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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와 아담 샬의 만남...
소현세자가 만남 사람은
당시 북경에 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었다.
아담 샬은 1628년 중국에
서른두번째로 파견된 예수회 신부로서 북경에와 해박한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명나라 신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북경 동안문내에 거주하면서
역서와 대포를 제작하는 일을 맡았다.
청의 세조도 북경을 점령한 후
그의 과학 지식을 높이 사 지금의 천문대장격인 흠천감정을 삼고
대청시헌력을 짓게 하였다.
아담 샬은 북경 남문인 선무문내에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세운 남천주당에 자주 머물렀다.
소현세자는 동안문내의 그의 거주처와 남천주당을 자주 찾아
아담샬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세자의 북경 숙소는 동화문 안의 문연각이었으므로 아담 샬의 숙소와 가까웠다.
두 사람의 친교를 당시 남천주당의 신부였던 황비묵은
그의 [정교봉포]란 책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순치원년(1644년)에 조선 국왕 인조의 왕세자는
북경에 볼모로 와서 아담 샬 신부의 명성을 듣고,
때때로 남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에 대해서 살펴 물었다.
아담 샬 신부도 자주 왕세자 관사를 찾아가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깊이 사귀었다. 아담 샬 신부는 거듭 천주교가 정도임을 말하고,
왕세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여 자세히 물었다.
왕세자가 귀국하자 아담 샬 신부는 그가 지은 천문, 산학,
성교정도의 서적 여러 가지와 여지구(지구의)와 천주상을 보냈다."
선진적인 서양 문물을 선물로 받은 소현세자는 곧 아담 샬에게 편지를
보내 이를 감사하며 이렇게 화답했다.
"귀하가 주신 여지구와 과학에 대한 서적은 정말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 중 몇 권의 책을 보았는데 그 속에서 덕행을 실천하는 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했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널리 읽히고자 합니다.
이것들은 조선인이 서구 과학을 습득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나 우리들이
이국땅에서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하여왔으니 하늘이 우리를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교류한 때가 1644년이란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가 개항한 것은 이보다 232년 후인 고종 13년이던 1876년이었다.
일본이 미국의 페리 제독에게 눌려 개항한 것은 이보다 211년 후인 1854년이었다.
소현세자의 말처럼 "하늘이 우리를 이끌어"일본보다 211년
이나 먼저 서구 문물을 섭취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아담 샬이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자,
소현세자는 신부를 대동하고 귀국하겠다고 말해
아담 샬을 놀라게 했을정도로 의식이 트인 소현세자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도 신부가 부족한형편이었기 때문에
아담 샬은 신부 대신에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들을 동반하고 귀국하기를
요청했다. 이방송, 장삼외, 유중림,곡풍등 등 중국인 환관들과 궁녀들이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볼모에서 풀려나는 소현세자...
소현세자는 북경에 머무른 지 약 두 달 뒤인 1644년 11월 26일 볼모에
서 풀려나 북경을 떠나 이듬해 2월 18일 서울에 도착했다.
8년 동안을 외국에서 보낸 후로, 한창 연부역강한 34세의 나이였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때인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를 치욕의 볼모로 보내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같이 잡혀갔던 동생 봉림대군이 이 기간을 분노와 증오,
그리고 아집만을 가슴에 쌓으며 보냈다면,
그는 이 치욕의 기간을 서구 문물과 세계정세를 호흡하여 받아들여 체화시켰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조선이 우물안 개구리였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또한 성리학은 절대 진리가 아니며
이 세상의 수많은 사상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고 이미 낡은 사상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귀국하면 볼모 기간중에 습득한 서구 문물을 더욱 발달시켜
조선을 강대국으로 만들 결심을 새롭게 하였다.
그것은 부인인 세자빈 강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귀국 후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의 운명은 가혹한 것이었다.
무능한 군주 인조, 소현세자 제거작전...
소현세자가 돌아오던 날 한양 시민들은 인산인해로 그를 맞이하였다.
어떤 백성은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스러워했다.
실로 8년만의 인질 생활을 청산하는 그날은 소현세자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는 자리였다.
당시 소현세자는 34세, 인조의 나이 51세...
그는 저무는 태양아니 마찬가지였다.
그때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공신 중에
심기원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인조에 대한 세간 민심을 전해 듣고
이제 인조는 더 이상 군주로서 권위를 찾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백성들은 두 호란을 일으켜
나라를 위태롭게 한 인조에게 마음이 이미 멀어졌고 소현세자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임을 알게 되며 역모를 꾸미기로 마음먹었다.
1) 심기원의 역모사건...
심기원은 자기와 뜻이 같았던 권억과 함께 소현세자를 옹립하기 위해 일을 꾸미기로 맹세했다. 심기원은 우선 인조의 호위를 책임진 구인후
를 제거할 생각으로 구인후의 집에 자객을 보냈지만 그 일은 실패하고
심기원의 역모 사실은 구인후에 의해 밝혀졌다.
심기원이 보낸 자객은 황익과 이원로였는데
이들은 모두 심기원의 거사계획을 실토했다.
구인후는 김류를 찾았다.
김류는 인조반정의 중심인물이며 원로답게
이런 역모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소상하게 알려 주었다.
구인후는 우선 혐의자들을 모조리 체포하였다.
결국 심기원을 비롯한 그와 동조자들은 그날 밤 모두 체포되었고
그 역모사실이 밝혀지자 인조의 충격은 대단했다.
심기원이 인조반정 공신이었으며
그는 소현세자가 돌아오면 인조를 상왕으로 내몰고 소현세자를
추대하여 북벌을 추진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회은군 이덕인을 추대하려고 방향을 바꾸었다가 발각된 것이다.
심기원의 역모사건으로 2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소현세자에 대해인조가 갖고 있던 감정도 이 사건을 계기로
마음에 들지 않은 자식이 아닌 정적의 대상이 된 것이다.
소현세자, 귀국 두달만에 독살...
인조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귀국하자 그들을 냉대했다.
소현세자가 조정 신하들에게 변화한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가지고 온
많은 물품들도 인조에게는 의혹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인조는 환국한
소현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하례조차도 막았다.
부왕의 이러한 냉대에 소현세자는 상심했으나 상심해 있을 여유도 없
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이 지난 4월 말 경에 오한과 발열로
고통을 받고 앓아 누웠다.
어의 이형익은 학질이라 주장했다.
그런데 학질은 당시 조선에서는 기후가 온대성 기후였고,
8년간의 볼모생활에서도 건강한 소현세자가 조선에서 흔한 질병이며
어의들 사이에서도 손쉽게 치료할 수 있는 학질이라면
왜 소현세자가 3일만에 침을 맞고 죽었는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소현세자의 독살의 범인 4인방(인조,귀인 조씨,김자점,이형익)...
소현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다.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7개 구멍(양 눈, 코구멍, 양쪽 귀, 입)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
검은 천으로 얼굴 반쪽만을 덮었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검은빛이 심했다. 그래서 마치 약물 중독된 사람 같았으나
그 내용에 대해 아는 자가 없었다. [인조실록 22년 6월 27일]
조선의 역사에서 독살설이 제기되는 군주는 여럿 있다. 그런데 왕조실
록에는 그 어느 것도 명확하게 실상을 밝힌 글을 찾기 어렵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군주라도 선대의 사초를 들추는 일은 법으로 엄격하게 금
지되었고, 선왕에 대한 독살설은 바로 다음 군주의 정통성 문제이므로
과거 김종직의 사초 문제로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가 일어난 경험은 인
조실록에서 이런 내용이 얼마나 독살설을 비중 있게 다루었나를 알 수
있다. 그럼으로 사관의 입장에서 소현세자의 죽음은 누군가 소현세자를
독살했을 가능성을 흘린 것이다.
인열왕후의 서제가 본 소현세자의 주검 모습...
당시 종실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는 곧 인열왕후(소현세자의 어머니)의
서재였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염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모습을 보
고 사람들에게 말한 것을 실록에 옮겨 놓은 것이다. 그 모습이 사실이
라면 이것은 분명 독살에 대한 죽음이다. 인열왕후의 여동생이라면 소
현세자에게는 외숙뻘이 되는데 거짓말할 리가 없지 않은가...
두 가지 모습, (일곱 개의 구멍에 피가 선연하다),
그리고 (얼굴빛이 무척 검다),
이 모든 것은 독살 당한 사람에게나 나오는 흔적들인 것이다.
소현세자의 병을 치료한 어의 이형익...
소현세자가 병에 덜리자 어의 이형익이 열을 내리게 한다며 침을 놓았
는데 그 침을 맞고 소현세자는 3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러면 소현세자를 누가 죽였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인조에게는 인열 왕후를 비롯한 두 명의 아내에게서 8명의 자녀를 얻었다.
그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용성대군, 왕자 노였
다.
그리고 계비 장열왕후는 후사가 없이 젊은 나이에 중풍이 걸렸지만
효종의 극진한 효도를 받으며 살다 1688년 죽었으며
그녀 때문에 예송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문제의 귀인 조씨가 인조의 말년 등장하
여 정치를 어지럽히는 핵심 여인으로 등장하게 된다.
소현세자가 급서하자 그의 치료를 맡았던 어의 이형익은 소현세자의
정확한 사인을 가리지 않은 채 침을 아무데나 놓은 것이다. 결국 소현
세자는 어의 이형익의 침을 맡고 5월 초에 사망한다.
어의 이형익에게 쏟아지는 화살...
소현세자가 급서하자 그의 치료를 맡았던 의관 이형익에게 비난의 화살
이 쏟아졌다. 그가 증세를 가리지 않고 아무 곳이나 침을 놓고 약을 잘
못 썼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급서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형익은 불과
3개월 전, 즉 2월에 의관으로 특채된 인물로서 원래는 귀인 조씨의 사
갓집을 출입하던 의원이었다. 귀인 조씨와 세자빈 강씨의 관계가 원만
하지 못했던 것이 의혹을 증폭시켰다.
실제로 대사헌 김광현은 이형익이 침을 잘못 놓아 소현세자가 죽었다
고 주장하고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시종일관 이형익
을 옹호하며 대사헌 김광현이 세자빈 강씨의 조카사위라는 이유로 좌천
시켜 버린다.
엉뚱한 행동을 취하는 인조...
원래 왕이나 왕세자가 죽으면 시의들은 잘못이 있거나 없거나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 사형을 면치못했었다. 그러나 인조는 시종
일관 의관 이형익을 비호하였다. 또한 사흘 만에 입관을 단행하면서도
대소렴 때에는 빈궁과 당상관 등이 입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불
허하고 종친 네댓 명에게만 소렴을 맡겼다.
소현세자를 죽인 것이 인조라는 보다 확실한 증거는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세자를 책봉하는 과정을 보면 명확히 들어난다.
세자가 죽으면 세손이 적통으로 왕위를 잇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맏아들인 석철을 세손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으나
인조는 석철이 10살 뿐이 되지 않았다며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인조는 둘째 봉림대군을 우격다짐으로 세자로 책봉하고 말았다.
봉림대군 또한 세자책봉을 받을 수 없다고 거듭 사양하였으나
이미 인조의 의사는 정해진 것이었다. 물론 서인들은 세손이 후사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봉림대군의 사양 또한 의례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인조는 소현세자를 음지에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곳에 대충 묘를
해둠으로써 세자의 지위마져 박탈하였다. 사도세자의 묘가 릉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소현세자의 묘는 그야말로 일반 백성들 묘 보다도 못한
무덤에 지나지 않았다.
소현세자는 정비에게서 태어난 맏아들, 곧 적장자이므로 종법에 따라 삼년상을 치러야 했다. 홍문관에서도 당연히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조는 이마저 무시하고 종법에 어긋나게 일년 단상
으로 치렀다. 망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마저 거부한 엉뚱한 처사였다.
인조, 비난의 화살을 세자빈 강씨에게 돌리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이고 나서 세자 책봉 문제로 신하들과 대립하고
있는 사이 인조의 수라상에 있는 생선에 독약이 검출되는 사건이 발생
했다. 이 사건이 터지자 귀인 조씨는 인조에게 즉각 이 일은 세자빈 강
씨가 저지른 일이라고 선수를 친다.
드디어 인조가 세자빈 강씨를 죽일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그 때 궁중에서 저주 사건이 발각되어 두 명의 궁녀가 하옥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소현세자의 맏아들 석철의 보모 최상궁이었다.
인형과조수 따위를 마당이나 배개 속 등에 묻어두고 상대방에게 화가 내릴 것
을 비는 저주 사건은 성격상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이 사건은 인조의 묵인 속에 귀인 조씨가 일을 꾸민 일이었다.
고문에 의한 자백을 인정하는 관례 때문에 고문이 가혹했는데도 투옥된
두 명의 궁녀들은 모두 죽을 때까지 자백을 거부함으로써 세자빈 강씨
를 보호했다. 이것으로 일이 해결되지 않자 인조와 귀인 조씨는 또다시
일을 꾸민다. 결국 얼마 후에 또다시 저주 사건이 일어났고 세자빈 강
씨의 궁녀 두 명이 다시 조작된 자백을 거부하고 내옥에서 죽어갔다.
인조 23년(1646년) 정월에는 어선에 독을 넣은 일이 발각되어 그 혐의
가 세자빈 강씨에게 돌아가 강씨의 궁녀들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세자빈 강씨는 후원 별당에 감금되고 말았다.
그러나 두 차례의 저주 사건으로 강씨 주위의 감시의 눈이 번득이는 상황에서
세자빈 강씨가 독을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에도 강빈의 궁녀들은 쓰라린 고문에 죽어가면서도 조작된 각본을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연달아 사건을 일으키는 인조의 본심이 강씨를
죽이는 데 있음을 안 대신들은 그 불가함을 논박했다.
대신들의 반대를 논박하는 인조...
그러나 인조는 대신들의 반대를 연산군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두려
워하여 화를 면하려는 연극으로 보았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사를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갑자사화가 발생해 수많은 신하들이
사형당하고 이미 죽은 신하들은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그 가족들까지 연
좌되었던 것을 두려워해 강씨를 죽이는 일에 반대하는 척으로 보았던
것이다. 인조는 신하들이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가 소현세자의 세 아
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조는 강씨는 물론 그
녀의 세 아들인 자신의 친손자로 죽여버리려 하였다.
끝내 세자빈 강씨를 죽이는 인조...
인조 23년(1646년) 2월, 인조는 세자빈 강씨를 폐출하면서 사사하라는
명을 내린다. 세자빈 강씨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
었지만 인조는 끝내 과부가 된 며느리를 죽이고 그에 대한 직책들을 모
두 거두어벼렸다.
인조는 또한 강씨의 형제들에게도 죄를 물어 장살시 켜 버린 것이다.
드디어 인조는 세자빈 강씨를 사사시킨다.
그러나 인조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세자빈 강씨의 궁녀들을 마져 사사시켜 버린다.
인조는 국문을 계속 하면서 강씨가 살아 있을 때 죽음으로
그녀를 지켰던 궁녀들도 이제 세자빈 강씨가 죽고 나자 더 이상 버팅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하고 허위사실까지 실토하는 바람에
강씨의 친정어머니도 죽게 되었고 궁녀들마져 죽고 말았다.
이제는 친손자에게로 화살이 쏟아졌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들,
첫째 석철 10세, 둘째 석린 6세, 셋째 석견 2세를 외부 사람들과 격리
된 곳에 유배하도록 조치를 취했으며
결국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석철과 석린은 김자점이 의혹 속에 죽였으며 막내 석견
만 유일하게 살아남아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유지하고 있었다.
72년이 흐르고 나서야 복위되는 세자빈 강씨...
세자빈 강씨 사사 이후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에 대한 억울한 죽음이
라며 송시열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상소를 올렸다. 결국 숙종 44년(1718년)에 이르러서야 숙종의 배려로 세자빈은 민회빈(愍懷嬪)으로 복
위되며 민회묘로 격상시켜주었고, 영조26년(1750년)에 영회원으로 개칭
되었다. 윤 8월에 숙종은 세자빈의 총명함과 정덕을 칭송하고 손수 제문을 지어 빈의 원혼을 위로하는 한편, 묘소를 개봉하여 소현세자의 신주를 함께 묻었다.
소현세자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에 따로 있다.
149년 후에 진가가 들어나는 소현세자...
소현세자 사망후 150여년이 지난 정조때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된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주어 수원화성을 짓는 데 활용한다.(기기도설)
이런 잠재력들이 드디어 진가가 발휘된다. 현실로 나타났다.
수원화성의 건축물은 청나라의 건축양식과 도입시켰다. 성벽높이 6m나 되는 대건축물을 먼 곳에서 나르는 것 등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약용은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수원화성을 짓는 데 활용했던 것이다.
유형거 녹로 거중기 등 최신시설들 있었기에 수원화성은 3년만에 완공될 수 있었다.
만약, 소현세자가 인조에 이어 조선 제 17대왕이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물론 모두 다 바뀌지는 않았더라도 1870년대에 물밋듯이 밀려왔던 외세에 선진문물을 도입하려 했던 고종과 명성황후.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더라면
기존의 성리학에 청나라의 새로운 과학기술과 선진문물과
천주교의 새로운 것들을 도입시켰더라면
조선은 선진화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백성들에게도 많은 이득이 됐을 것이다.
근대화로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그 나라는 문명이나 발전이 더디게 된다. 오히려 작은 한 부분이긴 하지만 이때부터 기초를 닦아 천천히 받아들여 수용했더라면 그리고 사대부들이 명나라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백성과 나라를 위한다면 자신의 이속을 챙기기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먼 장래를 내다보며 현실적인 정치를 과감하게 수용했었더라면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아픈 역사를 안갖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설사 빼아겼더라도 힘없이 빼앗긴게 아니라 힘들게 빼앗기더라고 그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개혁군주로 앞장서며 진정으로 조선과 백성을 위해 새로운 정치를 펼쳐노겠노라 다짐했던 소현세자!
사도세자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희생양이 된 두 왕세자
이 두 세자가 존경스러운 난 왜 그런 것일까? 지금이나 그때나 자신의 권력을 위해 온갖 갖은 방법을 부리는 사대부와 국회의원들이 그저 한심스러울 뿐이다.
아쉬움...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은 그야말로 조선의 꿈과 좌절이었다. 소현세자가
순조롭게 즉위하여 청국에서 익힌 세계 정세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정사를 펼쳤다면 인조의 쿠테타로 야기된 그 모든 국난들이 긍정되고
오히려 출산을 위한 산고쯤으로 평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능한 군주 인조와 반정 정권은 시종일관 몽상과 증오로 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