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화산 정토원 홈페이지} "봉화산 정토원은 지금부터 약 90여년전인 1920년 한림면에 거주한 지방유지 이진일의 발의에 의하여 자암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져 지역 유일의 신앙도량으로 자리하였다. 이후 1953년 화일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1958년 당시 동국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선진규가 백성욱 총장에게 고향 봉화산을 중심으로 농촌 계몽운동을 하고자 하니 도와달라하여 사찰터 등 35,000평에 대한 계약금 35만원을 지원받아 진영읍 신용리에 있던 신용사를 병합하고 절 이름을 봉화사라 개명함으로 명실공히 사찰의 터밭을 새롭게 변모시켰다. 1959년 4월 5일 황폐된 산야, 가난의 농촌, 부정과 독재의 자유당 말기 불교학도 31명에 의해 봉화산 정상에 개발을 상징하는 호미든 관음상을 봉안하고 선진규는 이곳에서 식목과 개간 그리고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슬픔을 간직한 부엉이 바위
접근을 못하도록 막아 놓았다
마애불 아 ,,,, 부엉이 바위 바로 밑에 누워있는 불상을 보니 노대통령의 모습을 보는것 같다 산을 내려오다가 너머진 사람처럼 ,,,,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노대통령이 어릴적부터 이 마애불을 보고 자랐을것이다. 이것이 노무현의 운명이였을까 ? 가만이 바라보고 있으니 머리가 어지러워 진다 (안내글에서) “이 마애불은 자연 암벽에 조각된 앉아 있는 석불로 발견 당시 산 중턱 바위틈에 끼여 옆으로 누워 있었다. 양손과 왼쪽 어깨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애불은 당나라 황후의 꿈에 한 청년이 나타나 자꾸만 자기를 괴롭히므로 신승의 힘을 빌려 그 청년을 바위틈에 넣어 김해 땅 봉화산의 석불이 되게 함으로써 생긴 것이라 한다.” |
노전대통령 묘역 전경
부엉이 바위
부엉이 바위 바로 밑에 있는 거울 연못 진짜로 맑은 투명한 거울 같다.
가까이 가서 물에 비치는 나 자신을 본다. 70여년 살아온 나 지신의 모습이 훤하게 다 보이는것 같다
아 ,,, 부끄러운 모습만 보인다.
부엉이 바위밑에서 쑥캐는 아줌마가 보인다. 한없이 평화로운 모습이다.
저 모습을 보니 이제 노전대통령도 모든걸 내려놓고 저세상에서 이런 봄날에 저 부엉이 바위위에 편안하게 앉아서 막걸리 한잔하고 있겠다 는 생각이 든다
노대통령 묘역
부엉이 바위와 사자바위가 좌우로 수문장같이 서있다 인생무상이다
이제는 모두가 좌우를 떠나 모든걸 툴툴 털고
서로 손잡고 손자들과 이곳에 소풍와서 막걸리 한잔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하고 기도해 본다
1만5천여개의 국민참여 박석
노대통령 생가
개나리 매화가 활짝 피었다
봉하마을
따뜻한 봄날씨처럼 그저 평범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배가 고파서 봉화마을 봉하빵을 몇개 사서 먹으며 봉하마을을 떠난다
노무현이 생전에 바라고 만들려고 한 " 사람사는 세상 " 은 어떤 세상이였을까 ?
그저 간단하게 하루 세끼 따뜻한 밥먹고
논에 일하다가 새참으로 동네 이웃사람들과 어울려 막걸리 한잔하고
손주 손잡고 논밭을 거니는 그런 평범한 세상이 아니였을까 ?
봉하마을을 지나 진영읍으로 걸어 가면서 봉하마을을 다시 돌아 본다 참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란 생각이 든다
봉하마을도 노대통령 묘역도 보이지 안는다. 그저 야트막한 산과 밭만 보이고 ,,,
지금 여야로 피터지게 싸우는 싸움도 무의미하게 여기에는 따뜻한 봄기운만 감돈다
진영읍
봉화마을에서 한시간 정도 슬슬 주위를 구경하면서 걸어오니 진영 시외버스 정거장에 도착한다
오늘은 어쩐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귀한 산행을 했다 답사산행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