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요한복음 12:12-19 요한복음에는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이 등장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사건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는데요. 사실상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과정도 나사로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죽게된 나사로를 중심으로 사람들의 반응이 그려지는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하기에 이릅니다. 나사로의 죽음이 가져다준 결과는 참으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아니 더 세밀하게 본다면 나사로의 죽음에 있어선 모든 사람들이 절망속에 빠져있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둘러싸고 “예수님만 계셨더라면” 이라는 아쉬움이 그나마 믿음의 발언이었던 것이죠. 누구도 완전한 죽음에 돌입한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죠.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았었죠. 그랬다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자 잔치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의 가족들과 마을은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누리게되는 천국의 잔치를 상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이죠. 그런 차원에서 마리아의 향유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중요한 일을 대비하여 마련한 향유일 터인데 지금 예수님의 현존앞에 어떤 것도 아깝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향유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연결시키십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마리아의 헌신을 기억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그녀의 헌신은 예수님의 자기 자신을 드리는 헌신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의 헌신도 귀하지만 자기 자신을 희생하지는 못했지요. 하지만 주님은 자기를 희생하여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게 하십니다.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죠. 오늘 예루살렘의 환호성은 어떤 면에서 아직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한은 그들의 환호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기록합니다. (요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스가랴 9장9절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사실 솔로몬도 왕의 자리에 오를때 다윗의 노새를 탓다고 기록됩니다(왕상 1:38). 세상의 지배자와 전혀 다른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단순히 인간의 욕심을 부렸다면 어쩌면 구약의 예언보다 나는 더 훌륭하다 우기며 백마를 탔을 것입니다.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 교주들의 역사를 살펴보니 하나같이 백마를 타고 사진을 찍더라구요. 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자신은 성경에서 기록된 메시아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 아닙니까? 어쩌면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마음속에도 그런 욕망이 있지 않았을까요? 지금은 노새지만 조만간 백마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자신들만의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환호하는 것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과 연관되 있다는 것을 요한복음은 기록합니다. 이들의 환호는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렸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증거가 더욱 분명한 나사로의 기적에 환호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18절이 요한복음의 독특한 기록으로 이 무리들의 중심을 꿰뚫는 내용입니다. (요 12: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요 12: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어전히 예수님을 시가하여 말합니다.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어떤 권력자로 여겼던 것이죠. 이것이 더 거세진다면 로마는 자신들에게 허락된 종교적은 관용도 거둬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계산을 합니다(요 11:48). 마치 나라를 걱정하는 것처럼 애둘러서 자신들의 야망을 감추는 것이죠. 하지만 놀랍게도 이들이 질투심에 내뱉는 이야기는 창세기 49장 10절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창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는 온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섭리하십니다. 예수님을 태웠던 나귀도 하나님의 예비하시는 섭리속에서 마련된 것 아닙니까? 인간의 역사가 사람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그 중심에 흐르는 하나님의 섭리는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역사이면서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섭리입니다. 이것은 놀랍게 함께 진행되어 갑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역사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며 주님을 환호하고 주님을 활용하여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욕심을 부릴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역사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루어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방법은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서 였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자연사하지 않으셨죠. 다른 종교들처럼 많은 시간을 들여서 제자들을 양성한 것도 아닙니다. 전혀 종교가 성립할 수 없는 어떤 조건에도 교회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의 삶에 주어진 삶의 조건들. 각자 자기에서 부족하면 부족한 그 조건들 속에서 선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 이심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앞에서 어떠한 조건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것도 부한 것도 낮은 것도 높은 것도 매인 상태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조건속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전히 붙잡았던 사도 바울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조건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면서 주님의 영광스럽게 하시는 사랑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나아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