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세월 중생염원 보듬는 자애로운 부처님
승가봉 아래 거대한 직벽 바위에
인연 따라 모습 드러낸 마애부처님
서울시내 굽어보며 온화한 ‘염화미소’
수천년간 중생소원 말없이 들어주네
북한산 비봉 아래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 고려시대(신라시대)에 조성돼 천년세월을 서울한강과 서울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서울 북한산 비봉 동쪽 중턱 승가봉 아래 부처님 도량 승가사. 그 뒤편으로 108개의 계단이 조성돼 있는 300여미터를 오르면 거대한 직벽에 부처님이 스며들어 있다. 어느 장인이 돌을 쪼아 만들어 낸 부처님이 아니다. 분명 바위에 들어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게 한 것이 틀림없다. 머리 위에 8각의 돌도 끼워 넣어 천년을 견딜 수 있도록 범천(梵天)이 조치해 놓았다. 거대한 바위 면에 홈을 파서 부처님이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 목조건물을 설치한 흔적도 있다.
천년 넘게 한양인 서울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인왕산과 남산을 넘어 멀리 관악산과 남한산성의 풍광을 아우른다. 높이 15여m의 거대한 바위에 너비 5.04m에 높이 5.94m의 마애부처님은 풍만한 형체와 잔잔한 미소, 연꽃잎 좌대가 인상적이다. 입술 부위가 붉은 빛을 내어 그 신기함이 과학적으로도 해석이 어렵다. 또한 좌우측의 바위와 산모양이 마애부처님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신이롭기까지 하다.
승가사 일주문 앞에 세워져 있는 ‘승가사 연혁사’에 따르면 승가사는 신라 경덕왕 15년(756) 수태선사에 의해 창건됐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지만 승가사의 시원(始元)은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 금석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가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했는데 비문에는 ‘견석굴도인(見石窟道人)’이 나오는데 1998년 재야사학자 임춘택씨가 ‘석굴도인’이 ‘법장혜인(法藏慧忍)’스님이며 연대도 568년이라고 밝혔다.
당시 문화일보는 “북한산 순수비의 비문을 작성한 사람은 당시 승가사 석굴에서 수도하던 법장 혜인스님이며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 승가사 석굴에서 만년 도인(법장 혜인스님)을 모시고 가 이들 비문을 작성했을 것이라는 대담한 가설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승가사는 진흥왕순수비가 건립된 연도인 555년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마애여래부처님 아래 조성돼 있는 승가사 모습.
이러한 승가사에 마애부처님이 조성된 시기는 고려초로 학자들은 의견을 내고 있으나 사찰 창건시기인 신라시대(756)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누구나 이곳 마애부처님을 친견하면 불심이 발현되고 고찰 승가사의 위상이 한층 돋보인다하여 그 옛날 많은 국왕들과 선사들이 기도한 도량으로 유명하다.
부처님되신날을 하루 앞두고 찾은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보물)은 무한자비의 얼굴로 뭇 중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는 듯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전정각산에서 내려와 네란자라강 건너편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기에 가득 찬 모습을 하고 있는 듯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부처님을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하지만 <승가사연기사지>는 관음보살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모든 불보살이 인연따라 시방세계에 그 몸을 나타낸다고 하지만 이 삼각산 기슭에 천 수백 년 전 자리잡고 계심은 승가사와 본질적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아래 약사전으로 불리는 석굴 안에 승가대사상이 봉안되어 있다. 서역 사람인 승가대사는 관음보살의 32신(身) 중의 화신으로 당나라에서 홍법포교로 널리 알려졌음이 문헌상에 나타나 있고 동남아 각국에 많이 모셔져 있다. 그러므로 장안을 굽어보는 위치에 우아하고 자비에 넘치는 관음보살상을 모신 것이다.”
<승가사연기사지>는 이어 “이 도량은 관음보살의 한 수류신(隨類身, 인연 따라 여러가지 몸을 나타내는 것)으로 때로는 부처의 몸, 보살의 몸인 연각불신(緣覺佛身), 성문신(聲聞身), 범왕신, 천왕신, 인왕신, 장자, 거사, 비구, 비구니, 부녀신, 동남동녀신 등 32신으로 나타낸다”고 했다.
인연 따라 여러 몸으로 나툰다니 석가모니불이면 어떠하고 관음보살이면 어떠하랴. 중생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자애로운 부처님임은 틀림없을 터니 말이다. 이 넉넉한 마애부처님의 영험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도 두루 이어지고 있다.
현대사의 아픔도 안고 있는 마애부처님은 1968년 ‘김신조 사건’으로 상처를 받기도 했다. 당시 김신조 등 32명의 무장간첩은 마애불 뒤편 바위 밑에 숨어 있었는데 지상의 군경이 이 일대를 물샐틈 없이 수색했으나 찾지 못했다. 또한 아군이 무장간첩의 총탄에 중상을 입었는데 상륜스님이 온몸에 피를 묻히면서 구호를 해 생명을 건졌다고 한다. 그 당시 군 헬리콥터에서 무장간첩을 소탕하기 위해 기관총을 쏜 탄흔이 마애부처님의 얼굴과 가슴부위에 남아 대수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북한산 비봉 아래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 고려시대(신라시대)에 조성돼 천년세월을 서울한강과 서울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추가 취재를 위해 며칠 후 찾은 승가사는 영하 10도 아래의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 엄동설한에도 마애부처님은 하얀 미소를 지으며 ‘백설의 고요’를 즐기는 듯 눈앞의 남산과 좌측으로는 롯데월드 고층건물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코로나19로 몸 녹일 공간마저 찾기 어려운데 때마침 법당에서 사시마지를 올리는 스님의 배려로 난롯불을 얻어 쬐었다. 내려오는 길목에서 비구니 스님 두 분을 만났다. 승가사에 주석한다고 한 스님은 “승가사를 중흥시킨 상륜스님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마애부처님께 3일 정도만 기도를 올리면 안 풀리던 일도 잘 풀렸다고 했다”고 귀띔했다.
중생의 염원은 끝이 없고 그 원을 성취하기 위한 기도도 끝없이 이어져 왔다. 그 중심에 승가사 마애부처님도 수많은 중생의 원을 들어주시기 않았을까. 바람찬 날 며칠동안 방문한 승가사는 산중사찰임에도 불구하며 뜻하는 바를 이루려는 기도객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마침 승가사에서 매 시간마다 배려하고 있는 승합차 덕분에 마애부처님을 친견하는 발길이 수월하다. 마애불에서 바라보는 원근거리의 서울풍경. 그 거대한 도시의 빌딩들이 성냥곽처럼 보이고 그 안에 사는 뭇 사람들의 이야기는 항하사 모래처럼 느껴진다. 마애부처님의 마음도 그러할까. 2022년 신년 마애불의 마음을 투과시켜 한 편의 운율에 녹여본다.
바라보고 굽어 봐도 뭇 중생 기도소리
남산 넘어 남한산성 한강너머 광주산맥
저마다 발원 백두대간 타고 흐르고
끝없는 원력 태평양을 훌쩍 건너가네
신라와 고려를 파하라 조선을 보았다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지나 해방된 조국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부처님 하얀 미소
돌햇살에 비춰보니 염화미소로 빛나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