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25.부활 제6주간 수요일>
<요한16,12-15>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진리를 알려주시는 ’진리의 영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16,13 참조) 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란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이나 평가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외부 세계에 제일 먼저 오감을 통한 감각체계가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수많은 자극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식 차원에서 지식이 있어야 수용하게 됩니다.
그 지식을 통해 수용된 내용중에 자신의 가치관에 맞아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현실 사진이 형성되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 안에 이상적인 사진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사진과 이상사진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 그 차이를 줄이려는 시도를 행동으로 하게 됩니다.
위와 같이 감각체계와 지식체계 그리고 가치체계는 모두 다 혼soul의 차원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의 판단 평가 없이 있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고 하십니다.
영의 차원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혼soul(정신)의 차원을 무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음적으로 깨달음, 즉 영spirit(마음)의 차원으로 가야합니다.
그럴려면 말씀을 혼의 차원(의식 차원)에서 연구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합니다.
혼soul(정신)의 차원의 연구는 우리의 호기심을 채워주기도 하지만 이해의 차원입니다. 이해의 차원으로 끝나지 말고 삶으로 옮기는 실천으로 가야합니다.
우리가 판단 평가하는 차원은 혼soul(정신)의 차원입니다.
혼soul(정신)의 차원은 세 개의 세계, 즉 원초적인 본능(Id, 원초아), 자아(ego, 에고), 사회적 자아(Superego, 초자아)의 갈등 세계에 있습니다.
판단 평가하며 해석하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하고 물으신 뒤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십시다.
그러자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묵상 단계가 아닌 관상의 단계에서 하늘의 지혜가 열리기 시작했다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16,17)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이어서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16,18) 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회는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적인 어떤 판단 평가나 해석을 가하면 이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16,19) 라고 말씀하시며 죄를 사해주는 권한을 성사안에서 교회에 주십니다.
구약은 성부의 시대,
신약은 성자의 시대라고 한다면,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며 교회의 시대입니다.
교회는 성사 안에서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18,2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지요.
교회인 우리가 말씀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1.주석을 읽습니다.(천주교 출판서적)
2.’렉시오 디비나’ 방식으로 말씀을 매일 세 번 외칩니다.
3.하루종일 그 말씀을 되뇌이며 쪽지 수행을 합니다(말씀을 쪽지에 써서 반복해서 암송합니다)
예)”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이 말씀을 살려고 노력하면,
어느 순간 진리를 향해 죽으려는 마음이 올라오게 됩니다.
4.순간순간을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예)예수성심께 순간순간 봉헌하면,
“1코린5,16-18”의 말씀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옵니다.
“16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8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코린5,16-18)
<John 16,12-15>Jesus said to his disciples:12 “I have much more to tell you, but you cannot bear it now.13 But when he comes, the Spirit of truth,he will guide you to all truth.He will not speak on his own,but he will speak what he hears,and will declare to you the things that are coming.14 He will glorify me,because he will take from what is mine and declare it to you.15 Everything that the Father has is mine;for this reason I told you that he will take from what is mineand declare it to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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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우리가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는 음식을 삼키고 눈을 깜빡이고 대소변을 보고 젖을 빠는 등의 필수적인 생리적 활동을 제외한 행동 체계는 거의 비어있는 백지 상태와 같다.
태어날 때부터 걷기, 수영 등 비교적 잘 조직화된 행동 체계를 가지고 태어나는 하등 동물에 비해 인간은 아무것도 갖지 않은 채 태어난다. 그러나 하등 동물과는 대조적으로 출생 직후부터 복잡한 행동을 배우는 인간은 일생동안 계속해서 거의 무한할 정도록 복잡한 행동을 배운다. 이것들은 행동의 저장소에 조직화되어 필요한 때에 쉽게 꺼내 쓸 수 있게 되어있는데, 이때 우리는 우리의 욕구와 바람을 가장 잘 충족시킬 것이라고 믿는 행동을 선택하게 된다. 2살 된 아이가 언제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행동 체계가 얼마나 큰 조직을 갖게 되는지 생각만 해도 저절로 고마운 마음이 들 것이다.
(당신의 삶은 누가 통제하는가, William Glasser 지음, 김인자 옮김, 생활심리시리즈4, 한국심리상담연구소, 2016, p.85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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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제2부 주님의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Y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403)
514 모든 기도 가운데에서 ‘주님의 기도’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나요?
‘주님의 기도’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말한 대로 “가장 완벽한 기도”며, 테르툴리아노 교부가 말한 것처럼 “복음 전체의 요약”입니다.[2761-2772, 2774, 2776]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스승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기도합시다. 우리가 그분의 기도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기도를 하느님의 귀에 울리게 한다면, 그것은 친밀하고 진심 어린 기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부께서 당신 아드님의 말씀을 다시 알아보시기를 빕니다……우리가 하느님의 눈길 앞에 서 있음을 생각합시다.(치프리아노 성인)
‘주님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 이상의 것이며,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직접 이르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례 때 새 신자에게 전수했던 교회의 가장 오래된 이 기도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하루에 세 번 바쳤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 소리 내어 기도하고 그 내용을 마음으로 청하며 우리 삶에 실현(Y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405)
하려는 노력을 하루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Y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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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편 그리스도인의 기도
제2부
주님의 기도
“우리 아버지!”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75)/
제1절 “복음 전체의 요약”
->2761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테르툴리아누스, ‘기도론’, 1, 6: CCL 1, 258(PL 1, 1255) “주님께서는 이 기도문을 전해 주신 다음 이렇게 덧붙이셨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16,24). 그러므로 저마다 자기 자신의 사정에 따라서 서로 다른 청을 하늘에 계신 분께 드릴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청원의 기본이 되는 주님의 기도로 늘 시작해야 한다.”(테르툴리아누스, ‘기도론’, 10: CCL 1, 263(PL 1, 1268-1269))
I.성서의 핵심
->2762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시편이 왜 그리스도인 기도의 주된 양식[主食]이며, 어떻게 주님의 기도의 청원 안으로 합류하는지를 보여 주고 나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성서에 실려 있는 모든 청원을 살펴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그 안에서 주님의 기도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나 연유하지 않은 어떤 것을 발견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서간집’, 130, 12, 22: CSEL 44, 66(PL 33, 502))
->2763 모든 구약성서(율법서와 예언서와 시편)는 그리스도 안(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78)/
에서 성취된다(루카24,44 참조). 복음은 이러한 ‘기쁜 소식’ 이다. 이 기쁜 소식의 첫 선포는 마태오 성인이 산상설교로 요약하였다(마태5-7장 참조).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주님의 기도)가 이 선포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기도의 청원 하나하나가 명확해지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 준다(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2-2, q. 83, a. 9, c: Ed. Leon. 9, 201).
->2764 산상설교는 삶에 대한 가르침이며, 주님의 기도는 청원이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 이 두 가지 안에서 주님의 성령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곧 우리 삶을 활기차게 하는 우리의 내적지향을 새롭게 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써 새 삶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기도로써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청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분 안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
II.주님의 기도
->2765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ca 곧 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은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 예수님에게서 우리에게 전해진 이 기도는 참으로 유일한 것으로서 ‘주님의’ 기도이다. 한편, 외아들께서 이 기도의 말씀을 통해, 성부께서(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79)/
당신에게 주신 말씀을 몸소 우리에게 전해 주신다(요한17,7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 기도의 스승이시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되신 말씀으로서, 인간의 마음으로 당신의 인간 형제 자매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그것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기도의 모범이시다.
->276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는 기도문을(마태6,7; 1열왕 18,26-29 참조) 우리에게 남겨 주시지는 않았다. 모든 소리 기도의 경우가 그렇듯이,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성부께 기도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녀다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말씀만이 아니라 동시에 성령도 주시는데, 성령을 통해서 이 말씀들은 우리 안에서 “영과 생명”(요한6,63)이 된다. 더욱이 자녀다운 기도를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실제로 자녀다운 기도를 하고 있다는 증거로서, 성부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다”(갈라4,6).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 우리의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 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로마8,27).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이 기도는 성자와 성령의 신비로운 사명에 직접 연결된다.
III.교회의 기도
->2767 시초부터 교회는, 주님의 말씀과 분리될 수 없고 또한 신자들의 마음 안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과 떨어질 수(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80)/
없는 이 선물을 받아들이고 생활화하였다. 최초의 공동체들은, 유다인들의 신심으로 바쳐 왔던 ‘열여덟 가지 찬미’ 대신에 주님의 기도를 “하루에 세 번”(‘디다케’, 8, 3: SC 248, 174(Funk, Patres apostolici 1, 20)) 바쳤다.
->2768 사도적 전승에 따라, 주님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전례기도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형제를 위해 공동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교회 전체를 위해 오직 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도록,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론’, 19, 4: PG 57, 278).
모든 전례 전승에서 주님의 기도는, 성무일도의 주요 시간경의 기본 요소가 된다. 특히 이 기도의 교회적 성격이 세 가지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2769 입교 성사 때 하는 ‘주님의 기도 수여’는 하느님의 생명을 얻는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바로 같은 ‘하느님의 말씀’으로써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새로 난”(1베드1,23)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언제나 귀담아들어 주시는 바로 그 ‘말씀’으로서 아버지께 기도드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들이 이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유로 받은 인호가 그들의 마음, 귀, 입술, 그리고 자녀다운 그들의 존재 전체에 지워지지 않도록 찍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기도에 대한 교부들의 주석은 대부분 예비신자들과 새로 입교한 교우들을 위한 것이었다. 교회가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에는, 언제나 “갓 태어난” 백성이 기도드리는 것이며, 자비를 받는 것이다(1베드2,1-10 참조)(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81)/
->2770 성찬 전례에서, 주님의 기도는 모든 교회가 드리는 기도가 되어, 그 완전한 의미와 효력을 드러낸다. 감사기도(Anaphra)와 영성체 사이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한편으로는 성령 청원 기도(Epiclesis)에 담겨 있는 청원과 전구를 요약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영성체로 미리 맛보게 될 천국 잔칫집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2771 성찬례에서 주님의 기도는 또한 이 기도에 담겨진 청원의 종말론적 특성을 나타낸다. 이 기도는 ‘마지막 때’, 곧 성령 강림으로 시작되었고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구원의 때에 바치는 기도이다.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청원들은 구약의 기도들과는 달리,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단 한 번 결정적으로 실현된 구원의 신비에 근거를 둔 것이다.
->2772 이러한 흔들리지 않는 신앙에서 일곱 가지의 청원 하나 하나에 생기를 불어넣는 희망이 솟아난다. 이 청원들은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 아직은 분명하지 않으므로”(1요한3,2)(콜로3,4 참조) 인내와 기다림의 때인 현세의 탄식을 표현하고 있다. 성찬례와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1코린11,26) 주님의 재림을 열렬히 갈망하고 있다.
간추림
->2774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며”(테르툴리아누스, ‘기도론’, 1, 6: CCL 1, 258(PL 1, 1255))(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82)/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2-2, q. 83, a. 9, c: Ed. Leon. 9, 201). 주님의 기도는 성서의 핵심이다.
->2776 주님의 기도는 교회의 가장 뛰어난 기도이다. 이 기도는 성무일도의 주요 시간경들과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인 세례, 견진, 성체성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다. 성찬례에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주님께서 다시 오시리라는”(1코린11,26) 희망이 표명되어서, 이 기도에 담긴 청원들의 종말론적인 특성이 드러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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