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톨릭 영상교리] (42) 피정
어수선한 일상에서 벗어나 주님 만나는 시간
여러분은 피정을 자주 가시는지요? 피정(避靜)은 ‘세속을 피하고 고요함을 따른다’ 또는 ‘세상을 피하여 고요하게 마음을 지닌다’라는 뜻입니다. 곧 ‘번잡하고 어수선한 일상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하느님과 가까이하는 길을 찾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을 말하는데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과 반성으로 양심을 깨끗이 하는 시간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휴가’, ‘주님 안에서 조용히 쉬는 시간’으로 받아들이고도 있습니다. 오늘은 피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피정은 바쁜 삶을 사는 현대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에게 필요한 시간입니다. 세상사나 인간적인 일로 멀어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인데요. 사실 우리는 하느님 뜻 안에서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참삶의 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길을 잘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적ㆍ외적ㆍ인간적 욕망과 주위의 많은 요소 때문에 이를 쉽게 방해받습니다. 또 인간적인 생각이나 일에 묻혀 하느님 자체를 잊어버리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참삶의 길에서 자주 벗어나기도 하죠.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멈추고 삶의 현장을 잠시 떠나서 그동안 자신을 이끌어주시고 지켜주셨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하느님과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고 맞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에 피정은 내 눈을 하느님께 다시 맞추고, 내 삶을 다시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만드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를 받으셔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상에서 물러나 오직 하느님과 함께 머무시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곧 시작할 공생활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공생활을 앞두고 광야로 가셔서 단식하며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모범 삼아, 중요한 일을 앞두거나 하느님을 좀 더 가까이 느끼고 싶을 때 광야로 가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으로 전해져 오늘날의 ‘피정’이 된 것입니다.
피정은 하느님과 나 사이의 긴밀한 관계가 이뤄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피정은 하느님께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으로는 나를 이 세상에 내시고 나를 속속들이 아시면서 나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느님의 뜻과 마음을 헤아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피정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다음의 몇 가지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째, “떠나라!”입니다. 자신의 여러 내적, 외적 집착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모든 소란한 주위 환경과 일에서 떠나고, 외적으로, 내적으로 매여 있는 모든 일에서 떠나고 마음을 비우는 것은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는 데 좋은 마음 자세입니다.
둘째, “향하라!”입니다. 자신을 매어 놓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고 비워서 자신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빛이 스며들 수 있도록 마음의 초점을 계속 하느님께로 맞추는 것입니다.
셋째, “맡기라!”입니다.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먹구름 속에서도 태양을 믿듯이 피정 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결국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임을 믿고 맡기라는 것입니다.
넷째, “응답하라!”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당신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피정 중에 만난 하느님의 빛과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돌아보며 그에 대한 나의 응답을 드리는 것입니다. 작고 소박한 응답이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나와의 눈 맞춤과 주고받는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니까요.
피정!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눈 맞춤과 사랑 맞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과의 눈 맞춤과 사랑 맞춤을 통할 때 진정한 평화와 휴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쁜 세상사에 몸도 마음도 지치고 산란할 때, 나도 모르게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졌다고 느낄 때, 피정! 모든 걸 멈추고 떠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05.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105항)
고통받는 이들에게 곁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인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트라우마 경험자를 살게 하는 핵심은 바로 사회적 지지입니다. 고통은 소외될수록 치유와 멀어집니다…. 사회에서 누군가 나를 돕고 지지한다는 감각이 있으면, 어떤 끔찍한 사건을 경험하고도 견딜 수 있습니다. 사회적 지지 유무에 따라 사람은 살거나 아니면 나락으로 빠집니다. 따라서 이름 모를 누군가의 고통이 소외되지 않도록, 혼자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도록 서로의 곁을 내주어야 합니다. ‘곁’은 물리적인 공간인 ‘옆’과 다릅니다. 서로의 마음을 허락하고 열어 주는 연결의 끈입니다. 너무나 아프고 힘들 때, 손 내밀어 잡을 수 있는 곁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위로로 다가옵니다. (채정호 「고통의 곁에 우리가 있다면」)
누군가의 희생에 빚지며
저출산·고령화가 심각한 요즘입니다만, 몇 십 년 전만해도 집집마다 자녀들이 많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열악했지만 온가족이 모여 함께 살았지요. 그 시절을 잘 이겨 낸 것은 우리 부모님들의 희생 덕분입니다. 못 입고 못 드시고 희생하시면서 자녀를 키우고 가정을 돌본 것이지요.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 우리 모두는 이전 세대의 희생을 통해 자랐습니다.
그밖에도 많은 숭고한 희생이 존재합니다. 평화는 정의의 요구와 분리되지 않지만 개인적 희생과 관대, 자비, 사랑으로 자라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520항) 우리는 이웃의 노고에 빚지며 살고, 희생은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불가피하기도 합니다.
희생의 양면성
그러나 희생은 고통스럽습니다.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으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됐습니다. 내전으로 고통받던 시리아 난민들의 피해가 컸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가족과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은 생존자들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각종 참사와 재난으로 희생된 분들, 사회적 소외와 배척, 심지어 부당한 폭력과 욕심으로 고통을 겪는 분들도 계십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런 무고한 희생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며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 개선해야 하며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 강조합니다. 또한 애석하게도 부유함은 불평등한 구조 안에서 다른 이웃과 더 약한 사회 계층의 희생을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에(374항), 우리는 희생에 대한 더 깊고 넓은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희생을 대하는 인식과 자세
가톨릭교회는 희생에 대한 심원한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항상 자신을 희생시킬 만반의 태세를 갖춰야 하고(581항)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인간 존엄과 사랑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고 순교에까지 이를 수 있는 근본 의무로 여겨야 합니다.(570항) 요컨대 희생은 숭고하면서, 솔선수범해야 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희생과 고통 속에서 아파하는 이웃과 함께 연대하려는 성숙한 인식이 요청됩니다. 하느님 아드님께서도 그 희생을 짊어지셨고, 그것이야말로 사람과 사회를 구원하고 치유하는 길입니다. 그런 희생에 대해 하느님을 따르려는 우리 신앙인들은 누구보다도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교회는 인간이 따라야 할 길을 가르쳐 주고 가장 먼저 그 길을 가고자 노력한다. 교회는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알든 모르든, 모든 사람,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이 자기 형제자매라는 것을 깨닫도록 권유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셨다.”(「간추린 사회교리」 105항)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05. 넷째 계명 ⑥ (「가톨릭교회 교리서」 2232~2257항)
하느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 팔마 일 조바네 ‘성 바오로의 회심’. 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에게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셨던 것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소명을 수행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진다.
만약 지금 우리가 노예 제도가 있는 나라에서 살고, 나에게 주인의 폭력이 싫어서 탈출한 노예가 숨어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오로 사도도 이와 똑같은 상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필레몬이라는 주인에게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스를 감옥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네시모스는 바오로를 통해 참 하느님을 알고 바오로의 충실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네시모스를 주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바오로는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필레 1,13-14)라고 말합니다.
노예 제도는 분명 모든 이는 평등하다는 주님의 가르침과는 어긋납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위에 맞서는 자는 하느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고, 그렇게 거스르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을 불러오게 됩니다”(로마 13,1-2)라고 말합니다. 가톨릭 교리도 “공권력 밑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윗사람들을 하느님 은혜의 관리자로 그리고 하느님의 대리자로 보아야 한다”(2238)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정권에 저항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87년 민주화 운동 당시 명동성당에 피신해 있던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려는 경찰에게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잡아가려면 우리를 넘고 가십시오”라며 저항하였습니다. 이는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이나 기본 인권이나 복음의 가르침 등에 어긋날 때, 시민들은 양심적으로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다”(2242)라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사회 권위에 순종하고 언제 저항해야 할까요? 교리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넷째 계명은 공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과 그 공권력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의무도 밝혀준다”(2234)라고 말합니다. 사회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는 부모와 자녀 사이처럼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권위를 하느님께서 주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만 하느님 뜻이 명확하게 부모의 뜻과 어긋날 때 우리는 하느님 뜻을 따르기 위해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을 의무가 생깁니다. 부모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녀를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고 존중하여야 합니다.”(2233)
법도 민법이나 형법이 헌법을 바꿀 수 없듯, 하느님의 법이 내리면 다른 권위는 힘을 잃습니다. 결국 모든 권력은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그 권위의 차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교회는 우선 “세금 납부와 투표권 행사, 국토방위 등의 의무”(2240)를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동시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태 22,21)라는 말처럼 마치 별개의 권위처럼 하느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 임무와 권한으로 보아 어느 모로도 정치 공동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결코 어떠한 정치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2245) 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에게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라고 하셨던 것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소명을 수행할 때는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사순시기의 시작, 재의 수요일
2019년 3월 6일 저녁, 미국 CNN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 크리스 쿠오모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이마에 검댕이가 묻은 채로 프로그램을 진행하였고, 출연자 몇몇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이유는 출연진의 부주의가 아니라 당일이 재의 수요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2월 22일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의 수요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작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받은 성지를 태워 이날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재를 축복하고 그 재를 머리에 얹어주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또는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창세 3,19 참조). 이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영원한 삶을 구하라는 장엄한 외침입니다.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3세기 초까지 사순시기의 기한을 정하지 않은 채 주님 부활 대축일 전 2-3일간 예수님의 수난을 특별히 기억했습니다. 40일의 기간이 정해진 건 니케아 공의회(325) 이후입니다. 그리고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재위 590-604) 때 사순시기의 첫날로 재의 수요일이 정해졌고, 성 바오로 6세 교황(재위 1963-1978)은 이날 단식과 금육을 지킬 것을 명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단식을 만 21세부터 60세까지의 신자들이 한 끼를 먹지 않고 한 끼는 적게 먹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단, 병을 앓고 있거나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는 예외입니다. 또한 금육은 만 14세 이상 모든 신자가 지키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순시기 중 전례에는 몇 가지 변화가 있습니다. 우선, 사제의 제의가 자색(보라색)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대축일을 제외하고 대영광송을 생략합니다. 또한 복음 환호송으로 알렐루야 대신 다음의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이런 변화는 사순시기가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때이기에, 통회와 보속과 희생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의 일상에서도 절제와 극기를 실천하고 그 몫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주님의 기도’ 때 손동작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미사를 집전하시는 신부님께서 팔을 벌리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기도 때 이와 같은 손동작을 취하는 전통은 이미 구약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수난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으로… 우리는 손을 들어 올리고 팔을 벌립니다.”라고 설명하는 초대교회 교부의 증언도 생생합니다.(경향잡지, 2011년 8월 호, 장신호 주교님 글 참조) 이 같은 흐름은 오늘 주신 질문의 주제인 미사 중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도 이어집니다. ‘미사전례총지침’은 사제나 공동 집전자가 주님의 기도 중 팔을 벌려 기도하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제273항)
팔을 벌리는 것은 하느님께 간절히 외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자세입니다. 사람은 두 팔을 벌림으로써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개방하고, 하느님을 향해 몸을 높이 세우게 됩니다. 나아가 활짝 펼친 두 팔은 마치 날개의 모습이 되어, 우리가 기도의 날개를 타고 하느님의 힘으로 높이 올라가도록 희망하게 해줍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두 팔을 벌린 모습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는 두 팔을 펼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과 함께 기도하며, 그분의 생각과 하나가 되고자 노력합니다.(<전례의 정신> 224-225쪽 참조)
그렇다면 사제가 이렇게 팔을 벌리고 기도하는 동안, 교우들은 어떤 자세를 취하면 좋을까요? 초대교회 때에는 사제뿐만 아니라 교우들도 기도를 바칠 때 팔을 벌리는 자세를 취하곤 했습니다. 이를 지금도 신자들이 전례 안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제대와 감실의 싸움> ‘미사 때 이루어지는 동작의 의미’ 참조) 다만, 현재 ‘미사전례총지침’이 주님의 기도 중 팔을 벌려 기도하도록 직접적으로 안내하는 대상은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뿐입니다. 교우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시 사항이 없다는 것과 더불어, 관례적으로 많은 본당에서 ‘주님의 기도’ 중 기도 손을 유지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여, 이 부분은 본당 사목자의 안내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편, ‘주님의 기도’ 중 교우들끼리 손을 잡도록 안내하는 미사에 참례해본 경험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교회 전체를 위해 한마음으로 드리는 공동의 기도라는 점(가톨릭교회교리서 2768항 참조)을 반영한 전례적 실천일 것입니다. 다만,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을 호소하는 의견도 없지 않았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지난 2015년에 발표된 주교회의의 지침을 전달해드립니다.
“전례적으로 주님의 기도 때에 손을 잡는 것이 권장 사항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에 정서적인 문제나 위생적인 문제로 손을 잡는 것에 대하여 불편을 호소하는 신자들이 늘고 있다. 그러므로 일선 사목자들이 친교를 이유로 미사 때마다 손을 잡기를 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본당의 날이나 큰 축제일에 예외적으로 할 수 있다.”(주교회의 2015년 춘계 정기총회)
[가톨릭 영상교리] (41) 묵주기도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 바라보며 주님께 바치는 기도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기도는 무엇일까요? 묵주기도 아닐까요? 여러분은 묵주기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른 기도와 달리 묵주 알을 굴리면서 바치고, ‘성모님께 바치고…’가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께 바치고, 기도문을 외고, 신비도 묵상하면서 바치는, 어떻게 보면 복잡하고, 어떻게 보면 참 특별한 기도이기도 한데요. 오늘은 묵주기도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볼까요?
묵주기도는 주님의 기도 1번, 성모송 10번, 영광송 1번을 1단으로 삼아 각 단마다 예수님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을 묵상하면서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단순하고 반복되는 기도이기도 하지만 ‘복음서 전체의 요약’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고 의미 깊은 기도입니다.
먼저 로사리오라고도 불리는 묵주기도란 말은 ‘장미 꽃다발’을 뜻하는 라틴어 ‘로사리움(Rosarium)’에서 나왔습니다. 박해 시대에 로마에서 순교자들이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가 사자의 먹이가 될 때 머리에 장미꽃으로 엮은 관을 썼는데요. 그러면 박해를 피한 신자들이 몰래 그 시신을 거둬들이면서 장미관을 모아놓고 꽃송이마다 기도를 한 가지씩 바쳤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 고대 교회 사막의 은수자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 매일 주님의 기도나 시편을 50편, 100편 또는 150편씩 바쳤는데요. 이때 바치는 횟수를 세기 위해 작은 돌멩이나 곡식알 같은 것을 실로 묶어서 굴렸는데 거기서 묵주기도의 유래를 찾기도 합니다.
한편, 묵주기도가 성모님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2세기 이후 삼종기도 등이 보급되어 성모 신심이 깊어지면서였습니다. 그전까지는 기도할 때 주님의 기도를 50번, 100번씩 바치던 신자들이 이즈음부터는 성모송을 대신 바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묵주기도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된 것은 15세기에 와서였습니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알랑 드 라 로슈 수사가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를 나누어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했고, 이것이 퍼져나가면서 전통적인 15단 묵주기도가 자리 잡게 됐습니다.
그리고 ‘묵주기도의 교황’이라 불렸던 비오 5세 교황이 1569년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 각 단별로 주님의 기도 1번과 성모송 10번, 영광송 1번으로 이루어지게 하고, 요일별로 신비를 달리해서 바치도록 하면서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전통적으로 묵상하던 환희, 고통, 영광, 이 세 가지 신비와 함께 그리스도 생애 전체를 묵상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공생활 중 중요한 다섯 사건을 묵상하는 ‘빛의 신비’를 추가해 조금 더 확장됐습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시작으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말씀과 행동으로 선포하신 공생활과 인류 구원을 위한 수난과 십자가 희생,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승리까지 예수님의 전 생애를 묵상합니다. 그래서 묵주기도는 ‘복음의 요약’입니다.
또 묵주기도는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묵주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관상 기도임을 뜻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의 신비를 기억하며 성모님의 모범을 본받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배웁니다. 또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노력하며,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 그리스도께 우리의 간절한 청을 드립니다.
나아가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로 묵주기도를 바치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래서 묵주기도를 바칠 때는 각 단의 신비를 제대로 잘 묵상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환희의 신비 1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라고 한 후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외울 때는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그 신비에 집중해서 묵상해야 합니다.
그럼 묵주기도는 어떻게 바칠까요? 먼저 묵주의 십자고상을 잡은 채 예수님의 발 부분에 입을 맞추고 성호경과 사도신경을 바칩니다. 다음 묵주 알을 잡고 주님의 기도를 바친 후, 세 개의 알을 차례로 넘기며 성모송을 바칩니다.
그리고 다음의 묵주 알을 잡고 머리를 숙이며 영광송을 한 후, 환희, 빛, 고통, 영광의 신비 중 하나의 묵상 주제를 택해 그 신비의 1단을 외우고,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그런 다음 묵주알 10개를 넘기면서 성모송 10번을 하며 묵상하기로 한 신비의 1단을 묵상합니다. 이후 다음 알을 잡고 영광송과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치면서 1단을 마칩니다.
이어서 그 신비의 2단을 외운 뒤, 마찬가지로 주님의 기도 1번과 성모송을 10번 하면서 2단의 신비를 묵상하고, 영광송,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칩니다. 같은 방법으로 3단, 4단, 5단을 바칩니다.
마지막 5단의 영광송,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친 뒤에는 성모찬송을 바치고, 십자가에 친구하면서 성호경을 하고 묵주기도를 마칩니다.
묵주기도는 요일마다 다른 신비를 바치도록 권고하는데요. 월요일과 토요일에는 예수님 탄생과 어린 시절에 관한 환희의 신비를,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과 관련된 고통의 신비를, 수요일과 주일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강림, 그리고 승천과 관련된 영광의 신비를, 목요일에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관련된 빛의 신비를 묵상하며 바칩니다.
이상 묵주기도의 특성과 유래, 그리고 바치는 방법을 알아봤는데요. 묵주기도를 더욱 열심히 바치는 계기가 되셨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