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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암영(暗影)-1
북경에 있는 작은 객잔을 북해방의 세력이 통째로 점령해 사용하고 있었다. 객잔
의 주변에 은신한 북해방의 무사들은 철통같은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특히 등곡
이 누워 있는 방의 경계는 그 중에서도 엄중했다.
매복이 얼마나 훌륭한지 인기척조차 나지 않아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
지만 문을 열고 악기영이 걸어나오자 바로 한 사람이 나타나 앞을 막아섰다.
"어떤가?"
그는 악기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살아났다."
악기영의 대답은 차가웠다.
"수고했다. 기영. 그런데 등 사형은 언제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는 뜻밖에도 북해방의 평범한 무사가 아니라 악중악이었다.
"흥. 정신을 차리면 일어나겠지."
"그야 당연한 말이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정확한 시간이야."
"그걸 나한테 묻다니 정말 웃기는군. 악중악."
"다시 한번 묻지. 언제 일어날 수 있는가?"
악중악은 비웃음이 가득한 악기영의 응답을 악중악은 웃음으로 받아들이며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눈으로 노려보며 내뱉은 음성은 한기(寒氣)가 풍
겼다. 사람들을 싸늘하게 얼어붙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악기영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건 나한테 묻지 말고 저놈한테 물어봐라."
악기영은 등곡이 누워있는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차갑게 응대했다. 듣는 사람
의 입장에선 격분할 정도로...
"의식을 일부로 잃고 있는 척하고 있다는 것이냐?"
그런데 악중악은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정한 말투로 악기영이 던진 말속에
숨어 있는 뜻을 파악하고 확인절차를 밟았다. 분노를 유도할 생각으로 던진 말을
냉정하게 분석해 숨은 뜻을 파악한 악중악의 냉정한 두뇌는 악기영을 놀라게 했다.
"후... 놀랍군. 놀라워. 아니 정말 너의 냉정함이 마음에 안 드는군."
"등곡이 위장으로 다쳤다고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다."
"불쌍한 놈. 어쩌다 그런 세계에 들어갔느냐? 동료조차 속고 속이는 더러운 세계로
말이다."
"그것이 내 운명이다."
악중악의 대답은 음울했다.
"등곡은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비수가 교묘하게
폐를 뚫었더구나.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협력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상처였
다."
"고맙다."
"고마울 것 없다. 너는 내 손에 죽어야지 다른 놈들에게 죽어서는 안 된다."
악기영은 사부인 괴의 공손찬이 죽어가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죽을 운명에 처하면 너에게 내 목숨을 맡기마."
"흐흐흐, 복수를 구걸 받으라니 정말 웃기는 말이군. 헛소리는 그만하고 나를 어쩔
것 인지나 말해라."
"나와 같이 움직인다."
"흥, 어디로 움직인다는 것이냐?"
악중악은 비아냥거리는 악기영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산동(山東)."
"산동이라고! 허... 미쳤군."
악기영은 악중악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북해방주는 한 번 내린 명령을 철회하지 않는다. 게다가 명령을 완수하지 못하면
참혹한 죽음을 내리지. 그리고 나는 을목도를 가지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을목도가 악삼에게 있다고 믿는 것이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악삼과 만나겠다는 것이군."
악중악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을목도를 구하겠다는
악중악의 굳은 의지는 악기영을 감탄시켰다.
"지척에 악삼을 두고도 만나는 못했는데 그리 쉽게 대면이 될까? 게다가 악삼은 너
를 보는 순간 죽이려 들 거다."
악기영의 음성에는 빈정거림이 가득했다. 비록 악중악의 의지는 감탄할 만 했지만
피맺힌 원한을 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악삼의 손에 악중악이 죽음을 당하
는 것을 막고 싶다는 심리도 깔려 있었다. 악중악은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것이 악기영의 생각이었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악삼의 꽁무니만 쫓다가는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방법을 달리 하기로 한 것이다."
"산동에 가는 것으로 바꾼 이유가 그것이냐?"
"그렇다. 기다리면 되는데 어렵게 추적할 필요가 있겠느냐?"
"흥, 함정을 파고 기다리겠다. 과연 너답군."
악기영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시선을 돌려버렸다. 악중악도 산동에 돌아갈 생
각을 하자 심란해진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어 탄식만 내뱉었다. 그에게도 고향은
남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갈씨 자매와 척금방을 태운 마차가 이원을 벗어 난지 어언 반 시진이 지났다. 마
부석에는 이상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석진이 굳은 얼굴을 풀지 못하고 있었
고, 그 옆에는 악삼이 구룡편을 만지고 있었다.
"악 가가, 그리도 좋아요."
마차 안에서 심심함을 참지 못한 갈운지가 휘장을 걷어버리고 머리를 밖으로 내밀
었다.
"무엇이 말이냐?"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상한 병기 말이에요."
"구룡편을 말한다면 정확하게 본 것이다."
악삼은 구룡편을 만지작거리다 조립을 했다.
찰칵. 찰칵.
순식간에 마디와 마디가 연결되더니 구척의 장창이 만들어졌다.
"대단해. 비록 연화불창과 같은 신기(神器)는 아니지만 순수한 병기로써 그 효과는
별 차이가 없어. 이 정도면 다음에 다시 만나더라도 창이 박살나는 일은 없겠어."
구룡편을 바라보는 악삼의 눈동자는 기묘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해요. 서문 어른은 구룡편같은 명품을 선뜻 악 가가에게 준 이유가 뭘
까요?"
"글세... 나 역시 사부님에게 서문 어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
지."
악삼은 이원을 떠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송가 가옥에서 회
식을 벌이고 나흘 동안 악삼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자헌과 서문종 두 노인과 지냈
다. 오전에는 송자헌과 오후에는 서문종과 토론을 했는데, 내용은 주로 무학의 원
리에서 실전의 응용까지 방대했다.
서문종은 그동안 자신이 연구한 창법의 원리와 정화를 말했고 악삼은 악가창의 운
용기법을 다. 덕분에 악삼은 악가창법을 재정립할 수 있었고, 삼절창과 태극삼검
혜의 이론으로 실전 사용이 어려웠던 악가창 오대필살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또한 송자헌과 나흘 동안 치른 논검(論劍)을 통해 공령의 2단계인 십존(十存)을 익
힐 수 있는 기반을 쌓았다. 몽환도의 운용기법이 십존의 불완전한 요결 부분을 채
웠기 때문이다. 나흘 간의 짧은 시간 동안 악삼의 역량은 전반적으로 상승해 버
렸다.
악삼은 나흘이 지나자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서문종과 송
자헌에게 이른 아침에 이원을 떠나 고향에 가겠다고 알렸다. 그런데 악삼이 이원
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척금방은 부친과 약속한 시간이 됐다며 동행을 요구했다.
악삼은 척신명과의 약속이 생각나 척금방의 동행을 허락했다. 송철방을 만나면 환
객에 대한 마지막 정보를 주겠다는 척신명의 약속을 악삼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런데 새벽길을 떠난 그들 앞에 서문종이 나타났다.
서문종은 이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악삼 일행이 나타나자 앞을 가로막고는
"자네를 기다린 이유는 이 구룡편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네."라고 악삼에게 말했다.
구룡편은 단숨에 악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악삼은 구룡편에 대해 참기 힘든 소
유욕을 느꼈다.
무사에게 최상의 병기는 생명 이상의 가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가 지나친 서
문종의 호의(好意)는 달갑지 않은 악삼이었다. 악삼은 지난 나흘 간 서문종이 보여
준 지나친 호의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논검 도중에 몽환도의 요결 일부분을 알려준 송자헌에 비해 서문종은 오랜 세월을
지내며 체득한 무예의 극의(極意)를 악삼에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서문종은 손녀
사위인 곽도성을 손님처럼 대하면서 악삼에게는 혈육처럼 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부족해 구룡편마저 넘기는 엄청난 호의를 베풀자 악삼은 서문종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다가왔다. 서문종은 악삼의 안색이 기묘하게 변하자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구룡편의 원주인은 자네 사부인 악풍이네."
서문종은 안색만 보고 악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파악한 것이다. 그런데
악삼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구룡편을 막무가내로 넘기는 서문종에게 말했다.
"저는 단 한번도 구룡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악삼은 아무리 생각해도 서문종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당연하네. 자네 사부와 나 사이에 있는 약조 때문이네. 어째든 구룡편은 자네
사부가 내게 임시로 맡긴 것이니 지금부터는 제 주인에게 가야지."
서문종은 악삼에게 구룡편을 던져 주었다. 날아오는 구룡편을 얼떨결에 잡은 악삼
을 바라보며 서문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가슴에 맺혔던 일이 해결됐으니 마음이 편하네. 이제 한동안 손녀랑 같이 놀아
야겠네. 자네의 무운을 빌겠네. 그럼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보세. 그럼 잘 가게."
서문종은 돌아서더니 이원으로 향해 걸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서문종을 향해
악삼은 외쳤다.
"사부님과 무슨 관계이십니까?"
그러나 구룡편을 넘긴 것으로 할 일이 다했다고 생각한 서문종은 대답은 고사하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큰짐을 벗어버린 듯 홀가분하게 걸어가는 서문종
의 뒷모습은 악삼의 입을 다물게 했다.
서문종과 사부인 악풍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짐작할 뿐 다른 사연을 알 수가 없는
악삼의 마음은 갑갑했다. 악삼은 구룡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갈운
지는 구룡편을 바라보다 회상에 빠졌던 악삼이 한숨을 내쉬자 생글생글 웃으며 말
했다.
"뭘 그리 답답하게 생각해요. 어째든 좋은 병기가 생겼으니 좋은 일이잖아요. 좋은
게 좋은 거예요."
갈운지의 단순한 시각과 생각은 악삼의 안색에 미소를 띄우게 했다. 악삼은 갈운
지를 쳐다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구룡편을 해체했다. 한 자 길이로 줄어둔
구룡편은 악삼의 등뒤에 매달렸다.
"척 대인이 앞에 계시네."
갑자기 석진이 입을 열었다. 고저가 없는 석진의 음성은 섬뜩했지만 다들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송자헌에게 패배한 뒤로 석진이 한마디조차 하지 않아 단순하게 기
분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고, 눈앞에 나타난 척신명에게 관심이 쏠렸기 때문이다.
"아버지."
척금방은 마차에서 내리더니 척신명에게 달려갔다. 부녀가 오랜만에 재회의 기쁨
을 나누는 동안 마차는 그들 앞에 도착했다. 마차가 멈추자 악삼과 갈씨 자매는
밖으로 나왔다. 악삼은 척신명에게 다가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척 대인."
"오랜만이오. 악 소협."
"가신 일은 잘 해결됐는지요."
"모든 일이 탄탄대로(坦坦大路)를 걷고 있소. 그런데 송 도공과 만남은 어떠하셨
소?"
척신명의 질문 속에 무슨 꿍꿍이가 숨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악삼은 만면
에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호. 그렇다면 다행이오. 사실 걱정을 했는데 좋게 끝났다니 참으로 마음이 놓이
오. 그럼 나는 약조대로 행하겠소."
척신명은 마부에게 눈짓을 했다. 마부는 마차안에서 작은 상자를 들고 나오더니
척신명에게 받쳤다. 척신명은 작은 상자를 악삼에게 전했다.
"이건 무엇입니까?"
"약조한 물건이오."
"내가 받을 물건은 몇 마디의 정보입니다."
"그 상자 안에는 악 소협이 필요로 한 정보가 적혀 있는 책이 들어 있소."
악삼은 상자를 받았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상자가 무거웠다. 악삼은 날카로운 시
선으로 척신명을 쳐다보았다.
"책 한 권치고는 무게가 너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척 대인."
"스물다섯 냥짜리 금원보 두 개와 은자 삼백 냥이 함께 들어 있소."
"약조한 물품인 책만 받겠습니다."
악삼의 차가운 대답을 들었지만 척신명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나는 상인이오. 악 소협. 삼백 냥의 은과 오십 냥의 금을 무상으로 줄 사람이 아니
오."
"그래서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돈은 악 소협의 것이오. 내 손에서 떠나 악 소협에게 갔으니 마음대로 하시구
려. 그러나 그 돈을 처리하기 전에 내 말을 듣고 행동하면 좋겠소."
악삼은 척신명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지만 침묵했다. 대신 시선을 척신명의 눈
동자와 맞추었다. 악삼은 경청할 것이니 어서 말하라고 눈으로 말했다.
"그 돈들은 악 소협에게 돌아가는 배당금이오. 악 소협이 이원에서 한 일은 내게
엄청난 이익을 보장했소. 사실 그 이익에 비한다면 배당금은 무척 적은 편이오."
"그럼 정당한 대가를 받은 것으로 하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악삼은 고개를 숙이고는 갈 길을 향해 걸어갔다.
"악 소협. 잠깐 실례하오."
"무슨 일이십니까?"
악삼은 몸을 돌렸다.
"설마 두 여인을 데리고 걸어갈 생각이오? 웬만하면 마차를 가지고 가시오."
"말씀은 고맙지만 마차는 제것이 아닙니다."
"마차는 선물이오. 이 정도 선물은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는 믿는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 주시오."
"알았습니다. 그럼 저 마차는 선물로 생각하고 잘 사용하겠습니다."
"그럼 무사히 여행을 하기를 빌겠소. 잘 가시오."
악삼은 척신명에게 목례를 하고 난 뒤에 마차의 마부석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악
삼과 척신명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갈운영은 석진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악삼이
마부석에 오르자 갈운영은 양피지 한 묶음을 전해주고는 마차를 향했다.
갈씨 자매가 마차에 오르자 악삼은 출발했다. 악삼은 마차를 얻은 이상 북경에 갈
필요가 없으니 일단 천진으로 직행한다고 갈씨 자매에게 알렸다. 악삼 일행을 태
운 마차가 사라지자 척금방과 석진은 척신명이 타고 온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석진이 마부석에 올라타자 척금방은 척신명과 함께 마차 내부로 들어갔다. 척신명
일행을 태운 마차는 북경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한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마차
는 멈추고 말았다. 두 사람이 척신명 일행이 탄 마차를 뒤쫓아 왔기 때문이다.
"아니, 곽 공자와 조 집사 아니오."
척신명이 마차 안에서 휘장을 걷어버리고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척 대인."
"만나서 반갑습니다. 척 대인."
두 사람은 이원에 있어야 할 조 집사와 곽도성이었다. 척금방은 두 사람이 나타난
이유를 알 수 없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은 어디에 가시는 건가요?"
"북경에 갑니다. 척 아가씨."
"두 분다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나는 임시휴가를 받은 몸이라 늦어도 내일부터 업무에 복귀해야 합니
다."
곽도성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조 집사는 무슨 일로 북경에 가시오?"
"북경에 두고 온 본 장의 가솔들이 무사한지 확인하러 가는 겁니다. 척 대인. 근 오
일동안 방치한 셈이니 지금이라도 가서 단속할 때가 됐습니다."
"그렇구려."
"그런데 악 협사 일행이 보이지 않는군요."
조 집사가 던진 질문은 곽도성도 궁금해하는 대목이었다.
"악 소협 일행은 산동을 향했어요. 한 시진 전에 저희와 헤어졌거든요."
대답은 척금방의 입에서 나왔다. 그런데 곽도성을 쳐다보는 척금방의 눈동자는 끈
적끈적한 유혹이 가득했고 음성은 교태가 넘실거렸다.
"고맙소이다. 척 아가씨."
척금방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낀 곽도성은 자신도 모르게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
러나 척금방은 개의치 않았다.
"저희도 북경에 가니 길이니 같이 움직이죠."
"알았소이다. 그렇게 합시다."
곽도성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곽 공자. 밖은 추우니 마차 안으로 들어오는 게 좋겠어요."
"호의는 고맙지만 이대로 좋습니다."
"그러지 말고 들어오세요. 조 집사가 타고 있는 말이 무척 괴로워하고 있으니 타고
가시는 말은 넘기고 마차 안으로 들어오세요."
척금방의 눈동자는 유혹의 빛으로 끈적거리다 못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곽도성
은 척금방의 행동이 도가 지나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척신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모라면 딸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잡아 줄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척신명은 먼 산을 보는 듯 척금방의 행동에 아무런 제약도 걸지 않았다.
곽도성은 척씨 부녀가 염치없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황보영 앞에선 조신한 척하다
가 전혀 다른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낸 척금방을 천박하다 생각하고 시선을 조 집사
에게 돌렸다.
그런데 조 집사는 타고 있는 말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말이 조 집사의 몸무게
를 감당하지 못해 허리가 휘어져 있었고 네 다리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기 때문이
다. 곽도성은 그 장면을 보고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제 코앞에 둔 북경이 너무
도 멀게 느껴졌던 것이다.
마차를 몰고 천진으로 향하던 악삼은 고개를 돌려 갈운영을 바라보았다.
"영매. 석진 선배에게 전한 책에 부동심결과 만심진광이 적혀 있는 거니?"
"네. 맞아요. 악 가가."
"역시 석진 선배는 칠대금공 중에 하나를 익히고 있었군."
"철마각이었어요."
악삼은 갈운영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송자헌의 기막(氣幕)을 겨루는 석
진의 모습에서 강호칠대금지무공의 흔적을 악삼은 느꼈던 것이다. 게다가 이원에
서 보여준 석진의 모습은 감정이 사라진 인형과 같아 어느 정도 확신을 주기도 했
다.
"석진 선배가 철마각의 3단계에 도달한 셈이구나."
"네. 송 노선배님의 기막을 뚫으려다 그만 3단계에 도달해 버리고 말더군요."
"그런데 부동심결과 만심진광이 철마각에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칠대금지무공은 칠리산당의 무공으로 그 뿌리가 같으니 분명한 효과가 있을 거예
요."
갈운영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 가벼운 말투로 대답해 주었다. 악삼은 갈운영
의 생각처럼 문제가 쉽게 해결되기 빌었다. 비록 정체를 숨기고 있는 석진이지만
악삼이나 갈씨 자매는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악삼과 갈운영이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누자 갈운지는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아 심사가 뒤틀렸다. 악삼과 갈운영은 팔색조처럼 안색이 수시로 바뀌고 있
는 갈운지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장소군이 사해방 총단에 도착한지 두 달이 넘었다. 그동안 장소군은 자기 거처에
서 꼼짝하지 않았고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사해방의 조직원들은 장소군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이상함을 느껴 감시의 눈길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근 두 달 동안 두문불출(杜門不出)하던 장소군이 갑자기 거처에서 나오자
그녀를 감시하던 간자들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소군의 갑작스런 행동을
상부에 보고하고 그녀를 놓칠세라 뒤를 따라 움직였다.
장소군은 간자들이 자기 뒤를 밟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유유자적(悠悠自適)했
다. 두 명의 시비와 호위 무사로 보이는 중년인 두 사람, 유모인 전설란과 함께 그
녀는 오빠인 장철군의 거처로 향했다. 장철군은 침대(寢臺)에 누워 아직도 거동조
차 못하고 있었지만 장소군은 그동안 단 한 번도 면회하러 가지 않았었다.
"오라버니. 오랜만에 보는군요."
장철군의 침실에 들어가자마자 장소군은 싸늘하게 인사했다. 그런데 장철군은 두
눈을 뜨고 있었지만 응답은 고사하고 단 한마디조차 하지 않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
보고 있었다.
"몇 달만에 본 여동생을 쳐다보지도 않는군요."
장소군의 싸늘한 음성에도 장철군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긴 앞으로 영원히 걷지 못하는 신세가 됐으니 충격이 크겠지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장소군은 미동조차 못하는 장철군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하더니 조용하게 속삭였
다.
"오라버니는 연화에게 고마움을 느끼세요. 연화의 손에 요절(腰折)나지 않았다면 내
손에 당했을 거니까요."
작은 속삭임 속에 숨은 증오는 지옥의 밑바닥에서 타오르는 화염이나 진배없었다.
눈동자 하나 움직이지 않던 장철군은 증오가 품은 지독스런 한기에 전율했는지 전
신을 가볍게 떨었다. 장소군은 그 모습을 보고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그려졌다.
"오늘은 이만 가겠어요. 아참 저녁에 좋은 선물을 하나 보내드리지요. 그리고 다시
방문할 때에는 선물을 같이 가지고 오겠어요. 강씨 일가 전원의 목을 들고 말이죠."
장철군이 진저리치자 장소군의 입가에 나타난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장소군은 밖
으로 나가더니 장철군의 시비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목숨은 오라버니의 안전과 똑같다. 오라버니 신변에 조금의 잘못만 생겨도
네년들 목숨뿐 아니라 가족들 모두의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네...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시비들은 장소군의 엄포에 겁을 먹고 부들부들 떨었다.
"가자."
장소군은 자기 시비와 호위무사, 유모에게 말하고는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
다.
"어디로 행차하실 겁니까? 아가씨."
"할아버지께 갈 생각이에요. 유모."
"그럼 대방주님께서 폐관수련을 마치셨습니까?"
"그래요. 오늘 아침 폐관을 마치고 나오셨다고 연락이 왔어요."
장소군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아가씨. 암영대의 대주한테 무슨 명령을 내렸습니까?"
"궁금한 가요?"
"그렇습니다. 오늘 외출을 하신 이유는 대방주님의 출관 때문임을 알았지만... 암영
대 대주를 새벽에 불러 밀명(密命)을 내린 것은..."
"오라버니께 보낼 선물을 마련하라고 시킨 것이에요."
장소군의 눈동자는 살의로 번뜩였다.
"선물이라고요?"
"그래요. 유모. 오라버니께 드릴 멋진 선물이에요. 그리고 동시에 암영대의 능력도
알 기회가 되겠죠. 오늘 저녁까지 그 선물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암영대는 존속가치
가 없어요."
전설란은 장소군이 무엇을 꾸미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단지 큰 사고가 없기를
빌었다. 장소군은 전설란에게 있어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은 존재였던 것이다.
"어서 가요. 유모. 할아버지를 너무 기다리게 하는 건 손녀가 할 일이 아니잖아요."
"알았습니다. 아가씨."
장소군이 동해방주의 거처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자 유모와 두 시비는 급히
뒤따라갔다. 동해방주의 거처인 대륭전(大隆殿) 앞에 장소군이 도착하자 수문장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총사. 대방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세요."
"그럼 저를 따라 오십시오."
수문장을 따라 장소군이 움직이자 두 호위무사와 유모, 두 시비가 뒤따랐다. 그런
데 그들이 대륭전의 대문을 넘으려고 하자 갑자기 수십자루의 칼과 창이 날아와 앞
을 가로막았다.
"너희들은 명단에 없다. 오직 총사만이 이 문을 넘을 수 있다."
"이..."
전설란과 두 호위무사는 창칼를 향해 병기를 뽑으려 했다.
"그만."
"아가씨..."
"할아버지 거처는 안전해요.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두 호위무사는 장소군의 명령대로 움직였지만 전설란은 걱정이 앞서 불안감을 이기
지 못해 안절부절했다. 그러나 대륭전을 넘기에는 미약한 힘을 가진 전설란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장소군은 수문장의 뒤를 따라 거대한 대륭전의 복도를 걸어갔다. 거대한 2층 건물
인 대륭전의 지붕 끝에 만들어진 복도의 바닥은 수문장은 복도 끝에 도달하자 화
강암을 갈라 깔려 있어 장중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장소군은 복도를 걸어가면서
무수한 고민에 휩싸였다.
과연 할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이 벌이기로 시작한
일이 문제가 없는 것인지, 명확한 해답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장소군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고민하며 걷는 동안 동해방주가 쉬고 있는 거실 입구에 도착
해버렸다.
"총사. 안으로 드시지요. 소신의 직분으론 더 이상 갈 수가 없습니다."
"수고했어요."
장소군은 급히 정신을 차렸다. 수문장에게 목례를 하고 문을 연 장소군 앞에 한
자 길이의 백염(白髥)의 칠십대 노인이 나타났다. 장소군은 노인을 보자 바로 땅바
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노인은 동해방주이자 사해방의 대방주인 장무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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