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 -
☆ 2014년 가해 5월26일(백)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수원] 꼭 필요한 때 꼭 필요한 말씀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사도 16,11-15
† 복음 : 요한 15,26―16,4ㄱ
필립보 네리 성인은 1515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때 사업가의 꿈도 가졌으나 수도 생활을 바라며 로마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활동을 많이 펼친 필립보 네리는 특히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형제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6세에 사제가 되어 영성 지도와 고해 신부로 활동하면서 많은
이에게 존경을 받았다. 동료 사제들과 함께 오라토리오 수도회를 설립한
그는 1595년에 선종하였고, 1622년 성인의 반열에 들었다.
★ 이제 바오로 일행의 다른 민족들에 대한 선교가 사도행전의 내용을
이룬다. 그들이 필리피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리디아가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는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진리의 영을
보호자로 약속하신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다가올 고난
속에서도 제자들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신다. 그들은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필립보 네리 성인은 '기쁨의 성인'으로 불립니다.
성인은 가난한 이들과 아이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살아생전에도 성인처럼 존경받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필립보 네리 신부는 어느 누구와도
격의 없이 친근하게 어울렸습니다. 이러한 그는 고위 성직자들이나
고관대작들에게는 의심이나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지만 소박한 시민들과
아이들에게는 더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단순성과 천진무구함,
익살스러움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성품이 고지식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잘 헤아려 그들을 깊은 신앙과 영성으로 이끌었습니다.
성인은 완덕이 어렵고 고상한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의 인품과
생활로 보여 주었습니다. "기쁨 없는 덕은 참된 덕이 아니다."라는 점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위로와 지침을 줍니다. 소탈하게 어울리는
일상의 삶이 완덕의 충분한 토양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작은 일을 통해 큰
덕에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헐벗은
어린이처럼 가장 어려운 이웃에 대한 연민과 배려, 사랑의 실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결코 제외할 수 없는 주요 부분이라는 점을 깨우쳐
줍니다.
우리는 성인의 이러한 삶을 기억하면서 이웃과 만나며 체험하는 작은 기쁨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깨닫습니다. 신앙의 덕은 일상과
떨어진 곳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5월26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요한15,26-16,4)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요한 15,26―16,4ㄱ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저는 두 마음을 품을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양다리 걸치기를 합니다.
하느님을 갈망하면서도 마음과는 달리 세상의 것을 그리워하고 쫓아갑니다.
이웃사랑을 말하면서도 손발에 이르지 못합니다. 정의를 말하면서도
정의롭지 못한 궁리를 합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미 심판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때때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7,15. 19).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약육강식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합니다.
마음을 천상에 둡니다. 빛과 사랑을 추구합니다. 몸이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끊임없이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결정적으로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것에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미움에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은 믿음의
수련기관이고, 그 기간 동안 단순히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아픔 또한 겪어 내야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을 처형한 세상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권력자들은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미움은 결국
폭력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당신이 떠나신 후의 일을 예견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시련과 박해의 시간에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시련과 고통이 생기면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기에 당신의 협조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강화시켜 주시고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용기 있게 그리스도를 증언할 힘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모든 사람이 성령의 손길을 통해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과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직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안에서 예수님께 대한
열망을 키워감으로써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참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이들은 그분을 추구합니다. 그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입김으로 그들에게 생기를 주시고 도움을
주십니다”(성 바실리오).
사실 “성인들은 자기가 받은 은총에 늘 만족하며 살았고 하느님이 주시는
시련과 고통도 그분의 뜻으로 알고 살았습니다”(아빌라의 성 요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련이 벌이 아니고 오히려 은총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이겨 내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이
시간 위로의 성령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그저 말로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5월26일 설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요한 15,26―16,4ㄱ
요즘이야 흙장난 같은 것을 할 나이가 지나서 하지 않지만, 어렸을 때에는
흙을 가지고 놀 때가 참 많았습니다. 하긴 지금처럼 놀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흙장난을 제일 많이 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친구들과 흙장난을 하다가 개미 한 마리를
발견했지요. 저는 개미가 가려는 길 앞에 돌 하나를 놓았습니다. 그러자
얼른 방향을 틀어서 다른 길로 가더군요. 친구와 저는 개미가 가려는 길
앞에 계속해서 돌을 놓았지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계속 막는 저희의
행동에 개미가 포기하고 그냥 주저앉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조금의 틈만
있어도 그 틈으로 도망가고, 심지어는 가지 못하게 막아놓은 돌을 기어서
올라가는 등, 개미의 앞길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지요. 결국 개미가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저희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이 기억을 종종 하게 됩니다. 하찮은 미물이라고 여기는 개미도
포기하지 않는 이 모습과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나라는 존재는
조그마한 문제에도 쉽게 포기했었던 모습이 크게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대신 쉽게 얻기만을 원하고,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주어지기만을 원했던
적은 얼마나 많았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에 조금 노력하다가 그만둔다고 합니다.
금연, 금주를 다짐했다가 갖은 이유를 들어 다시 시작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학 공부를 비롯해서 자신의 스펙을 쌓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하고서도 작심삼일이 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주님과 약속에 대해서도 공수표를 얼마나 많이
날렸을까요?
조금하다가 그만두는 것은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등산가는 “난 해내고 말 거야.”라고 진심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최선을 다하겠다.”, “노력하겠다.”라는 말만
하는 사람은 산을 절대로 정복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떠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진심으로 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하시면서
제자들을 환난에 대비시키십니다. 다가올 박해에 대한 예언인데, 이를
견뎌내어야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박해는 사람들의
외면 받으며, 오히려 박해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시지요. 정말로 견디어 내기 힘들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기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다고 무조건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이 길이 바로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라면
정면으로 마주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 스스로
모범을 보여주시지요.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당신을 외면하는 그 순간을 직접
겪으시면서,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그저 말로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조금 하다가 그만 두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됩니다. 앞서 개미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듯이, 주님을
따르는 이 길에 있어서 포기하지 않고 용기 있게 나아가는 모습이 반드시
필요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길 뒤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이 있으니까요.
위기는 기회이며 벼랑 끝에 선 자가 가장 강한 법이다(이지성).
용기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성경을 보면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쪽 뺨을 내밀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를 사랑의 모습인 것처럼, 또한 복수해서는 안 되는 말인
것처럼 알고 있지요. 이 말씀에 대해 어떤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려면 어느 손을 이용해야 할까요? 왼 손을 이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왼손이 부정한 손이라고 해서 남을 때리는데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른손으로 어떻게 오른편 뺨을 때릴까요?
당시 노예나 하층민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지배층들이 오른 손등을
이용해서 뺨을 때렸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른편 뺨을 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예수님께서는 왼쪽 뺨을 내밀라고 합니다. 이제 왼쪽 뺨을
어떻게 때릴 수 있을까요? 이때 때린다면 정상적으로 오른 손바닥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는 대등한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의미합니다. 즉, 노예나 하층민이 아니라 평등한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구나 싶더군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과연 왼쪽 뺨을
내밀 용기를 가질 사람이 있을까요? 오른편 뺨을 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큰 지위를 가지고 있을 테고, 반대로 맞는 사람은 지배를 당하는 하층민일
수밖에 없는데도 평등한 인간으로 대해 달라고 과연 왼쪽 뺨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삶에 순응해서 좌절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어렵고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기에 대한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진정한 용기를 가지고
있을까요? 혹시 사랑이나 기타 좋은 말들을 내밀어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용기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삼용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꼭 필요한 때 꼭 필요한 말씀
2014년 가해 5월26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복음 : 요한 15,26-16,4ㄱ
< 꼭 필요한 때 꼭 필요한 말씀 >
두 젊은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백화점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영학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인지 그 둘은 엘리베이터에서 안내하는 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자신들도 당당히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인데 경영진에서
하는 이 대우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 친구는
사표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 친구는 끝까지 엘리베이터 일에
충실했습니다.
직위가 높은 사람들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작은 일에도 충실한 이
사람을 보고는 그의 직급을 높여주었고 결국 그는 세계에 백화점 체인을
세워 백화점 왕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J.C. 페니’라고 합니다.
성경엔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이 큰 일에도 충실하다.”란 말씀이 있습니다.
만약 그 백화점을 뛰쳐나간 친구가 사표를 내기 전에 이런 그리스도의
말씀을 한 번이라도 되새겼다면 그는 아마도 친구 페니와 함께 승승장구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인생에서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어떤 선택을 하도록 나에게 미리 말씀해 놓으셔서 길을 잃지 않도록 섭리해
놓지 않으셨을까요?
제가 논문을 끝내고 한 달 동안 스페인-포르투갈-프랑스-스위스-
이탈리아를 차를 운전하며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달의 모든 숙소를
미리 예약을 해 놓았기 때문에 한 치의 지체함이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여행이었습니다. 하루가 늦어지면 다른 모든 스케줄을 조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내비게이션과 도로의 표지판만을 의지하며 여러 나라를
여행했는데, 다니면서 느꼈던 것은 그것 두 개면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대로 가다가 조금 헛갈린다 싶으면 도로 표지판을
봅니다. 그러면 정확히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게 됩니다.
인간들도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기 위해 이렇듯 꼼꼼하게 지도와
이정표를 준비해 놓았는데, 하물며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까지 찾아오는
길에 그런 이정표를 세워놓지 않으셨을까요? 더 완벽한 이정표를 세워
놓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에게 박해를 받을 것인데 놀라지 말라고 미리 예고하십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리고 그 말을 미리 해 놓으시는 이유는 그 때가 오면 당신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왜 그 말씀을 기억하도록 미리 말씀해 놓으시는 것일까요? 그렇게 될 것을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니 놀라지 말고 끝까지 믿고 힘을 내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힘들고 어렵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반드시 이정표가 되어줄 말씀을 미리 해 놓으셨다고 확신합니다. 바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때가 되면 그것을 기억해 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면 어떻게 기억해 낼 수 있겠습니까?
내비게이션이 있어도 도로의 표지판이 있어도 읽을 줄을 모른다면 어떤
도움을 받아낼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삶에서 방황하지 않기 위해
평상시에도 얼마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힘들다고는 하는데 성경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더
이상 어떻게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상황이 오면 그 상황에 맞는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러면 자비의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올바른
이정표를 제시해 주실 것입니다.
삼용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기타]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부활 제6주간 월요일
2014년 가해 5월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요한 15,26―16,4ㄱ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동물들이 거친 자연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프로입니다. 우리와는 말이 통하지 않지만 동물들은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어떻게 도전을 이겨내는가를
보여줍니다. 지구라는 별에는 사람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생명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프로입니다.
엄마 오리를 따라 다니는 새끼 오리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둥지에서 어미가
물어오는 먹이를 받아먹는 새끼 새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엄마를 따라다니던
새끼 오리들이 스스로 방향을 잡고 길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안전한 둥지를 떠나서 힘차게 날개 짓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엄마의
곁을 떠나지 못하면 새끼들은 생존할 수 없습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스스로
독립하지 못하는 새끼들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엄마의 품에서 아이는 자라나게 됩니다. 영양분을
공급받고, 따뜻한 양수 속에서 아이는 편안한 삶을 살아갑니다. 엄마의
심장 소리는 아이에게는 아름다운 음악 같을 것입니다. 아이에게 엄마의
품은 천국과 같은 곳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때가 되면 죽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세상으로 나와야 합니다. 만일 아이가 엄마의 품에 계속 있으면
아이도 엄마도 위험해 지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품에서 나온 아이는 세상을
향해서 손짓을 하고, 스스로 호흡을 하며, 비로소 하나의 독립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17장은 예수님의 ‘고별사’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켜 주시는 내용입니다. 참된 스승은
제자들에게 매일 먹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먹이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성령을 약속해 주십니다. 몸은 떨어져 있을지라도 마음은
늘 함께 있을 거라고 다짐을 해 주십니다.
요즘 우리가 읽고 있는 ‘사도행전’은 바로 둥지를 떠난 새끼 새들의 힘찬
날개 짓과 같습니다. 엄마의 품을 떠나 스스로 걸음마를 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어려움도 있고, 시행착오도 있고, 실패도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아이는 없기 때문입니다. 떨어져 보지 않고 나는 새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리디아는 세례를 받고 사도들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것이 옷감을 파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 마시오. 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하느님께서 다 채워 주실 것입니다.”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다른 갈매기들은 하루하루 먹이를
찾고, 쉬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갈매기들에게 하루 배를 채울 수 있는
먹이를 찾는 것만도 큰일입니다. 그런데 주인공 ‘조나단’은 그런 일에
갈증을 느꼈습니다. 좀 더 빨리, 좀 더 높이 날고 싶어 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 끊임없이 노력했던 조나단은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인류의 새벽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명과 역사의 첫 단추를
풀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것들을 찾아서 좀 더 멀리,
좀 더 날개를 폈던 분들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앞에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분이 보여 주었던 십자가의 길,
그분이 보여 주셨던 사랑의 길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길입니다.
저는 동창들과 목요일까지 여행을 다녀 오려합니다. 매일 묵상의 나눔은
금요일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5월의 끝자락입니다.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중요한 것보다는 소중한 것을 먼저 찾아보는 하루가
되셨으면 합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환대(hospitality)와 성령(Paraclete)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5월26일 월요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1515-1595) 기념일
사도16,11-15 요한15,26-16,4ㄱ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요한 15,26―16,4ㄱ
환대(hospitality)와 성령(Paraclete)
오늘은 ‘남산’예찬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장충동 수도원에 머문 후 어제
이른 아침에서야 처음 남산 순례에 올랐습니다.
마치 아꼈다가 방문한 소중한 선물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자주 방문한다는 것이 오히려 죄송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프린치스꼬 수사님, 부활 축하드립니다. 남산을 장충동에 있는 불암산으로
벗 삼아 편안한 휴식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최빠코미오 수사”
마침 빠코미오 원장님의 부활 축하카드의 인사말도 생각났습니다.
서울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남산의 깊이에 놀랐습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참으로 깊고 푸른 산이었습니다.
좋은 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깊은 산이라는 말도 떠올랐습니다.
불암산이 높게 느껴진다면 남산은 깊이에 가려 높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깊고 큰, 겸손한 산이었습니다.
이제 불암산의 높이의 드러나는 삶에서
남산의 깊이의 숨겨진 삶을 살라는 가르침처럼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사람도 산과 똑같습니다.
높은 사람보다 깊은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겸손과 깊이는 함께 갑니다. 삶도 깊어갈수록 겸손한, 좋은 삶입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환대와 보호자 성령입니다.
1독서의 리디아가 환대를 상징한다면 복음의 보호자는 진리의 영,
성령입니다. 둘 다 드러나지 않는 겸손을 상징하며 교회의 선교에 두
본질적 요소입니다.
환대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선교는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남산이 상징하는바 역시 환대입니다. 늘 그 자리에서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있는 듯 없는 듯’ 겸손한 환대를 상징합니다.
환대의 주님을, 환대의 사람을 상징하는 참으로 깊고 큰 품의 남산이었습니다.
-푸른 남산을 그리노라.
푸른 솔을 그리노라.
찰나의 인간을
유구하게 이어 줄
생명의 텃밭을 그리노라.-
돌에 새겨진 글귀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푸른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생명의
텃밭, 환대의 산을, 환대의 주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환대의 사람은 주님을 닮은 깊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바오로를 통해 주님의 환대를 체험한 리디아의 환대가 인상적입니다.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주님의 환대를 체험하면서 깊고 겸손한 환대의 인물로 바뀐 리디아입니다.
보호자 성령의 특징 또한 겸손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배경이 되어
온갖 도움을 주는 환대의 사람들과 보호자 성령의 겸손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우리를 통해 겸손히 활동하시며 주님을 증언하는 진리의 영, 보호자
성령입니다. 우리가 어떤 곤경 중에도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보호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환대하며 진리의 영, 보호자 성령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푸른 가슴 활짝 열어 우리를
환대하시고 진리의 영,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우리 모두 겸손한 환대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
(시편149,4).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기쁨과 희망의 성인, 필립보 네리
2014년 가해 5월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요한 15,26―16,4ㄱ
기쁨과 희망의 성인
필립보 네리 세월호 대참사를 비롯해 이런 저런 우울한 현실 앞에 다들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로마도 비슷한
분위기였나 봅니다. 당시 교회의 중심 로마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저버리기 시작했습니다. 15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가톨릭교회는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 섰습니다. 절대적 권위는 무너졌습니다. 지도층
인사들은 각자의 몫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교회도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현실에 희망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심각한 경제난에
허덕이던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앉았습니다. 한 마디로 도시 전체가
울적했습니다.
이런 어두웠던 시절 하느님께서 당시 시대에 보내주신 특별한 선물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필립보 네리(1515~1595) 성인이었습니다. 그는 성인,
사제의 분위기보다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풍부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였으며 매력과 다정다감한 인품을 지녔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기 전 늘 웃음꺼리를 제공할 수 있는 농담 몇
개를 준비했습니다.
필립보 네리의 삶은 언제나 기쁨과 활기와 재치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분 주변에는 남녀노소 그분의 추종자들, ‘광팬’들이 셀 수도
없이 모여들었습니다. 필립보 네리와 한번이라도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기도모임에 같이 참석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필립보 네리를 알게 된 그 날은 내 인생 가장 축복받은 날이었습니다.”
그는 교회 역사상 가장 명랑한 성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웃음과
활기를 잃어버린 동시대 사람들의 얼굴에 희미하나마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필립보 네리 신부였습니다. 이 어둡고 우울한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다른 필립보 네리로 세상 앞에 서야겠습니다.
존재 자체로 위로요 기쁨이며 희망인 그리스도인들, 그래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이 늘 옆에 있고 싶은 그리스도인들...
필립보 네리의 사목활동은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반드시 병행되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의 집이나 병원, 노숙인 수용소 등을 찾아다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대적인 모금운동도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필립보 네리의 노력은
서서히 결실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려 했던
사람들도 필립보 네리의 삶을 보며, 아직도 교회 안에 희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교회 쇄신 작업의 최 일선에 서서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했던 것입니다.
필립보 네리는 하느님께서 당시 교회에 보내주신 선물이 틀림없었습니다.
필립보 네리 시대, 영성생활이나 사도직 활동은 주로 성직자 수도자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하게도 필립보 네리는 1551년
부제로 서품되기 전까지 평신도로서는 보기 드물게 기도와 사도직 활동에
헌신하였습니다. 1515년 탄생하셨으며 36세에 부제품, 40세에 사제품을
받으셨으니 꽤나 늦깎이 성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상 사제나 수도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 탁월한 성덕의 길을 개척한
사람들의 삶을 보면, 먼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양성과정을 거치고,
마침내 사도로서의 충만한 사도직에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필립보
네리는 반대였습니다. 평신도 사도로서 열심히 영성생활과 사도직활동을
해나가던 중 사제로서의 부르심을 받은 특별한 케이스인 것입니다. 필립보
네리의 하느님으로부터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은 참으로 다양한 형태로 다가오며, 또 언제 다가올지 모르니 항상
하느님께로 우리의 안테나를 고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피렌체 출신의 필립보 네리는 18세 되던 해 부유한 숙부 로물로의 사업을
돕기 위해 로마 남동쪽 120Km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위치한 산제르마노란
곳으로 가게 됩니다. 성격이 원만하고 호탕했으며 다재다능했던 필립보
네리였기에 숙부로부터 큰 신임을 얻게 되어 세속적인 앞길이 활짝
꽃피어나는가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필립보 네리는 산제르마노 가까이에 있는 한 수도원을
방문하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적지로 유명한 몬테카시노
수도원인데, 그곳 분도회 수도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수도원은 방문이 가능한데 꼬불꼬불 굴곡진
도로를 타고 한참을 올라 구름 위에 세워져있습니다. 당시 분도회
수도자들의 영적생활에 대한 전념, 세상으로부터의 이탈, 극단적 청빈의
삶이 청년 필립보 네리의 삶 전체를 뒤흔들어놓았습니다.
깊은 영적 체험 이후 필립보 네리는 보다 본격적인 평신도로서의
사목활동을 위해 큰 물-로마로 떠나게 됩니다. 길거리에 나앉은 수많은
환자들, 걸인들, 매춘부들의 비참한 실상을 발견한 필립보 네리는 즉시
팔을 걷어붙이고 로마의 뒷골목을 샅샅이 뒤져가며 사목활동을 시작합니다.
당시로서는 거의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나이 40에 뒤늦게 사제서품을
받은 필립보 네리는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오라토리오회는 수도회처럼 엄격한 회헌회칙이나 청빈생활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첫 서원이며 종신서원도 없었습니다. 재산의 포기와 청빈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지금 있는 그 자리를 꽃자리로 여겼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이른 통해 행복한 사제 생활을 엮어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오라토리오회 설립의 목적이었습니다. 당대 오라토리오 회원들은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몇 권의 영성 서적과 성인전을 필독서로
선정해 같이 읽고 느낀 바를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교구 사제들이 쇄신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본당이
쇄신되고 교회의 심장인 로마 교구가 쇄신되기 시작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하느님의 삼위일체를 닮은 사람
2014년 가해 5월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요한 15,26―16,4ㄱ
하느님의 삼위일체를 닮은 사람
일구이언하는 사람은 믿지 못할 사람으로 거짓말쟁이나 책임회피자지요.
사람이 말을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진다는 것은 중요한 인간요소입니다.
사람이 말을 하고 책임지는 것을 인격자다운 인간의 속성이지요.
하느님은 말씀(예수님)하시고 책임(성령)지시므로 삼위일체이듯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삼위)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는 창세기 말씀, 맞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닮은 점이 바로 이 삼위일체라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기억을 통한 분별[단상]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요한 15,26―16,4ㄱ
부활 제6주간 월요일(2014년 5월 26일) 기억을 통한 분별
우리 안과 밖에서 온갖 말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내리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내면이 혼동 속에서 쉽게 분노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충동도 일어납니다.
보호자이신 성령, 진리의 영은 무엇보다도 분별의 선물을 내리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증거자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왜 돌아가셨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다시
살아나셨는지를 생생히 우리 마음 안에 불러일으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억’입니다. 없어지고말 머리 속 기억이 아니라 마음 속에 영원히 새겨지는
기억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우리 심장속에 새겨지는 사건이 바로
기억입니다. 성령이 불러일으키시는 기억의 능력으로 우리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매일 매순간 성령께 귀기울이는 사람은 내면의 평화를 삽니다.
성령께 귀기울이면 우리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생생히 살아움직이고 말씀에
대한 살아있는 기억의 힘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기도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생생한 기억을 우리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소서!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복음 단상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