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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창 33: 1-20.
화해’란 “과거의 적대감정과 상처를 제거하여 선하고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새롭고 창조적이고 건강한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화해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길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 지난 주간에 있었습니다. 민족의 단절과 반목의 관계를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가기 위해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화해사건들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오늘 본문의 야곱과 에서의 화해사건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형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요셉의 화해사건, 그리고 복음의 은혜로운 빛 가운데 이방인과 유대인이 화목하게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속의 화해사건은 새천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새롭게 조명해 줍니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족과 이웃, 심지어 과거의 상처와 화해하지 못하고 갈등과 반목을 경험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오늘 본문을 통해 화해를 위한 4가지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자기의 몸을 굽히는 것입니다(3절).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 형제였습니다. 장자가 에서였으나 태중에서 뿐만 아니라 태어날 때에도 야곱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올정도로 경쟁관계가 치열했습니다. 급기야 아버지 이삭의 축복권을 놓고 야곱이 형 에서를 속임으로 형제가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살기등등한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여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자녀들도 낳았으며 재산도 모았으나 그의 내면에는 과거의 상처와 형 에서와의 화해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야곱에게 형 에서와 만날 것을 말씀하시고 야곱은 라반의 집을 떠나 에서에게 나아갑니다.
본문은 야곱이 일곱번을 땅에 절하면서 형 에서에게 나아갔다고 말합니다(3절). 이처럼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몸을 굽혀야 합니다. 화해는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자신을 굽히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굽히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우리 인간과 화해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을 굽히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그 몸을 낮추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존중하시는 마음 때문에 화해의 사신이 되셔서 인간의 몸으로 우리에게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항에 직접 나와 김대통령을 영접하는 장면은 온 국민과 전세계에 큰 감명을 주었으며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였습니다. 일개 한 나라의 대표가 공항에 직접 나와 영접하는 것을 보며 감명을 받았다면 저 우주를 넘어 이 지상까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과소평가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과 인간관계에서 회복이 필요하십니까? 먼저 자존심을 굽히시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2. 상대를 품는 것입니다(4절).
자신을 굽혀 절을 하며 나아오는 야곱을 보고 에서도 달려왔습니다. 에서의 머리속에 지난 세월의 아픔과 원망, 증오의 기억들이 스쳐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핏줄의 정을 거스릴 수 없었는지 그도 야곱을 맞아서 끌어 안고 함께 울었습니다. 이 울음소리는 마음의 장벽이 무너지는 소리였습니다.
서울과 평양의 물리적인 거리는 너무나 가깝지만 분단55년의 마음의 장벽은 너무 높았습니다. 그러나 남북정상이 함께 만나 끌어안고 마음의 장벽을 허물 때 기자들은 “평양이 울고, 서울이 울고, 세계가 울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이 화해의 사신이 되기를 원한다면 조건없이 상대를 품어야 합니다. 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삼는 마음의 일체감이 있을 때 진정한 화해는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고 우리를 품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의 절망과 두려움을 아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하시며 조건없이 용서해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는 가족이나 형제들의 얼굴이 있다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받아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상대를 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 나의 소유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8-11절).
물질은 땀과 수고와 눈물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물질을 나누는 것은 곧 마음을 나누는 것의 외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형에 대한 화해의 표현으로 재산의 일부를 에서에게 바칩니다(11절). 에서는 야곱으로부터 받은 예물을 볼때마다 형으로서 동생에 대한 애틋한 혈육의 정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선물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만물을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화해의 의지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에 동독은 장벽너머로 쓰레기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서독은 오히려 식료품을 선물로 보내 주었습니다. 쓰레기를 받았더라도 오히려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고자 하는 마음이 화해와 통일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화해를 원하신다면 심정적인 화해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화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조건을 달지말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4. 화해의 마지막은 예배하는 것입니다(20절).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곧 야곱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20절).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광대하신 하나님께서 야곱 개인의 역사에도 개입하셔서 형 에서와 화해하는 모든 과정가운데 은혜를 베푸셨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야곱은 형과 화해하게 된 것을 감사하여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예배는 화해의 열매입니다.
이처럼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할 수 있었던 그 원동력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32장24-32절). 야곱은 그에게 아름다운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많은 재산이 있었으나 그것으로 자신의 과거와 화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여전히 도망자의 신세였으며 미래의 두려움에 쫓기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했습니다(32장26절). 사람이 아무리 소유가 많아지고 신분이 높아져서 사람들앞에 존경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용납을 경험하지 못하면 자의식의 문제는 해결받지 못합니다. 야곱은 기도의 씨름을 통해 마침내 ‘속이는 자’ 야곱에서 ‘참된 승리자’ 이스라엘로 새로운 자아정체감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제 야곱은 자신의 모든 삶을 은혜의 관점으로 바라봅니다.(33장5,10,11절)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화해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간관계, 사업, 자녀의 문제에 하나님의 은혜의 도장이 찍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질 때 우리는 참된 화해자와 승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야곱과 에서의 화해사건이 우리 삶에 체험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3장:
형 에서를 만남
바울
[1-4절]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야곱은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갔다. 아내들과 자식들을 세 무리로 나눈 것은 그가 아끼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 같다. 그는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형 에서에게 가까이 나갔다. 같은 나이의 쌍둥이인 야곱이 형 에서를 향해 몸을 입곱 번 땅에 굽힌 것은 그의 겸손함을 나타낸다. 야곱은 하란에서의 20년간의 혹독한 고난을 통해 확실히 겸손한 인격으로 변하였다.
에서는 달려와서 야곱을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었고 그들은 피차 울었다. 에서의 마음은 변화되었다. 동생에 대한 미움과 적개심이 사라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야곱의 기도의 응답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에서의 마음을 변화시키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야곱의 마음에서 두려움을 제거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
[5-7절]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에서는 눈을 들어 여자들과 그 자식들을 보고 야곱에게 너와 함께 한 이들이 누구냐고 물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라고 대답하였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자이다. 자녀는 하나님의 기업과 상급이다(시 127:3). 야곱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다. 또 그는 에서 앞에서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겸손히 불렀다. 본장에서 그는 자신을 두 번 종이라고 불렀다(5, 14절). 그 때 여종들이 그 자식들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들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였다. 그들은 야곱이 아끼는 순서대로 나아와 절하였다.
[8-11절]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에서는 또 그가 만난 모든 떼들, 즉 아홉 떼나 되는 짐승들이 무엇 때문인지 물었다. 야곱은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내 주'라는 말(아도니)이 본장에서 다섯 번 나온다(8, 13, 14, 14, 15절). 이것은 야곱의 겸비함과 동시에 형 에서에 대한 그의 뉘우침을 나타낼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한 것은 좋았고 또 콩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샀으니 축복받을 정당성도 있었지만,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복을 가로챈 것은 잘못이었다. 야곱은 과거의 자신의 이런 과오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면서 형을 '내 주'(나의 주)라고 불렀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낮춘다고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낮추는 자는 오히려 높아지며 큰 자가 된다. 겸손한 자가 큰 자이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0:26-27).
에서가 처음에 사양하였지만, 야곱은 자기가 형에게 은혜를 얻었다면 그의 예물을 받으라고 간청한다. 그는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야곱의 선물은 진심의 선물이었고 기쁨의 선물이었다. 에서는 야곱의 강권함으로 그 선물을 받았다.
[12-14절]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에서는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고 말한다. 인간은 연약하여 용서하면서도 약간의 감정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에서의 감정이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곱은 겸손히 이해를 구하며 사양한다.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야곱은 본문에서 에서를 '내 주'라고 세 번 불렀고 자신을 '그의 종'(원문)이라고 불렀다. 잠언 15:1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말한다.
[15-17절] 에서가 가로되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 야곱이 가로되 어찌하여 그리 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또 에서가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고 말하자, 야곱은 다시 "어찌하여 그리 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형 에서를 '내 주'라고 부르며 그의 은혜얻기를 구하였다. 어려움이 즉시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마침내 에서와의 갈등이 해소되고 야곱은 그 고민스러운 문제에서 승리하였다. 그 날 에서는 세일로 돌아갔고 야곱은 숙곳에서 자기를 위해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해 우릿간을 지었고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고 불렀다. '숙곳'(숙코스)은 '천막들'이라는 뜻이다. 거주할 천막 혹은 집을 세웠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심적, 환경적 안정을 찾았다는 뜻이다.
[18-20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100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야곱은 밧단아람에서부터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쳤다. '평안히'라는 원어(솰렘)는 고대 헬라어 70인역과 라틴어 벌케이트역이나 옛날 영어성경(KJV)은 '살렘'이라고 번역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본문을 "가나안 땅에 있는 살렘 즉 세겜성에 이르러"라고 번역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 살렘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온 셈이다(창 14:18; 33:18). 근래의 영어번역들은 '평안히'라고 번역하지만(NASB, NIV), '살렘'이라는 고대 번역이 옳을지도 모른다.
야곱은 세겜 성 앞에 장막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돈을 주고 샀다. '은'이라는 원어(케시타)는 옛시대의 무게 단위인데, 은인지 금인지 불분명하다고 한다(BDB, KB). 거기에서 야곱은 단을 쌓았다. '단'(미즈베아크)은 '짐승 제사를 드린 단'을 암시한다. 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속죄와 헌신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야곱의 경건을 나타낸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단을 쌓았고(창 8:20), 아브라함은 여러 번 단을 쌓았으며(창 12:7, 8; 13:18; 22:9), 이삭도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창 26:25). 이제 야곱도 하나님께 단을 쌓은 것이다.
창세기 33장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야곱같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도 응답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두려움과 심적 고통으로 부르짖었던 야곱에게 문제의 해결과 평안을 주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께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우리의 처한 환경을 주장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살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므로 항상 기도 응답과 그의 도우심을 체험하자.
둘째로, 우리는 겸비한 자가 되자. 야곱은 고난을 통해 겸비한 인격으로 변화되었다. 고난은 겸손 훈련을 위해 유익하다. 겸손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필수적인 덕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사도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하였다(빌 2:3).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단을 쌓는 생활을 힘쓰자. 하나님께 단을 쌓는 자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며, 육신 생활에서도 성공할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께 단을 쌓는 것인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과 기도를 올리며 그가 주신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기를 결심하는 것이 하나님께 단을 쌓는 것이다.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