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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여시아문(如是我聞)-3
여인의 검은 우에서 좌로 일직선으로 지나가며 천지를 횡단(橫斷)했다. 검의 윗면
은 하늘이었고 밑면은 대지와 같았다. 마치 검이 지나간 궤적은 지평선과 같았다.
천지를 나누는 것 같은 일자혜검의 위력을 목격한 고 노파의 심정은 놀라움으로 가
득했다.
"훌륭해."
고 노파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게 고 노파의
입장이었다. 고 노파는 회초리를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가로지르더니 원을 그리
며 좌상단으로 부드럽게 후려쳤다. 그리고 좌상단에서 우하단으로 이동해 동심원
두 개를 횡렬로 그었다.
우웅~.
회초리가 만들어낸 두 개의 동심원 중에 오른쪽 원은 태산이라도 밀어낼 듯한 압력
을 뿜어냈고 왼쪽 원에서는 동정호라도 빨아들일 흡인력이 발생했다. 상반된 두
개의 힘이 교차하는 중간 부분에서 기괴한 진동음을 터트리며 일자혜검과 충돌했
다.
파바박.
천지를 가르는 일자혜검의 힘이 압력과 충돌하면서 주춤거리자 그 순간을 흡인력이
놓치지 않았다. 일자혜검은 고 노파의 회초리 앞에 무력하게 무너져 버렸다.
"할머니의 역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군요."
"호오~, 정말 놀랍구나. 아직 20대에 불과한 것 같은데 벌써 심검의 초입에 들다
니... 향후 십년이 지나기도 전에 세상의 모든 검객들이 네 발 밑에 무릎을 끓고 고
개를 떨굴 것이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그러나 십년은 제게 너무 긴 시간입니다."
"허~, 지금 네가 이룬 경지만 해도 나이를 초월한 것인데... 너무 욕심이 과하면 해
가 되는 법이다."
고 노파는 눈앞에 있는 여인의 성급한 점이 안타까웠다. 세상을 뒤져도 찾기 어려
운 인재가 너무 일찍 개화(開花)하는 바람에 일찍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
었다.
"세상은 저를 위해 기다리지 않습니다."
"안타깝구나.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여러 인재들을 보아왔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타고난 재능을 믿고 성급하게 무력을 높이는데 만 급급해 과욕을 부리다
자멸의 길을 걸었지. 지금 네가 이룬 무위만 해도 차후에 문제가 생기거늘..."
여인을 안타깝다고 바라보는 고 노파의 시선에는 인재를 아끼는 마음이 실려 있었
다. 고 노파가 보기에 여인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무공의 천재였던 것이다.
"단계를 밟으며 무력을 높이는 것이 정석임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편법이 얼마나
큰 위험을 초래하는 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무위를 더 올리겠다는 것이냐?"
"네. 저는 앞으로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것도 빠르게 올라야 하지요.
그래서 제가 할머니를 찾아 온 것입니다."
고 노파는 흔들리지 않는 여인의 의지에는 감탄했다. 그러나 뛰어난 인재가 망가
지는 것을 볼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 고 노파는 여인에게 매정하게 대하기로 했
다.
"돌아가라. 십년이 지난 뒤에 방문한다면 내 너를 기쁜 마음으로 반기겠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저의 목표는 너무 거대하고 강합니다."
"내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겠다. 돌아가라."
고 노파는 언성을 높이며 매서운 눈빛으로 여인을 응시했다. 그러나 여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 노파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나와 겨루면서 내 무학을 훔쳐 가겠다는 생각인가 보구나.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내 무예는 겉으로 드러나는 초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더
이상의 재롱은 용납하지 않는다."
"할머니 뜻대로 하세요. 저 역시 제 뜻대로 하겠습니다."
여인은 검을 들고 춤을 추듯 우아한 걸음으로 고 노파를 향했다. 화려하면서도 우
아한 여인의 검법은 무예가 아니라 춤에 가까웠다.
"검무(劍舞)!"
고 노파는 기이한 시선으로 여인이 펼치는 검무를 바라보다 회초리를 휘둘렀다.
웅~.
회초리의 움직임에 따라 바람을 가르는 강렬한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고 노파의
회초리를 여인은 춤추듯 우아한 자세로 피하더니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갔다.
따따당.
춤추는 뱀처럼 움직인 검은 회초리에서 쏟아져 나온 기파와 충돌했고 그 순간 콩알
볶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여인은 어깨를 위아래로 흔들어 덩실덩실 춤을
추며 고 노파에게 근접했다. 고 노파 면전에 도착한 여인의 춤은 갑자기 격렬한
율동으로 바뀌었다.
왼발과 오른 발을 번갈아 축으로 삼으며 연달아 회전하면서 검으로 기묘한 포물선
을 그렸다. 검이 허공에서 춤추는 뱀처럼 꿈틀거리자 강력한 바람이 일어나 먼지
를 빨아들여 시야를 가리게 했다. 마치 구름이 고 노파와 여인을 감싼 것처럼 보
였다.
"풍운변색(風雲變色)!"
고 노파는 여인이 사용한 검법이 무엇인지 알고 경악해버렸다. 처음 여인이 춤추
듯 움직일 때부터 이상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이제야 알아차렸다. 고 노파는 회초
리를 무서운 속도로 돌려 광풍을 만들어 먼지구름을 일시에 날려버렸다.
그런데 먼지구름이 모두 사라지자 여인도 흔적을 감추었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
았다. 그러나 고 노파는 여인이 눈앞에서 사라졌는데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승리를 예감한 듯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게 공손검법을 사용한 것은 너의 실수다."
여인은 하늘 위에서 고 노파를 향해 낙하했다. 고 노파의 머리 위까지 떨어진 여
인은 검을 들어 무서운 속도로 찌르기를 감행했다. 마치 별이 떨어지는 것 같은
찌르기였지만 고 노파의 미소를 없애지는 못했다. 고 노파는 날아오는 검선을 향
해 회초리로 찔렀다.
쩡.
검 끝과 싸리나무를 꺾어 만든 회초리 끝이 맞부딪쳤는데 귀청을 진동시키는 굉음
이 터져 나왔다. 회초리는 한 치의 손상도 없었으며, 허공에서 낙하해 공격을 감
행했음에도 고 노파는 뒤로 반걸음도 밀려나지 않았다.
회초리와 검이 맞붙어 있어 허공에 매달린 여인은 뒤로 후퇴하기로 정했다. 그런
데 검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회초리에서 강력한 흡인력이 쏟아져 나와 빠지지 않았
고, 기묘한 힘의 균형으로 인해 여인은 아직도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이런..."
여인이 당혹해하자 고 노파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회초리에 적용되고 있는 흡인
력을 순식간에 반탄력으로 바꾸어 버렸다.
"아악~."
검병을 통해 들어온 강력한 힘이 내장을 뒤흔들어 버리자 여인은 피를 토하며 날아
갔다. 그러나 허공을 훨훨 날아가던 여인은 마지막 힘을 짜내더니 고 노파를 향해
일장을 날려버렸다.
윙~.
여인의 손바닥에서 녹색 기류가 쏟아져 나오더니 고 노파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고 노파는 녹색 기류를 보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녹색 기류가 면전까지 도달하
자 고 노파는 회초리를 들어 후려쳐 버렸다. 녹색 기류는 강한 일격에 땅바닥을
향해 급선회했다.
팍.
고 노파의 두 발 앞에 세 치 두께의 녹색 장인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이, 이건 아버님의 무공인 목표음장..."
고 노파는 시선을 여인에게 돌렸다. 여인은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균형을 잡더니
부드럽게 착지했다. 그러나 고 노파의 공격에 엄중한 내상을 입었는지 뒤로 십여
걸음이나 물러서더니 선명한 붉은 피를 토했다.
"누구에게 목표음장을 배웠느냐?"
고 노파의 냉랭한 음성은 여인의 흐릿한 의식에 차가운 냉수를 부은 것과 같은 효
과를 냈다. 거의 쓰러질 듯 위태로웠던 여인은 꼿꼿한 자세를 잡고 대답했다.
"무당산에서 보낸 비급을 보고 익혔습니다. 할머니."
"뭐라고! 이런 쳐죽일 것들이 있나. 목표음장이 여인에게 어떤 폐해를 주는지 알고
있으면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고 노파는 푸른 하늘을 붉게 만들 정도로 격분했다.
"목표음장의 폐해라면..."
"여인에겐 치명적이지. 음한 계열의 기공인 목표음장은 자궁을 얼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석녀로 만든단다. 도를 익혀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할 도인이 어떻게 여인에
게 치명적인 무공인줄 알면서 목표음장의 비급을 전해 주었단 말인가. 그 정도로
무당이 타락했단 말인가."
"할머니는 그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그리고 비급에는 그런 설명은 없었어요."
여인의 질문은 당연했다. 목표음장을 익히고 있는 자신조차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은 이상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고, 또한 고 노파가 말한 폐해가 진
실이라면 자신에게도 치명적인 내용이었기에 여인은 쓰러지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막았다.
"목표비마는 내 부친이란다. 그리고 비급에 폐해에 대한 부연 설명이 없는 것은 아
버님도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
고 노파는 왼 손을 하늘 높이 들었다가 땅바닥을 후려쳤다.
퍽.
고 노파의 왼 손바닥에서 솟아난 선명한 녹색 장인은 목표음장이었다. 세 치 두
께의 녹색 장인 옆에 무려 다섯 치가 넘는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목표음장이군요."
"그래. 바로 목표음장이란다. 내가 산파를 하고 사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가 바
로 목표음장의 폐해 때문이란다. 그리고 무당파에 그 사실을 오래 전에 알려주었
지."
고 노파의 안색은 씁쓸하게 변해버렸고 여인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그런데 네 이름은 무엇이더냐?"
"제 이름은 악소채입니다. 할머니."
여인의 정체는 악소채였다. 태을궁 지하미로에서 경운도장과 함께 행방을 감추었
던 그녀는 나름대로 무공을 완성했다. 그러나 무당의 오만을 무너뜨리기에는 악소
채의 역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악소채의 역량을 높이는데 한계를 느낀 경운도장은
자소전에서 우연히 찾았던 목표비마의 비망록을 기억해 냈다.
강호의 피비린내 나는 삶에 염증을 느껴 무당에 투신한 목표비마가 죽기 전에 무공
비급과 함께 남긴 비망록은 수많은 강호의 비사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경운도장이
기억한 부분은 고 노파에 대한 것이었다.
비망록에는 고 노파와 막설 수 있는 무당 검법은 오직 태극혜검이라고 쓰여져 있었
고 이름과 사는 곳이 쓰여져 있었다. 그러나 목표비마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한 경운도장은 악소채에게 고 노파를 만나보도록 종용(慫慂)했던 것이다.
악소채는 고 노파를 만나고 난뒤 다시 한번 세상이 넓으면서도 좁다는 것을 실감했
다. 고 노파 역시 악소채의 성과 악가쾌검을 연상해 산동악가의 이름을 유추해내
며 놀라워했다. 송자헌의 집에서 우연히 보았던 악삼의 무위가 다시 한번 기억난
것이다.
"너도 산동악가의 아이더냐?"
"네. 그렇습니다만..."
악소채는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내상이 심해 더 이상 서있을 여력이
없었고 의식마저 몽롱하게 변해버렸다.
"이런!"
악소채가 의식을 잃으려고 하자 고 노파는 놀라 가까이 다가갔다. 거의 의식을 잃
어버린 상태나 다름없는데도 악소채는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일어나려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의지가 강한 아이구나."
고 노파는 악소채의 강한 의지에 감탄하며 맥을 잡았다.
"응... 아니 이건!"
악소채의 신체에 흐르는 진기가 크게 세 종류에 달하자 고 노파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냐? 하나는 목표음장의 내공이고, 다른 하나는 도가 계열의 내공인데... 그
렇군 무당의 내공이야. 그런데 이 양강 계열의 내공은 뭐지?"
그릇 안에 불과 얼음을 같이 집어넣은 것 같은 악소채의 상태를 확인한 고 노파의
심정은 분노로 가득했다.
"도대체 이 아이의 사부는 어떤 놈이야."
고 노파는 씩씩거리다 악소채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억지로 내력을 주입했다간
무슨 위험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악소채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악소채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한 식경이 지나서였다.
"이제 정신을 차렸느냐?"
"네. 할머니."
"도대체 네 사부는 누구냐? 정신은 제대로 박혀 있는 자였느냐? 아니면 무당산 전
체가 미쳐서 돌아가고 있는 것이냐?""
"할머니. 고정하세요."
고 노파는 흥분해 분노를 표출하자 악소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악소채는 자
기 신상을 밝혀 고 노파의 관점을 돌리게 만들어 분노를 잊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제 사부님은 무당의 인물이 아닙니다. 강동오괴 중에 한 분이신 비연자가 제 사부
님입니다."
"목추영이 네 사부란 말이야? 그럴 리가..."
"네 할머니. 그런데 제 사부님을 아시나요?"
"대충 아는 것에 불과하지. 하지만 목추영의 역량으로는 너 정도 인재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게다가 목추영이 무당의 검학을 익혔다는 말은 들어본 적
도 없다."
고 노파는 턱도 없는 말은 하지 말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제가 익힌 무당의 무공은 자소전주인 경운도장에게 배운 것이에요."
"자소전주라면 무당의 모든 무공을 안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네 내공은 어떻게
된 것이냐? 무당의 내공은 그렇다 치더라도 양강의 내력을 익히다니..."
"열양공을 말씀하시는군요."
"열양공! 혹시 쌍면군자 기 노괴의 열양공을 익힌 것이냐?"
고 노파는 깜짝 놀라며 악소채의 복부를 만지며 질문했다.
"네. 그런데요."
악소채는 고 노파가 갑자기 자기 배를 만지자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너는 목표음장의 폐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네! 그 말씀은..."
"기 노괴의 열양공이 네 자궁을 지켜주었다. 원래 반음양의 기 노괴는 매달 성이
전환될 때마다 신체에 가해지는 폐해를 줄이기 위해 열양공과 한음공을 만들었지.
가만... 그러고 보니 목표음장의 공력과 열양공이 무리 없이 전환되고 있던데, 혹시
이합진결도 얻었느냐?"
"네, 그렇습니다. 할머니. 그런데 쌍면군자 기사의 선배님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시
는군요."
"당연하지. 기 노괴와 나는 앙숙이었다."
고 노파는 여자로 분한 기사의와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그런데 기사의가 남자로
변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부터 고 노파는 심한 구박을 가했다. 쌍면군자 기사의 음
양팔반장은 고 노파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여간 잘 된 일이다. 이번만큼은 염라국에 가있는 기사의에게 감사의 마음이 드
는구나. 특히 이합진결까지 네게 있다니 금상첨화나 다름없다."
"이합진결이 그리 뛰어난 무공인가요?"
"익히고 있는 당사자나 만든 인물이나 하나같이 얼마나 큰 보배인줄 모르는구나.
이합진결은 내력을 나누거나 합칠 수 있어 여러 종류의 내공을 익혀 문제가 발생한
무인들에겐 그 어떤 명약보다 훌륭하다."
"그건 알고 있어요. 저 역시 상반된 내공을 수련한 데다 산동악가의 내공과 무당의
내공까지 익혔는데도 문제가 없었지요. 하지만 그 외에 특별한 점은 없었어요."
악소채는 이합진결을 수련한 덕분에 여러 종류의 내력이 충돌하는 것을 방지해와
그 효과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 노파가 흥분할 정도로 뛰어난 묘용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의아해했다.
"그건 네가 이합진결을 자세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익힌 공손팔결(公孫八
訣)만 해도 정통의 방법으로 수련하면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 걸린다. 너 정도 수
준의 역량을 가진 경우라도 오년은 넘게 걸리지. 하지만 이합진결을 이용해 수련하
면 반년 안에 익힐 수 있다."
"공손팔결?"
생소한 무공 명칭을 들은 악소채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 노파를 바라보았다.
"공손팔결은 검결인 동시에 일종의 내공법이라 할 수 있다."
고 노파는 악소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손대랑의 무학과 연관이 있나요?"
악소채의 질문은 갑자기 무공을 전수하겠다는 고 노파의 의도가 공손대랑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나온 것이다.
"그렇단다. 공손대랑의 무공은 두 종류로 나누어져 전래됐는데 하나는 형(形)을 담
은 공손검법이고 다른 하나는 내공과 검결이 담긴 공손팔결이다."
"그럼 그 두 개가 합쳐져야 진정한 공손검법이군요."
공손검법을 익힐 때마다 이상할 정도로 연결이 되지 않아 단초로만 겨우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악소채는 그동안 의문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단다. 너는 공손검법과 공손팔결을 융합해 제 2의 공손대랑이 되야 한다. 내가
전력을 다해 도와주겠다... 아~, 드디어 육궁낭낭(六宮娘娘)의 유언을 지키는구나."
목표비마가 무당에 투신하는 바람에 고 노파는 아버지의 원수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었다. 살기 위해 황궁의 시녀가 된 고 노파에게 나타난 인물은 궁중의 여인들에
게 전승되던 공손팔결의 마지막 전승자였던 육궁낭낭이었다.
상궁나인들을 관리하는 육궁낭낭은 고 노파를 보는 순간 공손팔결의 전승자로 낙점
했다. 덕분에 고 노파는 편안한 궁중생활을 즐기며 공손팔결을 수련할 수 있었고,
육궁낭낭이 노환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이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원에서 안락하지는 않지만 마음만큼은 편안하게 살게된 고 노파였지만 항상 마음
에 걸리는 것은 육궁낭낭의 유언이었다. 육궁낭낭은 더 이상 공손팔결의 전승자가
유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공손검보를 찾아내 제 2의 공손대랑이 탄생하는 게
그녀의 꿈이었다.
그러나 공손검보를 찾을 방법은 없었고 공손팔결마저 익힐 인재를 얻지 못한 고 노
파의 마음은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가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 공손팔결을 전수할만
한 인재가 공손검법을 가지고 눈앞에 나타났으니 고 노파의 마음은 하늘을 날것 같
았다.
"그럼 제게 무공을 전수할 마음이 드신 것은 육궁낭낭의 유언 때문이군요."
"그렇단다. 너와 나의 인연은 공손검법 때문이라 할 수 있지. 자 이제 그만하고 일
단 내 집으로 가자꾸나."
"알았습니다 할머니. 그런데 아까 하신 말씀 중에 너도 산동악가의 인물이냐는 질
문이 마음에 걸리는데 혹시 저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셨어요?"
고 노파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악소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대답해주마. 근 두 달 전에 우리 마을을 방문한 산동악가 출신의 20대
청년을 본 적이 있었단다. 그런데 그 청년의 무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있더
구나. 나는 아직도 그 청년을 불가사의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20대 청년이라고요? 이름을 아시나요?"
"악삼이라고 했지."
"악삼... 사, 삼이가..."
악소채는 순간적으로 넋을 잃어버렸다. 경운도장의 지도를 받으며 검을 수련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과 인내의 연속이었다. 악소채는 무당산에 볼모로 가있는 친동생
과 악삼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수련에 박차를 가했었다.
그만큼 악삼은 악소채의 마음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악삼의 이름을 듣게 되자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또한 악삼이
너무도 그리워졌다.
"잘 아는 인물이구나."
"네. 할머니.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악소채의 눈동자가 아련하게 변하자 고 노파는 입을 다물었다. 고 노파는 질풍노
도(疾風怒濤)와 같은 청춘이 겪는 고뇌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 어떤 충고나
위로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 침묵한 것이다.
고 노파와 악소채가 하산한 뒤 일 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산 정상에 한 노인이 나
타났다.
"고 파파의 무예가 저렇게 가공할 줄은 몰랐군. 과연 이원은 와호장룡(臥虎藏龍)의
대지(大地)라 부를 만 하구나."
"그렇습니다. 아버님. 어떻게 저런 고수들이 함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노인의 뒤에 갑자기 나타난 40대 중반의 중년의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강호에는 기인이사들이 가득하며, 또한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경솔한 행동
을 피하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중년의 남자는 공손하게 시립(侍立)한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찾아온 것으로 보아 큰 변동이 생긴 것이구나."
"그렇습니다. 아버님. 다름이 아니오라 구류방이 갑자기 환희궁을 공격하기 시작했
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구류방을 움직인 것은 이원의 신녀가 명령한 것이다."
"그럼 구류방이 이원의 하부조직이라는 정보가 정확한 것이었군요."
중년의 남자는 오래 전에 본 구류방의 상부조직에 관한 보고서를 기억해냈다.
"나도 이번에 알았다. 구류방주가 이원의 신녀에게 명령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 지난 수십년동안 강호에서 발생했던 의안(疑案)들은 모두 이원에서 주도했
다는 추측도 신빙성이 있는 것이군요."
"그렇다. 그뿐만 아니라 십이년전 남해방을 위시한 세력들이 천익을 공격한 것도
이원의 신녀가 뒤에서 모략을 꾸민 것이다."
"아니 그럼 매부를 이곳에 계속 두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중년의 남자는 살막의 희부성이었다. 그리고 희부성의 부친은 뜻밖에도 이원에 살
고 있던 희 노인이었다.
"천익은 괜찮다. 강호전체를 통 털어 송자헌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실력자는 오
직 그 하나뿐이 없다. 이원에 있는 그 누구도 송자헌의 털끝하나 건들이지 못한다."
"후우~, 그렇기는 합니다만..."
희부성은 걱정이 앞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송자헌의 역량을 생각한다면 네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송자헌이 강한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십이년전 매부조차 연수합격을 견디
지 못하고 죽음직전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허허허, 사실 사돈이나 천익의 역량은 가공할 정도다. 그러나 사돈과 천익에 버금
가는 인물은 무려 여섯 이나 된다."
희부성은 부친이 말하는 일곱 사람이 누구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섯 사람밖에 나오지 않아 남은 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삼대이인과 이원의 양대고수를 말하는 겁니까?"
"송자헌은 천익보다 한 수위다. 삼대이인 중에 검성 일양자, 소림의 일묘선사와 이
원의 삼대고수인 신창 서문종, 귀면도(鬼面刀) 동문보, 고 파파 이 다섯 사람과 혈
모니 연화와 악삼이라는 청년이 천익과 역량이 비슷하다."
"악삼이 그 정도 고수입니까?"
희부성은 경악을 감추지 못한 채 반문했다.
"천익과 충분히 겨룰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 단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이원에
오기 전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순식간에 천익과 겨룰만한 역량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게다가 고 파파와 함께 있는 악소채라는 낭자도 반년 안에 그 정도 역량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그, 그런... 아무래도 산동악가에 대한 자료를 수정해야겠군요."
"산동악가의 새로운 정보를 구하는 것보다 악가의 청년들을 알아보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아버님."
희부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연남삼수나 강동오괴에 대해 나는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악삼
이나 악 낭자는 전부 그들이 키운 제자들이다. 악가의 인물들과 청년들의 차이가
큰 것은 그들의 역량이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악삼
과 악 낭자만 강자라는 법은 없다.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강자가 악가의 청년 중
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희부성은 부친의 뜻을 그제 서야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희 노인은 시선을 이원을 향한 뒤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왜 그러십니까? 아버님."
한숨을 내쉰 희 노인의 안색은 짙은 음영이 가득했다.
"너와 나는 자객이니 무위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사돈이나 천익은 다르다. 사실
삼대이인과 이원의 양대고수는 그에게 패배한 뒤 불철주야(不撤晝夜) 무공에 매달
려 역량이 상승했다. 그런 일만 없었다면 사돈이나 천익은 현재 이룩한 경지로 천
하무적이 됐을 것이야."
"과거는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차라리 그들을 어떤 방법으로 없애느
냐를 생각하는 게 현명합니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패한 자와 그를 알지 못한 자의 차이는 너무나 크
다."
희 노인은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희부성은
부친의 걱정을 덜어낼 방법이 없어 속으로 탄식을 하다가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유
도하기로 했다.
"아버님. 질녀가 드디어 움직였습니다."
"군아가 암영대를 사용한 것이냐?"
"네. 아버님."
"그래... 그렇다면 본 막도 바빠지겠구나."
희 노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보기에도 섬뜩해 보이는 살인자의 얼굴로
변해버렸다. 희부성은 사해방에서 일어난 일을 희 노인에게 조목조목 알려주었다.
희 노인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잠시 고민하더니 희부성에게 몇 가지 명령을
내렸다.
희부성은 희노인의 명령을 마음 속에 담고 조용히 사라져버렸다. 희 노인은 희부
성이 사라지자 이원을 향해 걸어했다. 하산하는 희 노인의 안색은 어느새 이원에
서 생활하던 표정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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