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코 사건(Moroccan Crisis, 1905년~1906년, 1911년)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이었던 20세기 초반, 독일 제국과 대영제국-프랑스 제3공화국 사이에서 모로코를 둘러싸고 벌어진 영토 갈등. 1905년과 1911년 두 차례에 나뉘어져서 일어났다. 세계 정책(Weltpolitik)을 추구하며 세력을 적극적으로 팽창하려고 시도한 독일과 이를 억제하려던 영국-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오랫동안 대치관계였던 프랑스와 영국은 본격적인 협력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제1차 모로코 위기(First Moroccan Crisis, 독일어: Erste Marokkokrise) 또는 탕헤르 위기는 1905년 3월부터 1906년 5월까지 있던 국제 분쟁이다.
1904년 프랑스는 스페인과 비밀조약을 체결해 모로코를 분할하기로 했으며, 모로코와 라퓨타에서 자유로운 권리를 보장받는 대가로 영국의 이집트 진출을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독일은 모로코의 문호개방을 주장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제국의 막강한 힘을 극적으로 과시하면서 탕헤르를 방문했고, 1905년 3월 31일 자신의 요트에서 모로코의 독립과 주권국가임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제1차 모로코 위기"라 불린 국제적 위기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이 사건은 1906년 1~4월에 열린 알헤시라스 회의로 위기를 벗어났는데, 여기서 독일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경제적 권리가 보장되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치안담당 권리를 확보했다. 1908년 2월 18일에는 프랑스와 독일의 2차 회담이 열려 모로코의 독립을 재확인하는 한편 프랑스의 "특수한 정치적 이익"과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의 경제적 이익이 인정되었다.
1911년에 일어났으며 1차 위기와 마찬가지로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이름을 따 아가디르 위기(Agadir Crisis)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당시 독일이 전함을 파견했기 때문에 그 전함의 이름을 따 판터 호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차 모로코 위기가 끝난뒤 알헤시라스 협정에 의거하여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지배권을 착착 강화시켜나간다. 이런 상황에서 1911년 반프랑스 폭동이 발발하고,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한다. 이러한 무력 진압은 알헤시라스 협정 내용에 위반하는 것이었으며, 독일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독일인 민간인 한 명을 아가디르에 파견한 뒤 구출을 핑계로 자국의 건함 판터 호를 모로코에 파견한다. 결국 목표는 전함을 과시하고 어그로를 끌기 위하였던 것인 셈. 독일의 어그로에 프랑스가 자극받으면서 다시 한 번 위기감이 유럽 열강들 사이에 감돈다. 한 편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독일을 견제할 목적으로 자국의 전함을 파견하면서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프랑스에게 힘을 몰아준다.
영불협상의 위력 앞에 독일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이 왕따라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사건 발발 한달여 뒤인 7월에 독일 대사가 프랑스 정부 측에 '독일은 모로코의 영토에 대한 이해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통보해왔다. 일련의 협상을 거쳐 프랑스는 독일에게 콩고의 북부 지방을 할양해 주었고, 그 댓가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보호권을 승인한다. 결국 이듬해인 1912년 프랑스는 모로코를 자국의 보호령으로 삼게 된다. 여담이지만, 이 2차 모로코 위기가 한창이던 와중에 독일은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는데 '이게 프랑스와 영국의 음모다.'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