을 알게되었다. 1791년 뜻밖의 조상제사 금기 문제의 신해박해가 발생하였다. 이벽이 순교하고 그후 천주교의 최고 책임자가 직암임을 알게된 조정에서 그를 체포하여 극악한 태형과 고문을 하였으나 이 세상 무엇을 준다해도 주님을 배반할 수 없으니 죽음을 택하겠다하여 정조 대왕은 그의 훌륭한 자질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아끼는 마음에 사형결안에 서명하지 못하고 그를 배교하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하였으나 허사였다. 하여 제주도로 귀향보내기로 하였으나 노모의 임종을 못보면 불효임을 이용하여 배교토록 회유하였으나 막무가내였다. 모진 고문으로 탈진한 그에게 계속 회유하여도 "서양인의 종교는 동양의 것과 매우 다르다. 공자와 맹자의 도리는 틀렸고 거짓되다." 는 직암의 글기에 늘어(於) 자를 넣어 "서양의 종교는 공맹의 가르침과 달라서 틀렸고 거짓되다."로도 해석될수 있도록 만들어 직암이 배교한 것처럼 정조왕에게 거짓 보고하여 유배지를 예산으로 바꾸었다. 1792년 용인군 구성면 구읍의 주막집에서 귀양길 첫날밤 장독으로 숨을 걷었다고 전하기도하고 정조대왕의 사랑을 받아온 직암이 다시 복직 될 가 후사가 두려워 목졸라 죽였다고도 전한다. 우리는 직암의 순교 열정을 기억하여 이웃을 따뜻하고 편하게 겸손한 자세로 세속 유혹을 뿌리치고 그 영성을 본받자는 요지의 열강이었다. 감사합니다. * 참고 基學大抵異於孔孟之學妖誕不正(기학대저이어공맹지학요탄부정) 교우들이 바친 십자가의 순교 성심 영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