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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 생각들 2011/03/01 01:00 정운현
해마다 3월이 오면 우리는 잊히지 않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옥중 사진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졸업사진. 뒷졸 오른쪽 끝이 유 열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내에 복원된 속칭 '유관순굴'. 높이 1.4m, 가로-세로 각각 1m 크기임 유 열사의 수형기록표 앞면. 고문 후유증으로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죄명은 '보안법 위반 및 소요'이며, '징역 3년형'으로 나와 있다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해 거족적으로 일어난 ‘3.1만세의거’가 그것입니다.
혹자는 또 심지어 역사교과서조차도 이를 두고 ‘3.1(만세)운동’이라고 하는데,
이 표현은 정확하지도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의거’로 인해 구속된 조선인이 4만 7000여명, 사망자가 7509명에 달했는데,
이를 ‘운동(運動, movement)'으로 부르는 것은 결코 당치 않다는 생각입니다.
‘3.1만세의거’를 생각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열사입니다.
물론 유 열사 말고도 목숨을 걸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도 있고,
또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 혹은 참여한 조선백성이 수 만 명도 넘습니다.
그들 역시 의거의 주역들이며, 또 우리가 기억해야할 분들임에는 분명합니다.
서울 동작동과 대전 국립묘지(현충원)에는 애국지사 묘역이 별도로 있습니다.
(*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이 이와는 별도로 또 있습니다)
그곳에는 일제 강점기에 항일투쟁을 하시다 돌아가신 애국선열들이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두 곳 그 어디에도 유관순 열사의 묘소는 없습니다.
유 열사는 서울 동작동 애국지사 묘역 추모관에 위패로 안치돼 있습니다.
왜일까요? 유관순 열사의 유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3.1만세의거 당시 유 열사의 활동상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3.1만세의거 당시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의 학생이었습니다.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以文會) 선배들을 통해 거사 계획을 감지한 열사는
의거 전날 서명학 등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하였습니다.
마침내 3월 1일 열사는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시위에 동참하였습니다.
3월 5일엔 다시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남대문역(서울역) 만세시위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이처럼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면서 시위가 더욱 열기를 더해갔습니다.
총독부는 급기야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해 임시휴교령을 반포하였습니다.
이로써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열사는 고향으로 내려가 시위를 전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한 열사는
동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만세의거 소식을 전하고 향후 시위계획을 세웠습니다.
4월 1일(음력 3월 1일), 그날은 마침 아우내[竝川] 장날이었습니다.
열사는 이날 정오 아우내장터에서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인근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마침내 4월 1일 정오, 선생은 군중 앞에서 열변을 토했고, 이어 만세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곧이어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둘러 19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다쳤습니다.
이에 항의하던 선생의 부친 유중권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달려 들던 선생의 모친마저도 헌병들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헌병주재소까지 쫓아가서 부모님의 참혹한 죽음에 항의하던 열사는
그 날 저녁 다른 시위 주동자들과 함께 체포돼 천안헌병대로 압송되었습니다.
며칠 뒤 공주감옥으로 이송됐는데, 거기서 오빠 유관옥(柳寬玉)을 만났습니다.
유관옥은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면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잡혀 온 것이었습니다.
이어 열린 재판에서 열사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그해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습니다.
이로써 열사는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어 다시 서울로 오게 되었습니다.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징역 3년을 받게 되자 열사는 상고를 포기하였습니다.
기결수 신분으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열사는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급기야 일제는 1평도 안되는 지하 감방에 가두고는 갖은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열사는 상고 포기로 1919년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니 만기 출소할 경우 출감 예정일은 이로부터 3년 뒤인 1922년 7월 4일이 됩니다.
그런데 수감 도중에 뜻밖에 특사로 형이 절반으로 줄게 되었습니다.
1920년 4월 영친왕 이은(李垠)과 방자(芳子)의 결혼으로 정치범에 대해 사면령을 내렸는데,
열사도 마침 그 사면대상에 포함이 됐습니다.
수형기록표에 적힌 ‘출옥 연월일 1921년 1월 2일’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사가 체포(4.1)돼 최종 재판(7.4)을 받기까지 3개월 남짓 소요되었는데,
바로 이 미결 기간까지를 감안하면 출옥날짜는 이보다 더 앞당겨지게 되는 셈이죠.
이럴 경우 출옥 예정일은 ‘1920년 9월 30일’이면 형이 만료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열사는 이를 이틀 남겨두고 감옥에서 숨을 거둔 것입니다.
그해 9월 28일 열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18세의 나이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얼마 뒤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으로 인계돼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습니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접했습니다.
열사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인도될 때 여섯 토막으로 훼손돼 있었다는 겁니다.
한 네티즌은 천안 열사의 생가 옆에 있는 매봉교회 지하 전시관에 전시된,
훼손된 열사의 시신을 담았다는 석유통 사진과 함께 이같은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네티즌들의 댓글은 물론 ‘천안의 역사’를 설명한 글에도 그렇게 기술돼 있었습니다.
“... 유관순이 참살되자 이화학당 교장 푸라이와 월터선생이 중심이 되어 유관순의 시체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유관순의 학살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위협하고 항의하자 일제는 할 수 없이 시체를 이화학당에 인도하였다. 시체를 인수한 후 석유상자 속에 든 유관순의 시체를 열어보니 여섯 토막으로 참살된 비참한 모습이었다. 수위를 입힐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신은 일본관헌이 감시하는 가운데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후에 일제의 군용지 사용으로 파헤쳐진 뒤 행방이 시신의 행방이 아직까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기념사업회에서 순국 69년 만인 1990년에 초혼묘를 봉안하여 유관순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 원문 : <천안의 역사> 중 ‘ⅰ) 유관순열사 유적’ 참조)
http://hyomin.deu.ac.kr/~history/tour/2004/chonan.htm
매봉교회 지하전시관에 전시된 유 열사 시신을 담은 석유상자와 시신 훼손 설명
위 상자와 동일한 석유상자로, 이 때문에 시신 훼손설이 설득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정은 저 <유관순>
유관순 오빠 유우석 선생
옛 이화학당 터에 세워진 유 열사 동상에 헌화하는 이화여고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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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짜요 이게 사실이면 못된놈들...
아 내가 그시절에 태어났으면 과연 어떤행동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안탑갑네요
강해져야 합니다
쳐 죽일놈들 ...
음.....
개 자식들 ....잔인한새끼들..손톱도 뽑고 생 이빨도 뽑앗다던데 사람이 어찌 그럴수 잇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