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장의 내용
이 장에서는 유명한 왕안석의 신법에 대하여 상술하겠다. 신법이 시행되기에 이른 경위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하였는데 북송 제6대의 황제 신종은 즉위후 곧 인종조이래의 명신 왕안석을 등용하여 신법을 행하였으며, 연래의 국가재정의 위기를 해소하고 관호․형세호의 수확을 억제하여 농민을 보호하였으며 농업의 발전을 꾀함과 동시에 대상인의 이익을 억압하여 그 이익을 관에 거두어들였고, 보갑(保甲)을 결성하여 향촌의 치안을 유지하고, 아울러 국방의 강화에 밑천으로 하려한 것이다.
즉, 왕안석은 우선 청묘법(靑苗法)을 시행해 저리로 농민이나 전호에 청묘전을 빌려주고, 단경기(端境期, 보릿고개)의 농민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호민의 고리대적 수탈을 방지했다. 다음으로 면역법(免役法)을 실시하여 아전 등 차역의 무거운 부담에 의하여 농민이 파산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고, 면역전을 징집하여 차역을 담당할 사람을 모집하였고, 관호․형세호 등으로부터도 조역전을 징수하여 겸병을 억제하려고 했다. 또 보갑법(保甲法)을 시행해 농촌에서 보갑을 조직하고, 도적을 잡아 농촌의 치안을 유지하였으며, 개봉부계나 하북․하동․섬서의 여러 로에서는 보갑에 교련(敎練)을 실시하여 이를 향병으로서 활용했다. 게다가 보마법(保馬法)을 실시하여 개봉부계나 섬서의 보갑․의용에 말을 사육시켜 군마로 이용했다.
조세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을 시행하고, 토지를 측량하게 하여 그 비척에 따라 이를 5등(후에 10등)으로 나누어 과세하고, 부담의 불균형의 시정을 꾀하였다. 이것은 개봉부계를 비롯하여 경동서로, 하북서로 등 화북의 여러곳에서 행해졌고, 구법당 지주들의 은전(隱田)이 다량으로 발견되어 재정을 윤택하게 했다. 또 농전수리법(農田水利法)에 의하여 강남에 위전(圍田)이나 우전(圩田) 등의 수리전을 대규모로 개발하여 제방을 수축시켜 농업생산의 증대를 꾀하였다. 북방에서는 개봉부나 경동․하북․하동의 여러 로에서 일종의 객토법인 어전법(淤田法)을 행해 많은 척전(瘠錢)을 옥토로 바꾸었다. 균수법(均輸法)은 대상인이 상품의 가격을 조작하고 이익을 챙기는 것을 방지하고, 운수비를 줄이고 물가 조절을 하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또 같은 목적으로 시역법(市易法)을 행하였는데 이 법에서는 상인에게 저리의 자금을 빌려주는 방법이 전국적으로 성행했다.
이와 같은 신법의 시행과 함께 사농사(司農寺)에 관할되어 재상에 장악되는 국가재정이 많아지고 재정상 차지하는 삼사의 지위는 매우 저하되었다. 그래서 삼사와 사농사의 재정의 통합이 꾀하여 지고, 원풍의 관제개혁에 의하여 삼사의 재정은 호부좌조(戶部左曹)에게, 사농사의 그것은 호부우조에게 속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원풍관제개혁의 요점이고 또 신법의 총결산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신법의 정책은 어느것이나 그 시대의 악습(時弊)를 예리하게 지적한 것이었기에 그만큼 이것에 의하여 이익을 잃은 관호형세호․호상․황족의 반대는 대단한 것이었다. 나중에도 기술하겠지만 신종의 사후, 북송시대를 통하여 신법당과 구법당과는 다섯차례에 걸쳐 정권의 교체를 하였고, 그와 함께 정부의 정책도 종종 변경되었는데, 두 파는 점차 정책수준뿐만 아니라 서로 상대를 배척하고 복수하는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
휘종조에 오랫동안 재상을 맡았던 채경은 정치적 신념을 가지지 않는 기회주의자로, 휘종에게 유희․오락을 권하고, 교묘히 그 뜻에 영합하여 권세의 자리를 유지했지만, 신법정책을 악용하여 가렴주구에 전념하고 천하가 원한을 가지게 하여 , 결국 북송을 멸망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그런데 채경은 신법당이었기 때문에 북송을 멸망시킨 것은 신법당이라는 것이 되었고, 남송이 되자 정권은 구법당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신법의 창시자인 왕안석이 좋게 이야기될 리는 없었다. 남송시대 구법당이 쓴 《신종실록(神宗實錄)》과 《사조국사(四朝國史)》를 기초로 하여 원말에 편찬된 송일대의 정사인 《송사》의 왕안석전도 결코 그를 좋게 기록하고 있지는 않다. 남송의 큰 유학자인 주희 등도, 왕안석을 비난한 인물의 한사람이었다. 한사람의 인간이 이루어낸 업적이 그 시대에 있어서는 말할것도 없고, 후세에 있어서 정당하게 평가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왕안석의 예는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송은 구법당의 천하가 되었는데, 구법당의 시책에는 신법당의 정책을 계승하는 것이 많다. 예를 들면 경계법(經界法)은 토지를 측량 또는 신고하게하여 농민의 역이나 세 부담의 균형을 이루었다. 경계법은 고종때 거의 전국에서 행해졌는데, 이것은 신법의 방전균세법의 계통을 잇는 것이었다. 면역법에서 면역전을 징집하는 것도, 남송에서는 그대로 행해졌다. 또 보갑법을 역법(役法)으로 바꾸는 일을 하였는데, 그 대신에 보갑법 본래의 목적을 위하여 보오법(保五法)이 설치되었다. 또 수리전의 개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것을 보아도 왕안석의 신법이 얼마나 시의에 적합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실로 왕안석은 시대를 앞서간 인물隔? 헛되이 옛것을 숭상하고 현재를 속이는 허황한 유가사상을 가진 이는 아니었다. 그는 시세가 움직이는 것을 잘 동찰하여 그 구제를 기도한 현실주의자이고 더욱이 원대한 이상가이기도 했다.
2) 왕안석의 등장
① 왕안석의 생애
앞서 말했듯이 송초이래, 사회경제가 크게 발달하고 송의 재정은 팽대한 것으로 되어왔는데 그 국가재정도 수지가 적자가 되었다. 그래서 신종조(1067~1085)가 되어 정치․사회경제․재정의 각 방면에 걸쳐 큰 개혁이 실시되었다. 이것이 왕안석의 신법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으로 이것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북방 지주출신의 노정객(老政客)․큰 유학자를 중심으로 한 기성계급 현상유지파인 구법당과의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왕안석은 무주 임천(강서성 임천현)의 사람으로 자를 개보(介甫)라고 하고, 호는 반산(半山)이었다. 인종 경력1(104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양주의 막직관인 섬서회남절도판관(陝西淮南節度判官)을 수여받아 지은현(鄞縣, 절강성 영파시)를 거쳐 황우3(1051)년에는 서주(안휘성 괴녕현)통판이 되었다. 지화원(1054)년에 집현교리(集賢校理)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구양수의 권유로 군목판관(群牧判官)이 되었고, 나아가 지상주(常州), 제점강동형옥(提點江東刑獄)을 거쳐 삼사탁지판관(三司度支判官)이 되었다. 가우5(1060)년, 유명한 《만언서(萬言書)》를 바쳐, 천하의 폐정을 들어 선왕의 정치를 본받아 변혁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이재(理財)의 도를 강의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다음해 6년에는 지제고가 되었는데 8년에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관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 다음에 즉위한 영종때에는 부름이 있어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왕안석은 19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집은 가난하고 많은 동생들을 키우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사회의 악에 대하여 눈을 떴다. 오랫동안 지방관을 역임한 것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수입이 많은 관직을 희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왕안석은 지방의 실정에 밝고, 송조의 오랜 폐정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치평4(1067)년 정월, 영종이 죽고 겨우 19세인 신종이 즉위하자, 젊고 기예로웠던 새로운 황제는 영종이 희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개혁을 단행하고 여러해 동안의 묵은 폐단을 한꺼번에 제거하려고 했다. 게다가 당시 묘당(廟堂)에 있던 중신들 가운데에는 함께 큰일을 행함에 충분한 기개나 식견을 갖춘 인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신종은 영왕(潁王)이었을 때부터 왕안석이 인물이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즉위하자 그를 강녕부(남경)의 지사로 임명하고, 곧 중앙으로 불러 한림학사겸 시강(翰林學士兼侍講)으로 삼고, 그 정견을 듣고 점점 그의 의견에 공감하여 , 희녕2(1069)년, 왕안석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하여 신법을 입안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재주가 썩 뛰어난 신종과 명민하고 의지가 굳센 대정치가인 왕안석은 손을 잡고 난국의 타개에 매진하게 되었다. 왕안석은 묘당의 중신의 반대를 예측하고 희녕2년, 천자직속의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라고 하는 정책을 심의하고 입안하는 설치하여 , 중서문하성으로부터는 왕안석, 추밀원으로부터는 그 장관이었던 진승지(陳升之)가 나와 신법을 심의․실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해인 희녕3년이 되자 왕안석은 동중서문하평장정사로 승진하고 내각의 최고책임자가 되었으므로 수구파인 사마광의 강한 반대도 있어 제치삼사조례사를 폐지했다.
이와 같이 하여 신법은 하나하나 실시되었는데, 모두가 실로 시의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만큼 신법에 의하여 이익을 제한당하는 관호․형세호나 호상․고리대업자의 반대는 매우 격렬했다.
왕안석은 강고한 신념을 가지고 망설이는 신종을 격려하면서 신법을 추진했다. 희녕7(1074)년 일단 하야하고, 다음해에는 다시 묘당으로 복귀하여 이후 2년간 신법의 시행에 진력을 다했는데 희녕 9년에는 왕안석의 행위가 신종에게 싫증나게 하여 사직하고 강녕(江寧)에서 여생을 보냈다. 신종 사후, 신법의 폐지를 듣고 시세를 한탄하면서 죽었다. 신진의 준재관료로서 장래를 기대받고 있던 사랑하던 아들 왕방(王雱)의 죽음도 왕안석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② 왕안석의 의도
종래 왕안석의 신법은 부국강병책이고, 《주례》를 인용하여 이것을 권위롭게 한 것이라고 일컬어졌다. 이 신법이 인종조 이후의 국가재정 적자를 해소하고, 강력한 민병제도를 창설하려고 해서 이것에 권위를 지우기 위하여 유가의 시조 공자에 의하여 이상인물시되는 주공(周公) 단(旦)이 정했다고 하는 서주의 제도를 상술한 《주례》를 인용하였던 점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은 이상의 시대를 옛날에서 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여겨진다. 필자는 겸병(호민이나 상인)을 억누르고 농민을 보호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중국전통의 억상중농정책도 가미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청묘법․면역법․방전균세법 등은 모두 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려고 한 것이고, 농전수리법이나 어전법은 농업생산을 증대시키려고 한 것이다.
또 보갑법은 강병책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농촌의 치안유지를 꾀함과 동시에 새로운 농촌질서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이들의 법은 모두 중농정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 균수법이나 시역법은 대상인을 억누르고, 그 이익을 관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것이다. 보마법은 강병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신종은 앞서 말했듯이 원풍의 관제개혁을 하는데,(제1장 참조) 이것은 주로 신법의 실시에 동반하는 재정개혁의 결과 행해진 것 같다. 즉 신법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새로이 사농사의 재정이 가능해져, 국가재정은 종래의 삼사와 사농사로 이분되었는데, 이것을 통합하기 위하여 삼사가 폐지된 결과, 이것을 중심으로 한 당의 육전(六典)으로 돌아갈려는 관제개혁이 실시된 것이다.(제1장 참조)
3) 청묘법의 기원
① 섬서의 청묘전(靑苗錢)
당말부터 오대에 걸쳐서 앞서 말했듯이 농민은 보릿고개에 비단이나 곡물을 호민(豪民)에게 미리 팔아 돈을 빌고, 비단과 곡물이 생겼을때 이것을 갚았다. 이 호민의 역할은 관에서도 하고 있었다. 송초에는 섬서로에서는 관이 이 청묘전의 법을 행하고 있었는데 1027(천성5)년에 이것을 그만두었다. 그 후 1048(경력8)년이 되어 섬서전운사인 부영(傅永)이 이 청묘전의 법을 시행하였다. 그 해 봄 섬서에서는 기근뒤에 이어 농민은 종자나 식량이 없어 괴로워하고 있었지만 상인이 곡물을 팔지 않아서 곡가가 등귀하고, 호민은 농민에 돈을 미리 빌려주어 높은 이자를 챙겼다. 그래서 부영은 돈 2백80만관을 내어 농민에게 미리 빌려주고 보리가 수확된 후에 그 보리를 갚게하여 가벼운 이자를 취하고, 보리 40만석을 얻어 군량으로 돌렸다.
이 법은 부영의 다음에 섬서전운사가 된 이참(李參)에 의하여 답습되었고, 이것이 왕안석의 청묘법의 기초가 되었다. 마침 이 무렵 왕안석도 앞서 말한 명주 은현(절강성 영파시)에서 농민에게 미곡을 빌려주고, 이자를 내게 하였고, 미곡이 수확되었을 때 그것을 갚게했다. 이 방법은 왕안석의 청묘법에도 받아들여져, 청묘법에서는 원칙적으로 청묘전을 대출하는데, 청묘곡을 빌리고자 하는 자는 이를 허락하였다.
이와 같이 관이 곡물의 수확전에 돈을 미리 빌리는 것은 앞서 말한 화적에서도 행해졌다. 즉 하동로의 화적은 태종조부터 시작되었고, 변경에 주둔하는 병사의 식량이나 말먹이를 조달하기 위하여 쌀․조․콩과 풀을 수확 전에 돈을 지급하여 사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에 관은 이것의 매입가격을 시가보다 높혀 우대하였는데, 나중에는 시가가 매입가격보다 높아져도 원래의 가격을 그대로 두어 결국에는 매입가격을 반이하로 떨어뜨려 강제적으로 농민에게 할당하여 농민을 괴롭혔다. 이것은 왕안석의 청묘법에서는 전혀 채용되지 않았고, 곡물의 중가(평균가격)을 미리 빌어주어, 강제적으로 농민에게 빌려주는 것을 금지했다.
또, 1033(명도2)년, 범중엄이 회남에서 화적했을 때에도 농민에게 곡가를 가불해주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농민이 수확후 곡물을 팔려고 하면 상인이 고의로 곡가를 낮게 사들여 관의 화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곡물이 상인의 집으로 들어가면 곡가를 높여서 팔기 때문에 관에서는 고가로 화적을 하여 , 관전이 많이 결손되었다. 그래서 범중엄은 농민에게 후술할 보갑을 편성시켜 시가에 의하여 돈을 미리 빌어주어 곡물을 사들였고 관이 이를 높은 가격으로 사들여 결손을 막았다.
이 방법은 1051(황우3)년, 맹주 하양현(하남성 맹현)의 지현인 진양(陳襄)도 시행하려고 했다. 이 때 하양현에서는 가뭄 때문에 중소농민은 식량을 구하는데 애를 먹었고, 호민이나 상인(겸병의 가)로부터 밀의 청묘로서 돈을 가불했는데, 호민이나 상인는 밀이 수확기의 가격 1두60문에 대하여 1두 30여문으로 가불해 주었다. 관은 이들의 밀을 호민이나 상인으로부터 1두 90문에서 120문으로 화적했다. 따라서 밀의 청묘전을 가불한 농민은 1두당 30문의 이자를 빼앗겼고, 관의 화적은 수확시의 시가보다 30문에서 60문이나 높은 가격으로 사들여졌다.
이와 같이 하여 호민이나 상인는 1두에 대하여 60문에서 90문의 이익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양은 밀 1두 60문으로 농민에게 가불하고 10호를 1보로 하여 보갑을 편성시켜, 상등호를 갑두(보갑의 장)으로서 이를 보증하게 하고, 이들의 청묘전을 빌려주어 하세와 함께 밀을 납부하도록 했다.
② 화적(和糴)의 가불제와 상평창․광혜창(廣惠倉)제도
이상과 같이 범중엄이나 진양의 화적은 농민에게 돈을 가불하였는데, 여기서는 곡물의 시가를 지급하였으므로 이자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은 종래의 화적에 의한 관전의 결손을 피하여 이익을 얻고 있었다. 이 가운데 곡가의 가불에 의하여 이자를 취하지 않은 점은 섬서 청묘전이나 왕안석의 청묘법이 곡가를 시가보다 다소 낮게하여 가불하고 박리를 취하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이 점에서 나중에 진양은 왕안석의 청묘법에 크게 반대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외의 점에서는 진양의 화적법은 왕안석의 청묘법과 완전히 같았다. 또 왕안석의 청묘법은 이들의 화적과 같이 청묘전을 가불하여 곡물을 납부하게 하고, 호민이나 상인의 중간이익을 억제하고, 관전의 결손을 없에는 것이므로, 다음에 나오듯이 나중에는 청묘전을 빌려주어 2할의 이자를 취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되었기 때문에 이 점(돈을 가불하여 곡물을 취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이 무렵, 소철(蘇轍)은 부민이 고리로 돈을 가불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례》의 천부(泉府)․大民(貸民)의 조를 인용하여 관이 봄에 민에게 돈을 가불하여 비단을 손에 넣고, 여름에 돈을 가불하여 곡물을 취하고, 그렇게 하여 낮은 이자를 취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 가운데 봄에 돈을 빌려주어 여름에 비단을 취하는 것은 앞서말한 예매견(預買絹)에 의한 것인데, 봄과 여름에 청묘전을 가불하는 것과 《주례》의 천부․대민의 조에 의하여 관이 저리로 민에게 빌려준다고 하는 점과는 왕안석의 청묘법과 마찬가지이다.
또 왕안석의 청묘법은 각 로의 상평창이나 광혜창의 전곡을 이용하여 농민에게 청묘전을 빌려주었다. 이 가운데 상평창은 992년(태종․순화3)이후 각 로에 설치되어 여름․가을 곡가가 쌀 때에 시가보다 다소 높게 사들여(糴)두고, 곡가가 높아졌을 때 시가보다 다소 낮게 팔아서(糶), 곡가의 고저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단 상평창미를 팔때에는 원래의 본전(적가)이 손해되지 않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곡을 비싸게 사들였을 경우에는 이를 팔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상평창의 미곡은 빈민을 구제하고 기근일 때에는 기민을 구제하였다. 광혜창은 호절(戶絶, 사람이 없어진 호)의 토지를 기반으로 하여 , 그것을 소작시켜 그 수입으로서 성내의 노인이나 유아 등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상평창․광혜창은 중앙에서는 사농사, 로에서는 제형사가 관할하였다. 그래서 왕안석이 청묘법을 시행했을 때에도 중앙에서는 사농사가 이를 관할하게 되었다. 다만 노에서는 새로이 제거상평사(提擧常平司)를 두어 이를 관할하게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왕안석의 청묘법을 섬서청묘전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화적중의 가불제도 참고로 하였고, 상평창과 광혜창의 제도도 고려하여 입안된 것이다.
4) 청묘법의 시행
① 고리대호민․상인에 대한 대책
왕안석은 정권을 장악하기 전부터 호민이나 상인을 억제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송초이래 호민(豪民)은 고리대를 행해 농민이나 전호를 괴롭히고 있었다. 호민의 고리대에는 3가지가 있는데, 돈을 가불하여 미곡이나 명주실과 비단으로 갚게하는 ‘거방(擧放)’과 돈을 빌려주고 본전과 이자를 돈으로 갚게 하는 ‘과전(課錢)’이 있고, 게다가 옥수수․보리를 빌어주고 현물의 이자를 붙여서 옥수수․보리를 갚도록 하는 ‘속맥출거(粟麥出擧)’도 있었다. 송에서는 이것에 대하여 이자를 제한하여 이자는 1년에 본전의 1배(배칭의 이자)까지로 제한하고, 이자를 본전으로 넣는 즉 복리를 취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것 때문에 토지나 가축을 빼앗는 것을 금하고, 이것들의 유리채부(有利債負, 利付債權)에 대해서는 관에 호소해도 관은 이를 수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호민은 이들의 거방이나 과전․속맥출거 등에 의하여 1년마다 2배․3배의 이자를 취해, 농민의 토지를 사들이고 있었다. 또 호민은 전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1년마다 2배․3배의 이자를 취하여 그들을 괴롭혔다. 그래서 왕안석은 호민의 고리대를 억제하기 위하여 앞서 말한 섬서청묘전이나 화적의 가불제 등을 참고하여 청묘법을 입안한 것이다. 즉 섬서청묘전은 호민의 고리대를 억제하고 농민에게 저리로 가불하도록 하는 것이었고, 하동의 화적과 같이 강제적으로 이를 할당하는 것도 아니었고 범중엄과 진양의 화적과 같이 관이 이자를 취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왕안석은 이것을 청묘법의 원칙으로 채용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왕안석은 청묘법에 의하여 농민이나 전호에게 3할 혹은 2할의 저리로 자금을 빌려주고, 그 생활의 안전을 꾀하려로 했다.
청묘법은 희녕2년에 시행되어 왕안석의 신법 가운데에서도 처음으로 실시된 것이었고, 그만큼 신법당과 구법당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래서 우선 1069(희녕2)년에 청묘법이 창설된 무렵의 주된 실시조항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② 주요실시조항
(1) 이 무렵 여러 로의 상평창․광혜창은 많은 액수의 돈이나 미곡을 쌓아두면서 이를 팔고 사는(糴糶) 방법이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근일 경우 기민을 구제할 수가 없었고, 성창(省倉, 관리의 봉급을 지출하는 창)의 전곡도 내어 구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상평창이나 광혜창(도시의 노인과 어린아이에게 지급한 나머지)의 전곡을 내어, 미곡은 전운사가 관할하는 세전(稅錢)과 바꾼 돈을 청묘전으로서 지출한다.
(2) 이들 청묘전은 섬서청묘전의 법에 따라 정월(夏料)과 5월(秋料)의 두번에 나누어 빌려주고, 하세와 추세를 납입할 때, 함께 납부하게 한다. 그것들 청묘전은 밀․조․쌀 등을 수확했을 때의 1두의 시가의 중가(中價, 평균가격)로 미리 지급하고, 그것들의 곡물이 수확되었을 때 그것에 상당하는 수량의 곡물을 납부하게 한다. 단지 농민이 청묘전 대신에 곡물의 지급을 바랄 때에는 곡물을 주는데, 그 곡물은 시가로 환산하여 그것을 청묘전의 액수로 한다. 또 농민이 청묘전을 빌리고, 곡물을 납부할 때 곡가가 등귀했을 때에는 곡물대신에 돈을 납부할 것을 허용한다. 이 경우에는 곡물이 얼마 등귀하더라도 단 청묘전의 3할을 더하여 납부하게 한다. 이것이 청묘전의 3할의 이익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3) 작물의 재해가 5할 이상 미쳤을 때에는 청묘전의 납입은 다음 하료 또는 추료까지 연기한다.
(4) 청묘전은 농촌 호의 자산에 의해 제1등호에게는 15관까지 빌려주고, 제2등호에게는 10관, 제3등호에게는 6관, 제4등호에는 3관, 제5등호와 객호에게는 1관5백문(1관문이라고 되어있다)까지 빌려준다. 이들 돈은 10호이상을 1보로 하여 보갑을 편성시켜, 3등이상의 호를 갑두로 하여 이를 보증하게 한다. 이 가운데 객호(주로 전호)에 대해서는 주호(지주)에게 보증시켰다. 농촌의 호에 청묘전을 지급하고도 아직 여유가 있으면 방곽호(坊郭戶, 도시의 호)의 자산이 있고 저당이 있는 자에게도 빌려준다.
(5) 청묘전을 농민에게 강제적으로 빌려주지는 않는다.
(6) 청묘법은 호민이나 상인이 보릿고개에 농민이나 전호에게 전곡을 가불하고, 고리를 취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 청묘법으로 얻은 전곡은 농전수리(農田水利)에도 사용한다. 이것은 민을 위하여 하는 것으로 국가는 그 수입을 이익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7) 옛 제도에서는 상평창․광혜창은 로의 제형사에 속해 있었으나, 청묘법을 실시하기 위하여 각 로에 제거상평광혜창관을 파견한다. 즉 로에 제거상평사를 늘 둔다.
청묘법은 이들의 조항에 따라 하북로에서부터 실시되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구법당의 한기․사마광․구양수․소식 등의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여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위에서 말한 조항도 상당히 수정되었다.
③ 실시를 둘어싼 논쟁과 수정
구법당의 사람들이 청묘법에 반대한 주된 이유는 대개 네가지 정도로 (1) 청묘법은 정부가 민간의 거방이나 과전을 행하는 것으로 정부자신이 이자가 있는 금대(金貸)를 행하고, 3할이 이자를 취하는 것은 무겁다. (2) 겸병을 억제하고 빈민을 구제한다고 하면서 호민이나 상인인 제3등호이상의 호나 방곽의 자산이 있는자까지도 청묘전을 빌려주는 것은 관이 단지 이윤를 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청묘전을 빌려주고 곡물을 납부하게 한다고 하면서 청묘전에 3할의 이자를 붙여 돈을 납부하게 하는 것은 농민을 괴롭히는 일이다. (4) 상평창의 전곡을 청묘전으로 지출하면, 상평창이 곡물을 사고팔아 곡가를 조절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 등이었다.
왕안석은 이에 대하여 《주례》의 천부의 대민의 조를 인용하여 《주례》에서도 민은 돈을 빌려주고 “국복을 가지고 이자를 만든다”고 하듯이 이자를 취하고 빌려주고 있고, 그 이자도 25%까지 취하고 있으며 청묘법의 이윤 3할은 하북로에서 취한 것으로 그 밖의 경서․섬서로에서는 2할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어 청묘전의 이윤을 3할에서 2할로 내렸다. 또 청묘전을 방곽호에게도 빌려준 것에 대해서는 왕안석은 상평창의 전곡을 농민에게 빌려주고 여유가 있으면 방곽호의 결핍도 구제해야 한다고 하여 서 《주례》의 천부의 대빈의 법에도 도읍(방곽)과 비야(농촌)의 제한은 없으므로 이 점에서는 청묘법도 섬서청묘전의 조항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것에 대하여 한기는 이 《주례》천부의 대민 조항의 “국복을 가지고 이자를 만든다”에 대해서 왕안석의 해석에 반론했다. 즉 《주례》 이 조항의 정현의 주에서는 국복(國服) 즉 “그 나라에 있어서 섬기고 따르는 세”는 도읍의 가까운 곳에서 멀어짐에 따라 년 5리에서 2할으로 무거워지고, 단 칠림은 25%가 되어 있고, 이것이 민에게 빌려주었을 때의 이자율이다. 즉 청묘법에서는 청묘전을 봄과 여름에 빌려주고 각 2할의 이자를 취함으로 도읍에서 원근에 관계없이 1년에 4할의 이자를 취하는 것이 되고, 《주례》의 대민의 법보다 무겁게 되었다고 하였다.
청묘법에서 봄․여름의 두번에 걸쳐 청묘전을 빌려주는 것에 대해서는 구양수도 반대하였고, 봄에 청묘전을 빌려주는 것은 보릿고개의 농민의 결핍을 구제하는 것인데, 여름에 이것을 빌려주는 것은 보리가 재배되고, 누에가 자랐을 때이므로 농민은 결핍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이자를 취하기 위하여 돈을 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희녕7(1074)년에는 청묘전은 봄에 1번만(육전, 밭은 2월, 수전은 3월) 빌려주게 되었다. (단 완급일 경우에는 이밖에도 빌려주었다.)
또 한기는 청묘법에서 돈을 빌려주고 곡물을 납부시키면서 청묘전에 2할의 이자를 붙여 돈을 납부하게 하는 것을 허락한 것은 장래에 단지 민으로 하여금 본리의 돈을 납부하게 하고 곡물을 납부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닌가라고 하였다. 사마광도 청묘전을 빌려주고 본리를 돈으로 납부하게 하였기 때문에 농민은 풍년에는 곡물을 싸게 팔아 돈을 납부하고, 흉년에는 팔 곡물이 없으므로 전지․가옥․일소 등을 팔아 돈을 얻어 이를 납부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개정되지 않았고, 청묘전은 대부분 본전에 2할의 이자를 붙여 납부하게 했다.
또 사마광은 청묘가 대신에 곡물을 빌려주었을 때 그 곡물을 시가로 환산하여 청묘전의 액수로 하는 것에 반대하고, 청묘곡의 경우에도 2할의 곡물을 더하여 반납하게 하도록 주장했다. 이것은 이와 같이 행해졌다. 따라서 희녕7년에는 청묘전을 빌려주었을 때에도 또 청묘곡을 빌려주었을 때에도 이자 2할을 붙여서 반납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청묘법에서 돈을 빌려주도 곡식으로 납부하게 하는 원칙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게다가 사마광이나 소식 등은 상평창은 곡가가 쌀 때에 높게 곡식을 사고 곡가가 높아졌을 때에 싸게 곡식을 팔기 때문에 곡가가 안정되어 관․민 모두 그 이익을 받지만, 이 전곡을 청묘전으로 지출해 버리면 상평법이 무너져 풍년에 곡물을 사들일 수가 없어지므로 흉년에는 기민을 구제할 수가 없어지게 된다, 즉 상평법과 청묘법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신종은 이를 양립시키고자 희녕7년 상평창의 전곡은 재해의 경우에 기민을 구제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절반만 청묘전으로 빌려주게 하고, 그 나머지 반은 상평 옛법에 의하여 적조해 두도록 하고, 농전수리(후술)공사나 성채의 수축에도 이를 지출했다.
이상과 같이 청묘법은 구법당의 의견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 수정되었다. 이 청묘법에 의한 정부의 수입은 거액에 달했고, 이것들은 군비로 이용되거나, 로의 전운사의 비용으로도 사용되었다.
5) 면역법이전 - 송초의 차역법
① 송초의 역의 특징
왕안석의 면역법(모역법)은 송초이래의 차역법(差役法)을 고친 것이다. 차역법은 대부분 오대의 역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들 송초의 역은 당대의 균전제 아래의 역역(力役)에 대하여 직역(職役)이라고 불린다. 즉 균전제에 있어서 조용조의 용(庸)은 역역, 즉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것이었는데, 송초의 역(役)은 대부분 직무, 특히 주현과 향촌의 각종 직에 종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직역은 송대의 주현제의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또 당대의 용은 모든 호의 정에 대하여 부과되었는데, 송대의 직역은 나중에 언급하듯이 호의 자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자산이 많은자에게 부가되고 자산이 적은 자에게는 부과되지 않았다. 이 점에 있어서 송대의 차역은 이전시대의 역과 다르다.
송초의 차역에는 주의 역, 현의 역, 주현에 공통되는 역, 향촌의 역 등 4가지 종류가 있었다. 주의 역에는 (1) 아전, (2) 공목관 계통의 인리(人吏), (3) 승부(承符)․산종관(散從官)․인력(人力), (4) 원우후(院虞候)․옥자(獄子) 등이 있고, 현의 역에는 (1) 압록(押錄), (2) 수력(手力), (3) 궁수(弓手) 등이 있었고, 주현에 공통되는 역에는 (1) 두자(斗子)․간자(揀子)․칭자(秤子)․고자(庫子)․도자(搯子), (2) 난두(攔頭)가 있었다. 또 향촌의 역에는 (1) 이정(里正)․향서수(鄕書手) (2) 기장(耆長)․장정(壯丁) (3) 호장(戶長)의 역이 있었다.
이상의 역 가운데 주의 공목관 계통의 인리와 현의 압록 등은 마찬가지로 인리였고, 주의 승부․산종관․인력과 현의 수력도 같은 계통이었고, 주의 원우후․옥자도 현의 궁수도 같은 성격이었다. 또 향촌의 역은 다음에 언급할 보갑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들의 역은 자산의 많고적음에 의하여 부과되었다. 송대에는 자산은 ‘물력(物力)’ 또는 ‘가업전(家業錢)’이라 불리어 전지․가옥․창고․도구 등을 평가하여 몇관 몇백문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상인 등은 ‘영운전(營運錢)’이라 하여 상업상의 이익을 평가하여 물력으로 산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의 자산은 5등으로 나뉘어져 ‘5등정산부(五等丁産簿)’라고 하는 장부에 기입되었고, 역은 이들 주에 주로 제1․제2․제3등의 호로, 20세 이상 60세의 정이 두사람이상 있는 호에 부과되었고, 가벼운 역에는 제4등․5등호에 부과되는 것도 있었다.
송초에는 관호․방곽호(성내의 호)․사관(寺觀, 사원이나 도관)이나 단정(單丁, 정이 한사람인 호)․미성정(未成丁, 아직 정이 되지 않은 호)․여호(女戶)는 역이 면제되었다.
② 주의 아전(衙前)
송초의 아전은 오대의 아전을 계승한 것인데 송대에는 아전은 주의 창고를 관리하고, 수운 또는 육운에 의하여 조세를 중앙으로 수송하고, 주의 손님을 접대하고, 나아가 주무(酒務, 술을 만드는 곳)를 경영하고, 관역(館驛)을 담당하였다.
아전에는 장리(將吏)아전․이정(里正)아전․압록(押錄)아전․투명아전(投名衙前, 投名衙前) 등이 있었다. 장리아전은 앞서 말한 오대의 아전을 직접 계승한 것인데, 이것은 뒷날 장명아전이 대신하게 되었다. 이정아전은 향촌의 이정(다음절 참조)의 역을 마친 자가 지명되는 역이었다. 이 이정아전은 향촌의 제1등호가 담장하여 제1등호가 모자랄 경우에 제2등호도 이를 담장하게 되어 가업2백관이상인 자가 이것이 되었다. 이것은 아전이 주의 전곡을 취급하므로 이것을 결손했을 때 이것을 배상하기 위함이었다. 이정아전의 기한은 2년이었는데, 이 역은 가장 무겁고 힘든 것이었으므로 향촌의 호는 나중에 언급하듯이 대부분 이것 때문에 파산했다. 압록아전은 현의 압록(후술)에서 충당한 것으로 그 기한은 3년이었다. 투명아전 또는 장명아전은 아전이 되고 싶은 자를 모집하거나, 혹은 이정아전과 압록아전 가운데 기한후에도 계속해서 머무르며 아전이 되고 싶은 자 가운데에서 이것에 충당하였다.
더욱이 주의 아전에는 이들 세 아전외에 객사(客司, 客將)․통인관(通引官)이 있었다. 오대에서는 아전과 객사․통인관과는 다른 것이었던 것 같은데 송에서는 객사․통인관은 아전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객사․통인관은 자손이 세습하였다.
이들 중에 이정아전이 가장 괴로웠다. 그것은 이정아전이 향촌의 호이고, 그 직무에 적응하지 못하여 많은 경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아전이 관리하고 있는 주의 창고의 물건이 없어지거나, 혹은 조세의 곡물․비단․돈을 경사로 수송할 경우에 이들 물품이 결손되면 그것들을 배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아전은 주의 객을 접대하기 위하여 설치된 공사고(公使庫)를 관리했는데, 연회의 재료나 시설이 모자라면 그것을 보충해야만 했고 주무를 경영하여 술을 만드는 자재의 부족을 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이정아전으로 파산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이들 역은 아전 중에서도 ‘무겁고 괴로운 역(重難之役)’이라 불리었다. 이에 비해 쉬운 ‘여유있고 가벼운 역(優輕之役)’도 있었다. 그러나 이정아전은 이들 ‘무겁고 괴로운 역’을 반드시 맡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원래 관은 아전의 역에 대하여 분의 수로서 그 비용을 지급하고 있었다. 한 예를 들면 하북에서는 어하(御河, 대운하의 황하이북의 지역)를 지나 경사로 곡물을 수송하는 배에는 60분의 비용을 지급하고 있었다. 이 1분은 5관문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어하의 수류가 평온할 때에는 이 수송은 ‘여유있고 가벼운 역’이었는데 하류가 위험할 때에는 이 수송은 ‘무겁고 괴로운 역’이 되었다. 따라서 여유로울 때에는 관급의 분의 수로 비용이 충분하더라도 힘들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비용이 모자랐다. 특히 이정아전과 같은 향촌의 호에서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겁고 괴로운 역’에서는 관급의 1분에 대하여 2분 내지 3분, 즉 2․3배의 비용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이들 상경의 곡물․비단․돈 등의 수송선과 앞서 말한 공사고의 관리, 주무의 경영 등의 ‘무겁고 괴로운 역’으로서는 이정아전의 대부분 파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인종의 지화2(1055)년에 이정아전은 폐지되어 향호아전으로 개정되었다. 이것은 이정은 향마다 한사람 배정되었으므로 좁은 향에서는 1등호이더라도 그 자산이 그리 많지 않은 자도 있었고, 이들을 이정아전으로 했을 경우, 역에 견디지 못하고 파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현의 각향을 통하여 1등호 중에서도 가장 자산이 많은 자를 골라 아전의 역에 임명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향호아전이고, 그 임기는 2년이었다. 그러나 향호아전도 ‘무겁고 괴로운 역’에 괴로워했다. 예를 들면 섬서의 봉상부(鳳翔府)에서는 향호아전의 ‘무겁고 괴로운 역’에는 1분10관을 지급하였는데, 실제로는 1분이 15․16관에서 20관, 나아가 그 이상의 비용을 필요로 했다. 그로인해 제1등호가 많이 파산하여 중등호가 이에 임명되게 되었다.
③ 고역인 향호아전과 투명아전․장명아전
이와 같이 하여 왕안석이 면역법을 실시할 무렵에는 향촌의 호는 향호아전에 지명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여 , 호의 등급이 올라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농경에 힘쓰지 않고, 곡물이나 비단을 축적하지 않았고, 소유토지를 늘리지 않았으며, 가옥의 수리도 행하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산동에서는 향호아전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부친과 자식의 2정밖에 없는 집에서 부친이 자살을 하여 , 자식 한사람의 단정호라고 하는 자도 나타났다. 또 강남에서는 조부모와 부모가 살아 있을 경우에는 그 자손은 자산을 분할할 수 없으므로, 조부와 부친이 죽었을 때에 조모와 어버니를 시집보내어 자산을 분할하고, 1등호의 등급을 내리는 자도 나타났다. 또 관료는 면역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1등호가 관료에게 그 자산을 팔고, 등급을 내려 아전의 역을 피하는 자도 많았다.
이로 인하여 향촌에서는 아전의 역에 임하는 자가 점점 감소하고, 남은 호에게는 아전의 역이 빈번하게 돌아와 더욱더 이 역이 힘들어졌다. 왕안석이 차역법을 개정하여 면역법으로 하고자 한 것은 주로 이 향호아전의 고역을 바꾸자고 하는 의도에서였다.
앞서 말했듯이 이정아전은 고역이었으므로, 송초이래 아전을 모집하는, 즉 투명아전도 행해졌다. 특히 진종 천희3(1019)년에는 강남에서 아전을 모집하였고, 화북에서도 그 후 이를 모집하게 하였다. 또 역을 마친 이정아전으로 계속하여 아전이 되는 것을 바라는 자에게는 이를 허가했다. 즉 장명아전이다. 단 이들은 장리아전과 같이 아직(압아에서 승진하여 좌우도압아․도지병마사에 이른 자)으로 이동해 가서 결국에는 관에 임용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정아전이나 향호아전은 고역이었는데 대하여 투명아전이나 장명아전이라는 것은 이들 아전은 직무에 익숙하여 아전의 분의 수로 그다지 결손을 초래하지 않았고, 한편 다른 직역을 면제받았고, 또 방장(坊場, 술을 파는 곳)이나 하도(河渡, 나루터)에서 생기는 이익을 맡겨서 큰 이익을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투명아전이나 장명아전은 각지에서 점점 증가하였고 면역법이 시행될 무렵에는 성도로는 장명아전만으로 이루어졌고, 회남․양절로에서는 태반(3분의 2)이었고, 그 밖에서도 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복건로의 복주에서는 향호아전 72명, 압록아전 55명, 장명아전 60명, 객사․통인관 57명, 합계 244명이었으므로, 장명아전은 세가지 아전 가운데 거의 3분의 1이 되었다.
더욱이 압록아전은 현의 압록, 즉 현의 서기이면서 아전에 임명된 자인데, 이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마 이 아전도 관청의 업무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④ 주현의 인리
주의 인리는 도공목관(都孔目官)․공목관(孔目官)․구압관(勾押官)․개절관(開折官)․양료관(糧料官)․압사관(押司官) 등의 직급과 전행․후행의 수분(手分)이나 첩사(貼司) 등을 말했다. 인리는 주의 여러 조 및 여러 사의 전곡이나 조세․재판(옥송) 등의 문서를 담당하고, 그 계산을 하였다. 이들은 자제가 뒤를 잇게 되어 있었는데, 결원이 생기면 이를 모집하고 투명의 인리를 두었다. 또 주의 속현인 인리를 파견하여 이에 충당하고 2년이 되면 교체시켰다. 또 투명이 모자랄 때에는 중등호(2, 3등호)에서 뽑아 이 역에 두었고, 이도 2년이 되면 교체했다.
그러나 강남이나 사천에서는 주의 인리는 거의 투명의 인리였다. 하북․하동․섬서 등의 화북의 여러 로에서는 민이 서산(書算)에 어두웠기 때문에 투명이 별로 없고, 향촌의 호가 이에 충당되었다. 이들 투명의 인리도 연한에 의하여 직급(압사관에서 승진하여 도공목관에 이른다)이 옮겨지고, 결국에는 관에 임용되었다.
현의 인리에는 압록․수분․첩사가 있었다. 현의 압록이하의 인리도 주의 인리와 마찬가지로 서기․계수를 담당했고, 조세의 징수나 옥송의 일도 했다. 압록은 처음 상등호로써 이도(吏道)로 통하는 자를 임명하였는데, 나중에는 투명으로 하고, 투명이 모자랄 때에는 향촌에 자산이 있는 호를 이 역에 충당시켰고, 3년이되면 교체시켰다.
이들 압록은 앞서 언급했듯이 주의 아전이 모자라면 압록아전에 충당되었다. 수분도 투명이었으나 화북에서는 주로 차역이었다.
⑤ 주의 승부․산종관․인력과 현의 수력
주의 승부․산종관․인력도 오대의 제도를 계승한 것인데, 승부․산종관은 주의 조세를 추징하거나 관원의 구사(驅使) 내지 사령(使令)에 따르는 자였고, 인력은 주의 판관(判官)․추관(推官)의 사령이 되는 자였다. 이것에는 향촌의 세를 납부하는 중하의 호 또는 성내의 호를 지명하여 2년이 되면 교체시켰다. 또 승부․산종관은 관원의 말을 키우기 위하여 말먹이를 베는 경우도 있었고, 관원이 부임할 때 또는 임무를 그만둘 때에 멀리까지 마중가거나 혹은 배웅을 하러 갔다. 이 관원의 영송이 승부․산종관의 가장 어려운 역이었다.
현의 수력도 주의 승부․산종관이나 인력과 같이 조세를 추징하고, 현령․주부의 구사내지 사령에 주어져 말먹이를 베거나 관원의 마중이나 배웅에도 괴로워했다. 이 수력도 2, 3등호가 지명되어 2년이 되면 교체시켰다.
이상과 같이 주의 승부․산종관․인력이나 현의 수력은 다른 여러 역과는 달리 역역에 가깝고, 이들은 차역이었고 투명은 없고, 상당히 괴로운 역이었다. 이것도 왕안석이 면역법을 행하기에 이른 계기를 만든 것이다.
⑥ 주의 원우후(院虞候)와 현의 궁수
오대에는 마보원(馬步院)에 도우후(都虞候)가 있어 재판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송초에는 마보원은 사리원(司理院)으로 개정되어 문관인 사리참군(司理參軍)이 재판의 일을 행했다. 또 재판은 부원(府院) 또는 주원(州院)에서도 이루어졌다. 이들 부주원과 사리원에는 원우후라는 역이 있었다. 이 원우후는 주의 판관․추관이나 사리참군의 아래에 있어서 재판의 일을 담당하고, 죄인의 호송을 행했다. 이 원우후는 앞의 승부․산종관의 법에 의하여 향촌의 호를 이에 충당하고 3년이 되면 교체하게 했다. 송초에는 이것에 투명은 없었던 것 같다.
오대에는 진장(鎭將)이 두어져 도적을 잡고 투송(鬪訟)을 담당했는데, 송에서는 현에 현위를 두어 이 일들을 담당하게 했다. 그래서 이 현위의 아래에는 궁수를 두어 도적을 잡게 했다. 이 궁수는 향촌의 중등호를 임명했고, 3년이 되면 교체했다. 그 후 광남동서로나 사천에서 궁수는 3년으로 교체했으나 그 밖의 로에서는 교체하지 않기도 하거나 7년만에 교체하기도 했다. 이것은 궁수가 도적을 잡기 때문에 세월을 걸쳐 훈련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궁수는 산종관과 수력과 마찬가지로 관원의 송영을 할 경우가 있었다.
이들의 원우후․궁수 가운데에서 옥자(獄子)로도 충당되었다.
⑦ 두자․간자․칭자․도자․고자․난두
송대에는 오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양세법이 행해졌고, 하세로는 견․포․면 등을 납부하게 했고 추세로는 쌀․조 등을 납부시켰다.
두자는 추세인 쌀․조를 받을 때에 이를 ‘도구(斗)’로 재는 사람이었고, 간자는 하세인 견이나 마 등의 천을 받는 자로 그것들 견이나 포가 규격에 맞는 것인지 어떤지를 골라서 받았다. 칭자(秤子, 称子라고도 함)는 조세와 소금 등의 무게를 재는 것이었다. 또 도자의 도(搯)는 ‘집다’라는 의미로 돈을 고르는 것이었다. 고자는 창고의 되(말)․저울, 장척 등을 거두어 보관하고 또는 창고의 돈을 지급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것들은 주현에 같이 두어져 제3, 제4등호에서 뽑아 충당되었다.
난두는 주현이나 진시에 설치된 세무나 세장에 두어져 감관의 아래에서 상세를 징수하는 자였다. 이것도 오대때부터 두어졌다. 송에서는 객호를 모집하여 이에 충당한 적도 있었으나 제5등호를 이에 충당하기로 했다.
이상과 같이 송초의 차역법에서는 많은 역이 호의 등급에 의하여 충당되었고, 투명은 아전의 일부․인리 등에 행해질 뿐이었다.
6) 면역법의 실시
① 면역전의 징수
면역법은 1071(희녕4)년 10월부터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이것은 종래의 차역을 면제하고 돈을 징수하여 사람을 모집하고 이에 고전(雇錢)을 지급하여 차역에 대신하게 했던 것이다.
면역법에서는 면역전은 양세를 납부할 때 함께 징수하는 것인데 이를 상세히 설명하면, 면역전․조역전․관잉전(관잉전(寬剩錢))․두자전(頭子錢) 등이 있었다. 면역전은 종래 주로 여러 역에 충당되어 있던 호, 즉 제1등호이하 제3등호로부터 징수하는 것이고, 지방에 따라서는 제4등호․제5등호로부터도 징수했다.
조역전은 종래 면역되었던 방곽호(도시상인의 호)․관호․사관(사원과 도관)․단정호․미성정호․여호 등에게 돈을 내게하여 역을 원조하게 한 것이었다. 이 조역전은 관료, 호족, 상인, 사관 등의 겸병을 억제하는 정책이기도 했다. 단 조역전은 이들의 반대를 두려워하여 면역전의 절반이었다.
관잉전은 흉년에 대비하기 위하여 2할만 여분으로 징수해 두는 것이고, 두자전은 역전에 대한 부가세이고, 종래 역에 충당되어 있던 호에서 관사를 수리하고, 집기를 만드는 비용을 융통하게하고 있던 것을 그만두고 이 돈으로 이것들의 비용으로 충당했다.
면역전은 처음 자산 즉 가업전, 또는 물력에 의하여 제1등호에서 제3등호까지 할당하고 있었는데, 제4등․제5등호로부터도 이를 징수한 곳도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지역에 따라서 징수방법이 달라져 가업전에 의하여 , 매관 몇 문을 징수하거나, 전무에 따라 매무마다 몇 문을 징수하거나 혹은 하세에 의하여 세전1문마다 몇 문을 징수했다. 또 곽방호로부터도 가업전에 따라 징수하고, 더구나 상업상의 이익 즉 영운전에 따라 징수하는 일도 있었다. 단 객호는 특히 자산이 많은 경우를 제외하고, 면역전을 징수하지 않았다.
또 이와 같이 하여 징수된 역전은 주로 주현의 직역의 고전으로 충당되었지만, 이들 고전은 방장전과 하도전에서도 지출되었다. 이 방장과 하도는 앞서도 말했듯이 투명아전에게 맡겨서 그 이익을 얻도록 하였는데, 면역법이 실시되었을 때 이들 방장이나 하도는 일반적으로 민간에게 청부하여 관이 그들의 전을 징수하고, 그들 방장․하도전의 일부를 내어 아전의 고전이나 나중에 말할 이록(吏祿)으로도 지급했던 것이다.
② 면역법에 의한 변혁
송초의 차역법은 면역법의 실시에 의하여 크게 변혁되었다. 우선 주의 아전에 대해 말하면 각 주에서 아전의 인원이 대폭 줄어들었다. 그리고 종래의 향호아전은 투명아전 또는 장명아전이 되었고, 그 일부에게 고전이 지급되었다. 또 종래의 아전의 무겁고 어려운 역이었던 조세의 경사로의 수송이나 공사고의 관리는 대부분 군교(軍校, 하급무관)에게 관할시켰다. 또 종래의 압록아전은 폐지되었다.
이와 같이 아전은 투명아전 또는 장명아전으로 되었고, 그 일부가 고전을 지급받는 고모아전이 되었다. 예를 들면 복주에서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면역법의 이전에 아전은 2백44명이었으나, 면역법이 실시되고 난 후에는 장명아전 1백17명, 고모아전37명, 합계 1백54명이 되었다. 그 후 고모(雇募)아전도 장명아전이 되고, 아전인원은 더욱 줄어 1백25명이 되었다. 이와 같이 복주에서는 고전을 지급할 아전은 없어졌으나 다른 주에서는 고모아전도 있었던 것 같다. 이들의 고전은 앞에서 언급한 방장․하도전이나 역전에서 지급되었는데, 방장․하도전은 많은 액수의 잉여금이 나와 정부의 재원이 되었다.
주현의 인리도 면역법에서는 모두 투명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인리에 대해서는 고전 즉 이록이 지급되었다. 이 이록은 개봉부 여러 창의 인리(서리)가 경사의 병사에게 지급하는 봉록을 훔치거나 혹은 상경 수송선의 쌀을 빼앗거나, 나아가 뇌물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지급된 것이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행위가 인리에게 있었을 경우에는 엄벌을 가했고 이를 ‘창법(倉法)’이라고 했다.
이 창법도 왕안석이 실시한 것으로 이것은 중앙의 여러 관청에서 지방의 로의 감사나 주의 인리에게까지 널리 시행되었다. 그 비용은 면역전 뿐만 아니라 관잉전, 앞서 말한 방장․하도전이나 후술할 면행전 등으로부터도 지출되었다.
주의 승부․산종관․인력(후에 산종관으로 통합됨)이나 현의 수력도, 면역법이 실시되고부터는 이들을 모집하여 고전을 지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래 산종관이나 수력의 고역이었던 관원의 송영에는 여비가 지급되었다.
주의 원우후는 면역법시행 후 처음에는 투명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제4등호를 충당하여 1년마다 교체했다. 그 후 투명하는 자가 나왔으나 이것에는 고전을 지급하지 않았다. 현의 궁수에게는 향호의 젊은 자를 투명하게 하여 고전을 지급하였다.
주현의 두자․고자․도자․평자․간자도 면역법에서는 투명으로 했으나 고전은 지급하지 않았다. 또 란두도 투명이 되었으나 마찬가지로 고전은 지급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이 면역법에서는 송초이래의 직역은 모두 투명이 되어 모집하게 되었으나 투명한 자 모두에게 고전을 반드시 지급한 것은 아니다. 또 그들의 고전은 역전뿐만이 아니라 관잉전이나 방장․하도전․면행전 등으로부터 나온 것도 있었다. 그 때문에 면역전에는 많은 잉여금이 나와 방장․하도전과 함께 정부의 큰 재원이 되었다.
③ 송초향촌의 차역과 면역법
송초의 향촌에는 당이래의 향리의 제도가 행해지고 있었는데, 당말이래의 전란에 의하여 향촌에 호수의 변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새로이 ‘관(管)’이라고 하는 행정구획이 만들어졌다. 관은 향과 같은 한 구획인 것도 있었으나, 2, 3관으로 하나의 향을 이루는 것도 있었다. 향촌의 차역에는 향마다 이정 한사람, 향서수 한사람이 있었고, 관마다 세사람의 기장(3대호), 한 기장 아래에 장정 3․4명이 있었고, 게다가 호장 한사람이 있었다.
이정은 향의 조세나 역의 업무를 담당했고, 향서수가 이에 속하여 서기의 역을 하였다. 이정에는 제1등호가 충당되어 임기가 3년이었고, 그것이 끝나고 나서는 주의 아전에 충당하였다. 향서수는 제3, 제4등호가 충당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정은 이정아전의 역이 무겁고 괴로웠기 때문에 1055(재화2)년에 폐지되었다. 향서수는 이후 향의 ‘오등정산부’와 조세부를 관리하여 현의 중요한 리가 되었다.
기장은 현으로부터 문서의 통달을 받아 향촌의 도적을 잡고 소송이나 소방을 담당했으며 도로나 교량을 수리하고, 농업기술의 지도도 했다. 그 아래에는 장정이 속하여 기장의 지휘를 따랐다. 기장에는 제1․제2등호가 충당되어 그 임기는 3년이었다. 장정은 제4등․제5등호가 충당되었다. 단 기장에는 투명도 행해져 투명의 기장에게는 관리로 임명된 자도 있었다.
이와 같이 기장은 향촌에 있어서 중요한 직이었기 때문에 향촌안에 ‘기(耆)’라고 하는 행정구획도 생겨났다. 기장은 3대호라고도 말해지듯이 ‘관’안에 3명이 있었으므로 ‘관’아래에 3개의 ‘기’가 생기게 된다. 또 호장은 ‘관’안의 조세를 징수하는 자로, 제2등호가 충당되어 그 임기는 3년이었던 듯하다. 호장은 이정과 마찬가지로 징세의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정이 폐지되자 이정의 수만큼 호장의 수는 증가되었다. 호장은 조세의 징수액이 부족했을 때에는 이를 배상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무거운 역이었다. 따라서 기장, 호장의 역은 주의 아전․산종관 등의 역과 함께 면역법시행의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면역법이 시행되자 처음에는 기장에는 제1․제2등호가 임명되어 1년마다 교체하였고, 그 면역전을 어느정도 면제되었다. 장정은 제4․제5등호가 충당되어 반년마다 교체했고, 면역전은 납부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기장․장정은 차역에 가깝게 보이는데 면역전의 지출가운데에는 기장고전(耆長雇錢)․장정고전(壯丁雇錢)이라는 명목이 있으므로, 기장이나 장정을 고용한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호장은 제4등호에서 모집되어 여름과 가을, 양세 가운데에서 1세씩 징수하고 교체하여 반전전(盤纏錢, 지금의 교통비) 말하자면 고전을 지급받았다. 그런데 이 기장․장정 및 호장은 보갑법이 행해지게되자 그 안의 보정․대보장 및 보장이 대신하게 된다.
7) 보갑법의 시행
① 오보의 제
보갑법은 당의 인보제도 가운데의 보의 제도를 확대한 것이었다. 오대부터 송초에는 도적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각지에서 오보의 제가 행해지고 있었다. 오보의 제는 “다섯집을 1보로 하여 서로 보증하고 검찰하여 비위(非違, 惡事)를 이루는 것이 없고 멀리서 온 손님이 머물고 있거나 보내의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갈 때에는 같은 보의 사람에게 알리라”(구양수 《구양문충공문집》권117 오보첩(五保牒))라고 있기 때문에 보 안에서 도적이나 도망간 군병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오대의 후촉에서는 오가를 소보(小保), 50가를 대보(大保)라 하여 도적을 방지했다. 이것과 왕안석의 보갑법과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또 오보안에는 북을 두고 도적이 나타나면 그 북을 두드려 원근의 오보에게 알려 도적을 잡게 하는 일도 있었다.
② 보갑법의 시행
왕안석의 보갑법은 이들의 오보 내지 소보나 대보의 제도를 답습하여 이것를 확대한 것이었다. 이 법은 1070(희녕3)년, 우선 개봉부 관하에서 실시되었다. 그것에 의하면 10가를 1보(소보)로 하고, 50가(5소보)를 1대보, 10대보(5백가)를 1도보(都保)로 하고, 1보에 보장(소보장)한사람, 1대보에 대보장 한사람, 1도보에는 도보정, 부보정 두사람을 두고, 소보장․대보장․도부보정(都副保正)에는 각각의 보 가운데에 주호의 가장 자신이 많은 자가 충당되었다. 그리하여 보에서 주호․객호를 통하여 1가에 2정 이상 있으면 한사람을 보정으로 하고 궁전 등의 무기를 스스로 갖추게 하고 무예를 배우게 했다. 그리고 매일 밤, 대보마다 보정 3명씩을 내어 보내를 순경하고, 도적이 나타나면 곧 북을 울려 대보장이하 같은 보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도적을 쫓아가 잡고, 도적을 잡으면 상전을 지급했다.
또 보내에 강도․절도․살인 등의 범죄인이 있는데도 이를 보고하지 않거나 혹은 강도를 머물게 해 준 사람은 죄에 처했다. 또 보내에 도망자나 사절(死絶)한 호가 있으면 현으로 보고하게 하고, 외지에서 온 자가 행동이 수상할 경우에는 이를 조사하여 잡아 관으로 보내었다. 그 후 이들의 보갑을 개봉부내에 번상(番上)시켜 교련하는 방법도 생겨나 이들의 보갑은 앞서 말한 현의 궁수나 순검사의 병사(순회하는 병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1073년, 이 법은 하북․하동․섬서 등의 다섯로에서도 실시되어, 이들 로가 외적에 방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보갑에게도 무예를 교련시켰다. 이 법은 여러 로에서도 행해졌는데 이들 로 이외의 로에서는 사천․호남․광동․광서 등의 연변지대를 제외하고 보갑이 무예를 배우는 것을 면제했다.
그래서 보갑에는 보정에게 무예를 교련시켜 이를 열병하는 ‘교열보갑(敎閱保甲)’과, 그것을 배우지 않는 ‘부교열보갑(副敎閱保甲)’의 구별이 생겨났고, 개봉부계나 하북․하동․섬서 등의 로는 교열보갑로였고, 그 밖의 여러 로는 부교열보갑으로 되었다. 그리고 교열보갑로에서는 특히 보정과 보장․보정과의 상하관계를 엄격히 규정하고, 보정의 보장․보정에 대한 범죄를 엄벌에 처하고 (후에 이 법은 보정과 후술할 승첩인의 사이에도 해당된다), 보정이 도망가는 것을 금지했다.
또 이 해에는 개봉부의 보갑편성의 가수를 반분하고 5가를 1보, 5보를 1대보, 10대보를 1도보로 하고, 각각 소보장 한사람, 대보장 한사람, 도부보정 두사람을 설치하는 것으로 해서 여러 로에서도 이 법을 적용시켰다. 그리하여 이 보갑법에서는 처음에는 소보․대보․도보는 주호의 가수로 각각 편성하여 객호를 포함시키지 않는 곳도 있었으나, 나중에는 주호 뿐만이 아니라 객호의 가수도 합하여 이들 보를 편성하였다.
③ 향․민병의 탄생
이와 같이 개봉부나 하북․하동․섬서 등의 교열보갑로에서는 보갑에 무예를 교련시켰으므로 이들의 로에서는 보갑은 향촌을 자위(自衛)하는 향병, 즉 민병이 되었다.
이 때문에 보갑은 병부의 소관이 되었다. 그래서 1079(원풍2)년에는 개봉부에서 대보장을 모아 무예를 교련시키는 대보장의 ‘집교집(集敎法)’이 생기고 다음해에는 이들 대보장에게 1도보의 보정을 5단으로 나누어 무예를 교련시키게 하는 보정의 ‘단교법(團敎法)’도 생겨났다. 이 집교법이나 단교법은 하북․하동․섬서 등의 로에서도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그것들의 비용은 대부분 후술할 ‘봉장전(封樁錢, 기장․장정의 고전)’으로부터 지출되었다.
이 모든 것들을 관할하기 위하여 개봉부계나 하북․하동․섬서 등의 로에서는 제거보갑사(提擧保甲司)가 두어졌다. 또 정부는 매년 이들 로에 제거안열(提擧按閱)을 파견하여 보갑의 교련을 검열하게 하고, 그 무예가 뛰어난 자에게는 많은 상전을 지급하거나 혹은 무관의 직을 주었다.
이상과 같이 개봉부계나 하북․하동․섬서 등의 교열보갑로에서는 보갑은 향병이 되었기 때문에 송초이래 이들의 지방에 두어졌던 향병도 대부분 이 보갑안으로 편입되었다. 송초에는 하북․하동양로에는 ‘강장(强壯)’, 섬서에는 ‘보의(保毅)’라는 향병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고쳐져 ‘의용(義勇)’이라고 했다. 그 밖에 섬서․하동에는 ‘궁전수(弓箭手)’도 두어졌다. 궁전수는 전지를 지급하여 궁전을 스스로 준비하고, 향토를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이 중에 하북․하동․섬서 등의 의용은 1081년 보갑으로 되었다. 또 사천․호남․광서의 ‘토정(土丁)’이나 광서의 ‘동정(洞丁)’, 또 광동의 ‘창수(槍手)’ 등의 향병도 대부분 보갑으로 개정되었다.
이상 말한것과 같이 보갑은 주호․객호를 통하여 편성되게 되었고, 이 중 개봉부나 서․북변의 여러 로 및 사천․호남․광동서의 연변지대에서는 보갑이 향병으로 되었는데, 그 이외의 중국 내지일대에서는 보갑은 향병이 아니라, 도적을 잡고 향촌의 치안은 유지하는 것이었다.
④ 보갑법의 향촌차역화
이상에서 보갑법의 시행에 대하여 말했는데 1074(희녕7)년에는 면역법이 실시되고나서 호장을 고용․모집하던 것을 그만두고 주호 2․30호로 1갑을 편성하고 교대로 갑두에 충당하여 조세나 청묘전․면역전 등을 징수하였고, 하추 양세에서 한번의 세를 징수하고 교체하도록 했다. 이를 ‘최세갑두(催稅甲頭)’라고 하는데 왕안석은 이 최세갑두를 보정에게 최세시킨다고 했으므로 이 갑두에는 보갑법안의 보정이 충당되었다. 단 이 갑두법은 보갑법과는 그 편성이 달라 주호만으로 갑을 편성했고, 객호는 이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것은 객호가 대개 조세를 납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해에는 장정을 고용․모집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다음 1075년에는 기장도 폐지하여 보갑법의 도부보정․대보장에게 도적․재판․소방․교도 등의 일을 관리하게 하였고, 도부보정에는 원래 기장, 대보장에는 원래 장정의 일을 하게 했다. 그래서 도부보정에는 현의 문서를 받기 위하여 승첩인 두사람을 고용․모집하여 이에 속하게 했다.
이와 같이 하여 종래 향촌에 두어져 있던 기장․장정이나 호장은 보갑법안의 도부보정․대보장과 보정으로 바뀌게 되고, 보정을 위하여 승첩인이 고용되었다. 거기에 면역법안의 지출항목인 기장․장정고전과 호장고전은 이 안에서 단지 승첩인의 고전이 지출될 뿐이었고 그 나머지 고전은 ‘봉장전’ 또는 ‘장류전(樁留錢)’이라 불리어 주현에 남겨두었다. 이 중 개봉부계나 하북․하동․섬서 등의 로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이 봉장전은 보갑의 무예교련의 비용으로 지출되었다. 이 봉장전은 전국에서 상당한 액수로 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민간으로부터 면역전을 징수하면서 이를 고전으로 지출하지 않고 민간으로도 환원하지 않은 것은 결국 큰 문제가 된다. 또 앞서 말했듯이 주현의 역에서는 면역법을 행하면서 향촌에서는 도부보정, 대보장과 보정을 원래의 기장, 장정과 호장의 역에 충당하게 한 것은 차역법의 부활이고 이것도 또한 뒤에 큰 문제를 남기게 된다.
8) 보마법․호마법(戶馬法)
① 보마법
왕안석의 보마법은 1072(희녕5)년에 시행되었다. 이것은 개봉부계 및 하북․하동․섬서의 보갑이나 의용에게 말을 기르게 하여 주로 군마를 공급하려고 한 것이었다.
송초이래 군마는 하북․하동․섬서 등에 목초지를 설치하여 길렀고, 군목사(群牧司)를 두어 마정(馬政)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 섬서에서는 서번(西蕃)으로부터 많은 말을 사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군마는 부족했다. 그래서 왕안석은 우선 1072년, 개봉부계의 보갑에게 명하여 매호당 말 한마리를, 자력이 있는 자에게는 매호당 말 두마리를 기르게 하고, 그들 호의 토지의 부가세인 말먹이(馬草)를 면제했다. 이들 말은 관의 목지의 말을 지급하거나 말값을 지급하여 말을 사도록 했다.
이 보마법은 하북․하동․섬서에서도 행해져 보갑이나 의용에게 매호당 말을 기르게 하고 지세의 절변이나 연납전(沿納錢)을 면제했다.
이와 같이 하여 개봉부에서는 말 3천마리, 하북․하동․섬서에서는 5천마리를 기르게 하여 도적을 잡는데도 사용했으며, 단 이들 말이 죽었을 때에는 보상하도록 했다. 즉 민호의 제1등호에서 3등호까지는 10호를 1보(保)로 하고, 제4, 5등호는 10호를 1사(社)라 하여 말이 죽었을 때에는 보호에게는 전액을, 사호에게는 반액을 보상하게했다. 그리고 이들 말은 매년 1회 그 비척을 검열시켰다. 1084년 이 법은 경동로와 경서로에서도 실시되었다.
② 호마법
호마법은 1080(원풍3)년, 개봉부계 및, 하북․하동․섬서․경동․경서 등의 화북의 여러 로에서 실시되었다. 이것은 도시와 농촌에서 자산이 많은 호에게 매호당 말 한마리를 기르게 하는 것으로 특히 자산이 많은 호에게는 매호당 3마리까지 기르도록 한 것이다. 단지 경동서로에서는 앞서 말한 보마법이 행해지자 호마는 폐지되어 호마를 기르고 있는 자는 보마를 면제했다.
9) 방전균세법
① 천보방전법
왕안석의 방전균세법은 송초이래의 균세법이나 천보방전법(千步坊田法)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었다.
송의 태조는 후주 세종의 균세법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민호가 세의 불균을 자주 호소했으므로 961(건륭2)년 관리를 각지로 파견하여 민전을 신고하게하고 조세를 균등하게 했다. 그러나 태종조가 되자 빈부의 차가 점점 심해져서 양자간의 조세의 부담도 불공평해지고 관호형세호는 많은 토지를 소유하면서 양세를 대부분 면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996(지도2)년, 풍년을 기다려 경기(개봉부 관할내의 주현)부터 균세법을 시행하려고 했으나 이를 실시하지 못한 채 죽었다.
진종조 초에는 신하가 대부분 전세를 균정(均定)하기를 청하였으므로 1000(함평3)년이 되어 진정(陳靖)을 경기균전사로서 우선 경기지방부터 전세를 균등하게 하고 원래의 세액을 증가시키게는 못하게 하고 도망간 호는 따로 장부를 두어 귀업하도록 권하고, 또 민호에게 뽕나무를 많이 심게했다. 그러나 민호는 이 균세의 취지를 잘 깨닫지 못하고 증세가 되는 것은 아닐까하고 두려워하여 오히려 자신의 집의 뽕나무를 잘라버리는 일도 있어 향촌이 소연해졌기 때문에 곧 이를 폐지해 버렸다.
그러나 그 후 관호형세호의 대토지소유는 점점 진행되어 양세의 균정이 필요해졌기 때문에 진종도 균세의 사자를 각지로 보내어 1주 1현부터 이를 시행하려고 했으나 이것도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인종이 즉위한 1022(건흥원)년에는 앞서 말했듯이 관호형세호의 토지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법이 시행되었으나 이것은 관료의 반대를 받아 곧 폐지되었다. 그러나 균세법의 실시는 점점 활발히 논의되게 되었다. 그래서 1043(경력3)년이 되어 천보방전법이 실시되기에 이른다.
이 무렵 하북의 명주(洺州) 비향현(肥鄕縣, 하북성 비향현)에서 곽자(郭諮)․손림(孫琳)이 이 천보방전법을 행해 전지를 측량하고, 전지가 없는데도 조세를 납부하고 있는 자는 이를 장부에서 제외하고, 전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조세를 납부하고 있지 않는 자는 장부에 올려 체납된 세를 납부하게하고, 도망간 민호를 귀업하게 했다. 이 법은 뒷날 방전균세법의 기원을 이루는 것인데 이 법에 의하면 토지의 천보사방, 즉 41경 66무 여를 1방으로 하고, 1방씩 토지를 측량, 그 1방의 비척에 따라 그 토지의 등급을 매겨 그 등급에 따라 세율에 차이를 두게 하고 양세를 부과한 것이다.
이 법은 구양수를 비롯하여 추천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삼사도 이를 전국에 시행하려고 했다. 따라서 우선 회남로의 박주(亳州, 안휘성 박현)․수주(壽州, 안휘성 수현)과․경서로의 여주(汝州, 하남성 임여현)․채주(蔡州) 등에서 시행하기로 하고, 채주 상채현(上蔡縣, 하남성 상채현)에서 이를 실시하게 했다. 그런데 곽자․손림들은 이곳에서 전지를 측량하여 토지 2만6천9백경을 검출하고 조세를 균정했는데, 도망호의 토지가 너무 많아 모두 검출하지 못하고 결국 이를 중지했다. 따라서 당시 방전법은 각지에서 행해지지는 못했다.
그리고 방전법에 있어서 방전의 형식을 채용하여 토지를 측량한 것은 989(태종 단공2)년 이후 하북에서 ‘방전(方田)’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태종조의 방전은 둔전의 한 형식으로서 고대의 정전법에 따라 사각형의 토지를 조성하고, 그 주위에 깊게 도랑(용수구)을 파서 하수를 끌어대어 병사를 시켜 그 안을 경작하게 하여 식량을 수확하게함과 동시에 거란의 기병이 돌진해 오는 것을 저지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이 방전은 하동․섬서 등에서도 시행되고 있었다. 곽자․손림은 둘 다 하북사람으로, 명주에서는 이미 방전도 실시되고 있어 곽자는 이 방전에도 능통한 듯하므로 천보방전법의 방전형식은 이 방전에서 생각해 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천보방전법의 시행이 중지된 후에도 균세는 각지에서 이루어졌다. 1052(황우4)년에는 지박주(博州, 하북성 류성현) 채정(蔡梃)이 관하의 현에서 조세를 균등하게 하고, 지창주(滄州, 하북성 창현)인 전경(田京)도 관하의 땅을 균정하여 세액을 증가했다. 이 무렵에는 관호형세호의 토지겸병이 점점 증가하여 양세부담의 불균형이 많고 비옥한 땅에서는 세가 적고, 비척한 땅에서는 세가 무거웠으며, 땅이 넓어도 세가 적고, 땅이 좁아도 세가 많았던 상태로, 중소농민이 상당히 많은 세금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1060(가우5)년에 또 손림 등에게 명하여 하북․섬서․경동 등의 로의 일부에서 천보방전법을 시행하게 하고, 토지의 비척을 4등으로 나누어 세율에 차이를 두어 양세를 부과했다.
그런데 이 여러 주현에서는 토지를 측량하여 감추어지고 누락된 토지를 찾아내어 세를 증가하고, 혹은 여러해 동안 결세를 검출하여 이를 추구했으므로 민호가 조세의 불균을 호소하는 자가 많았다. 그로인해 다음해 천보방전법을 폐지되었다.
이상과 같이 인종조에는 곽자․손림의 천보방전법이 하북․섬서․경동 등의 로의 일부에서 실시되었으나 아직 널리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② 방전균세법의 주요 조항
왕안석은 일찍부터 관호형세호나 상인 등 이른바 호민이나 상인을 억제할 정책을 시행하려고 하여 청묘법이나 면역법 등을 실시했다. 그러나 왕안석은 호민이나 상인의 전지를 빼앗아 빈민에게 부여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1072(희녕5)년에 이 방전균세법을 실시하여 호민이나 상인과 빈민과의 조세부담의 불균형을 시정하고자 한 것이다.
이 조세부담의 불균형은 주로 ‘할이(割移)’라고 하여 토지를 양도할때의 부정으로부터 생겨났다. 그것은 ‘생산은 없어져도 세는 남는다’라는 것으로 토지매매때에 가난한 사람은 토지를 빨리 팔려고 하여 토지의 가격을 싸게 하고, 그 세를 조금밖에 옮기지 않고, 부자는 그 가격을 싸게 사서 세금도 적게 인수받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토지가 부자에게로 가더라도 그 세금이 무겁게 남아 있으므로 부자는 토지를 널리 겸병하면서도 세금은 점점 가벼워지는 형편이었다.
왕안석의 방전균세법은 이를 개정할 뿐만 아니라 종래의 방전법의 규정을 집대성함과 동시에 세제의 개혁도 단행하고 지세뿐만 아니라 도시의 가옥세까지도 균정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방전균세법의 주된 조항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방전법에서는 동서남북 각 천보, 합계 41경 66무 남짓을 1방(方)으로 한다.
(2) 해마다 9월에 현령․승․주부에게 명하여 토지를 나누어 측량하게 하고 방장(方帳)이나 장장(莊帳, 名寄帳)을 만들게 한다.
(3) 방장이나 장장에 의하여 토지의 비척을 5등으로 나누어 세를 부과한다. 이것은 나중에 10등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4) 그 다음해 3월이 되어 이것이 끝나면 방호에게 지시하여 불균등한 것이 있으면 이를 호소하게 하고 토지를 측량하게 한다.
(5) 균세법은 현의 세액은 원래의 수를 취하고 증세를 금지한다.
(6) 황무지는 현재 경작하고 있는 자를 지주로 한다.
(7) 불모의 땅을 차지하여 경작하는 것은 허카한다. 중인(衆人)이 땔감을 구하고 혹은 중호(衆戶)가 이익을 얻는 산림․보(陂塘)․도로․구거(溝渠)․하천 등은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8) 궤명협전(詭名挾佃, 타인의 땅을 자기의 명의로 하고, 그 사람을 전호로 한다)은 합병하여 개정한다.
(9) 1방의 땅의 네 구석에는 흙을 쌓아 나무를 심어둔다.
(10) 방장이나 장장․갑첩(甲帖)․호첩(戶帖, 각 호의 地券)이 있는데 가산상속이나 전당 잡힘․매매의 할이는 계서(契書, 계약서)에서 이를 기입하게 한다.
(11) 양세의 세목을 개정하여 하세는 비단․보리․잡전(앞서 말한 연징․연납 등의 부가세)의 세가지, 추세는 백미․잡전의 두가지로 한다.
(12) 도망호의 논과 직전․관호 등의 세금은 면제한다.
(13) 가옥세도 지세에 준하여 균정하게 하고 10등으로 나누어 세를 부과한다.
(14) 이 법을 실시하기 위하여 지교관(指敎官)과 방전관(方田官)을 둔다. 또 1방마다 상등호 두사람을 대갑두에 임하게 하여 소갑두 3명과 함께 이에 협력하게 하고, 방장․장장 등을 만들게 한다.
③ 방전균세법 실시의 결과
이 방전균세법도 전국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했고, 단지 화북의 개봉부 및 경동서로․하북서로․영흥군로․진봉로 등에서 시행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화북에서는 종래 감추어져 있던 전지가 많이 검출된 것 같다.
1077(희녕10)년의 전지 통계에 의하면 전지의 총계는 4,616,550여경이었다. 이 때에는 방전균세법이 시행중이었고, 이 통계에는 방전균세법의 결과는 어느정도밖에 반영되어 있지 않은데, 이 통계에 의하면 화북의 여러 로, 즉 앞서 말한 개봉부․경동서로․하북로․섬부서로(영흥군과 진봉의 양로) 및 하동로 등의 전지의 합계는 1,431,760여경 그 밖의 강남이나 사천의 여러 로의 전지 합계는 3,184,790여경이었다.
이것을 오대의 후주 세종조에 있어서의 균세법시행후의 전지통계 1,085,130여경에 비교하면 화북에서는 송초이래 345,900여경이 증가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 방전균세법이 실시된 곳에서는 전지가 2,484,349경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화북 여러 로에서는 전지가 대량으로 검출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화북에서도 주로 대토지소유를 행하고 있던 관호형세호의 은전(隱田)이 검출되었기 때문일 것이므로 그들은 상당한 증세를 받아들였을 터이였다.
이들 화북 여러 로의 관호형세호는 주로 구법당의 사람들이었으므로 구법당의 사람들은 이것에 의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것이 철종조초에 방전균세법이 폐지되고 방전에 의한 경계가 무너져 간 이유일 것이다.
10) 농전수리법(農田水利法)
① 송초부터의 농전수리법
농전수리법은 1069(희녕2)년부터 실시되었다. 농전이라 함은 황지를 개간하여 비척한 토지를 비옥한 토지로 만들고 밭을 논으로 바꾸는 일 등을 말한다. 수리는 관개용의 피(陂, 댐)나 당(塘, 用水池)를 창설하고 또는 이를 수리하고 우전이나 위전을 새로 쌓고, 또는 그것들 우전두렁(圩岸)․위전두렁(圍岸) 등을 수축하는 일을 말한다. 우전․위전은 같은 것으로 호수나 늪 안에 제방(우안․위안)을 사방에 만들고 그 안을 둘러싸서 논을 만든 것으로 강남동로나 양절로에 많이 구축되어 있었다.
이들 논에서는 우안이나 위안의 밖은 물이었고, 우안이나 위안으로 둘어싸여진 안의 논은 주위의 물보다 낮은 곳에 있는 것이 많았으므로 홍수가 나서 우안이나 위안이 무너지면 이들 논은 곧 수해를 입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들 우전과 위전에서는 그 우전이나 위전의 수축이 중요한 과제였다. 따라서 왕안석의 농전수리법에서도 이것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왕안석의 농전수리법도 송초이래 실시되고 있던 것을 이어받아 이를 대규모로 실시한 것이었다.
송초에는 황지의 개간은 크게 장려되어 민호의 개간지는 그 사람의 소유로 하고 3년간, 그 조세를 면제하고, 그 후에도 그 땅의 세를 가볍게 해 주었다. 진 종조에는 지방관에게 명하여 인민에게 토지를 개간하게 하고, 지주(知州)에서 지세의 액을 20만 이상 증카한 자에게는 많은 상을 내렸다. 인종조에도 각지에서 토지개간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경서로(하남과 호북의 일부)에서는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당주(唐州, 하남성 沘源縣)의 토지개간에 대해서는 왕안석도 《신전시병서(新田詩幷序)》를 만들어 이를 상찬(賞贊)하고 있다.(《임천문집(臨川文集)》권38)
이것에 의하면 1060(가우5)년에 조상관(趙尙寬)이 지당주가 되고 나서 조상관은 병사에게 큰 거(渠, 용수로․도랑)를 한 곳, 큰 피(陂)를 네 곳을 수복하게 하고, 농민에게도 작은 도랑이나 피를 수십개소를 만들게 하여 농지 수만경에 관개하도록 했다. 또 민에게 소․쟁기나 식량을 빌려주고 토지를 개간하게 하였으므로 유민을 돌아오게했고, 회남이나 호북․호남으로부터 많은 민이 몰려와 토지가 많이 개간되었다. 그리하여 원래 콩이나 보리를 재배하고 있던 밭도 대부분 벼를 재배하는 논으로 바뀌었다. 1064(치평원)년, 조상관을 대신하여 지당주가 된 고부(高賦)도 하북․하남의 기민을 모집하고, 전지를 주어 개간하게 하였으므로 산림황지가 대부분 좋은 양전이 되어 논 3만여경이 증가했고, 피언 44개소를 만들었다. 이것들은 피․거․언(堰) 등을 만들게 하였으므로 수리정책도 함께 행했던 것이다.
수리정책도 인종조이후 크게 시행되었다. 1034(경유원)년에 양절로의 소주에서는 지주 범중엄이 이곳은 저지가 많아 자주 수해를 입었으므로 오하(五河, 浦)를 준설하게 하여 논에 있던 물을 배출했다. 1043(경력3)년, 강남동로에서는 우전이 무너지고, 양절로에서는 수해가 있고, 경동서로에서는 고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장소의 우안이나 하거․피당을 개수시켰고, 또 1049(황우원)년에는 관호형세호가 다수 민호의 관개에 사용되고 있던 피나 호수를 차지하고, 그 안에 논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금지했다. 1061(가우6)년에는 강남동로의 선주(宣州) 영국현령(寧國縣令)인 심피(沈披) 등은 태평주 무호현(안휘성 무호현)의 만춘우(萬春圩)가 무너져 있던 것을 다시 헤우고, 전지 1천2백70경을 만들고, 매년 조율(소작료) 3만5천석, 전 5백여관을 거두었다. 이것은 우전을 부흥한 것이다.
이 농전수리법은 왕안석의 농전수리법에 답습되었다.
② 왕안석의 농전수리법
신종조에 있어서는 1068(희녕원)년에 우선 피당이 폐지된 것이나 우전이 부서진 것을 고쳤다. 다음해인 1069년, 왕안석은 농전수리법을 시행해 앞서 말한 제거상평관에게 농전수리의 일을 겸임시켰다. 그리고 관민 가운데 그 토지에 적합한 작물의 종식법을 알고 있는 자, 관개를 위한 피나 호수가 논으로 된 것을 완전히 부흥시킬 것인가 혹은 이를 부흥시키지 않고 사람에게 이를 소작시켜 둘 것인지 아닌지 그 이해를 알고 있는자, 또 피당․우안․제언(堤堰)․구혁(溝洫, 용수로)가 없는 곳에 이것들을 창설해야 한다고 하는 자, 또 다수의 농민이 관개하고 있는 피당 등의 수리를 사람들이 마음대로 차지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알고 있는 자는 주현을 통하여 상신(上申)하게 하고, 이를 행해 효과가 있으면 상을 주었다.
1071년에는 주현관으로서 피당이나 하구를 완전히 수복하게 하고, 그 저수를 끌어 민전에 물대도록 하고 우전이나 위전의 제방을 수축하고, 그 고인물을 배출시켜 수해를 제거하고, 또 농민을 모집하여 황전을 개간하도록 했다. 나아가 그 다음해에는 민호가 피당의 고적을 경작하고 있을 경우에는 그 피당을 원래대로 수복하게 하고, 그 보상비용은 이 피당으로부터 수리를 받는 민호에게 갚게 하는데, 그 비용이 모자랄 경우에는 상평창의 관전에서 지출하도록 했다.
③ 겹단(郟亶)의 ‘수학(水學)’
이들 농전수리법은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상당한 효과를 거두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1072(희녕5)년, 겹단을 양절제거흥수수리(兩浙提擧興水水利)로 임명하여 양절로의 소주․수주에서 수리를 흥수하게 한 것은 주의할 만하다. 겹단은 소주 곤산현 사람으로 왕안석과 친하고, 이 지방의 수리를 연구하여 ‘수학(水學)’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냈다. 왕안석은 겹단에게 이 수학을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겹단의 수학은 이 지방의 지형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 지역은 태호의 물이 송강(松江, 吳松江)을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지방이어서 저지가 많고 호수나 늪이 많았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수해가 많아 지세를 면제했기 때문에 관으로 들어오는 세액도 감소했다. 겹단은 이 수해를 없애고 호수나 늪을 메워 위전을 만들고, 지세의 액을 증가시키려 했던 것이다.
겹단에 의하면 원래 이 지방에는 송강을 남북으로 통과하는 포(浦, 리아스식해안)와 그 해안을 동서로 횡단하는 당(塘)도 많았고, 전지는 그 종포(縱浦, 세로로 뻗은 해안)와 횡당(橫塘)으로 둘러싸여 우전(위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종포는 배수, 횡당은 관개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이들 저지의 물은 송강과 이 종포에 의하여 북쪽은 양자강으로 들어가고, 동쪽으로는 바다로 유입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포와 당은 상당이 넓고 깊었으며 우안(위안)은 높고 두터웠기 때문에 홍수때에도 물을 위전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고, 물의 흐름이 좋아 홍수를 막았다. 그런데 이 무렵이 되자 우안(위안)이 무너져 상당히 낮아졌고, 포나 당은 모래로 메워져 좁고 얕아져버려 홍수가 나면 물이 넘쳐 논속으로 들어가 물이 고여 농민은 수해로 괴로워하게 되었다고 말해진다.
④ 많은 수리전 조성
그래서 겹단은 이 수해를 막기 위하여 이 포나 당의 고적(古跡)을 조사하여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긴급을 요하는 것, 종포 20여 곳, 횡당 17곳을 다시 세워 이 포당을 파내고 그 파낸 흙으로서 우안(위안)을 높게 쌓아두어, 논의 고인물을 배제하려고 했다. 또 겹단은 이 지방의 호수와 늪에서 수심이 얕은 것은 그 안에 우안(위안)을 쌓고, 이를 메워 위전을 만들어, 지세의 액을 증가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이 종포․횡당을 부흥하기 위하여 5년에 걸쳐 소주․수주․상주․호주(湖州) 등의 4주의 민 약 2천만명의 인부를 사역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겹단의 계획은 이들 지방농민의 거센 반대를 받아 결국 다음해인 1073(희녕6)년, 겹단은 그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실현되지 못했다.
겹단은 이 계획을 실현하지 못한 것을 꽤나 안타까웠든지 관직을 그만두고 곤산(崑山)현으로 돌아간 후, 거택의 서쪽의 대사낭(大泗灢)이라고 하는 늪에 자기가 주장한 것 같이 우안이나 구혁․집을 조성하고 우전을 만들어 많은 세입을 얻었으므로 이 시도를 작성하여 정부에 헌상하고 자신이 앞서 말한 설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혔다. 또 이 겹단의 ‘수학’은 그의 아들 겹교(郟僑)에게 이어졌다. 겹교도 소주의 호수나 늪에 위전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남송이 되어 이 지방에서는 겹단부자가 주장한 것과 같은 위전이 많이 만들어지게 된다.
왕안석은 또 강남동로의 여러 주에서 우전을 구축하게 했다. 1076년, 왕안석은 재상을 그만두고 강녕부(강소성 남경시)의 판부(장관)가 되었을 때에도 현무호에서 빈민에게 소․쟁기나 종자를 빌려주고 호전(우전)을 조성하게 했다.
이 농전수리법의 시행으로 많은 수리전이 생겼는데 1077년의 통계에 의하면 개봉부계 및 여러 로의 수리전은 합계 10,793곳 361,198여경이고 그 가운데 양절로가 가장 많아 1,980여곳, 104,848여경에 이르렀다. 이 농전수리법은 이후에도 널리 시행된다.
⑤ 어전법
어전법이라고 하는 것은 하천의 진흙 물을 밭이나 논으로 끌어들여 그 진흙을 침전시켜 비료로 하고 비척한 토지를 비옥한 토지로 바꾸는 일종의 객토법이다. 이것은 1069(희녕2)년, 후숙헌(侯叔獻)이 대운하의 일부인 변수(汴水)를 끌어들여 어전법을 행한 이후부터 이 법이 화북각지에서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법도 옛날부터 화북에서 행해진 적이 있고, 송대에도 1060(가우5)년에 정사맹(程師孟)이 하동로의 강주(絳州, 산서성 신강현) 등에서 이를 행하였다. 그래서 왕안석도 이 법을 화북에서 실시하고자 한 것이다. 또 송대에는 강남의 소주 등에서는 활발히 구거(溝渠, 크리크) 밑의 진흙을 배로 끌어올려 이를 운반하여 논안에 넣어 비옥한 토지를 만들었으므로 이 지방을 본 왕안석은 이 어전법을 화북에서 활용한 것이다.
왕안석의 어전법이 실시된 지방은 다음 세구역으로 나뉜다.
(1) 변수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지방. 이것은 개봉부를 중심으로 하여 경서로나 경동로의 청주(산동성 익도현)․운주(산동성 동평현) 등의 지방이었다. 이곳에는 변수의 유역을 관할하는 제거연변어전사(提擧沿汴淤田司)와 경동로의 어전을 관리하는 관할경동어전사(管轄京東淤田司)가 두어졌다.
(2) 하북로의 장하(漳河)․호타하(滹沱河)․호로하(葫蘆河) 등의 유역, 심주․익주․창주 등의 지방으로, 이곳에는 제거하북어전수리사(提擧河北淤田水利司)가 두어졌다.
(3) 하동로의 분하(汾河)유역․강주․해주(산서성 해현)․동주(同州, 섬서성 大荔현) 등의 지방으로 이곳에는 어전사는 두어지지 않았다. 또 이들 어전사를 통괄하기 위해 개봉부에 도제거어전사(都提擧淤田司)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어전법에서는 하천에 제방을 쌓아 봇둑을 만들고, 도랑(용수로)을 열어 그 진흙물을 밭이나 논으로 흘러들어가게 하는데, 이들 공사에는 많은 병사를 사용하고, 농민을 인부로서 징발했다. 이 법은 관유지나 사유지에서도 행해져 비척한 토지가 많이 비옥한 토지로 되었다. 그 어전의 면적은 변수유역에서 8만여경, 하북로의 여러 강유역에서 2만7천여경, 하동로의 분하유역에서 1만8천여경으로 합해 10여만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단지 이 어전법에서는 봄여름의 우기에 대량의 진흙물을 밭이나 논으로 흐르게 하여 홍수를 일으킬 위험이 있어 이 점에서 기술적인 곤란이 있었던 것 같다.
이상과 같이 왕안석은 이 어전법을 화북에서 시행해 농업생산을 증대하고자 했으나 이것은 첫번째로 앞서 말했듯이 남방으로부터 조운되어 오는 미곡의 액을 줄이고, 화북에서도 군량 등의 식량을 자급하려고 꾀한 점도 있었다. 이 법은 상당한 효과를 올렸다. 어전법이 실시된 지역에서는 쌀․보리의 생산이 증가하고, 토지의 가격도 등귀했다. 단 이 법은 이 때 행해졌을 뿐으로 그 후에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11) 대상인의 폭리억제
① 균수법
균수법은 1069(희녕2)년 7월에 실시되어 왕안석의 신법 가운데에서는 처음으로 행해진 것이다. 이 법은 강회등로발운사인 설향에게 명하여 실시하도록 했다.
당시 여러 로의 상공하는 물화는 매년 그 액이 정해져 있어 일부러 멀리서부터 많은 운임을 들여 경사(개봉시)로 보내온 것 중에서도 경사에서는 이를 사용하지 않고 그 반가격으로 상인에게 팔아버리는 것이 있었고, 또 조정이나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 가운데에서도 대부분 이들 물건을 생산하지 않는 주현에 이를 할당하거나 혹은 이 물건이 생산되지 않는 시절에 요구했으므로 부상이나 대고(大賈, 대상인)가 이 공사의 급용을 틈타 이는 물건의 가격을 조작하여 큰 이익을 얻고 있었다.
왕안석은 이 대상인의 이익을 억제하기 위하여 이 균수법을 시행했다. 즉 이 때 강회등로발운사가 동남의 6로(회남․양절․강남동로․강남서로․형호남로․형호북로)의 조세수입을 모두 관할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돈 5백만민․상공미 3백만석을 대여하고, 6로의 조세수입의 유무를 주지(周知)하여 자유재량으로 물화를 매매하여 옮겨 쓸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화적미나 화매견, 조세나 상공물은 모두 물가가 높은 곳을 피하여 싼 곳에서 사들이고, 또 먼 곳에서 사는 것을 그만두고 가까운 곳에서 구매하도록 하고 싼 가격으로 이 물건을 조달하여 운임을 절약하게 했다.
게다가 중앙의 삼사나 제거제사고무에게 명하여 미리 경사가 있는 창고의 1년간의 지출액과 지금의 재고, 지금부터 조달해야 할 물건 등을 발운사에게 알려놓고, 발운사는 조세나 상공물을 팔아 경사의 여러 창고에 필요한 물건을 필요한 양만큼 사서 저장해 두고, 조정이나 궁중의 명령을 기다려 이것을 경사로 운송하도록 했다.
이와 같이 하여 대상인이 물가를 조작하여 큰 이익을 얻는것을 막고, 운송비용을 절약함과 동시에 물가의 안정을 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후 강회등로발운사 설향은 속관을 두고 이 균수법을 행하였다. 그러나 이것에는 구법당의 반대도 있어 그 효과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② 시역법과 그 주된 조항
왕안석의 시역법은 1072(희녕5)년에 시행되었다. 이것도 또 경사(개봉부)의 대상인이 물가를 조작하여 큰 이익을 획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억제하기 위하여 실시한 것이다.
이 시역법은 위계종(魏繼宗)의 상주에 의하여 시행되었다. 위계종은 경사의 물가가 부상․대성에 의하여 지배되고, 부상․대성이 큰 이익을 거두고 있으므로 시역무를 두어 각화무의 잉여를 빌려 선량한 상인의 원조를 받아 경사의 물가의 고저를 파악하고, 싸면 이것을 사고, 비싸졌을 때 이를 팔아 그 이익을 관에서 거두고 부상․대성이 물가를 좌우하는 일을 없애고자 했다.
또 이 무렵에는 경사의 겸병의 가(대상인)는 지방에서부터 객상이 물화를 가져오면 그 물가를 싼 가격으로 매겨 그것을 사들여, 이들 객상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하여 1072년, 왕안석은 여가문(呂嘉問)을 제거재경시역무로 삼아 창고안의 돈 1백만민과 각화무의 돈을 시역의 본전(원금)으로 하여 시역법을 실시하게 하였다. 이 중 각화무는 앞에서 서술했듯이 차인(차의 어음)과 염초(소금의 어음)의 발행을 담당하는 관청으로서(제3장 참조) 많은 현금을 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금을 시역법으로 유용했다.
경사의 시역법은 다음과 같은 조항으로 실시되었다.
(1) 경사의 여러 행포(行鋪, 상인)과 아인(牙人, 중개상인)을 불러 시역무의 행인(行人)과 아인에 임명한다. 행인에는 자기 또는 타인의 자산이나 금은을 저당하게 하고 5명이상으로 1보를 편성한다. 아인에게는 물화의 평가를 하게 한다.
(2) 지방의 객상이 경사에 물화를 가져와 이를 대상인에게 팔지 않고 시역무에 파는 것을 허카한다.
(3) 행인과 아인은 객상과 물화의 가격을 안정되게 하고 행인이 필요로 하는 물화의 수량을 사들여 시역무의 관전을 지급한다.
(4) 객상에게는 그 물화를 가지고 관물로 교환하는 것도 허카한다.
(5) 행인에게는 이 물화를 그 저당자산의 다소에 따라 그 분에 응하여 사청(외상매입)하게 하여 한번 또는 두번에 나누어 그 가격을 반납시킨다.
(6) 반년후에 납부하면 이자 1할, 1년후면 2할의 이자를 납부한다. 그 후 기한이 지나도 납부하지 않으면 매월 벌금을 징수하도록 한다.
(7) 이상의 것은 강제로 하지 않는다.
(8) 행인이 지금은 불필요하지만 사서 저장해 두면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물화는 관이 사들였다가 시가에 따라 팔도록 한다.
(9) 종래 삼사(제거재경)나 제사고무에서 매년 과배(科配)하고, 또는 과매(科買)하고 있던 물화는 시역무에서 입수한다.
(10) (이것은 후의 규정이지만)상인에게 토지나 자산 또는 금은을 저당해두고 돈을 빌려서 이자를 취한다.
위와 같은 조항으로 시역법은 경사에서 시행되었다. 이어 재경시역무는 시역상계, 각화무는 시역하계로 개정되고 재경상세원, 잡매무, 잡매장 등이 재경시역무의 관하에 속하게 되었다. 이 세 관청은 원래 제거재경제사고무에 속하고 있었고, 재경상세원은 상세를 징수하고, 잡매무는 궁중이나 조정이 필요한 물자를 사들였고, 잡매장은 필요하지 않는 것을 팔았다.(제1장 참조)
이 가운데 잡매무와 잡매장은 앞서 언급한 시역무의 제9항에 해당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이 때 재경시역무에 부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시역무는 경사 이외에도 설치되어 특히 북변이나 강남 등에 많이 두어졌다. 이 때문에 경사의 제거재경시역무도 도제거시역사(都提擧市易司)라고 개칭되어 이들 시역무를 관할했다.
③ 변경무역의 시역무(市易務)
이들 시역무와는 별도로 서변의 섬서로에서는 이보다 앞선 1070년(희녕3)년, 진주(秦州, 섬서성 천수현)에 시역무가 설치되었고, 이어 이것은 고위채(古渭寨, 감숙성 섬서현)으로 옮겨졌다. 이 시역무는 재경시역무와는 그 성격을 달리했고, 서변 여러나라와의 무역 때문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들 지방에서는 상인이 중앙아시아․서번 여러나라와 무역하여 큰 이익을 획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도 이 무역을 행하였고, 그 이익으로 이 방면의 군비도 보조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앞서 말한 사천의 교자를 시역본전으로 하고 서번의 말과 중국의 차를 무역하고 중국의 비단과 서번 여러나라의 산물을 교역했다.
그 후 이 지방에도 많은 시역무가 설치되었다. 이들 시역무는 처음 전운사의 감독하에 있었으나 후에 경사의 도제거시역사의 관할 아래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후 이들 시역무는 또 도제거시역사의 관하를 떠나 이 방면에 신설된 희하로의 경제희하로변방재용사에 속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왕안석의 시역법은 경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시행되었기 때문에 부상․대고는 큰 타격을 입고 파산하는 자도 있었다. 시역무의 이익도 점점 많아져 매년 1백만관에서 1백33만관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 시역법은 그것이 실시되어 가는 동안에 그 실시조항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즉 이 중에서 행인에게 보갑을 편성시켜 외상매입하게 하여 해마다 2할의 이식을 취하고 기한이 지나면 벌금을 내게 하는 법(結保賖請法)은 그 후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 또 물가의 고저를 보고 물화를 매매하고, 그것에 의해 이익을 거두는 법(貿遷物貨法)도 서변의 시역무를 제외하면 그다지 큰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단지 상인에게 그 자산을 저당으로 하여 그 계약서를 잡고 금전을 빌려주고, 혹은 금은을 저당하게 하여 빌려주는 방법(契書金銀抵當法)만은 활발히 이루어져, 이자도 1년에 1할5분에서 1할2분의 저리였다. 이 법은 처음 경사에서 이루어졌을 뿐이었는데, 1082(원풍5)년부터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각 로에 저당고를 설치하여 저당본전을 두고 널리 대부가 이루어졌다.
④ 면행법(免行法)
다음으로 시역법과의 관련으로 1073(희녕6)년에 면행법도 시행되었다. 이 무렵 경사에는 각종의 상업마다 상인의 동업조합, 즉 ‘행’이 결성되었다. 앞서말했듯이 궁중이나 여러 관청은 이들 행으로부터 그 필요로 하는 물화를 사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각행으로부터의 매상은 거의 징발에 가까웠고, 각행의 상인은 이에 무척 고통받았다.
왕안석은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1073년 여러 행의 이익의 다소에 응하여 면행전을 납부하게 하여 종래 궁중이나 여러 관청이 행호로부터 사들이고 있던 것을 그만두게 했다. 그리하여 궁중의 물품은 앞서 말한 잡매무․잡매장에게 내려주고 시사(市司)를 두어 물가를 정하여 매매하게 하고, 여러 관청의 물자도 이곳으로부터 사들이게 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시역사의 업무내용의 제9항에 관련하는 것이다. 이 면행법은 도제거시역사의 감독하에 시행되어 이들 면행전은 면역법의 관잉전 등과 함께 서리의 이록(吏祿)으로 지급되었다.
12) 왕안석 신법의 총정리
① 관제(원풍)의 대개혁으로
이상 서술한 것처럼 1069(희녕2)년부터 왕안석의 신법은 차츰차츰 실시되어 1076(희녕9)년, 왕안석이 재상의 자리를 떠나고 나서도 다소의 변경은 있지만 신종말년까지 시행되었다. 이 때문에 1080(원풍3)년부터 1082년에 걸쳐 앞서 말했듯이 관제의 대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원풍관제는 주로 이들 신법의 실시와 함께 일어난 국가재정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듯하다.
즉 송초부터 왕안석의 신법이 실시되기까지는 국가재정은 삼사가 관할하는 것이었고 재상이라 하더라도 이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자 청묘법, 면역법 및 이에 부속된 방장․하도전(河渡錢)의 법, 농전수리법, 시역법 등의 신법의 재정관계는 모두 사농사가 관할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들 새로운 재정은 모두 재상 왕안석이 장악하는 바였다. 따라서 왕안석의 신법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국가재정은 종래와 같이 삼사가 관할하는 것과, 재상인 왕안석의 관하에 있어 사농사에서 관할되는 것 등의 두가지의 재정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것은 지방재정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로의 전운사(漕司)는 종래와 같이 삼사에 속하여 삼사의 재정을 담당했으나 신법을 시행하기 위하여 창설된 제거상평사(倉司)는 사농사에 속하여 신법관계의 재정을 담당했다. 이것이 원풍관제가 반포되는 큰 요인을 이루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삼사 및 외국(外局)인 제거제사고무사와 제점창초장소는 당제의 3성․6부․9사․5감 가운데, 호부․공부나 예부․형부의 일부 및 각 사, 각 감의 직무 등 광범한 사무를 담당하고 있었다.(제1장 참조) 그런데 이때까지도 가끔 삼사를 폐지하고 당제의 3성․6부․9사․5감을 부흥하자고 하는 의론이 일어났었다. 특히 이 삼사는 당말오대에 임시로 설치된 ‘영외의 관’이므로 송 중앙정부의 관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는 의론이 강했다.
그런데 마침 이 때 왕안석의 신법이 실시되어 유력한 새로운 재정이 생겨나, 삼사의 국가재정에 차지하는 지위가 상당히 저하되었기 때문에 신종은 삼사를 폐지하고 당초의 관제로 돌아가고 삼사와 사농사의 두 사의 재정을 통합시키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원풍의 관제개혁은 한편으로 보면 신법의 총마무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풍관제에서 중앙관제를 보면 앞서 말했듯이 당의 제도로 돌아가 3성(중서․문하․상서성), 6부(이․호․예․병․형․공부), 9사(태상․종정․태복․대리․홍려․광록․사농․태부․위위사), 5감(국자․장작․도수․군기․소부감)이 두어졌다. 이 가운데 특히 재정관계에 대하여 보면 종래의 삼사와 그 바깥 부서인 제거제사고무사, 제점창장소는 폐지되었고, 그것들의 직무는 6부 가운데 호부․공부․예부․형부와 9사 가운데 종정사를 제외한 그 밖의 8사 및 5감 가운데의 국자감을 제외한 그 나머지 4감에 분산되어져 버렸다.(이상 제1장 참조)
② 호부좌우조의 대립
이들 분산된 재정관계안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국가재정을 주로 담당한 호부의 내부구성의 문제, 즉 호부의 좌조와 우조와의 대립관계였다. 그것은 호부의 좌조가 원래의 삼사의 재정을 담당한 것에 대하여 호부의 우조가 원래 사농사의 재정, 즉 신법관계의 재정을 담당한 것이다. 그래서 호부의 장관인 호부상서는 좌조의 재정을 관할할 뿐으로 우조의 재정은 호부의 차관인 호부시랑이 담당했고, 호부상서는 이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 호부우조의 재정은 재상이 관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원풍관제에서는 국가재정은 명목상으로는 호부로 통합되었으나 실질상으로는 호부상서가 관할하는 좌조의 재정과 재상의 관할하에 있는 호부시랑이 담당한 우조의 재정이 있었다. 이 관계는 지방의 로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로의 전운사의 재정은 호부좌조가 관할하는 것이었고, 제거상평사의 재정은 호부우조가 관할했다.
이와 같이 원풍관제에서는 국가재정은 호부상서가 관할하는 좌조의 재정과, 재상의 관할하에 호부시랑이 담당하는 우조의 재정으로 나뉘어 졌으므로 앞의 호부상서가 관할하는 재정을 ‘호부전물(錢物)’이라고 하고, 재상의 관할하에 호부시랑이 담당하는 재정을 ‘조정전물’이라고도 한다. 이 ‘조정전물’은 원래 왕안석이 신법을 실시하여 신법관계의 청묘법․면역법 및 그에 부수되는 방장․하도전의 법․농전수리법․시역법 등의 재정을 사농사에 관할시켰을 때 생겨난 것인데, 원풍관제에서 호부의 좌조와 우조가 대립하는데 이르러, 이 ‘조정전물’은 ‘호부전물’과 명확히 나뉘어지게 된다. 또 ‘호부전물은 국가의 경상비를 지불하는 것이고 ’조정전물‘은 평시에는 원칙으로서 축적해 두고, 비상시의 비용으로 충당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조정봉장전물‘이라고도 불린다. 봉장(封樁)이라 함은 축적하여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원풍관제에서는 호부좌조의 ‘호부전물’과 호부우조의 ‘조정전물’내지 ‘조정봉장전물’로 명확히 나뉘어져 양자가 대립관계에 있게 되었는데 이 관계는 북송말의 국가재정상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신종은 1080(원풍3)년무렵 거란과 서하를 토벌하고자 원풍고를 두고 그 비용을 봉장 즉 축적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1082년에는 상평전(청묘전)이나 방장․하도전의 잉여 5백만민을, 이어 호부우조에게 명하여 상평전 8백만민을 이 원풍고(元豊庫)로 납입하게 했다.
더욱이 1084년에는 제로제거상평사에게 명하여 상평․면역․방장 등의 전곡의 잉여를 안무사 소재의 주나 연변의 군사상 요지로 옮겨 봉장시키고 군비로 충당하게 했다.
그 밖에 상평전곡이나 방장전을 이용하여 전운사의 전곡을 보충하게 하고, 기민을 구제하는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신종조에 있어서는 국가재정은 신법의 실시에 의하여 상당한 여유가 생겼고, 인종조이래의 국가재정의 위기를 극복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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