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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암영(暗影)-2
장소군을 바라보는 장무염의 눈동자는 투명해 일흔이 넘은 고령의 나이임을 의심케
했다.
"일어나거라."
장무염의 엄중한 말투는 엎드려 있는 장소군의 정신을 차갑게 만들었다.
"실내는 답답하니 정원에 가자꾸나."
"네. 할아버지."
장소군은 일어나 정원을 향해 걸어가는 장무염의 등뒤를 따랐다. 정원에는 기화이
초(奇花異草)가 향기를 품어내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인 강
북에 비해 사해방 총단이 있는 광동성 불산(佛山)의 날씨는 한 여름이나 다름없었
다.
"꽃들이 무척 아름답구나."
"천 일 동안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지하 석옥(石屋)에서 무공 수련을 하다가 나오
셔서 그럴 거예요."
"그렇구나.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본지도 오랜만에 보니 새롭게 다가오는구나."
"진실로 소중한 것들은 가까이 있을 때 그 가치를 모르다가 멀어지면 알게 된다고
하지요. 물의 소중함은 사막에서 갈증을 느낄 때 아는 것과 같은 이치(理致)지요."
장무염은 제각각 아름다움과 향기를 뿜어내는 꽃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
막의 물을 비유한 장소군의 설명이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구나. 네가 오히려 늙은 나보다 세상의 도리와 이치를 더 잘 알고 있구나."
"과찬이세요. 할아버지."
장소군의 대답은 겸손했다.
"사돈에게 연락이 왔다."
장무염의 말투는 평이했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살막에서요?"
뜻밖의 소식에 장소군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장무염과 살막이 밀약이 있다는 것
을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관계가 깊다는 사실은 장소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시작할 때가 왔다고 알려왔다. 그리고 모든 일을 네
손으로 해결하게 해달라는 부탁도 함께 왔다."
"그래요. 그럼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나는 찬성이다. 북해방과 남해방, 서해방, 집법전을 없애는 일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네 손으로 강씨 일가를 멸족시키는 것은 달갑지가 않구
나."
"강분옥은 제 친모를 비롯해 부친마저 지옥으로 몰아 넣었어요."
장무염은 잠시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독기를 품은 손녀를 보는 것만으
로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강분옥이 제 남편을 모살(謀殺)하는 대죄를 지었지만 강씨 일가는 죄 지은바 없다.
강씨 일가는 본 방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오라버니 때문이군요."
"그렇단다."
장무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씨 일가는 손자인 장철군의 외가였다. 장철군은 비
록 편협한 성격에 뛰어나지 못한 재질을 가졌지만 장무염에게는 혈육이었다.
"강씨 일족이 오라버니의 혈족이고 본 방에 충성을 다하는 가문인 것은 저도 인정
해요. 하지만 대죄를 범했어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대죄를..."
"흠... 강씨 일가의 대죄가 무엇인지 궁금하구나?"
"강분옥을 키운 죄지요."
장소군의 음성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싸늘하며 삭막했다.
장무염은 살의가 번뜩이는 장소군의 눈빛을 바라보다 탄식했다. 손녀의 마음을 모
르지 않았지만 예상을 벗어난 격한 반응은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알았다. 어차피 모든 일을 너에게 일임하기로 했으니 네 뜻대로 하거라."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장무염은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전하는 장소군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분옥을 생각한다면 강씨 일가 전체를 도살하고 싶은 것은 장무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강씨 일가의 수장은 장무염에게 있어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 그는 장무염에게 있어 둘도 없는 친구이며 심복이었다.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내는 동안 쌓은 정은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동
료가 손녀의 손에 의해 본인뿐 아니라 혈족 전체가 사형선고를 받는 것을 방관해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다. 장무염은 답답한 마음을 누르지 못해 정원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를 따더니 향기를 맡았다. 괴롭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는 장무염을 바라보
는 장소군의 심사도 편치 않았다.
"할아버지."
장무염은 시선을 돌려 장소군을 바라보았다.
"폐관수련의 결과는 어떠하세요."
장소군이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린 이유를 장무염은 말투만 듣고도 알 수 있었
다. 괴롭고 답답한 생각을 그만 하도록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는 장소군의
배려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장무염은 장소군의 작은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귀엽
게 느껴졌다.
"제법 효과는 있었다. 천일 간 수련을 했는데 아무런 소득이 없었겠느냐."
"그럼 사해대전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요."
사해대전은 대방주의 직위를 놓고 겨루는 비무로 30년마다 열리는 사해방 최대의
행사였다. 동해방은 30년 전과 60년 전 두 번에 걸쳐 연거푸 우승을 해 사해방을
장악해 왔던 것이다.
"올해는 사해대전을 치르지 않는다. 아니 사해대전은 두 번 다시 치르지 않을 것이
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장무염의 선언은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어 장소군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사해대전이 열리기 전에 북해방과 남해방, 서해방, 집법전은 멸망할 것이다."
"그들을 멸망시킬 건가요?"
"그렇다."
"무척이나 통쾌한 선언이군요. 할아버지. 하지만 사해대전은 앞으로 한달 뒤에 개최
해요."
장소군은 한달 안에 동해방을 제외한 사해방의 전 세력을 멸망시키겠다는 장무염의
호언장담에 회의적이었다. 누구보다 그들의 세력을 잘 알고 있었고 동해방은 아직
그들 전체를 압도할 전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사해대전을 반년 뒤로 연기한다고 통보했다."
"네! 그들이 인정할까요?"
"대방주가 가진 권한 중에 하나가 사해대전의 시기를 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정해
진 대전 날짜에서 육 개월 이전에서 육 개월 이후까지 총 일 년 간의 시간을 조정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무염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장소군은 그제 서야 장무염이 이상할 정
도의 자신감을 보인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장무염이 반 년 안에 난마처럼 얽혀
있는 사해방의 현황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방법을 천일 폐관 동안 찾아냈음을 직
감적으로 느낀 것이다.
장소군이 근 두 달만에 외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학경자는 불안감을 느껴 자신의 거
처 앞에서 서성거렸다. 연화를 피해 도주할 때 장소군을 외면하고 장철군을 데리
고 갔던 일을 생각할수록 학경자는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패를 잘못 선택했어. 그때 장소군을 데리고 갔어야 했어. 아무 쓸모도 없는 병신을
구한답시고 소중한 기회를 날리다니..."
장철군을 데리고 사해방에 되돌아왔을 때 동해방주 장무염의 분노한 얼굴을 회상할
수록 학경자는 한숨만 나왔다. 장무염의 심중에 장철군의 가치가 장소군에 비해
하잘 것 없다는 사실이 충격이었고, 잘못된 선택을 감행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
다.
"이를 어쩐다..."
학경자의 독백은 무거웠다. 장소군이 돌아온 뒤에 거처에서 두문불출한 뒤부터 본
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학경자는 그동안 수많은 돌파구를 모색했지
만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응?"
어느새 잘 알지 못하는 곳까지 걸어온 자신을 느낀 학경자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군. 언제 여기까지 걸어온 거야?"
학경자는 투덜거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처음 본 지
역으로 높은 담장 사이에 난 골목길이었다. 동서남북조차 판단하기 힘든 곳이라
학경자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경공을 사용해야 하나?"
학경자가 머뭇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사해방의 총단에서 함부로 경공을 사용해 날
아다니다가는 목숨을 보존하기 힘든 법이다. 요소마다 매복이 깔려있고 금지구역
이 가득한 사해방에서 함부로 이동을 한다는 것은 미친 짓인 것이다.
"빌어먹을...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됐나..."
학경자는 신경질을 부렸다. 사해방의 함정과 매복이 두려워 경공을 사용해 공중으
로 올라가 쉽게 길을 찾는 방법을 포기한 자신이 한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비
복장을 한 소녀가 꽃을 한아름 안고서 걸어오자 학경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오너라."
꽃을 든 시비는 학경자가 부르자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서 머뭇거렸다.
"이리 오라고 하지 않느냐."
학경자는 시비에게 짜증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외쳤다. 애꿎은 시비에게 화풀이
를 하는 것과 다름없었지만 학경자는 알지 못했다.
"아, 알았습니다. 어르신."
겁에 질린 시비의 눈망울엔 눈물이 번졌다. 시비가 가까이 다가오자 학경자는 진
한 꽃향기를 느꼈다.
"제법 예쁘구나."
학경자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 됐고 음성은 탁했다. 시비는 더욱 겁이 나는지 고개
를 숙이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너는 어디 소속이냐?"
"소, 소녀는 청향각(淸香閣)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어르신."
"청향각! 그럼 총사의 시비란 말이냐?"
"네. 어르신."
학경자는 얼음물을 한 사발 들이킨 것 같았다. 이런 외진 곳에서 하필이면 장소군
의 시비와 마주칠 줄은 생각도 못했고, 또한 우연이라 보기에는 이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비를 아무리 보아도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는 소녀에 불과해 학경자는 긴
장을 풀고 말았다.
"그래. 내가 한 가지만 묻자구나."
"말씀하세요. 어르신."
"여기는 어디냐?"
"이 길은 운문각(韻文閣)으로 가는 우회로입니다. 평소 시비들과 하인들이 주로 사
용해 어르신들은 잘 모르는 길입니다."
이제야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알게 됐지만 왜 이 길에 들어왔는지 학경자는 이해
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길이 어딘지 안 이상 출구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
해 안심해지자 시비가 무슨 일로 운문각에 가는지 궁금해졌다. 운문각은 장철군의
처소였기 때문이다.
"네가 운문각에 가는 이유는 무엇이냐?"
시비는 학경자의 질문을 받자 대답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며 머뭇거렸다.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네, 네... 저 사실은..."
"어서 말하거라."
"아가씨께서 이 꽃을 장 공자님의 침실에 꾸미라고 했습니다. 방안이 너무 삭막해
몸이 아픈 장 공자님의 마음이라 풀어야겠다고 하셨어요."
시비가 품에 안은 꽃을 내밀자 학경자는 머리를 굽혔다. 장소군이 갑자기 꽃을 보
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학경자는 고개를 숙이
는 바람에 시비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그려지는 걸을 보지 못했다.
퓽.
꽃다발 속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쇠꼬챙이가 날아오자 학경자는 내력을 모으려 했
다.
"헉!"
뜻밖에도 내력을 운용하자 경맥 전체에서 엄청난 통증이 생기자 학경자는 신음을
토했다.
푹.
"독! 어, 언제..."
학경자는 언제 중독을 당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시간은 학경자가 더 이상 생각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털썩.
학경자는 뒤로 넘어져 땅바닥에 누웠다. 이마에 박혀버린 새하얀 꽃송이가 학경자
의 죽음을 애도했다. 새하얀 꽃은 인공으로 만든 조화로 강철로 만든 가지의 끝
은 뾰족했다. 학경자의 이마를 한순간에 꿰뚫어 버리고 뇌를 헤집어 버릴 정도로
날카로웠던 것이다.
"장 공자에게 보낼 선물을 이제야 구했군."
시비는 땅바닥에 누운 학경자를 향해 안고 있던 꽃을 던지며 비웃었다. 백 송이도
넘는 꽃들은 학경자의 시신을 뒤덮었고 시비의 손에는 수전(袖箭)으로 보이는 강철
관과 숙수들이 사용하는 요리용 칼이 들려 있었다.
"어리석은 늙은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가 무공을 익힌 자보다 무서울 때가 있다
는 사실도 모르면서 강호 고수라고 이름을 내걸었다니 정말 한심하구나."
시비는 칼을 들어 학경자의 목을 겨냥하더니 내리쳤다.
퍽.
학경자의 목은 일격에 두 동강나버렸다. 시비는 자기 옷과 얼굴에 피가 튀었는데
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학경자의 수급은 시비의 품속에서 나온 보자기에 감
싸졌다. 시비는 머리를 잃은 학경자의 시신을 힐긋 쳐다보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그런데 시비가 사라지자 한 남자가 조용히 나타났다. 그는 꽃에 파묻힌 시신을 바
라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장소군을 내버려두고 장철군을 구할 때 어리석은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
군. 무공을 모르는 소녀라고 방심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꽃향기 속에 풍겨나는
독 냄새조차 눈치채지 못한단 말인가."
그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시체를 바라보았다.
"어째든 이 어리석은 늙은이 덕분에 청향각에 있는 시비나 하인, 숙수, 정원사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됐군."
그는 시비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여간 앞으로 재미난 일이 많이 생기겠군. 흐흐흐."
메마른 웃음을 던지는 그의 안색은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만약에 누구든지 그
의 얼굴을 보았다면 섬뜩한 느낌에 등골이 서늘해 졌을 정도였다. 그의 이름은 혁
무강이었다.
곽도성은 집에 돌아오자 바로 등청할 준비를 했다. 예상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관
계로 오후에라도 등청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상관에게 꾸중을 들은 준비마저 마친
곽도성은 자금성을 향했다. 특히 곽도성의 직속상관인 강청은 대쪽같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곽도성은 이왕 먹을 욕이라면 빨리 먹는 게 좋다고 생각해 빠른 걸음으로 근무처에
들어갔다. 그런데 강청은 오후에 출근한 곽도성에게 아무런 말없이 명령서 한 장
을 건넸다. 명령서에는 운남성에 일어난 의문의 사건을 조사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명령서를 받는 즉시 수행원 없이 출발하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
라는 단서가 적혀 있었다.
"지금 즉시 출발해야 합니까?"
곽도성은 볼멘 소리를 했다. 운남을 왕복한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을 소모해야 했
기 때문이다. 황보영이 어렵사리 근처까지 왔는데 갑자기 운남에 갈 생각을 하자
곽도성의 마음은 참담하다 못해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곽도성의 그런 마음은
강청의 안중에 있을 리가 만무했다. 강청은 싸늘한 시선으로 곽도성을 쳐다보며
아무런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그럼 준비를 하고 떠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우리가 모두 준비해 두었네. 자네는 지금 즉시 떠나기만 하면 되
네."
"그러나 부친께 제가 어디에 가는지 정도는 알려 드리는 게..."
강청은 곽도성의 말을 중간에서 잘라버렸다.
"곽 시랑는 자네가 임무 때문에 운남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네."
"후우~. 알았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명령대로 이행하겠습니다."
곽도성은 강청에게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곽도성이 사라지자 강청의
안색이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강청은 한숨을 내쉬며 집무실을 서성거렸다.
"강 도위. 무슨 고민을 그리 하는가?"
환관 한 명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강청은 갑자기 들어온 환관에게 고
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교 첩형."
"곽도성 때문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네."
"그러나 그의 부친은 호부시랑입니다."
"곽항은 영원히 모를 거네. 설령 안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지. 흐흐흐."
교 첩형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교활한 눈빛을 번뜩이
는 교 첩형을 바라보는 강청의 안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두워졌다.
성밖에는 여행에 필요한 말을 비롯해 여러 가지 장비가 구비돼 있어 곽도성을 놀라
게 했다.
'아니 언제부터 이렇게 준비가 철저해진 거지? 내참 이런 일 처리는 처음 보는군.'
언제나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준비해야 일할 수 있었던 업무방식과 달리 매끄럽게
처리돼 있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나 곽도성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여행 장
비를 인수받고 바로 출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경에서 멀어져 갔고 해는 떨어져 어둠이 사방을 뒤덮었지만 곽
도성은 멈추지 않았다. 황보영을 나두고 운남에 간다는 현실이 혹독한 추위마저
잊게 한 것이다. 그런데 어둠과 차가운 날씨로 인해 인적이 끊어진 언덕길에 서있
는 사람을 발견한 순간 곽도성은 멈추고 말았다.
"아니! 조 집사가 아니오."
뜻밖에도 조 집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북경에서 말을 타고 무려 네 시진이나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고안(固安) 근처에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에 말에서 내린 곽도성은 조 집사에게 달려갔다.
"조 집사."
"안녕하십니까. 곽 공자님."
"조 집사도 잘 있었소?"
"네. 저는 아주 평안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있는 것이오?"
곽도성의 질문을 받은 조 집사의 얼굴에 기괴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구할 물건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그건 바로... 너의 목이다."
조 집사는 오른 손바닥으로 곽도성의 흉부를 후려쳤다.
쾅.
빠가각.
"커억~."
곽도성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조 집사의 일격은 벼락보다 강했고 바람
보다 빨라 설령 공격을 미리 안다고 해도 막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곽도성
은 무방비 상태로 공격을 허용해 단 일격에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조, 조 집사... 왜... 허억~."
곽도성은 조 집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이름을 부르다가 피를 토하고는 눈을
감고 말았다. 단 일격에 내장이 파열되고 쇄골과 흉골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곽도
성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신음하다 기절해버렸다.
"그 정도의 고통도 이기지 못하는 나약한 도련님에게 위유무기진해의 무공은 돼지
목에 걸린 진주목걸이에 불과하지."
조 집사는 기절한 곽도성에게 다가갔다. 곽도성은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어 조
집사가 자기 머리맡에 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조 집사는 곽도성의 이마에 오른
발을 올리더니 내력을 모아 내리 밟아버렸다.
퍽.
곽도성의 두개골이 일순간에 쪼개져버렸다. 허연 뇌수와 붉은 피가 조 집사의 신
발과 땅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조 집사는 개의치 않았다.
"황보영을 너 따위에게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조 집사는 5년 전 황보영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다. 비록 황보영에게 마
음을 털어놓지는 못했지만 다른 누구에게도 넘길 생각은 없었다.
짝. 짝. 짝.
갑자기 박수소리가 들려오자 조 집사는 고개를 돌렸다. 조 집사의 눈에 화려한 교
자가 나타났다. 박수소리는 교자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훌륭해. 곽도성은 강호에서도 능히 백위권 안에 들어가는 고수로 젊은 층에선 거
의 무적이라 할 수 있다. 만압장(萬壓掌)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이라도 쉽게 이길 수
없지. 그런데 너는 너무나 쉽게 해결하는구나."
교자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남녀를 구분 짓기 힘든 요사스런 음성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칭찬이 실려 있었음에도 듣기에는 거북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작은 형님."
"그렇구나. 덕찬. 너를 마지막으로 본 게 오년 전이었지."
"네. 북해방 총단에서 인사드린 것이 마지막이었지요."
교자 안에는 북해방주 조덕환이자 동창의 제독태감인 조환이었다. 그리고 조환으
로 알려진 조 집사의 본명은 조덕환으로 조가 삼형제의 막내였던 것이다.
"오년전 조숭이 나한테 달려와 네가 자기 양자로 들어와 선교장에서 살겠다고 했다
며 이를 말려달라고 애원했지."
"제겐 그 당시나 지금이나 선교장이 가장 마음이 편한 곳입니다."
조숭은 조가 삼형제의 충신이었다. 송 황조의 후손들은 황씨 일가를 감시하기 위
해 보낸 가문이 조숭의 조상이었다. 그런데 오년전 조덕찬이 황씨 일가를 아무도
모르게 방문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황보영을 보는 순간 조덕환은 영혼이 떨리는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조덕찬은 자
신이 가진 모든 지위와 신분을 버리고 선교장에 들어가기로 했다. 선교장의 집사
인 조숭의 아들로 위장해 그 동안 살아온 것이다.
"좋아. 좋아. 제 아무리 극락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옥이나 다름없는 법이
지."
"제 마음을 아는 건 둘째 형님뿐이군요. 어째든 도움을 주신 건 진심으로 감사 드
립니다."
"곽도성을 이곳에 오도록 한 것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지. 그러나..."
"알고 있습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단 두 가지만큼은 안됩니다."
조덕찬의 음성은 단호했다.
"두 가지라...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구나."
"첫째는 선교장과 황씨 일가에 위해가 가는 일은 절대로 안됩니다."
"나는 황철이 배신한 것을 알고 있지만 그동안 충성을 받쳤던 것을 고려해 손을 쓰
지 않았다. 이유는 네가 선교장에 있다는 것 때문이었지. 그런데 일부로 네 힘을 동
원해 황철을 응징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생각은 없다."
"고맙습니다. 작은 형님."
조덕환에게 진심으로 허리를 굽힐만큼 조덕찬은 선교장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아니 황보영이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이 정확했다.
"두번째를 말해보거라."
"큰 형을 치는 일에는 끼지 않습니다."
"흥.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조덕환의 음성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증오가 넘실거렸다. 한 마디 한
구절이 칠흑처럼 어두웠고 지옥의 불길처럼 느껴졌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
즐독입니다
잘보았습니다.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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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이랍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