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선정릉(宣靖陵)
(2016년 12월 18일)
瓦也 정유순
서울에 올라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20대에 만났던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금년을 마무리 했다. 처음 모일 때는 십 수 명이 모여 세상을 경영할 것 같은 기개(氣槪)가 서려 있었는데, 출발점은 같았어도 세월이 가면서 각 자 서있는 위치에 따라 지금은 연락도 되지 않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뭐가 그리 급해서 빨리 이승을 하직한 친구도 있으나, 그래도 가족들을 포함하여 이렇게라도 만난다는 것이 살아 있는 자의 축복이며 기쁨이다.
<선정릉공원 전경-네이버 캡쳐>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두어 시간 남짓 오찬을 하며 담소를 나누다가 일어설 때는 해어지기가 아쉬워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주 먼 길처럼 잘 가지 않는 선∙정릉을 가기 위해 역삼역에서부터 테해란로를 따라 발품을 판다.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에 와 살면서 그동안 변한 서울의 옛 모습들을 더듬어 간다. 1970년대 후반까지 모내기철이 되면 양재동으로 농촌 일손 돕기 왔던 기억들이 아련하다.
<선릉 안내판>
선∙정릉은 서울 강남의 빌딩 숲 속에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成宗, 1457∼1494)과 제2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의 능인 선릉(宣陵)과, 아들 11대 임금인 중종(中宗, 1488∼1544)의 능인 정릉(靖陵)이 있어 선∙정릉(宣∙靖陵)이라고 하며, 또한 3개의 능(陵)이 있다고 하여 삼릉공원으로도 불린다. 당시에는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서울 강남도심의 중심부이고, 울창한 숲이 도심의 허파역할을 한다.
<서울 선릉과 정릉 입구 표지>
성종은 훗날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와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되어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는 바람에 성종은 할아버지인 세조의 손에 자란다. 세조는 일찍이 손자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총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할아버지 세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성종은 다섯 살이 되던 해(세조7년, 1461)에 자산군에 봉해지며, 1467년에는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와 혼인을 올리고 1469년에는 숙부인 예종(睿宗)의 뒤를 이어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선릉 입구>
그 후 성인이 되는 7년 동안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으며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권신과 사림세력을 조화롭게 운영하여 국가권력을 균형을 이루며 치세에 능한 왕이 되었다. 유교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의 기초를 완성함으로써 조선 개국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다. 1485년에는 조선의 기초가 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 되었고,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삼국사 절요 등 다양한 서적이 간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장수하지 못하고 38세의 나이에 16남 12녀의 자녀를 두고 승하한다.
<선릉 정자각>
<성종 릉(선릉)>
성종의 제2계비인 정현왕후 윤씨는 정비인 공혜왕후 한씨,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뒤를 이은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이자 중종의 생모이다. 우의정 윤호(尹壕, 1424∼1496)의 딸로 성종4년(1473) 숙의에 봉해졌으며, 1479년 폐비 윤씨가 폐출되면서 1480년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1497년에 자순대비가 되고 소생으로는 중종과 신숙공주가 있다. 1530년(중종25년)에 68세를 일기로 경복궁에서 승하하여 성종의 동북쪽에 묻힌다.
<장현왕후 릉(선릉)-네이버 캡쳐>
성종릉은 병풍석의 면석(面石)에는 구름문양 속에 십이지신(十二支神)이, 지대석(地臺石)과 만석(滿石)에는 연꽃문양이, 인석(引石)에는 해바라기와 모란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상석(裳石) 및 난간석이 있다. 정현왕후 능은 석물 등 상설(象設)은 기본적으로 왕의 능과 같으나 다만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欄干石)만을 두르고 봉분도 비교적 낮아 조촐한 모습이다. 이곳 석물들은 성종5년(1474)에 완성된 국조오례(國朝五禮)에 의하여 장대하면서도 조화가 잘 이루어져 균형미가 있다. 그러나 선릉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능침이 훼손되었고 시신은 모두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정현왕후 릉 표지판>
선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丁字閣)을 사용하되 언덕을 달리하고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선∙정릉 입구에 들어서서 재실(齋室) 앞으로 하여 서쪽으로 들어가면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이고 정자각 서북쪽 뒤로 성종의 무덤이 있으며, 왕후의 능은 계곡 건너편 동북쪽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두 능침 사이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고, 능역 외곽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선정릉공원 산책 길>
정현왕후 능을 둘러보고 우측 산책로를 따라 계곡 길을 한참 걸으면 중종의 묘인 정릉(靖陵)이 나온다. 중종은 성종19년(1488년)에 정현왕후 윤씨 소생으로 성종의 차남이다. 성종25년(1494년)에 진성대군에 봉해지고, 1506년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보위에 오른다. 중종은 신진사림세력들을 등용하여 훈구대신들과의 세력 균형을 이루면서 새로운 이상형(理想型)의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훈구세력의 반격으로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등 각종 옥사로 이어지는 당파싸움의 벽을 넘지 못한다.
<중종의 릉(정릉) 정자각>
중종은 원래 진성대군 때인 1499년에 신수근(愼守勤)의 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와 결혼하였으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반정에 반대한 신수근의 딸이며 연산군의 비 신씨의 질녀라는 이유로 반정을 주도했던 공신들의 압력으로 폐위되고 만다. 1544년 57세의 나이로 승하한 중종은 38년 2개월 동안 왕위에 머물렀으며 인종의 생모인 장경왕후 윤씨와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 윤씨 등 두 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을 두어 9남 11녀의 자녀를 두었다.
<정릉 전경-네이버 캡쳐>
그리고 원래 중종은 1544년 승하하여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묻혔으나 명종17년(1562년) 문정왕후가 사후에 왕과 합장하기를 희망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그러나 장마 때면 물이 차오르는 등 풍수상의 결함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문정왕후는 노원구에 있는 태릉에 묻혀 있다고 한다.
<정자각 문으로 본 정릉>
그래서 정릉은 단릉(單陵)으로 홍살문과 정자각이 일직선상에 있다. 정릉의 상설(象設) 구조는 기본적으로 선릉과 거의 비슷하다. 다만 인석에는 국화문양과 모란문양이 조각되어 있으며, 문석인과 무석인은 장대하고 선각이 뚜렷하여 머리가 몸에 비하여 큰 편이다.
<정릉>
사적 제199호로 지정된 선∙정릉은 <세계유산 조선 왕릉>으로 2009년 6월에 등재되었다. 조선 왕릉은 1392년부터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조선을 이끌어온 왕과 왕비의 무덤 42기 중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으로 지금 까지 이곳에서 산릉제례가 500년 이상 이어져 오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설명문>
관람코스는 정문에서 재실 앞으로 하여 선릉 정자각으로 가서 성종 능을 먼저 보고, 정현왕후 능을 본 다음 정릉으로 오는 시계방향으로 코스를 잡으면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사전지식이 없었던 우리는 시계반대방향으로 잡아 마지막에 재실에 들렀다 나왔다. 그래도 삭막한 도심에 조상의 얼과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다시 담소를 나누다가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구름 낀 흐린 날씨지만 해는 벌써 서산을 넘어 간다.
<선정릉 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