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의(義)를 밝게 알고, 소인은 이익(利益)을 밝게 아느니라.”고 하셨다.
喩, 猶曉也. 義者, 天理之所宜. 利者, 人情之所欲. 喩란 안다는 것과 같다. 義라는 것은 天理의 마땅한 바다. 利라는 것은 인정상 하고 싶어 하는 바다.
○ 程子曰: “君子之於義, 猶小人之於利也. 唯其深喩, 是以篤好.” 정자가 말하길, “군자가 의로움에 있어서는 소인이 이끗에 있어서와 같다. 오직 그가 깊이 알기에, 이런 까닭으로 돈독하게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2 | 楊氏曰: “君子有舍生而取義者, 以利言之, 則人之所欲無甚於生, 所惡無甚於死, 孰肯舍生而取義哉? 其所喩者義而已, 不知利之爲利故也, 小人反是.” 양씨가 말하길, “군자는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끗으로써 말한다면, 곧 사람이 하고 싶은 것 중에 삶보다 더 심한 것이 없고, 싫어하는 것 중에 죽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누가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하려 하겠는가? 그가 아는 것은 의로움일 뿐이고, 이끗이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소인은 이를 거꾸로 한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君子見得這事合當如此 那事合當如彼 但裁處其宜而爲之 주자가 말하길, “군자는 이 일이 이와 같이 함이 합당하고, 저 일은 저와 같이 함이 합당함을 알아보고서, 다만 그 마땅한 바를 재단하여 결정하여,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君子之於義見得委曲透徹 故自樂爲 小人之於利 亦是於曲折纖悉間都理會得 故深好之 군자는 義에 있어서 자세하고 투철하게 알아보기 때문에, 스스로 즐겨 행하는 것이다. 소인은 利에 있어서 역시 미세한 곡절과 조그만 것 사이에서도 전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깊이 좋아하는 것이다.
喩義喩利 不是氣稟如此 君子存得此心 自然喩義 小人陷溺此心 故所知者 只是利 若說氣稟定了 則君子小人皆由生定 學力不可變 義를 잘 알고 利를 잘 아는 것은 품부받은 氣가 이와 같은 것이 아니다. 군자는 이 마음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히 義를 잘 아는 것이고, 소인은 이 마음을 물에 빠뜨려 잃기 때문에, 아는 것이 그저 利일 뿐이다. 만약 품부받은 기가 정해진 것이라고 말한다면, 군자와 소인은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니, 배우고 힘쓰는 것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南軒張氏曰 學者莫先於義利之辨 蓋義者無所爲而然也 凡有所爲而然 皆人欲之私而非天理之存 此義利之分也 朱子謂義者無所爲而然 此言可謂擴前聖之所未發 남헌장씨가 말하길, “배우는 자는 義와 利를 분별함보다 우선할 것이 없다. 대체로 義라는 것은 위하는 바가 없어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무릇 위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모두 인욕의 사사로움일 뿐이지, 天理가 보존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義와 利의 구분인 것이다. 주자가 義라는 것은 위하는 바가 없어도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前聖께서 미처 드러내지 못하신 바를 擴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象山陸氏曰 此章以義利判君子小人 學者於此當辨其志 人之所喩 由其所習 所習由其所志 志乎義 則所習者 必在於義 斯喩於義矣 志乎利 則所習者 必在於利 斯喩於利矣 상산육씨가 말하길, “이 장에서는 義와 利로써 군자와 소인을 판별하였다. 배우는 자는 여기에서 마땅히 그 뜻을 분별해야만 한다. 사람이 잘 아는 바는 그가 습관이 든 바를 통해서이고, 습관이 든 바는 그가 뜻한 바를 말미암는 것이니, 義에 뜻을 둔다면, 습관이 든 바가 반드시 義에 있게 될 것이다. 이렇다면 義에 대하여 잘 알게 되는 것이다. 利에 뜻을 둔다면, 습관이 든 바가 반드시 利에 있게 될 것이니, 이렇다면 利에 대하여 잘 알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此指君子小人之已成者 而言所以於義與利之精微曲折各能深曉 程子是說喩以後事 象山是說喩以前事 쌍봉요씨가 말하길, “여기서는 군자와 소인 중에서 이미 완성된 자를 가리켜서, 義와 利의 정미함과 미세한 곡절에 대하여 각자 능히 깊이 깨우친 까닭을 말한 것이다. 정자는 잘 알게 된 이후의 일을 말한 것이고, 육상산은 잘 알기 이전의 일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王氏曰 篤好在喩後 志習在喩先 왕씨가 말하길, “돈독히 좋아하는 것은 잘 알게 된 이후에 있고, 뜻을 두어 익히는 것은 잘 알기 전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陳氏曰 天理所宜者 只是當然而然 無所爲而然也 人情所欲者 只是不當然而然 有所爲而然也 진씨가 말하길, “天理에 합당한 것이란 그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위하는 바가 없어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인정상 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마땅히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함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고, 위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君子喩義未嘗求利 然義之所安 卽利之所在 義之和之利 自在其中 小人喩利 雖專求利 然嚮利必背義 不義之利 利愈得而害愈甚矣 要之 義利之界限 學者先明辨其幾微 次必剛決其取舍 至深喩其趣味 則君子小人成天淵判矣 신안진씨가 말하길, “군자는 義를 잘 알아서 일찍이 利를 추구한 적이 없지만, 그러나 義에 비추어 편안히 여기는 곳이라면, 곧 利가 있는 곳이니, 義의 조화로움이라는 利가 저절로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소인은 利를 잘 알기에, 비록 오로지 利를 추구할지라도, 접때의 利가 반드시 義에 위배될 것이니, 불의한 利는 利를 얻으면 얻을수록 더욱 害가 심해질 것이다. 요컨대, 義와 利의 한계에 대하여, 배우는 자는 먼저 분명하게 그 기미를 분별해야 하고, 다음으로 반드시 그 취사선택을 굳세게 결단해야 한다. 그 취향과 의미를 지극히 깊게 알게 된다면, 군자와 소인은 하늘과 연못을 판가름하는 것처럼 명확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