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미터’의 영적 시그널
늘푸른언덕
얼마 전 지인이 보내 준 [좋은 글]을 저장해 두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꺼내 봅니다.
‘불과 1미터’란 제목의 짧지만 의미 있는 글이라 함께 나눕니다.
한 젊은이가 경사가 급한 고갯길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믐이고 밤안개가 자욱하여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그만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젊은이는 다행히 주변의 바위를 붙잡아 버틸 수 있었습니다.
도와달라고 큰소리로 외쳤지만 늦은 밤이라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젊은이는 바위에서 떨어지면 꼼짝없이 죽을 것 같아 불안에 떨며 밤새 애를 태웠습니다.
시간이 흘러 새벽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동편 하늘이 밝아졌고, 주위의 지형지물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럴 수가!”
바위에 매달린 젊은이가 아래를 보니 1미터 아래로 새로운 산골짜기 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불과 1미터 밖에 안되는 높이.
다리를 쭉 뻗으면 땅에 닿을 수 있는 높이였는데,
이를 몰랐기 때문에 밤새도록 바위에 매달려 죽을 고생을 하였던 것입니다.
좋은글 중에서
짤막하지만 함축적인 삶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글을 잠시 묵상해 봅니다.
누구나 어려운 일을 당하면 걱정과 초조,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근심은 더 큰 염려를 낳고, 두려움은 계속 커지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두려움은 오늘의 이야기처럼 다리만 쭉 뻗으면 닿을 수 있는 1미터밖에 안되는 높이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고 크건 간에 오늘의 이야기와 유사한 수많은 경험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들은 그렇게 거듭되는 수많은 두려움과 시련들을 이겨내고 당당히 오늘의 자리에 선 사람들입니다.
사실 시련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이길 것인가를 걱정하기도 하고 때론 두려움이 앞서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자연스럽게 지나가버려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또 생각해 보면 걱정만 할 뿐 일어나지 않은 것들이 태반이고 그 중 어떤 것은 정말 죽을 각오로 싸우면서 어렵사리 이긴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것이 자력이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든...
다시 오늘의 이야기를 지나온 저의 삶에 비추어 돌아보니 결코 평탄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삶이 항상 힘들거나 죽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어려웠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삶에서 누구나 만나게 되는 비슷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인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삶의 시련과 위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굴곡진 삶에 신앙이라는 특별한 믿음이 덧입혀질 때 그렇게 형성된 인격은 영성이라는 축복으로 새롭게 탄생되기도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방정식을 잘 담아낸 넉 자로 된 성어 중에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뜻으로,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옴을 이르는 말’이지요.
우리가 살아온 삶의 방정식을 시련 극복이라는 조건절로 풀이하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거저 얻어지는 축복은 결코 없습니다. 반드시 그 앞에 시련과 극복이라는 조건절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물론 ‘어쩌다 타고난 금수저’처럼 거저 얻어지는 축복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기실(其實) 그 이면에는 부모든 조상이든 누군가의 시련과 극복을 위한 남다른 피나는 노력이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행운이라는 예외적인 하늘의 복도 존재하긴 합니다만...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는 베스트셀러로 단연 성경(聖經, Bible)이 으뜸으로 꼽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은 다양한 각도로 해석되는 진리의 언약과 축복의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오늘의 주제어인 ‘축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축복이라는 결과물의 전제로 반드시 시련과 극복이 조건적으로 수반됨을 예외 없이 보게 됩니다.
성경 속에는 수많은 축복의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 먼저 생각나는 대표적인 성경 속 인물들로 ‘아브라함과 그의 축복의 자손들인 야곱과 요셉과 다윗’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과 시련의 대명사로 불리는 ‘욥’도 빼 놓을 수 없는 성서 속의 축복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마치 주인공처럼 온 몸에 받은 이들의 삶을 일일이 담기엔 지면이 부족합니다만 시련과 축복이라는 관점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간단히 조명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시면서 이들에게 결코 복을 그냥 주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약속된 축복을 받기 위하여 마치 축복의 공식과도 같은 시련과 극복이라는 조건적인 장애물을 반드시 통과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시련과 극복의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이 축복의 사람들을 마치 눈동자와 같이 늘 함께 지키고 보호하셨음을 한편의 영화처럼 보게 됩니다.
오늘의 이야기 ‘불과 1미터’처럼 아주 가까운 지근거리에서 이들과 함께 동행하시며....
이러한 시련과 극복을 전제로 얻어지는 축복의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예수를 구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성경은 다음과 같은 언약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4장 15절~17절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를 마치시며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 땅을 떠나시면서 따르던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를 통하여 동행하시겠다는 하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다음은 ‘주와 동행’ 관련 언젠가 깊은 울림으로 읽었던 [모래 위의 발자국]이란 글입니다.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하늘 저편에 자신의 인생의 장면들이 번쩍이며 비쳤습니다.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그는 모래 위에 난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그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비쳤을 때 그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걸어 온 길에 발자국이 한 쌍밖에 없는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인생에서는 가장 어렵고 슬픈 시기들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몹시 마음에 걸려 그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나면 항상 저와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제 삶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기에 주님께서 왜 저를 버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소중하고 소중한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버리지 않는다. 네 시련과 고난의 시절에 한 쌍의 발자국만 보이는 것은 내가 너를 업고 간 때이기 때문이니라"
모래 위의 발자국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라면 누구나 숙제처럼 주어진 인생이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인생길이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앞이 가로막히기도 하고, 때로는 칠흑같이 어두워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이겨내며 자생하는 법을 터득하기도 하지만 때론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오늘 묵상 글에서는 우리가 즐거울 때나 힘들 때나 주님께서 늘 함께 동행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시련과 두려운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믿음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의지를 통하여 스스로 이겨냅니다. 또 어떤 이는 이러한 시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이는 자신들을 축복하시기 위한 주님의 영적 시그널로 받아 들이는 신앙적 자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주님께서 동행하신다는 확신을 갖기도 하고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주님과의 동행을 경험하고 감사해 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을 알기 전과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 경험한 시련과 그 시련을 극복하고 난 후에 받게 되는 축복의 가치를 가늠해 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관점은 전적으로 나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강해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또한 시련 후에 찾아온 모든 축복은 온전히 나의 능력 덕분이라는 교만에 빠졌던 부끄러운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다시 시련이 닥치면 또다시 같은 모습으로 두려워 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난 후 시련과 극복을 대하는 태도는 이전과 사뭇 다름을 알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축복하기 위한 주님의 계획으로 해석하는 영적 자세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겸손한 자세로 전적인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주님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님의 온전하신 뜻을 깨달아 알게 되는 영적 겸손함을 배웁니다.
살아보니 우리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우리들 앞에 펼쳐진 삶의 길은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없는 막막한 길입니다. 정말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길이며 알 수 없는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를 오늘의 이야기 [불과 1미터]에 담긴 메시지에서 찾았습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생길에 [불과 1미터] 곁에서 늘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께서 계시기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 20절
첫댓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생길에서
보이지 않게 늘 가까이 동행하시며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손길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요 위로입니다.
때론 어둡고 막막하고 힘든 길에
늘 함께 주와 동행하는 영적 기쁨을 사모합니다.
<늘푸른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