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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길
성경본문: 잠언 1: 7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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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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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까? 칸트가 이 질문을 던졌고 소크라테스가 이 질문을 말했다. 아마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은 마음의 옷깃을 가다듬고 진지한 마음으로 자기 인생에 대하여 이러한 질문을 던질 것이고 경험하는 사실이다. 사람에 따라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되는 계기와 형편은 각각 다르다. 사랑하는 자식의 애통한 죽음을 당해서 또는 자기 인생의 온 정렬을 기울이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또는 애인이나 친한 친구에게 배신 행위를 당한 경우 또는 불의의 사고로 생명이 사생의 고비를 당해 방황하는 경험을 하였을 때 그렇지 않으면 인간에 대한 깊은 신앙의 마음에 골몰할 때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는 모두 살아야 한다. 이것은 생의 기본 명제이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갈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데 대해서 사색을 가지는 존재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삶에 관해서 진지한 사색을 한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사색은 사람의 특권이다. 사람이란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자요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생각하기 전에 먼저 느끼고 감각한다. 현대인은 이미 생각하는 갈대가 아니고 느끼는 갈대이다. 지식은 많아도 지혜는 적다. 공연히 바쁘기만 하고 조용한 시간을 갖지 못한다. 어지러운 경험의 혼돈은 있어도 정연(整然)한 생활의 양식은 부족하다. 현대인은 생각하는 갈대가 아니고 생각을 안하는 갈대이다. 또한 뒤이어 생각 못하는 갈대로 전락하고 있다.
현대인은 진지하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생명의 존중을 강조한 슈바이처는 현대인의 병리현상을 예리하게 진단했다. "현대인은 무(無) 사상(思想)이다. 현대인은 자기의 사상을 갖지 않는다. 그는 진리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리고 진리를 추구하는 말도 상실하고 그저 무사상인채 취생몽사(醉生夢死)하여 여러 가지 의견 또는 논리를 이리저리 부동(浮動)하고 있다"고 말했다.
슈바이처의 이 말은 분명히 통찰과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현대인의 머리는 남의 사상으로 가득차 있고 그의 지식은 잡다하여 통일과 체계가 없다. 그러기에 자기정체(自己正體)를 모른다. 지식의 과잉과 지혜의 빈곤, 이것이 현대인의 불행한 정신적 형편이다. 지식과 지혜는 엄연히 다르다. 지식은 지혜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이 많다고 곧 지혜가 많은 것은 아니다.
지혜란 인간의 지식과 감정의 의지가 하나의 세상 아름다운 질서 속에 통일되고 종합되고 조화된 상태이다. 지혜는 인생과 사물에 관한 올바른 판단력이다. 인간 생활에 진리와 질서를 주는 것이 지혜이다. 우리는 깊은 의미에서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인생에 대해서 옳게 생각할 줄 알고 옳게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 인생을 옳게 살아야 한다.
인간은 일생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서 태어나고 한 번은 살기 위해서 태어난다. 이것은 깊은 자아의 자각의 탄생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생각하고 사람답게 살기 위한 탄생이다. 인간은 인간의 높은 존엄과 품위를 간직하고 자아실현을 위하여 삶의 길을 가야 한다. 이를 위해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한다. 삶은 사는 길이다. 생명되신 '예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서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고 하신 말씀을 짙어가는 가을 단풍과 함께 삶의 열매 맺어가자.
모파상의 단편 소설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젊은 여인이 성대한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신혼 때 마련했던 야회복은 있었으나 목걸이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친구에서 멋진 진주 목걸이를 빌려왔다. 젊은 여인에게 아주 잘 어울리고 돋보이는 장식품이었다. 이 젊은 부부는 그 날밤 파티의 황홀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부부는 말할 수 없는 흥분과 행복감에 젖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귀중한 목걸이가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란 부부는 아무리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젊은 부부는 진주 목걸이를 변상하기 위하여 10년 남짓 온갖 고생을 겪어야 했다. 허영심에 찬 여인이 하룻밤의 만족을 위해 참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빌려왔던 그 진주 목걸이가 모조품이었다는 것이다. 이 가짜 목걸이를 위해 10년 세월을 보냈다는 일이다. 이 세상에는 오늘날도 진짜가 아닌 거짓 것에 속아 허망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 세상의 한 삶을 살아가는데, 덧없이 살아가기도 하고 나름대로 한 목표를 세워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대개는 물질을 추구하며 생활의 안녕을 위한 삶을 살아간다. 이를 위해 세상에 많은 이들은 돈벌이를 삶의 목표로 정하고 살아간다. 왜냐하면 돈만 있으면 안되는 일이 없고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황금만능주의의 시대요 배금주의 상념에 젖어 돈이면 최고이고, 그 최고를 위해 정신 없이 살다보면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세상의 끝을 보게된다.
사실 돈이 세계 정치, 경제를 주름잡고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사회상을 만들고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행복과 불행을 맛보며 산다. 결국 돈 자체가 우리 삶의 목표가 될 때 인간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같은 수전노로 전락할 뿐이다. 인간이 소유하는 생업과 재물은 모두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돈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잘 쓰느냐 못쓰느냐에 문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항상 가진 자는 갖지 못한 자에게 관심과 책임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삶의 방법으로 삼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재물과 함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또한 권력이다. 권력을 행사 할 수 있는 권좌는 세상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나폴레옹은 권력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권력은 나의 애인이다. 음악가가 자기의 바이올린을 사랑하듯이 나는 권력을 사랑한다' 이처럼 권력을 탐내고 사랑하는 자들이 많아지면서 세계는 전제군주와 독재자들의 지배 집단으로 화하였다.
공산주의 국가들을 비롯하여 아프리카 신생국들에 이르기까지 또 동남아나 중남미 일대에 독재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성서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권력에 대한 바른 견해를 제시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도록 허락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외에 어떠한 권력도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 성서의 기본적 사상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절대권력의 자리에 올라앉으려는 자들을 하나님은 예외 없이 끌어내려 파멸의 구덩이로 내던져 버리신다. 권력은 우리가 추구한 삶의 최종적 목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삶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돈과 권력이 인간의 삶의 길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할 삶의 길은 무엇인가? 예수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고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께 나가는 여기에 인간의 삶의 길이 있다. 이것이 본래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부터 인간은 그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고 그의 행하신 일을 감사 찬양하는 일이 우리 삶의 길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서는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것이다'(고전10:31).
'또한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롬14:8).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인간 본연의 삶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감으로 불안과 공포가 조성되고 전쟁과 테러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자기만을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삶은 파괴적 종말을 앞당길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한 삶은 차원 높은 영적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언제나 감사와 기쁨이 넘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인간은 어떤가? 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위선과 거만으로서 하나님을 떠나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교만 하는가 하면 때로는 이 세상의 지배와 부귀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죄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된다. 예수는 이와 같은 인간의 현실을 들추어내면서 스스로 죄인을 용서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인간을 깊이 사랑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곁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이끌어 주신다. 예수는 자신의 삶과 존재 방식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형과 새로운 삶의 길을 보여준다.
인간의 삶은 정성스러운 창조의 일터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생명을 조각하는 삶의 예술가이다.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이 주신 천분(天分)과 개성을 가지고 성심껏 자기 인생을 조각하면서 살면 된다. 사람의 마음은 기름진 옥토와 같다. 좋은 씨를 뿌리면 꽃은 좋은 꽃이 자라고, 나쁜 씨를 뿌리면 나쁜 것이 자란다. 아무것도 안뿌리고 내버려두면 잡초만 우거진다. 좋은 열매를 거두려거든 좋은 씨를 뿌려야 하고 많이 거두려하거든 많이 뿌려야 한다. 아무것도 심지 않았는데 나는 법이 없다. 사람은 저마다 마음 밭을 개발하는 정원(丁園)이다. 정성스럽게 가꾸어서 풍성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드느냐 잡초 투성이의 잡다한 밭을 만드느냐는 그 정원의 정성과 노력에 달렸다.
괴테는 노래했다. "네 발 밑을 파라 거기에 맑은 샘물이 솟으리라"고 했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 발 밑에는 언제나 맑은 샘물이 쉼없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맑은 샘을 찾아야 한다.
예수는 사랑이란 것으로 모든 것을 상호관계로 방향을 잡아 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실현케 하는 힘이요 중심이 됨을 삶으로 몸소 보여 주었다. 성서는 십자가상의 죽음을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한 것으로서 그 자신이 중보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이해하여 예수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신앙이 성립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분열을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극복함으로서 예수로 하여금 그 사랑을 밝히 보여 주었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것"(요한4:12)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인간관은 전통적인 구약성서의 인간관을 간직하고 창조의 질서에 따라 사는 인간과 현실의 질서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인간을 구별하면서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연민의 정으로서 새로운 인간의 존재 방식을 가르쳤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다. 창세기의 기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으심을 받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하였고 따라서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을 가르쳤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과 사귐을 갖고 그 품안에서 모든 자유를 부여했고, 만물과 함께 살도록 위임하셨다. 그 때문에 예수도 또한 인간이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즉 삶이다"라고 삶의 길을 말씀하신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