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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강해(1)
출 19: 1-6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고민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고민이 되고 숙제가 되어서 늘 하나님과 동행을 위한 열심과 노력들이 눈물겹게 이루어지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기에 눈으로 볼 수 없고, 영이시기 때문에 손으로 만질수도 없는 그분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우리의 깊은 고민을 분명하게 해결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그 자체라고 요한 복음은 증거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다는 선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해주는 가장 귀한 요한복음의 진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표현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 구체적으로 말씀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언약의 내용인 십계명은 다음주에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되겠지만 이 십계명은 단순히 도덕적 기준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할 때에 복이 되지만, 지키지 않을 때에는 저주가 되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래서 이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거룩한 예식을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남녀가 오래도록 교제를 했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을 부부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인 앞에서 언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조건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결혼식은 하객이 많이 왔을 때 양가에서 흐뭇하게 생각합니다. 반면에 하객이 작으면 왠지 쓸쓸하고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물론 서양의 생각은 다릅니다. 시청에 가서 몇 사람의 증인만 있다면 그냥 선서하고 결혼의 새로운 출발을 하는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찌됐든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증인이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증인은 하나님과 사람들입니다. 증인 앞에서 언약을 할 때 비로소 부부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언약 백성으로서 공식적인 출발을 하기 위해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부르셨고 그를 통해 백성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과의 언약은 시내산 언약이 처음은 아닙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사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언약을 맺기 위해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 그리고 숫양을 요구하셨습니다. 3년 되었다고 하는 것은 보다 성숙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제물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그 제물을 반을 쪼개도록 요구하셨습니다.
본래 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껍질을 벗겨내고 피를 쏫아내고 안에 있는 모든 내장들을 꺼내고 나서 각을 뜹니다. 팔다리를 다 자르고 몸통도 잘라 각을 뜬 후에 그것을 깨끗한 물로 씻어서 제단 위에 올려 놓은 후에 태워서 드리는 것이 화제입니다. 번제의 대부분은 화제입니다.
그런데 "피의 언약을 맺으실 때에는 각을 뜨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절반을 쪼개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제물을 쪼개어 놓게 하시고 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그 쪼개어진 제물 사이로 지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의미는 무었입니까? 만약 네가 나와 언약을 맺고 난뒤 언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 제물처럼 되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피의 언약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피의 언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언약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후 "너를 통해서 민족을 이룰 것이다" 라는 언약의 내용을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75세가 되었는데도 아직 자식이 없는데 너를 통해서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니까 "우리 집에 엘리에셀이라는 종이 있는데 지금 내 모든 소유를 그 성실한 청지기에게 물려 주려고 하는데 어떻게 민족을 이룰 수 있습니까?" 반문하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리라. 그리고 그 아들을 통해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고 거듭 확인하셨습니다.
출애굽부터 아말렉 전투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시련들을 경험케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 모든 일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기 전에 당신의 백성들을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통해 일 하기를 원하시지만 준비된 사람을 통해서 하시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삶의 순간 순간 왜 우리에게 바로가 추격을 하게 하느냐고, 왜 홍해가 막히느냐고, 왜 마라의 쓴 물을 주느냐고, 아말렉의 군사들을 왜 르비딤 골짜기에서 만나게 하느냐고 원망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세계를 크게 보면 그것은 우리를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에 계획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피의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개인이 아닌 민족과 최초로 언약을 맺기 원하셨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과 민족이 언약을 맺은 최초의 사건입니다.
3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대목이지만 이 3절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지금 그 백성들을 바라보시는 시각이 두 가지 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야곱 같은 모습이고, 하나는 이스라엘 같은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야곱과 이스라엘은 같은 사람입니다. 얍복강에서 주의 사자를 붙들고 축복하시지 않으면 놓지 않겠다고 했을 때에 비로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고 "야곱"이라고 했을 때 이제는 그 이름을 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약탈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스라엘"이라고 해라,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고 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이 져주셨다는 말입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그 시점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야곱의 세계와 이스라엘의 세계입니다.
야곱의 세계는 우리의 본성이 살아있는 세계이고, 육신의 정욕이 살아있는 세계이며, 내 멋대로 하던 그런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중심으로 살아가는 세계이며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기는 그런 세계입니다.
야곱 족속에게 고하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라고 하는 이 말씀은 수백만이 된 이 백성이 한편으로는 야곱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또 다른 한 면은 이스라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기에는 자격으로 볼 때 "100% 온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100% 완전했기 때문에 부르셨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성경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불러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합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그 부족한 부분들을 다 메워주셨어요. 그리고 의롭다 하신 줄 믿습니다.
4절에 보면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인도하였는지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미 새들이 새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날개로 품습니다. 그러다가도 둥지가 위험하다고 생각이 되면 자기 새끼들을 부리로 물어서 다른 장소로 옮겨갑니다. 그런데 유독 독수리는 자기 새끼를 옮길 때 부리로 옮기기 보다는 등에 업어서 옮깁니다.
독수리는 자기 새끼를 등에 업는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냥 편안하게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주지는 않습니다. 등에 업은 새끼를 한참 비행하다가 어미가 그냥 달아나 버리면 새끼는 공중에서 어쩔 줄을 몰라 자기의 날개 짓을 하면서 균형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래로 곤두박질 치면 어느새 어미가 와서 새끼를 등에 업고 날아갑니다. 자기 새끼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며 키워가면서도 때때로 새끼에게 험한 훈련을 시키는 거예요. 새 중에 다른 천적이 없다고 할 만큼 강력한 독수리의 세계도 사실은 그만큼 훈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유약한 집단이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저 숫자만 많은 군중이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였시면서도 때론 많은 시련과 역경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왜 나를 이러한 어려움 속에 두느냐고 우리는 원망을 자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수 있는 강한 민족으로 하나님의 복된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우리를 연단하신다고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도 감사의 제목이 돼야 할 줄 믿습니다."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나면 다 감사의 조건이 되어서 버릴 것이 없다"고 바울 사도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5절 6절에는 이제 언약의 목적, 그 백성을 택하신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온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너희에게 맡기기를 원하고 그것을 맡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러이러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보다 구체적인 언약의 내용은 십계명에 담겨있지만 택하신 목적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다른 사람의 죄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히브리서는 이제 모든 성도들이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함을 받은 이후에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중보자입니다. 제사장나라가 된다는 것은 중보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 문제에 급급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영적인 필요를 위해서 눈물 흘리고 다른 사람의 갈급한 문제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중보의 삶이 곧 하나님 백성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거룩에의 초대입니다. 아직 덜 거룩한 우리를 거룩의 자리로 불러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성전을 드나들 수 있는 생활을 하셨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멀쩡하게 살아서 숨쉬고 있지 않습니까? 거룩하기 때문에,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아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거룩의 자리로 우리를 끊임없이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 이제 우리에게 약속하신 이 두 가지가 언제나 사랑하는 성도들에 삶에 기둥 같은 기준이 돼어 그 기준대로 사시므로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언약 백성으로서 부족함이 없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의 십자가의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깨끗케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신 아버지, 이제 그 은혜를 생각하며 날마다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의 일원으로 우리가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시내산 언약이 오늘 나와 하나님과의 언약이 되게 하시고 그 언약을 지키기에 생명을 다하는 피의 언약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
출애굽기강해(2)
출 19: 7-15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얻을 수 있는 경험들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계약'입니다. 땅이나 집을 사고 파는 계약은 의미로 보면 상업적인 계약입니다.
성경에도 많은 계약이 소개되어져 있는데, 특별히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의 계약은 같은 계약이지만 의미로 보면 상업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것입니다.
계약의 중요성은 일방적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물건을 사고 파는 것도 서로의 가격과 기호가 맞아야 합니다. 더 나가서 신앙적이고 인격적인 의미의 계약이라고 하면 상호 의사의 중요성은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고 그들의 의사를 물어보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의사를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서 전달했고, 백성의 장로들은 백성들과 함께 자신들이 어떻게 응답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의논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우리 전도사님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임성환 전도사님이 결혼을 처음 하는 관계로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그저 싱글벙글 했습니다. 어려운 여러 가지 여건들이 있었지만 그 여건을 잘 감당하려고 두 사람이 같은 결심을 했기 때문에 결혼이 가능했습니다.
구약시대의 결혼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과 맺는 계약과 같은 차원에서 보았습니다. 신약에서는 신랑 되신 주님과 신부된 우리 성도들의 관계로 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와 계약을 맺을 수 있겠느냐"고 의사를 물어보셨습니다.
장로들은 백성들과 함께 의논을 하고 나서 8절에서 이렇게 응답합니다.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순종을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약의 내용을 제시한 그대로 따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10절에서 모세를 통해서 응답하셨습니다.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여 그들로 옷을 빨게 하라." 주께서 첫 번째 요구하시는 내용입니다.
우리 여성들이 빨래 때문에 평생에 허리가 휘청거립니다. 빨래하는 일만 없다면 엄마노릇도 아내노릇도 할만하다고 생각할 정도 입니다. 요즘에는 세탁기가 있어서 나아지긴 했지만 빨래하는 일은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닙니다.
빨래를 한다는 것은 더러운 것을 깨끗게 하는 어떤 환경적 변화이기도 하지만, 더 나가서는 빨래하는 사람의 마음에 변화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너희가 옷을 빨라"고 하는 그 말씀 속에는 우리의 삶의 태도를 바꾸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깨끗하게 준비하여 내 앞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결혼식에 입는 옷을 예복이라고 하는데 요즘에는 서양의 턱시도를 주로 입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정신입니다. 예복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적어도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식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옷을 예복에 준해서 입습니다. 그것은 결혼 당사자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합니다. 결혼식에 오면서 슬리퍼를 끌고 오거나 청바지를 입고 온다면 큰 실례가 될 것입니다. 최소한의 예의라고 하는 것이 결혼 당사자간에 그리고 하객들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 언약을 맺기 원하시면서 가서 빨래를 하고 오라는 것은 단지 더러운 옷감을 깨끗하게 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나오는 성도들의 '바른 자세'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여러분들의 옷을 빠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거울을 보면서 확인하고 성전을 향해야 될 것입니다. 주님의 요구입니다. 황 요한 목사의 요구가 아니라 주님의 요구입니다. 예배시간에 우리 자신들의 복장이 합당한지, 정성을 다하는 모습인지요?
책을 팔기 위해 무더위에도 외판원들은 정장을 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다닙니다. 그 좋은 양복, 양장들 옷장 속에 넣어놓고 언제 입으시려고 그럽니까? 우리가 이런 면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도전을 받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두번째, 우리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에게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예비하여 제3일을 기다리라." 우리는 종종 기도하고 눈을 뜨고 나면 기도한 것들이 눈앞에 주어져야 성미가 찹니다만 주님은 약속을 하고나서 3일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기대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꿈을 현실화하는 소망의 기쁨을 얻게 하는 시간입니다. 소풍가는 날보다 기다리는 날들이 훨씬 더 좋은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며 기다리는 그 시간이 훨씬 더 좋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주실까? 어떤 말씀을 주실까? 어떤 약속을 하실까? 어떤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까? 기다리면서 기대에 부푼 마음이 가득한 겁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은혜를 얻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도 기다릴 줄 아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면서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가꾸어 가는 것입니다. 만난 지 한달 만에 결혼한다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런 인스턴트 사랑은 오래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래 기다리면서 준비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기대가 철저하다는 이야기고,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어떤 것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든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기다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번째, 우리 주님께서는 12절 이하에서 말씀하시기를 "백성들에게 사면으로 지경을 정해 그 지경을 범하지 말라"고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그 영역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정하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정 할 수 없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계약이 이루어 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하여 입으로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인정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이와 같이 준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외형적으로도 준비가 되고, 마음으로도 준비가 되고, 삶으로도 준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준비되었을 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계약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지명하여 부르신 부르심에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나와 있다고 하는 의미는 그 계약 당사자로서 하나님의 요청에 우리가 응답했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는 그 계약의 내용들을 최선을 다하여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은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취소하면서 몇 푼의 배상금을 물어주면 되는 그러한 계약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오늘 본문 말씀에 있는 것처럼 "사느냐 죽느냐" 하는 계약입니다. 계약을 안지키려면,아예 그만두고, 지킨다고 하면 목숨을 걸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옆 사람들과 한번 인사하십시다. "당신은 계약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렇게 한번 인사해요. 계약을 할 때는 눈을 봐야 돼요. 지금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눈에 써 있거든요. 다시 한번 눈을 바라보면서 인사합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의 첫 번째 경험은 세례입니다. 세례받기 전에 먼저 증인들 앞에 서서 오른손을 들고 서약을 합니다. "이렇게 살겠습니까? 예 그렇게 살겠습니다" "버리겠습니까? 예 버리겠습니다." "가지겠습니까? 예 가지겠습니다." 이렇게 가져야할 것, 버려야할 것, 새로워져야 할 것을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 계약하는 거예요.
만약 여러분들이 그 세례예식에서 하나님과 성도 앞에 계약한 것을 아직까지 지키지 못하고 산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에요. 약속을 하고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사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을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그래서 주님은 약속을 했으면 목숨을 걸고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동산 계약과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기분 나쁘면 배상금 얼마 물어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주님께서는 3일 동안의 유예기간을 주신 겁니다. 3일 동안 준비하면서,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에 등록하고 나서 약 1년 정도의 기간은 생각하면서 내가 세례를 통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킬 것인가를 신중히 결단하는 기간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스라엘백성에게 말씀하듯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다리는 동안 경거망동하지 말고 거룩한 하나님의 산을 범하지 말고 절제하면서 그 하나님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성결을 요구하시고 언약백성으로서의 삶의 절제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동차를 타고 가다보면 자동차가 돌아갈 수 있는 U턴 표지판을 보실 겁니다. 이제까지 우리의 욕심과 방법대로 살아왔던 그 길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계약내용대로 U턴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의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계약속에 새로운 결단을 통해 돌아와 그 하나님과 함께 계약의 백성으로서 누릴 축복을 기다리며 기뻐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이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며 계약 백성으로서의 기쁨과 자부심을, 그리고 기다림과 절제를 원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저희들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높은 곳에 오르는 부활 신앙
출 19: 16-25, 빌 3: 10-16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허락 받았지만, 동시에 그 부활은 이루어 가야 할 우리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완성 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겨자씨처럼 시작되어 점점 자라 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 신앙도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 속에 들어오 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자라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 살 때에는 노예로서 아주 형편없는 천한 삶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서 나 와 시내산에 이르러서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어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났던 것입니 다. 노예의 삶을 깊은 골짜기의 삶이라면, 거룩한 백성의 삶은 높은 산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 높은 산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허락되었 지만, 문제는 '어떻게 거기에까지 오르느냐'입니다. 깊은 골짜기에 있다가 높은 산 에 오르려면 한참 고생하며 올라가야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은 거룩한 백성 이 되기 위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부활 신앙도 마찬가지로 죽음의 깊은 골짜기에 있다가 이제부터 부활의 저 높은 산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 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 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골짜기에서 부활의 높은 곳에 이르신 것처럼 바울도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높은 곳에 올라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거기에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른다고 합니다. 에베레스트를 등산하는 사람들을 보면 목숨을 걸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그 정상에 올라서 하는 일이란 태극기 하나 꽂아놓고 감격 소리 한 번 외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훈련을 하고 막대한 돈을 드리고 마침내는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것입니다.
97년에 시내산에 갔을 때 새벽 2시에 일어나 산에 올랐습니다. 우리 일행은 낙타를 타고 중턱까지 올라가서 정상까지 걸어올라 갔습니다. 정상에는 바람이 몹시 불고 추웠는데,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거기에 오르는 이유는 그 산이 모세가 올라와 하나님과 만나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았던 곳이라는 것과 그 리고 거기서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 산이 모세가 올랐던 산 인지는 아직까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어쨌든 이 단순한 이유 때문에 이른 새벽에 시내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이유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율법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엘리야가 호렙산에 오른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 이 변화산에 오르신 이유는 자기의 사명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 위하여서였습니 다. 자 그러면 우리가 부활의 높은 곳에 올라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시내산에 오른 것처럼 우리가 이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부활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 스라엘 자손들이 시내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뵙기 위하여 이틀동안 옷을 빨고 몸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뵙기 위하여서는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옛 생활을 십자가에 못박고, 새로운 마음, 새로운 생각, 깨끗한 몸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의 죄를 씻어내 고 우리 속에 새로운 삶을 받아드릴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팔복 말 씀에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부활하여 모든 욕심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을 뵈옵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90년 2월에 보세이 참여자들과 함께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고 교황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직접 악수를 하고 함께 사진도 찍었습니다. 별 것 아니지만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일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기독교 지도자들 초청한 청와대 오찬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가서 대통령과 악수하 고 중국 음식으로 준비된 오찬을 먹고 돌아온 것이지만 이 역시 누구에게나 주어진 기회가 아니기에 기억에 남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 뵙는 일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죄씻음을 받고 부활의 생명에 이른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을 뵈옵는 것 입니다. 교황이나 대통령을 만나는 것처럼 악수하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믿음 가운데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교황이나 대통령 은 어쩌다 한 번 만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하나님은 항상 만날 수 있고 그의 은 총이 우리에게 내리기에 이것은 기쁨이며 보람이며 큰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는 하나님을 만나는 이 기쁨과 보람을 위해 부활의 높은 산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 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부활의 산을 오르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은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을 듣고 받기 위하여 부활에 이르러야 합니다. 육신의 양식은 농사를 통해 얻지만, 하늘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세처럼 시내 산에 올라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 말씀이 성경으로 우리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성경을 누구나 읽는다고 해서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성 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기에 성령의 도우심과 감동이 없이는 아무리 읽어도 거기서 말씀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속에 세상을 향한 욕심이 가득한 채 아무 리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이란 결국 내가 마음을 비울 때 오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버리고 세상의 잡다한 생각을 비우고 가 난한 마음 겸손한 자세로 그 성경을 읽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울 때 우리의 귀가 열리고 우리의 눈이 밝아지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에서만 듣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귀가 열리고 눈이 떠지면,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속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의 편견과 고집과 이념을 버리면 어디서나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만, 나의 편견을 버리지 아니하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편견의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성장이란 이념에 사로잡히거나 틀에 박힌 신학에 붙잡히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마음을 비우면서 조용히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비 로소 그 말씀을 제대로 설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마 찬가지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오면서 복잡하고 힘들었던 세상살림에 대한 걱정과 생각들을 다 비우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기도하고 준비한 사람에 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설교가 허공을 치는 무의미하고 지루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호렙산 굴속에서 겸손히 엎드렸을 때 작고 가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이제 우리 도 부활 신앙의 높은 곳으로 나아가 우리의 잡다한 생각과 이념과 걱정근심들을 털 어 버리고 가난한 마음으로 엎드릴 때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 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자에게는 기쁨이 있으며, 자기의 길이 분명해지고 그 말씀 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부활의 높은 곳으로 오르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멀리 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깊은 골짜기나 낮은 곳에 있으면 멀리 볼 수 없습니다. 높은 곳에 오를 때 비로소 멀리 보이고 자기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가끔 길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막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데 하늘에 뜬 헬리콥터가 이런 상황을 살펴서 지상에 알려주면 그런 궁금증을 금방 풀 수가 있고 상황을 보아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거기서 보내어 오는 정보를 가지고 가장 빠른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단 자동차들이 나옵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 다보면 한 눈에 모든 길이 다 보이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얻어 높은 곳에 오르게 되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그 역사의 방향과 의미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 니다. 그러면 우리는 길을 헤매지 않고 바르게 그 역사의 방향을 좇아 나가며 지혜 롭게 문제에 대처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이란 바로 높은 곳에서 하나님 의 역사를 통찰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오늘의 인공위 성이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과거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비록 이 땅 낮은 곳에 살지만 부활을 통하여 신앙의 인공위성을 우리의 영의 하늘에 띄워야 하겠습니다. 거기로부터 오는 정보를 분석하여 우리의 잘못된 삶의 방향을 수정하 고 올바른 방향을 찾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 편한 길로 몰려가는 것은 그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는 그 앞길의 정보를 알 수 있는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로 당장 넓고 편한 길을 택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 넓은 길 끝에 절벽 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안다면 사람들이 그 길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애써 부활의 높은 곳으로 오르려 하는 까닭은 바로 하나님이 이루시는 그 역사의 길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야 미리 우리의 길을 내다보면서 갈 길을 택하고 지혜로 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부활의 높은 곳에 오르려 하는 것은, 하늘의 능력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눅 24:49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 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행 1:8
'능력'이나 '권능'이 다같이 '듀나미스'에서 번역된 말입니다. '힘', '이적적인 능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영어의 dynamics가 여기에서 나온 말로서 원동력, 활력, 역동성을 뜻합니다.
가끔 TV를 통해 춤추며 노래하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게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격렬하게 율동을 하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그 젊은이들의 힘과 그 능력이 부럽습니다. 농구나 축구 선수들이 쉴 사이 없이 뛰면서 공을 놓은 것을 보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뛰는 젊은 선수들의 그 넘치는 힘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젊음의 힘은 30대가 넘어서면서 많이 줄어들게 되어 대체로 운동선수들은 은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그 힘과 역동성은 점차 사그라지는 것입니다.
여성의 경우 여성 호르몬이 마르기 시작하는 50대가 되면 진이 빠지고 활기를 잃게 되며, 아기를 낳을 수 없게 됩니다. 생명의 힘이 말라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아름답던 피부에 주름살이 생기고 여러 가지 병에 걸리게 되어 결국은 시든 꽃과 같이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성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아름다운 것처럼, 젊은 운동 선수들이 그 넘치는 힘으로 뛸 때 놀라운 기술과 아름다움을 들어내는 것처럼,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면 그 속에 간직된 새로운 생명의 힘이 우리를 아름답게 만 들며,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수 있게 만듭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기에 무서 운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결코 그 신앙을 굽히지 않으며, 불의와 부정, 거짓과 탐 욕에 대항하여 정의와 사랑으로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 생명의 능력 은 사도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였으며, 특별히 사도 바울은 "나에 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9)고 하면서 그는 온갖 고난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3차에 걸친 선교 여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복음 전파의 능력이야말로 부활의 생명이 간직한 놀라운 힘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얻기 위하여 부활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아직 우리가 담대하게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 능력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제 시대나 군사정권 시절에 저들의 불의와 억압에 맞서서 하나님의 의를 전하지 못한 것도 이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그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는 우리에게 이 부활 생명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에게 이 능력 주시기를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 생명을 얻게 된 여러분은 이제부터 그 부활 생명의 높은 정상에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며, 그가 들려주는 말씀을 들으며, 그가 보여주시는 구원의 역사를 보며, 거기 로부터 오는 하늘의 능력을 받아 이 땅에 널리 복음을 전하며 모든 어둠의 세력과 불의와 맞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였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낮은 곳에서 평범한 삶에 묻혀 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을 받으므로 아름다우면서도 활기에 넘친 삶,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삶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나라에는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일꾼을 삼으시려 하는데, 우리가 그 부름을 외면하고 나의 평안만은 구하는 안이한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제 부르심을 따라 나가서 그가 주시는 말씀과 능력을 받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가야 하겠습니다.
저는 안동교회 역사를 쓰면서, 교회가 마땅히 하여야 할 선교와 봉사의 기록들이 많이 있어서 그것을 위주로 역사를 써야 할텐데, 오히려 문제가 생겨서 그 문제 때문에 갈등하고 싸운 기록들로 역사를 채워가야 하는 것이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 닙니다. 이제 90주년을 맞은 안동교회가 앞으로의 역사는 하나님 나라를 힘있게 건 설하는 일들로 채워질 수 있기를 위해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제 부활 신앙을 따라 높은 영의 세계에 올라가 새로운 부활 생명을 받아서 새 역사를 창조해 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