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까이 : 조선총독부 관변학자로 동경대 교수였으며 <조선식물도감>의 편찬자. ♣센인바리(千人針)) : 일제식민지시대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갈 때 우리 어머니들이
배조각에 천 사람의 바늘 땀을 놓아 지니고 가면 살아서 돌아 온
다는 부적 같은 것.
시골길 또는 술통
저전거 짐받이에서 술통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와서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꿈꾸는 섬
말없이 꿈꾸는 두 개의
섬은 즐거워라
내 어린 날은 한 소녀가 지나다니던 길목에
그 소녀가 흘려 내리던 눈웃음결 때문에
길섶의 잔 풀꽃들도 모두 걸어 나와
길을 밝히더니
그 눈웃음결에 밀리어 나는 끝내 눈병이 올라
콩알만한 다래끼를 달고 외눈끔적이로도
길바닥의 돌멩이 하나도 차지 않고
잘도 지내왔더니
말없이 꿈꾸는 두 개의
섬은 슬퍼라
우리 둘이 지나다니던 그 길목
쬐그만 돌 밑에
다래끼에 젖은 눈썹 둘, 빼어 눌러 놓고
그 소녀의 발부리에 돌이 채여
그 눈구멍에도 다래끼가 들기를 바랐더니
이승에선 누가 그 몹쓸 돌멩이를
차고 갔는지
눈썹 둘은 비바람에 휘몰려
두 개의 섬으로 앉았으니
말없이 꿈꾸는 저 두 개의
섬은 즐거워라
나팔꽃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鐘(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젊은 날의 초상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위로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슬픔을
나누는 사람은 행복하다.
더 주고 싶어도 끝내
더 줄 것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렇게도 젊은 날을 헤매인 사람은 행복하다.
오랜 밤의 고통 끝에 폭설로 지는 겨울 밤을
그대 창문의 불빛을 떠나지 못하는
한 사내의 그림자는 행복하다.
그대 가슴속에 영원히 무덤을 파고 간 사람은
더욱 행복하다.
아, 젊은 날의 고뇌여 방황이여
땅끝에서
등대가 서 있는 방파제 끝
빚에 몰린 한 여자가 투신했다
마을 사람들 횃불을 들고 나와
간신히 구조되었다
이듬해 유채꽃이 피어서야
그 여자 이바지 떡짐을 이고 왔다
암, 쇠똥에 굴러도 이승이 백 번 낫지
마을 노인들 저마다 한 소식씩 던졌다
암, 그렇고말고 죽고 나서야 찍는 발자국이
첫 발자국이지!
적막한 바닷가
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 보내듯이 갈밭머리 해 어스름녘 마른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바래서서 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또는 바삐바삐 서녁 하늘을 깨워가는 갈바람소리에 우리 으스러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초록의 감옥
초록은 두렵다
어린날 녹색 칠판보다도 그런데 자꾸만 저요, 저요, 저, 저요 손 흔들고 사방 천지에서 쳐들어 온다 이 봄은 무엇을 나를 실토하라는 봄이다 물이 너무 맑아 또 하나의 나를 들여다보고 비명을 지르듯이 초록의 움트는 연두빛 눈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무섭다 초록에도 감옥이 있고 고문이 있다니! 이 감옥 속에 갇혀 그 동안 너무 많은 말들을 숨기고 살아왔다.
연엽(蓮葉)에게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고 그만두고
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을 몸에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 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발바닥은 움쩍도 않는다
발아 발아 가치마늘 같던 발아!
蓮 잎새 맑은 이슬에 씻긴 발아
지금은 진흙밭 삭은 잎새 다 된 발아!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아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운다
그 蓮 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詩를 쓰는구나
오, 하느님
이 덧없는 말의 교예
짐승의 피!
거두어 가소서
혀 밑에 감춘 사과씨
가을이 오면 호주머니에 그 해의 첫 사과 한 알을
넣고 다닌 적이 있었다
색과 향과 감촉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때
불두덩에 털이 나기 시작했고, 달거리 한
그 소녀의 비밀스런 미소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때
사과 한 알을 끝내 깨물지 못하고 손바닥에 굴리며
혼자서 썩히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과밭을 하나 가지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사과향은커녕 내 몸에선 쉰내가 난다고
아내는 잠자리에서 투덜거린다
오늘 좌판대를 지나오며 햇사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오면서,
저 햇빛과 바람과 이름모를 벌레 소리가 그 치렁한
강물소리가 내 몸 안에는 없다는 걸 알았다
그늘을 친 사과밭은커녕 아직 한 그루의 사과나무도 심지 못했다
햇사과를 먹으며 얼굴 붉히며, 사과씨를 뱉으며
혀 밑에 감춘 오래된 사과씨는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강
이 겨울에는
저무는 들녘에 혼자 서서
단호한 믿음 하나로 이마를 번득이며
숫돌에 칼을 가는 놈이 있다
제 섰던 자리
벌판을 두 동강 내어
어슬어슬 황혼 속을 걸어 가는 놈이 있다
보아라 저 방랑의 검객
한 굽이 검돌면서 모래톱을 만들고
또 한 굽이 감돌면서 모래밭을 만드는 것은
힘이다
누가 저 유연한 힘의 가락 다시 꺾을 수 있느냐
누가 저 유연한 힘의 노래 다시 부를 수 있느냐
우리는 어느 산굽이
또 한 바다에 퍼런 굽이 설 때까지
흐득흐득 지는 잎새로나 숨어
유유히 황혼 속을 사라지는
저 검객의 뒷모습이나 지켜볼 일이다
뻘물
이 질퍽한 뻘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 아니라 밤꽃 흐드러진
페로몬 냄새 그보다는 문클한
이 질퍽한 뻘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야
열 몇 살 가슴 두근거리던 때 이야기지만
들찔레 소복이 피어지던 그 언덕에서
나는 비로소 살냄새를 피우기 시작했어요
여자도 낙지발처럼 앵기는 여자가 좋고
그대가 어쩌고 쿡쿡 찌르는 여자가 좋고
하여튼 뻘물이 튀지 않는 꽹과리 장고 소리보단
땅을 메다 치는 징 소리가 좋아요
하늘로는 가지 마.....
하늘로는 가지 마.....
캄캄하게 저물면 뒤늦게 오는 땀 울음
그 징 소리가 좋아요
저물다가 저물다가 하늘로는 못 가고
저승까진 죽어 갔다가
밤길에 쏘내기 맞고 찾아드는 계집처럼
새벽을 알리며 뒤늦게 오는 소리가 좋아요.
그늘
그늘이란 말 아세요
맺고 풀리는 첩첩 열두 소리마당
恨의 땟깔을 벗고 나면
그늘을 친다고 하네요
개미란 말 아세요
좋은 일 궂은 일 모래알로 다 씻기고
오늘은 남도 잔치마당 모두들 소반상을 둘러 앉아
맛을 즐기며
개미가 쏠쏠하다고들 하네요
순채란 말 아세요
물 속에 띠를 늘이고 사는 환상의 풀
모세관의 피를 맑게 거르는…
솔찮이란 말 아세요
마음 외로운 날 들로 산으로 바자니며
나물 바구니에 솔찮이 쌓이던 나숭개 봄나물들
그러고도 쑥국과 냉이 진달래꽃 보릿닢 홍어앳굿…
벌천이란 말 아세요
시집온 지 사흘 벌써부터 기러기 고기를 먹고 왔는지
깜빡깜빡 그릇을 깨기만 하는 이웃집 새댁…
사는 재미도 오밀조밀 맛도 아기자기
산 굽굽, 물 굽굽 휘어지는 남도 칠백 리
다 우리 씀씀이 넉넉한 품새에서
그늘을 치고 온 말들이에요.
송수권 시집목록
1980년 1 시집 『산문에 기대어』(문학사상사) 1982년 2 시집 『꿈꾸는 섬』(문학과지성 시인선) 1984년 3 시집 『아도』(창작과비평사) 1986년 4 시집 동학혁명을 다룬 서사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나남) 1988년 5 시집 『우리들의 땅』(문학사상사) 시선집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문학사상사) 1991년 6 시집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전원), 시선집 『지리산 뻐꾹새』(미래사) 1992년 7 시집 『별밤지기』(시와시학사) 1994년 8 시집 신국토 생명시『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문학사상사) 1998년 9 시집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시와시학사) 1999년 우리 토속꽃 시선집 『들꽃세상』(혜화당) 육필 시선집 『초록의 감옥』(찾을모) 2001년 송수권·이성선·나태주 3인 시집 『별 아래 잠든 시인』(문학사상사) 10 시집『파천무』(문학과 경계사) 2002년 자선시집 『여승』(모아드림)
송수권 宋秀權 (1940.3.15 ∼ )
1940년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에서 태어났다.
1959년 순천사범학교와 1962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산문에 기대어〉 등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같은 해 문화공보부 예술상을 수상하였다.
1980년 첫 시집 《산문(山門)에 기대어》와 1982년 두 번째 시집 《꿈꾸는 섬》을 출간하였고, 이후로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30년간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사 및 광주학생교육원 연구사, 연구관을 지낸 뒤 1995년 명예퇴직하였다. 1999년부터는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7년 전라남도 문화상, 1988년 제2회 소월시문학상, 1993년 서라벌문학상, 1996년 제7회 김달진문학상, 1999년 제11회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 시집 《아도(啞陶)》(1984), 《새야 새야 파랑새야》(1986), 《우리들의 땅》(1988), 《별밤지기》(1992), 《바람에 지는 아픈 꽃처럼》(1994),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1998)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다시 산문(山門)에 기대어》(1986), 역사기행집으로 《남도기행》(1991) 등이 있다.
첫댓글 송수권님의 "여승"의 심정으로 시를 대하다. 나도 그렇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