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 앞에서 1만엔짜리 지폐를 찢은 까닭은

[코렉트]

한편 손정의는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에도 눈을 돌렸다. 그 무렵 일본의 50여개 소프트웨어 회사 가운데 단연 으뜸은 삿포로에 본사를 둔 허드슨이었다. 허드슨은 대리점 판매와 통신판매를 병행하고 있었는데, 손정의는 그 거래를 모두 끊고 소프트뱅크와 독점계약해 달라고 청했다. 허드슨 경영자인 쿠도 유지와 쿠도 히로시 두 형제는 고개를 저었다. “독점을 주면 우리 매출은 크게 떨어질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매출이 떨어지고, 중간마진을 우리가 챙기기 때문에 수익률도 떨어질 겁니다. 하지만 저, 손정의가 모든 것을 걸고 확실하게 팔아주겠다고 약속드립니다. 매출은 수십 배 오를 것입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지만 그 불타는 열정에 쿠도 히로시의 마음이 흔들렸다.

“당신을 믿어보겠소. 착수금 3000만엔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허드슨의 월 매출과 맞먹는 큰돈이었다. 오사카 전시회에서 자금을 거의 다 써 버린 손정의였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그는 일단 승낙하고 동업자 묘가 요시데루와 다카하시 요시토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본금 1000만엔 가운데 800만엔을 이미 써버렸는데 어디서 3000만엔을 더 구하느냐며 펄쩍 뛰었다. 그러나 손정의의 집요한 설득에 마침내 동업자들은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그만 손을 떼겠습니다. 우리 지분을 모두 사주시오. 혼자 운영하는 게 당신도 편하겠지요.” 그들은 액면가의 3배인 1500만엔을 요구했다. 허드슨에 예탁할 금액을 합치면 무려 4500만엔이었다. 손정의는 승부를 내야 할 때라고 판단하고 그에 따랐다.

손정의의 예상이 맞아떨어져, 죠신전기 컴퓨터 부문 매출은 이전의 세 배로 껑충 뛰었으며 그 뒤로도 전국 1위를 이어갔다. 허드슨의 매출도 함께 치솟았다. 처음부터 큰 거래처를 확실하게 손에 넣은 손정의는 세이부백화점과 제일가전 등 소매점에도 뛰어들었다. 일본소프트뱅크의 평판이 저절로 높아지며 따로 홍보를 안 해도 주문이 들어올 정도였다. 1년 반 사이에 다섯 번이나 사무실을 확장이전했고, 100여개 회사에서 2000개가 넘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했으며 판매가맹점도 300곳이 넘었다.

그 무렵에는 소프트웨어 저작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빌려주거나 복제해도 위법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제작사나 유통사들 모두 도저히 버텨낼 방법이 없었다.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는 소프트웨어 저작권이 법률로 인정되고 있었는데, 일본은 그보다는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마침내 1982년 5월 손정의의 제안으로 허드슨, CSK, 나이가이 데이터 어시스트, 밀키웨이 등 12개 회사가 모여 일본소프트웨어협회를 발족한다. 초대 회장에 손정의 자신이 취임하고 사무소도 소프트뱅크 내에 두었다. 1982년 끝무렵 도쿄 지방 재판소에서 소프트웨어에 저작권을 인정했다. 일본 최초의 소프트웨어 저작권에 관한 사법부 판결이었다.

모래알처럼 쏟아지는 소프트웨어들 가운데에서 옥석을 가리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1980년 즈음 소프트웨어 개발사는 대부분 ‘단칸방 회사’라 불릴 정도로 영세했다. 대부분 젊은 컴퓨터 매니아들이 수작업으로 개발하여 카세트테이프나 플로피디스켓에 복사하고, 손으로 쓴 매뉴얼과 함께 비닐봉지에 넣어 통신판매하고 있었다. 자갈밭에 간간이 보석이 섞여 있는 정도였다. 소프트뱅크 창업기에는 소프트웨어의 질은 고려하지 않았다. 개발사와 판매점을 하나라도 더 확보하여 일본 최대 소프트웨어 유통회사가 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죠신전기와 허드슨과의 독점계약으로 소프트뱅크의 이름은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그 다음부터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개발사와 판매점들이 알아서 연락을 해왔다. 처음에는 거래처에 대한 선별 작업은 하지 않았다. 어떤 개발사, 어떤 제품이라도 무조건 유통했다. 그 무렵에는 얼마나 많은 소프트웨어를 취급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어떤 제품이 보석인지 금세 안다. 곧 불량 재고품이 창고에 쌓여 갔다. 개발사 측에 반품하기도 어려웠다. 하나같이 영세업체들이어서 반품은 곧 도산이나 마찬가지였고, 반품도 하기 전에 어느새 도산해 버린 곳도 수두룩했다. 결국 팔다 남은 소프트웨어들은 폐기처분하는 수밖에 없었다. 손정의는 직원들을 폐기장에 데려가 그 현장을 보여주고, 그 다음 날 직원들을 모아놓고 1만엔 지폐를 꺼내 보였다.

“제가 이 1만엔짜리 지폐를 찢어버리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러고선 지폐를 반으로 쫘악 찢어 버리는 것이었다. 직원들은 모두 지폐가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에 불을 지피려는 듯, 손정의는 이렇게 말했다. “어제 폐기처분된 상품은 몇천만엔어치입니다.” 한순간 긴장감이 흐르고 직원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부터 회사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무작정 아무 소프트웨어나 받아들이지 않고 선별작업을 강화한 것이다. 그 뒤로도 불량 상품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지만 소프트뱅크는 순항을 계속 이어 나아갔다.


‘오! PC’ ‘오! MZ’ 창간

그 무렵 컴퓨터 잡지들은 손정의를 경계하는 업체들의 부탁을 받고 일본소프트뱅크의 광고를 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손정의는 아예 1982년 5월 ‘오! PC’ ‘오! MZ’를 동시 창간했다. ‘오! PC’는 NEC의 퍼스널 컴퓨터에, ‘오! MZ’는 샤프의 MZ시리즈에 맞춘 정보지였다. 기종별 정보지라는 콘셉트도 손정의의 아이디어였다. 창간호 80%가 반품되는 실패를 겪었지만 1억엔을 과감히 투자하고 책값을 내린 뒤 TV 광고 등 공격적으로 과감히 홍보를 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10만부가 사흘 만에 팔려나갈 만큼 대성공이었으며, 이후 3년 뒤에는 잡지 9종을 매달 60만부씩 발행할 만큼 성장했다.

1982년 봄 손정의는 중증 B형 만성간염 판정을 받는다. 평소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피로해지곤 했지만 회사를 일구느라 잠이나 식사가 불규칙한 탓이려니 생각했다. 확실한 치료법이 없어 B형 만성간염은 불치병으로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앞으로 5년 정도….” 의사가 말끝을 흐렸다. 겨우 25살 젊은 나이인데! 손정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무렵 일본소프트뱅크는 곧 손정의로 통했다. 손정의는 거래처는 물론 사원들에게도 입원 사실을 숨겼다. 몇몇 간부사원들은 “사장님은 미국 유니슨월드 일로 미국에 가 있다”고 둘러댔다. 외부에서도 손정의와 가까운 사람 외에는 이 일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샤프의 사사키 전무는 손정의를 대신해 회사를 이끌 인물로 일본경비보장(현 세콤) 부사장 오모리 야스히코를 소개해 주었다. 뒷날 손정의의 참모로 불리며 소프트뱅크 대표이사에 오르는 미야우치 겐은 오모리의 권유로 일본소프트뱅크에 들어온다. 손정의는 회사 일에서 손을 떼고 병 치료에 힘쓰며 병상에서 경영서, 역사서, 자기개발서 등 4000여권의 책을 읽었다. 1984년 3월 손정의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도쿄 미나토구의 도라노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간 전문의 구마다 히로미츠가 있었는데, 그의 ‘스테로이드 이탈 요법’으로 손정의는 가까스로 회복할 수 있었다. 손정의는 생명의 은인 구마다에게 감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1986년 2월 손정의는 사장으로 복귀했다. 그가 없는 동안 경영을 맡았던 오모리는 회장으로 물러났다가 3년 뒤에는 회사를 떠났다.

‘아스키’의 니시 가즈히코는 손정의의 가장 큰 라이벌이었다. 그는 손정의와 마찬가지로 갓 스무 살 젊은 나이에 컴퓨터의 가능성을 꿰뚫어보았다. 그 무렵 빌 게이츠는 세계 컴퓨터업계의 총아로 떠올라 있었다. 니시는 미국에서 빌 게이츠를 만나 친분을 쌓고, 마이크로소프트 BASIC의 독점판매권을 손에 넣고 마이크로소프트 부사장에 오르며 일본 컴퓨터업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손정의와 니시는 1983년 6월 정면으로 부딪친다. 그 무렵 일본 컴퓨터소프트웨어는 호환성이 없어 불편했다. 니시는 회사들마다 MSX 사양의 컴퓨터를 개발하고 마이크로소프트 BASIC으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게끔 통일하려 했다. 소니, 도시바, 산요, 캐논, 파이어니어 등 유명한 회사들도 참여했다. 그러나 손정의는 이런 움직임에 반대했다. 결과적으로 아스키와 마이크로소프트만 큰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니시에게, 타 회사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면 독자적인 통일규격을 만들겠다고 받아쳤다. 이 일은 매스컴에서도 크게 다룰 만큼 화젯거리였다. 창업한 지 겨우 2년 지났지만 일본소프트뱅크는 소프트웨어 유통에서 압도적인 보유율을 쥐고 있었고 개발 회사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 MSX 전쟁은 6월 26일 손정의와 니시의 회담으로 결말이 난다. 니시가 양보하여, 모든 하드웨어 회사에 기본 사양을 공개하고 로열티를 받지 않기로 합의했다. 전부터 좋지 않았던 두 사람 사이는 이 일로 인해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그와 달리 빌 게이츠는 손정의와 돈독한 관계를 이어갔다. 1995년 그는 자신의 첫 책 ‘빌 게이츠의 미래로 가는 길’을 손정의에게 보낸다. 이 책에 빌 게이츠는 손정의를 위해 이렇게 썼다. “당신은 나 못지않은 뛰어난 승부사입니다.” 이것은 손정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말은 손정의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그 뒤 손정의는 새 사업을 펼칠 때마다 빌 게이츠에게 의견을 청했다.


세계로 세계로

손정의는 일본을 넘어 세계로 뻗어가기를 바랐다. 그러던 1994년 6월 ‘월스트리트저널’에 “세계 최대 컴퓨터 관련 출판사인 지프 데이비스가 출판 부문과 전시회 부문 매각에 나섰다”는 기사가 실렸다. “바로 이거다!” 손정의는 무릎을 탁 쳤다. 그는 인수합병 분야 세계 최대 기업인 모건스탠리를 고문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프라이스 워터하우스에 회계감사를 맡긴 뒤 입찰 준비에 들어갔다. 정보망을 총동원하여 관련 정보를 끌어모으는 한편 뱅크오브뉴욕, 맨해튼, 시티 등 미국 은행과 일본 은행에서 융자받아 16억달러를 마련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손정의는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1994년 10월 25일, 입찰을 몇 시간 앞두고 사무실에 모여 최종 점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 투자회사 ‘포스트먼 리틀’이 단독교섭권을 얻어 지프 데이비스를 차지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지프 데이비스 측에서 유력 매수처인 소프트뱅크가 자금이 부족하다는 루머를 듣고 입찰 전에 거래를 마무리 지어 버린 것이었다.

“포스트먼 리틀이 제시한 금액에 1억달러, 아니 2억달러를 얹어드리겠습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손정의가 거듭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쉽고 분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빼앗기다니! 호텔방에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그는 ‘미국식 인수합병이란 걸 제대로 배웠구나’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손정의는 마음을 다잡고 먼저 전시회 부문을 인수하기로 했다. 1994년 11월 2일 소프트뱅크는 2억207만2000달러로 지프 데이비스 전시회 부문을 인수했다. ‘컴덱스’의 전시회 부문도 8억달러에 인수하여 미국 전시회시장의 75%를 손에 넣었다.

지프 데이비스 출판 부문 인수도 포기하지 않았다. 손정의는 지프 데이비스를 사들인 ‘포스트먼 리틀’의 테드 포스트먼을 찾아갔다. “내가 이걸 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팔라고 하는 거요?” 예상대로 포스트먼은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 뒤로도 손정의는 끈질기게 인수 교섭을 벌였다.

“저는 얼마에 사서 얼마를 벌어들이느냐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윌리엄 지프’가 만든 위대한 출판사를 꼭 손에 넣고 싶을 뿐입니다. 출판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포스트먼 리틀은 투자회사이니 언젠가는 지프 데이비스를 팔겠지요. 그렇게 몇 년을 낭비하느니 지금 바로 저에게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파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몇 번이고 찾아가 진심을 담아 계속 조르자 마침내 포스트먼의 마음이 움직였다. 1995년 1월 19일 소프트뱅크가 21억달러에 지프 데이비스 출판 부문을 인수했다는 발표가 났다. 그 금액은 손정의의 예상 금액과 별 차이가 없었다. 실로 집념의 사나이라 하겠다.


소프트뱅크 손정의·알리바바 마윈의 역사적 만남

손정의는 캘리포니아대학 시절 ‘유니슨 월드’를 세운 적이 있다. 동업자였던 루흥량은 1995년 유니테크텔레콤에 자본을 투자해 중국 통신네트워크 사업에 진출했고, 2000년에는 벤처캐피털 홍콩 현지법인 ‘소프트뱅크 차이나펀드’를 세웠다. 그 무렵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놀랄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는 있었으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기업 운영 환경도 체계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손정의는 ‘세계 제일의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을 제패하는 것이 곧 세계 제패의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먼저 소프트뱅크 차이나펀드 담당자가 선정한 중국 관련 기업 경영자와 만났다. 그들의 수만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손정의에게는 사람 보는 눈과 기업 장래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있다. 수많은 경영자를 만나면서 길러진 능력이다.

1999년 10월 31일 베이징 푸화빌딩에서 손정의와 마윈은 투자자와 경영자로 처음 만난다. 이 만남은 모건스탠리 아시아지역 투자분석가 서닐 굽타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으며, ‘6분 만의 담판’으로 일컬어지며 IT 역사상 명장면으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마윈은 손정의 앞에서 자신이 세운 ‘알리바바’의 개요, 현재 진행 중인 사업, 앞으로의 사업 방향 등을 설명해 나갔다. 그런데 채 6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손정의가 손을 내저으며 중단시키더니 대뜸 묻는 것이었다.

“당신의 회사에 투자하겠습니다. 얼마가 필요하신가요?” 아직 설명이 다 끝나지 않았기에 마윈은 의아해했다. 손정의는 알리바바의 성공 가능성을 꿰뚫어보고 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윈의 대답 또한 뜻밖이었다. “지금은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마윈은 골드만삭스로부터 500만달러 규모의 엔젤기금을 받아 놓고 있었다. 놀란 손정의가 물었다. “투자자를 찾고 있는 게 아니었나요? 그럼 왜 날 찾아왔습니까.”

“당신을 찾아온 게 아니라, 누가 나를 만나보려 한다기에 와 본 것일 뿐입니다.” 마윈의 성격을 뚜렷이 알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 기백과 결심이 손정의는 마음에 들었다. 손정의는 알리바바의 B2B모델이 야후 포털사이트 모델, 아마존 B2C모델, 이베이의 C2C모델에 이어 인터넷 ‘제4모델’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알리바바가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성공을 예감했다. 그 뒤 여러 협의를 거친 끝에 소프트뱅크가 2000만달러를 알리바바에 투자하고 지분 30%를 갖기로 확정되었다. 마윈에게 손정의는 이상적인 투자자였다. 손정의는 멀리 내다보고 장기적 발전에 주목할 줄 알았으며, 단기간 이익을 내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손정의는 마윈에게 또 한 가지 중대한 역할을 했다. 투자를 받은 뒤에도 알리바바는 좀처럼 흑자를 내지 못했다. 새 수익 모델이 필요했기에 마윈은 일본에 가서 인터넷 메신저와 온라인게임시장을 살펴보았다. 일본 방문 계획을 손정의에게는 굳이 알리지 않았는데, 일정 마지막 날 손정의에게서 자신을 만나고 가라는 전화가 왔다. 꼭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마윈이 손정의의 사무실에 들어가자 손정의가 대뜸 말했다.

“마윈, 알리바바와 이베이의 플랫폼이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나요? 다들 이베이가 넘지 못할 산이라고들 하지만, 우리 야후재팬은 해냈습니다. 알리바바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손정의는 야후재팬을 포털사이트만이 아닌 C2C전자상거래사이트로 운영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는 이베이와 어떻게 싸워 물리쳐 시장점유율 70%를 이루어냈는지 마윈에게 들려주었다.

“이베이 경영진은 아시아를 잘 모르고 그들의 전략은 아시아 시장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요. 승산은 충분합니다. 자금은 얼마든지 지원할 테니 한번 승부를 걸어보세요.” 마윈은 그동안 복잡했던 머릿속이 한순간에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 순간의 감격을 두고두고 회고한다. 이 만남에서 마윈은 전자상거래시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깨달았고, 알리바바를 제2의 야후가 되게끔 돕겠다는 손정의의 진심을 확인했다.

마침내 2003년 5월 10일 오늘날의 알리바바그룹을 있게 한 ‘타오바오닷컴’이 탄생한다. 마오는 대대적인 홍보를 위해 손정의에게 자금을 요청했고, 약속대로 손정의는 8200만달러를 투자했다. 중국 인터넷업계 사상 가장 큰 금액이었다. 거액의 투자자이면서도 손정의는 알리바바의 경영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고 마윈에게 모두 맡겼다. 손정의와 마윈은 반농담으로 서로 ‘첫눈에 반했다’고 말한다. ‘영혼의 반쪽’이라고까지 한다. 그야말로 보기 드문 두터운 믿음으로 연결된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