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와 정총리의 오해와 무지.
결론부터 얘기한다. 청와대가 얼마 전에 발표한 참고자료 '수도이전 및 분할과 관련한 6개국
사례'는 사실과 다르다. 다른 5개국의 사례는 잘 모르겠지만, 호주의 사례는 분명히 틀렸다.
캔버라(Canberra)는 실패한 수도가 아니다.
청와대의 분석은 이렇다. "1927년 건설된 호주의 수도 캔버라는 쾌적한 환경을 갖추고 있고
국립도서관 국립미술관 국립대학 등도 입주해 있지만 산업 기능이 약해 일자리 창출이 제한
되고 장기적으로 도시의 경제적 활력과 발전에 한계가 있다"는 것.
한편 국무총리실장(장관)은 "세종시는 베드타운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호주 캔버라 역시
행정수도로 계획된 곳이지만 주말이 되면 사람들이 다 시드니로 빠져나가 식당도 문 닫고 상가
도 없다"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캔버라에서 시드니까지 기차는 하루 두번밖에 안다니고,300km나 떨어져서 승용차로도 4시간 걸려
주말에 나가긴 커녕 캔버라에서 먹고 자고하므로 있을건 다 있다.
단지 호주가 다 그렇듯이 인구가 적고 전원도시로 조성되어 있을 뿐이다.
정총리역시 수도이전의 실패사례로 호주 캔버라를 예로 들었는데,
야당에서는 "청와대의 주장은 견강부회이며, 억지춘향과 다름 아니다. 브라질의
브라질리아, 호주의 캔버라, 터키의 앙카라 등은 대표적인 수도 이전 성공 사례"라고 반박했다.
어느 쪽의 주장이 맞을까?
다른 5개국의 사례는 차지하더라도, 캔버라에 관해서는 이곳 호주에 살고 있는 한인동포들이
나름대로의 답변을 해줄 수 있다. 또한 주변의 호주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더욱 더 분명한 답변
을 들을 수 있다.
'명품수도' 캔버라 뿔났다
캔버라 행정수도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는 청와대와 야당의 입장도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세종시 수정안'을 내놓은 MB정부가 대국민 홍보를 위해서 캔버라를 실패한
사례에 포함시켰다면 외교적 결례가 될 수 있다.
더욱이 불과 10개월 전에 이명박 대통령이 캔버라를 방문해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터인데,
마치 달나라 얘기처럼 말했다면 도덕성까지 의심 받을 수 있다. 정략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호주 수상실(한국의 청와대와 비슷함)에서 똑같은 얘기를 했다면 한국에서는 어떻게
반응했겠는가.
필자는 캔버라에 대해 좀 더 명확한 답변을 얻기 위해서 ACT관광청 관계자와 두 명의 호주
역사학자, 그리고 캔버라에 CSIRO를 유치하기 위해서 프로모션을 했던 전직 행정관을
인터뷰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캔버라가 실패한 도시라니요?"
특히 관광청 관계자는 상당히 불쾌한 반응을 보이면서 많은 자료를 필자에게 보내왔다.
캔버라의 탄생 배경과 변천 및 성장과정을 담은 역사적인 자료들이었다.
1908년에 연방수도로 결정 되어
캔버라는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원주민 '느거나왈(Ngunnawal) 부족'이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캄버라(Kamberra)로 불렀다. 그곳에 백인들이 나타난 건
1830년대였다. 백인들은 애버리진 땅을 빼앗아 농장과 목장을 만들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캔버라에 큰 변화가 일어난 건 1908년 연방수도 이전지로 결정되면서부터였다. 그때까지
호주의 연방수도는 빅토리주의 주도인 멜번이었다. 그로 인해서 라이벌 도시 시드니는
불만을 터트리던 중이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할 호주의 역사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주가 200여 년 전부터 한 국가였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6개 식민지 국가로 독자적인 국가 경영을 했다. 그래서 국경을 넘으려면 관세를 물어야했고.
그러던 중 1888년에 식민지 건설 100주년(Centennial)을 맞으면서 연방국가의 탄생을 꿈꾸
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의 반대에 부딪쳤다. 영국의 식민지 정책이 '분할통치(Devide and
Rule)'였기 때문이다. 식민지들끼리 앙숙이 되도록 만드는 ......
결국 1901년에 호주연방국가(Commonwealth of Australia)가 출범했고 그에 따른 연방수도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조건은 두 가지였다. 라이벌 도시들인 시드니와 멜버른의 중간쯤에 위치
해야하고, 호주 대부분의 도시가 해변에 위치한 점을 감안하여(안보적인 측면도 고려) 내륙에
행정수도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역사, 교육, 체육, 관광의 도시 캔버라
그런 과정을 거쳐서 캔버라가 새로운 연방수도로 결정됐다.
그런데 그 후에 알아보니 애버리진 언어 캄버라(Kamberra)의 의미가 '만남의 장소(meeting
place)'였다. 우연치고는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새롭게 출범한 호주 연방정부는 야심찬 마스터
플랜을 갖고 행정수도 건설에 착수했다. 우선, 세계 최고의 수도를 만든다는 목표로 인공도시
설계도를 국제 공모했다. 자연과 문명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현대도시를 설계하도록 유도한 것.
당선자는 시카고에서 활동하는 건축가 월터 B. 그리핀이었다. 그는 캔버라 중심부에 인공호수
를 만들어서 바둑판 모양으로 도시가 확대되도록 설계해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마침내 호주
정치의 심장인 국회의사당(옛날 의사당)이 1927년에 개원했다.
그후 캔버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정체현상을 보이다가 호주의 역사, 교육, 체육, 과학, 관광의
주요 도시로 발전했다. 특히 세계적 수준의 국립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전쟁기념관, 영화
자료관, 국립공원 등이 속속 문을 열어서 활기에 넘치는 도시로 거듭났다.
한인동포들에게도 인기를 모으는 꽃 축제(Floriade, 9-10월), 캔버라 다민족 축제(3월), 내셔날
민속 축제(4월)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축제가 1년 내내 열린다.
현재 캔버라 인구는 35만명,시드니 400만명,멘번 350만명 에 비하면 적은것 같지만 수도로써 활력을
유지하며 기능을 다하고 있다.
호주수도지역(ACT)이라고 불리는 캔버라와 주변 지역의 가계소득은 전국 평균의 1.5배다.
신분이 안정적인 공무원이 중심이어서 실업률도 낮다. 교육 수준은 전국 최고다.
25~64세 인구의 42%가 대졸자로 호주 평균(24%)의 거의 두 배다.
차분한 환경을 선호하는 공무원들에게 나쁜 조건은 아니란 뜻이다.
이쯤에서 얘기를 갈무리하자. '세종시 수정안' 때문에 딜레마에 빠진 MB정부의 입장을 모르
는 바 아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캔버라를 실패한 수도로 소개한 청와대의 행태는 지나
쳤다. 무식한건지 .....바보들인지 모르겠지만 힘들수록 정공법으로 가야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