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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생명 말씀(2018.3.11.)
말씀/ 요한 5:25, 8:7
살리는 언어, 살리는 말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 5:25)
김용규씨의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는 책에 보면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제목 머리말에 폴티보드, 레라보르드치키의 이런 글을 소개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형성한다’ 이 책속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탠포드 대학인지언어학교수인 폴 티보드와 레라보로디츠키가 언어사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험했습니다. 두 실험자는 성별 나이 학력 이념 등 무관하게 피실험자를 선별했습니다. 그리고 절반은 ‘범죄는 에디슨 시를 먹이로 삼는 맹수다, 범죄는 모든 인근에 숨어서 노리고 있다’. 이처럼 범죄를맹수에 비유한 문장들을 읽게 하였고, 다른 절반에게는 범죄는 모든 인간을 감염시킨다’ 범죄를 바이러스에 비유한 문장을 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모두에게 이 도시에서 증가하고 있는 범죄에 대한 대응책을 제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범죄를 맹수에 비유한 문장을 읽은 사람들은 범죄자 색출과 검거를 가장 중요한 대처방안으로 제시한 반면, 바이러스로 비유한 문장을 읽은 사람들은 빈곤을 포함한 범죄의 근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마을이 그 원인에 ‘감염되지 않도록’ 사전 예방하는 법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였습니다.
이 실험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증병한 대표적 사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결과 어떤 대처가 효과를 발휘하였겠는가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든다면 지구촌에 끝없이 테러가 일어나고 있고 지도자들은 분노하며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곤 합니다. 그것은 좋은 대처방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방차원에서 근본이 치유되지 않는 방법은 끝없는 전쟁으로 이어질뿐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총기 사건이 그렇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똑같은 상황에서라도 좋은 말을 듣고 읽고 써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될 수 있으면 긍정적인 말, 믿음의 말, 소망의 말, 사랑의 말을 잘 선별해서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귀신 들린 한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게 나와서 ‘할 수 있거든’ 고쳐 달라고 부탁 합니다. 예수님은 그 말자체가 잘 못 되었음을 지적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내라’ 엡 4:29에서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으로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였고, 골로새서 4: 6절에서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어 말이라는 것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서 6:2절 한 말씀 더 보겠습니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민수기 14장 27절을 보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지난 주 제가 군포에 사는 둘째 누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추석즈음에 형님이 시골 집을 고친 사진을 단톡에 올렸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루디아 사모는 여기에 덧 붙혀서 형수님과 대화 중에 가족들이 세집에 모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그 말을 제주에 사는 큰 누이에게 전해졌고, 그 사진으로 인해서 큰 누님이 상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큰 누님이 서울에 모처럼 올라가게 되어서 형님게 전화를 걸도 문자를 보냈는데 전부 씹어버리고 너무 서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한마디도 안하고, 집 수리르 하고 가족 모임을 생각할 수 있는가? 미주알 고주알 형님의 못된 심보 그리고 큰 누이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이번에는 더욱 심도있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 오랬 동안 들어온 형님 이야기를 또 듣기가 싫었습니다. 다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너는 이해를 못해, 언니가 얼마나 어렵고 상처를 받았는지...내말 들어봐.. 저는 너무 답답했습니다.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이야기하길레 화가 나서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심으려고하느냐? 그만하라고 말해버렸습니다. 여기서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는 잘 몰랐는데 그 후에 제주에 사시는 큰 누이로부터 전하가 왔습니다. 둘째 누이가 가족 단톡에 아멘도 안하는데 알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모른다고 했습니다. 상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전화를 해주라고..부탁을 했습니다. 안받길레 카톡을 했습니다. 죄송하다고, 문자도 넣었는데 보지를 않습니다. 나중에 다시 전화는 받았는데 전혀 새로운 동생의 모습을 발견했다, 변했다. 들어서는 안될 뜯밖의 말을 들었다. 착한 동생인데 목사인데. 시간이 걸릴듯하다고 하였습니다. 듣기 싫어도 지혜롭게 섬기는 언어를 쓰고 살리는 언어를 써야하는데 차단하는 언어 죽이는 언어를 쓴 것입니다. 감정과 분노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미 업질러진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례하였다. 죄송하다. 용서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돌이켜보니 저도 더 수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재명이 어머니로 인해서 형수 수욕한 것이 녹음 되서 평생 따라다니며 욕을 먹는 생각이 났습니다. 언어란느 것이 그렇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성처를 주면 그동안의 수십년의 세월고 인격이 붕ㄴ됩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22절에서 예수님이 왜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하였겠습니까? 말이라고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잘 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힘들다는 생각으로 죽이는 언어를 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살리는 언어 힘을 주는 언어, 세우는 언어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용규씨는 그의 책에서 ‘벨락의 아폴로’라는 풍자극을 소개하면서 말과 언어의 놀라운 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주인공 아그네스가 취업을 하려고 사장실 문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밖에서 비서 서기가 아무도 만날 수 없다고 막습니다. 그 때 한 남자(아폴로신)가 나타나 마법의 주문을 알려줍니다. 남자를 사로잡는 비결? 그들이 사장이건 누구건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다이아몬드를 바치게 하는 비결을 가르쳐줄까요 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간단하다고 합니다. 딱 한가지 실패가 없는 비결이라고 합니다. 이 비결을 모르면 여자는 일평생 불행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비결을 알면 세계의 여왕이 된다고 합니다. 아그네스는 그 비결이 무엇인지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귓속 말로 이야기합니다. 그들에게 “잘생겼다”고 말하세요. “그러니까 아첨하라는 말입니까? 치켜세우라는 것입니까?” “그런 것 필요 없고 그저 잘 생겼다고 하세요”. “그게 전부 입니까?” “전부에요. 바보도, 똑똑한 자도, 겸손한 자도, 허영심 있는 자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구별하지 말고 잘생겼다고만 하세요. 철학박사에게 하면 당신에게 학위를 줄 것이고, 푸줏간 주인에게 하면 고기를 줄 것이고, 사장에게 하면 일자리를 줄 것입니다”. 잘 아는 사이라야 그렇지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직접 대면해서 그런 말을 해요. 대부분 남자들 미남이 아닌데요. 아가씨 그렇게 인색하세요? 주저하지 말고, 추남이건 절름발이이건 홀쭉이이건 뚱뚱이 이건 가릴 것 없이 말하세요. 그 사람들이 그걸 믿을까요? ‘물론 믿고 말고요. 모든 남자들은 가장 추남이라도 내심으로는 그들이 미남이라고 믿고 있답니다. 가장 자신이 없는 사람일수록 그 말을 들으면 가장 반가워할 것입니다. 하도 반신반의하니까 파리를 상대로 연습을 한번 시킵니다. “파리야 넌 참 잘생겼구나” 그 말을 건네자 파리가 그녀에게 달라붙어 가질 않습니다. 다시 “파리야 네 다리는 어쩜 그렇게 못생겼니?” 하자 날라가버립니다.
용기를 얻은 아그네스가 다시 사장실을 향해 나갑니다. 부사장실에 들어갔던 서기가 마침 나옵니다. 아폴로가 아그네스에게 어서 말하라고 합니다. 아그네스가 활짝 웃으면서 인사를 합니다. “잘 생기셨어요” 서기가 귀를 의심하듯 하지만 싫지는 않은 내색을 합니다. 설마 고릴라를 보고 잘 생기셨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요? 하이튼 고맙소. 그런데 어디가 잘생겼나요? 전부가요. 허허 활짝 웃으면서 전부라고요 그럴리가? 그러더니 아가씨 일자리 알아보러 왔다고 했지요? 잠간 기다려요 내가 가서 내 조카라고 해서 부사장님 만나게 해드릴께요. 전에는 무조건 안 된다고 하던 사람이 확 바뀌어졌습니다.
부사장이 나왔습니다. 2분만 시간 냅니다. 용건만 빨리 말씀 하세요. 아그네스 부사장을 보면서 말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잘 생기셨어요?” 부사장은 못 믿겠다는 듯이 “나보고 하는 말이요?” “그럼요. 부사장님은 미남이셔요.” 처음에는 믿지 않고 2분만하던 부사장이 한참 이야기를 하더니 수작까지 떨고,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또 만나자고 합니다.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했지요. 그거 잘 됐소. 내 비서가 엉망인데 전보 발령 낼 참이었소, 아가씨 일급 타이피스트라고 했지요? 자기 비서로 쓸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회의를 위해 중역들이 출근할 때 그들에게도 “참 잘 생기셨어요”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 “오 상냥한 아가씨군, 오 매력있는 아가씨야” 하며 기분이 좋아합니다. 회사가 밝아지고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사람들 얼굴이 환해지고, 일에 열정들을 보이고, 시무룩하고 무뚝뚝한 사람들이 표정이 밝아집니다.
사장이 말합니다. “아그네스양 이 회사는 지난 15년 동안 질시와 의혹 암울에 휩싸여왔어요. 그런데 갑자기 오늘 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모두들 자기 자신에 도취되어 있으며 서로 웃고 즐거워해서 물어보면 모두 입을 모아 아가씨 덕분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했길래 이같은 기적이 일어났단 말이요? “저는 그저 잘 생기셨어요”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래요? 보자마자 그저 잘 생기셨어요라고 했다는 말이요? 그렇다면 사장인 나는 어떻소? 나에게는 왜 아무 말도 아니했소? 그 이유는 사장님이 더 잘 아실텐데요. 나는 모르겠는데... 그건 굳이 말씀 드릴필요가 없습니다. 사장님은 미남이시기 때문이지요. 다시 한번 말씀해주세요. 사장님은 미남이세요. 잘 생각해봐요 아그네스양,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확실히 내가 미남으로 보인단 말이지요?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미남이세요. 아 그래요? 일자리 찾는다고 했지요? 그 때 비서가 들어왔는데 사장은 즉시로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오늘 그만 두라고합니다. 아그네스양을 비서로 채용한다고 합니다.
전 비서가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집니다. 기가 막혀서. 사모님께 보고드린다고 합니다. 그 때 사모가 들어옵니다. 왜 갑자기 이 아가씨를 비서로 채용하냐고 따져 묻습니다. 갑자기 돌았느냐고 합니다. 천만에 미남이 되었을 뿐이요 합니다. 아그네스에게 묻습니다. 이 양반이 정말 미남이라고 생각해요? 그럼요! 어떤 스타일의 미남이죠? 멜락의 아폴로같은 타입. 사기군이로구만. 그렇다면 그동안 16년동안 살아오면서 사장을 가장 잘 아는 자신이 말해준다고 하면서 사장은 미남이 아니라 추남이라고 합니다. 이 여자가 어떤 달콤한 말로 거짓말 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결코 모든 걸 걸고 맹새코 외치겠는데 당신은 추남이라고요. 아그네스양 들었소, 나는 16년 동안 아내에게 이말만 듣고 살았소. 그 진실이기 때문이죠. 저는 사실대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알겠군, 왜 내가 당신 옆에 있기 만해도 자신을 잃고 기가 죽는지... 부인은 아그네스에게 또 다른 진실을 이야기 해줍니다. 밤마다 코를 곤다는 사실, 깡마른 무릎팍을 가졌다는 사실, 흉측한 눈썹있다는 사실.
그러나 아그네스는 사장님 코고는 것도 멋있고, 무릎은 개성있어 좋고, 눈썹은 제왕의 눈썹이라고 합니다. 부인은 화가 나서 나가버리고 사장은 고백합니다. 아그네스양 고맙소, 당신은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었소.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언어 어떤 말을 써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살리는 말, 행복하게 하는 말, 또 하나는 죽이는 말, 불행하게 하는 말입니다. 물론 죽이는 말이라고 해서 꼭 나쁜 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말이라고 해서 꼭 사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그네스의 말은 일반적으로 거짓일 수 있습니다. 미남이 아닌데 미남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기분이 좋고, 행복해지고, 자신감이 생기고 행복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언어를 물의 언어라고 합니다. 또는 사랑의 언어 삶의 언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장 부인의 말은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느낀 장본인으로서 정말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적인 언어가 16년 동안 사장의 마음을 자신감 없게 만들고, 아내의 물건만 봐도 움추려들게 하였고 불행한 존재가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언어를 불의 언어라고 합니다. 또는 사실 언어 판단 언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이 사실이라도 사랑없이 들이밀 때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도 그런 원리입니다.
저도 사실 다 알아도 그렇군요, 그래요, 그랬었군요하며 인내로 들어주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누님. 그래도 옆에서 큰 누님 위로해주고 관심가져줘주니 큰 누님이 힘을 얻겠습니다. 저는 실제로 아무것도 못하지만 그래도 둘째 누님이 그렇게 힘써 주시니 고맙네요. 누님, 위해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형님 위해. 반목 질시보다 모두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야지요. 기도할께요. 아, 누가 찾아온 것 같네요, 다음에 또 전화해요. 이렇게 했으면 상처받을 일이 없었겠지요.
이제 성서로 들어가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성서에서 이미 우리는 수없이 배웠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아비 데라는 강건너 편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고, 아브라함은 75세가 되도록 나이가 늙어가지만 자식도 없습니다. 현실을 보면 정말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부르시고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12) 현실적으로는 안 맞는 말씀을 하십니다. 살리는 언어를 쓰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이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언어, 소망을 주는 언어입니다. 그는 그 말씀대로 하늘의 별과 같은 후손들을 두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밤이 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고기가 제대로 잡을 수 있을까 하는데 예수님은 그 상황을 초월해서 그에게 이제부터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십니다. 당장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실패한 어부였지만 말씀대로 그는 위대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한 여인을 끌고 와서 율법에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 하였는데 선생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빈틈없는 사실 언어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에 근거한 말 앞에 여인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율법은 사실 이지만 불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의 언어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아무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냥 앉아서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이 말을 듣고 나서 예수님을 시험하며 여인을 죽이려했던 사람들은 어른으로부터 아이들까지 슬슬 다 도망하고 여인만 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살리는 언어입니다. 지금 죄인이고 허물투성이인 인간에게 율법을 적용한다면 어느 누구가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죄인이 되었고, 정령 죽으리라는 말씀대로 죽어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리러 오신 것입니다. ME TOO 운동이 안타까운 것은 정죄 판단 죽음 더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적 말은 맞지만 사람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 운도 이전에 먼저 살리는 언어운동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 5:25) 율법은 판단만 하지 살리지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단지 me yoo 운동으로 사회가 밝아질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밝은 세상을 만두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드는 것입니다. 먼저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리는 말씀을 말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마지막 베드로 전서 4:11절 말씀 읽고 마치겠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