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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경제 스크랩 KLO 부대와 백마부대원
스콜피언 추천 0 조회 27 09.12.31 15: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6·25전쟁 實錄 - KLO부대 소속 유격백마부대원들의 마지막 증언
 
『散華한 570명의 백마부대원을 기억하는 사람은 우리들 밖에 없습니다』
 
38선 이북 敵地에서 서해 12개 도서를 점령하고 유격전 감행…
북괴군 3000여 명 사살, 중공군 600여 명 생포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ksdhan@chosun.com
五山學校 출신들이 주축
사망한 유격백마부대원 추도식에 참석한 생존 유격백마부대원들.
 지난 6월12일 오후 月刊朝鮮으로 70~80代의 노인 7명이 찾아왔다. 6·25전쟁 당시 서해안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이북 島嶼(도서) 12곳을 점령하고 인민군·중공군에 맞서 유격전을 벌였던 「유격백마부대원」 출신들이었다.
 
  삶의 모진풍파를 얼굴 가득 담은 노인들은 『기력이 더 쇠하기 전에 우리들이 겪은 6·25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17세 때 유격대원으로 참가해 부대內 막내였던 金一龍(김일용)씨의 지금 나이는 만 73세다.
 
  6·25전쟁 당시 2600여 명이었던 부대원들 가운데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200명이 채 안 된다. 전쟁 중 552명이 사망했고(편집자 注: 유격백마부대원 주장은 사망 570명이다), 휴전 후 부상 후유증으로 시달리다가 사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은 현재 「유격백마부대전우회」를 구성해 활동하고 있는데, 회원은 120명이다.
 
  유격백마부대는 南岡 李昇薰(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五山學校(오산학교) 출신들로 부대원들 대부분의 고향이 평북 정주다.
 
  10代 후반에서 20代 초반 나이에 공산군과 싸우는 군번 없는 유격대원이 되어 혈혈단신 고향을 떠난 이들은 전쟁 발발 57주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一家(일가)붙이도 없고 연고도 없는 남한에서의 삶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 이상의 고통이었다고 이들은 말한다.
 
  이날 증언에 참석한 사람들은 韓鳳德(한봉덕·80·유격백마부대전우회 회장), 盧朝熙(노조희·86), 金一龍(김일용·73), 李公植(이공식·75), 洪性根(홍성근·80), 田成俊(전성준·73), 安道國(안도국·75) 씨 등 7명이다.
 

 
  軍籍에 오르지 못한 전사자
 
홍성근씨

  이들은 증언에 앞서 타이핑된 문서를 한 장 내밀었다. 1971년 9월16일자로 작성된 「국방부 장관의 전 유격백마부대에 관한 사실 증명」이다. 6·25전쟁 중 활동을 증명할 수 없어 정부로부터 보상을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한 이들에게는 소중한 문서다. 내용이 길지만 유격백마부대의 활동을 요약해 보여 주는 내용이어서 전문을 게재한다.
 
  <유격백마부대에 관한 사실
 
  가. 1950. 11. 17 평안북도에 진격하였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침략으로 전략적인 후퇴를 하게 되자, 정주군의 각 면 치안대가 단합하여 12. 22 유격대로서 백마부대라고 명명하고 발족하였음. 그 후 서해의 여러 섬을 전전하면서 대공 유격전으로 북괴군 3000여 명 사살, 중공군 포로 600여 명, 애국 청년 구출 2800명, 동포 구출 1만5000명의 전과를 올렸으며, 그외 적의 보급로 파괴(철도·터널·교량)와 중요 시설 기습 등 실로 빛나는 전공을 거두었음.
 
  나. 유격백마부대는 병력이 2600여 명으로서, 20개 유격부대 중 그 규모가 가장 컸으며, 이들 각 유격부대는 처음에 미8군에서 관장하다가 1952. 11 美 극동사령부 정보처로 이관되었음. 휴전 후 1953. 10 국방부 산하 8250부대로 흡수되어 유격대로 존속하여 오다가 1954. 2 국군으로 정식 편입되었음.
 
  다. 유격백마부대는 유격작전 기간 중 552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이들 전사자는 육군본부 민사감실에 통보되어 그 명단이 기록으로 보관되어 있으나 軍籍(군적)에 오르지 못하고 금일에 이르고 있음>
 
  유격백마부대전우회 韓鳳德 회장은 『켈로부대 직할 소속 대원들은 국가가 인정해 주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인정해 주지 않고 있다』면서 『金大中 정부 때 인정을 해준다고 해서 서훈 상신을 어렵게 했는데 아직까지 인정을 안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552명의 戰友(전우)를 戰場(전장)에서 잃고도 국가로부터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까닭일까. 이들의 戰場에 관한 기억은 57년 여가 지난 지금도 생생했다. 이들이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전투는 인민군 1개 대대를 섬멸한 정주 부근에 있는 「애도섬 전투」와 중공군 2개 사단과 접전을 벌인 「대화도 전투」다.
 
  이들의 증언을 종합해 당시의 상황들을 再구성했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무기
 
  유격백마부대의 前身(전신)은 정주군 일대 13개 面(면)에 조직돼 있던 치안대다. 유엔군이 北으로 진주할 때 평북 정주군 오산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학생과 청장년들은 향토 사수와 자유를 외치며 궐기, 치안대를 조직하고 인해전술로 공격해 오는 중공군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
 
  무기도 없고 훈련도 안 된 상태에서 정규군인 중공군에 대항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최대의 위기에 몰린 정주군 각 面의 치안대들은 포구인 각산면 본저리로 집결했다. 각 面의 치안대들은 1950년 11월22일 이곳에서 육군본부 G2 요원인 金應洙(김응수·2003년 작고)씨를 부대장으로 추대하고 유격백마부대를 창설했다.
 
 
  부대 창설 후 애도에서 조직 강화
 
한봉덕씨

  부대 창설 직후인 11월26일 유격백마부대는 본저리에서 20리가량 떨어져 있는 섬인 「애도」로 들어갔다. 일단 중공군의 공세를 피하고 전투부대로서의 편제와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곳에서 유격백마부대는 이듬해 2월24일까지 약 3개월간 머물렀다.
 
  애도로 들어간 유격백마부대원들은 공산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방어진지 구축과 전술적 병력 배치 등 철저한 방어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군대라는 조직이 만들어진 이상 규율이 필요했다.
 
  대원들은 매일 오전 7시에 조회를 했다. 부대본부 국기게양대 앞에 전원 집합해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봉창했다. 부대장의 훈시를 끝으로 조회가 끝나면 아침식사를 한 다음 8시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군가 연습과 행진 후 부대장의 강의를 들었다. 오후에는 전투훈련을 했다. 대원 중에는 여성도 있었는데 그들도 남자대원과 다름없는 교육과 훈련에 임했다. 보초근무만 열외였다.
 
  담배를 구할 수 없어서 목화잎, 포도잎, 아카시아잎, 딸기나무잎, 칡넝쿨 등 연기가 나는 것은 모두 담배 대신으로 이용됐다.
 
  사방에서 모여든 피란민들로 人的(인적) 자원은 풍부했으나 이들을 무장시킬 무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130여 정의 총과 경기관총 3정이 전부였다. 결국 槍(창)으로 무장하기로 하고 창을 이용한 돌격전법을 훈련시켜 유사시에 대비했다.
 
  1950년 12월17일 인민군 500~600명이 바닷가에 집결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敵(적)이 침공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피란민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일부 부녀자들 가운데는 벌써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부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대장은 부대원 전원을 애도섬에 있는 붕어리 고지에 집합시켰다. 이곳은 조수가 들면 섬이 되고, 조수가 빠지면 갯벌로 걸어다닐 수 있는 지역이다. 육지에서 갯벌을 걸어서 애도로 오려면 이곳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다.
 
 
  部隊長 권총 버리고 槍을 잡다
 
전성준씨

  유격백마부대는 붕어리 고지에 敵들의 포탄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한 참호를 파서 진지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붕어리 고지로 부대원이 아닌 피란민들도 몰려들었다. 金應洙 부대장이 『왜들 안전지대로 대피하지 않고 위험한 이곳으로 오느냐』고 물었다. 피란민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젊은 사람들이 싸우는데 우리들은 살겠다고 피할 수 있겠습니까. 대원, 피란민, 주민을 막론하고 적이 들어오면 다 죽을 목숨인데 어디 가서 살겠다고 피합니까. 대원들이 전사하면 우리들도 하다 못해 그 무기를 들고 싸워서 고깃값이라도 해야 할 게 아닙니까』
 
  부대장을 비롯한 부대 간부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의 불안감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金부대장은 차고 있던 권총을 연락병에게 주면서 대신 창을 받아 들고서 말했다.
 
  『나는 오늘의 전투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하면서 이 창을 가지고 싸우겠으니 그리 알고 여러분들은 곧 헤어져서 싸움터로 가라』
 
  붕어리는 동쪽이 육지로 향해 있는데 섬 밑에는 사람의 키를 넘는 바위가 수없이 많았으므로 엄폐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사람의 힘으로 만들기에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천연 엄폐지대였다.
 
  바위 틈에는 창부대와 수류탄만을 가진 대원들이 숨었고, 바로 뒤에 다발총(기관단총) 부대가 숨었다. 고지 중턱에 있는 참호 속에는 소총 부대가, 고지에는 경기관총이 배치되었다. 적들과 비교해 터무니없이 적은 화력 때문에 최대한 지형지물을 이용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인민군은 2000m 전방에서 박격포 사격을 가해 왔다. 아무 반응이 없자 경무장한 소총 부대가 진격해 왔다. 붕어리 고지 가까이 접근한 인민군은 유격백마부대원들에게 투항하라고 외쳤다. 아무 반응이 없자 인민군 소총 부대는 다시 더 가까이 진격해 왔다. 그들은 이미 추위에 지쳐 있었고 피로에 지쳐 있었다.
 
  인민군이 유격대원들이 숨어 있는 곳의 5m 앞까지 접근해 왔을 때 부대장의 사격 명령이 떨어졌다. 적들이 쓰러졌다. 총알을 피하기 위해 갯벌에 엎드리는 인민군도 있었는데, 혹한으로 온몸이 얼어붙고 총도 쓸모가 없게 됐다. 전투 시작 15분 만에 3분의 1 이상 병력을 잃은 적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인민군들이 다시 공격 대형을 넓게 하고 쳐들어왔다. 유격백마부대원들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숨을 죽이고 그들이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가까이 다가왔을 때 또다시 유격백마부대원들의 화기가 불을 뿜었다. 참패를 당한 인민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후퇴하던 인민군들에게는 바닷물이라는 또 다른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살아 돌아가던 인민군의 대부분이 水葬(수장)됐다. 이날 전투에서 죽은 인민군 수는 650여 명이었다. 훗날 유격백마부대가 구출한 북한지역에 있던 반공청년들에 따르면, 이날 전투에서 인민군의 생존자는 3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명은 동상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 전투를 통해 유격백마부대는 82mm 박격포 2문, 61mm 박격포 2문, 중기관총 3정, 경기관총 5정, 아식보총 617정, 권총 5정, 실탄 15만여 발, 쌀 11가마를 노획했다.
 
 
  동키부대 15연대로 편입
 
김이후씨

  이후에도 인민군과 몇 차례 교전을 벌이며 애도를 지키던 유격백마부대는 식량 사정 때문에 애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애도를 떠나 1951년 2월26일에 황해도 「초도」에 도착한 유격백마부대는 그곳에서 활동하던 구월산 부대와 연합으로 적진 침투 등의 對공산군 전투를 벌였다.
 
  서해 도서지역에서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하여 공산군을 공격하며 유격전을 감행하고 있던 유격부대의 전투 능력을 알게 된 美軍(미군) 당국은 1951년 3월 유격백마부대를 美 극동군표기지 사령부의 동키 제15연대로 편입시켰다.
 
  유격백마부대가 활동하던 비슷한 시기에 평북지역 치안대 출신들로 구성된 「평북부대」는 정주 등에서 적의 후방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이 부대도 동키부대 14연대로 편입되었다.
 
  1951년 4월16일 평북부대는 북한 내륙으로 침투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를 위해 유격백마부대가 머물던 애도로 들어가 많은 전과를 얻었다. 그해 11월15일 중공군 1개 연대의 공격을 받아 360여 명의 대원 중 300여 명이 사망했다. 이 부대 생존자들은 1961년 12월 유격백마부대로 흡수 통합됐다.
 
  1951년 5월2일 유격백마부대는 북위 40도선 근방의 평북 철산반도 해안으로 북진해 대화도를 점령한 후 인근 大小 도서들을 모두 탈환해 새로운 전초 기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부대가 대화도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병력의 보충은 이웃 매추리섬과 철산 모나즈 광산에서 구출되는 반공청년들을 주축으로 했다.
 
  철산반도 해안 일대의 모나즈 광산은 일제 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8·15 광복 전에는 정주 출신인 崔泰涉(최태섭) 前 한국유리 회장의 소유였다. 북한은 1950년 국군과 연합군이 이 지역까지 진격했을 때 우익 진영에 가담했거나 치안대에 가담했던 반공청년들을 체포해 모나즈 광산으로 보내 강제 노역을 시켰다. 유격백마부대가 모나즈 광산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반공청년을 구한 수는 2800여 명에 이른다.
 
  유격백마부대의 6·25 당시 활동상을 증언하기 위해 찾아온 盧朝熙씨도 모나즈 광산에서 일하다가 구출돼 유격백마부대원이 된 사람이다. 오산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盧씨는 1951년 8월8일에 동료 40여 명과 함께 구출됐다고 한다.
 
  盧씨는 6·25전쟁 전 결혼했지만 아내와 딸을 데리고 나오지 못했다. 유격백마전우회 韓鳳德 회장 역시 부모님과 남동생 셋, 여동생 한 명을 고향 정주에 남겨 두고 유격대 활동을 벌이다 남한에 정착했다. 韓회장은 『고향으로 곧 돌아가게 될 줄 알고 떠나왔는데 벌써 57년이 흘렀네요』 하며 허하게 웃었다.
 
  부대 창설時 막내였던 金一龍씨는 그나마 행복한 편이다. 오산학교 재학 중에 유격백마부대원이 된 金씨는 남한에서 두 누나를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조실부모한 후 자신을 자식처럼 키워 준 큰누나의 얼굴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지만 말이다.
 
서울 서초구「양재 시민의 숲」충혼탑 앞에서 6·25 당시를 회상하고 있는 백마부대원들. 맨 왼쪽이 유격백마부대 창설 부대장인 김응수씨다. 김씨는 2003년 작고했다.

 
  휴전 회담이 부른 공산군의 총공세
 
노조희씨

  이들이 가장 아프게 기억하는 전투가 중공군 2개 사단과 접전을 벌인 1951년 11월의 「대화도 전투」다. 유격백마부대는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이 전투에서 부대 창설 후 최대의 피해를 당한다. 이곳이 격전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停戰(정전) 회담 때문이었다.
 
  1951년 10월 유엔군 측은 공산군 측에 다음과 같은 제의를 했다.
 
  『지금의 전선을 휴전선으로 하되 우리가 점령하고 있는 38선 이북 도서와 공산 측이 점령하고 있는 개성지구와 교환하자』
 
  공산 측은 이런 유엔 측의 제의를 거절하고 38선 이북의 도서를 무력으로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38선 이북의 도서 가운데 우리 측은 황해도 「초도」와 「석도」를 유격수월부대와 한국 해병대가 점령하고 있었을 뿐 「대화도」를 비롯한 12개 도서는 유격백마부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게다가 유격백마부대가 점령한 도서는 최북단에 있는 섬들이었다. 공산군의 공격목표가 백마부대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51년 10월13일 오후 3시. 대화도 북쪽 상공에 대형 폭격기 8대와 미그15기 12대가 출현했다. 적의 대대적인 공중 폭격이 감행된 것이다. 대화도는 삽시간에 불바다가 됐다. 이날 317명의 부대원과 민간인 39명이 사망했다.
 
  공산군은 11월9일에는 미그기 편대를 동원해 야간공습을 해왔다. 다음날에는 유격백마부대 제3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백마부대 최후의 전초기지인 탄도를 공격해 왔다.
 
  마침내 1951년 11월30일 이날은 우리 軍이 북위 40도 선상에 있는 최후의 교두보를 적들에게 넘겨 주는 날이었다. 중공군 2개 사단이 대화도를 공격한 날이다. 이날 전투에서 유격백마부대는 253명의 전사자를 냈고, 613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대화도를 점령한 중공군의 피해도 엄청났다. 500`~600t급 해군함정 6척이 유격백마부대의 포격으로 격침됐고, 3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부상 후 자결을 택한 연대장들
 
김일용씨

  본대가 떠났지만 대화도에서 유격백마부대원과 중공군의 전투는 계속됐다.
 
  정광남 제3연대장은 패잔병 50여 명을 모아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게릴라전 8일째 되던 날 정광남이 적탄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동료들에게 부담줄 것을 염려한 그는 칼빈 총구를 가슴에 대고 자결을 시도하다 2연대장 최광조의 만류로 총구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그날 정광남은 끝내 총탄을 자신의 가슴에 쏘아 자결하고 말았다.
 
  13일째 되는 날에는 제2연대장 최광조 역시 적의 토벌대와 격전 끝에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여섯 군데 관통상을 입었는데, 의약품이 없어서 치료는 불가능했다. 최광조는 은신처인 토굴로 데려다 달라고 부대원들에게 부탁했다. 부대원들은 최광조를 토굴에 두고 탈출 선박 노획을 위한 작전에 나섰다.
 
  부대원들이 뭔가 꺼림칙해 다시 토굴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수류탄으로 자결의 길을 택했다. 형체도 알 수 없는 사체들을 모아 가마니에 싸서 묻은 후 부대원들은 이 토굴의 이름을 「피굴」이라고 지었다. 살아서 통일이 되는 날에는 그 자리에 위령탑을 세우자던 당시 부대원들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대화도에 남아 게릴라 활동을 벌이던 50여 명의 대원들이 이렇게 하나둘씩 숨져 가고 8명이 남았다. 이들 8명은 다음해인 1952년 4월 하순 구사일생으로 대화도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유격백마부대원들은 그들을 「대화도 탈출 8용사」라고 부른다.
 
  1951년 11월30일 대화도에서 철군했던 유격백마부대원들은 이듬해 7월20일 대화도를 다시 점령한다. 부대원들은 그곳에서 7개월 전에 숨져간 대원들의 유해를 찾는 데 힘썼다. 13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찾아낸 유해를 장례 지내고 간단한 위령제를 지냈다.
 
  용감하게 싸우다 동료들에게 부담줄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자결의 길을 선택한 최광조·정광남씨의 자결 장소를 찾아 예를 표하고, 산에서 꺾어 만든 조화를 바쳤다. 부대장을 포함한 모든 부대원들이 눈물을 흘렸다. 살아 있는 것이 미안하고 함께 철수하지 못한 것이 더 미안해서 울었다.
 
  유격백마부대는 휴전협정 조인 1주일 전 그 지역에서 철수해 인천 앞바다에 있는 용유도로 주둔지를 옮겼다. 1954년 2월26일 우리나라 전체 유격대가 해산됨으로써 유격백마부대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민주화 운동한 사람은 보상을 받는데…
 
안도국씨

  증언을 마친 老兵(노병)들에게 기자는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남한 사회에는 연고자가 거의 없을텐데 정전협상 발효 후 부대를 떠난 유격백마부대원들이 주로 선택한 직업은 무엇이었습니까.
 
  『가족도 없고 발판도 없으니까 주로 장사였죠. 유격전을 벌일 때 우리 부대가 배를 많이 이용해서 그런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당시 부대원들이 주로 인천 등 서해안 지역에 밀집해서 살지는 않습니까.
 
  『아니에요. 역시 연고가 없다 보니까 부산·목포 등 전국적으로 흩어져서 살아요』
 
  ―함께 목숨을 걸고 공산군과 싸운 전우들이니까 지금까지 자주 만나셨겠습니까.
 
  『먹고살기 바빠서 자주 못 만났어요. 지금도 상황이 별반 달라진 것은 없어요』
 
  ―오산학교 재학 중에 유격대에 지원하신 분들이 많을 텐데 전쟁이 끝나고 난 후 학교를 더 다녀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까.
 
  『학교 다니는 학생들을 보면 참 부러웠죠. 다시 학교에 들어가서 고등학교라도 마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먹는 것은 물론이고 몸 하나 눕힐 곳을 찾는 것조차 어려웠는데요』
 
  ―전투 중 사망한 분들을 기리는 추도식은 열립니까.
 
  『매년 10월에 열리죠. 유격백마부대 기념사업회가 있는데 오산학교 전제현 교장이 주도하고 있어요. 장소는 오산학교 강당에서 하는데 요즘은 학부모들이 귀찮게 왜 추도식을 학교에서 하느냐고 항의도 하고 그런다네요. 씁쓸한 일이죠』
 
  ―우리 사회에 대해서 서운한 게 많으신 것 같습니다.
 
  『사회에 대한 서운함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좀 있어요. 이런 얘기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민주화운동한 사람들은 다 보상을 받았는데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 걸었던 우리들은 보상은 고사하고 「고맙다」는 소리조차 못 들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민주화도 가능했던 것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 대한민국의 땅을 한 평이라도 더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었는데…』
 
 
  『우리 일은 우리만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유격백마부대는 서해 최북단에서 공산군과 500여 회에 달하는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는 한편 공산 치하를 피해 남쪽으로 가려는 북한 주민들의 피란을 돕고 敵 지역에 숨어서 지내는 반공인사들의 탈출을 도왔다. 공산군이 점령 중인 지역에 직접 들어가서 한 일들이다. 이들이 구출한 인사만 2만여 명이다.
 
  ―부대가 작전을 벌인 지역이 고향인 정주와 가까웠는데 고향으로 가서 식구들을 구출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습니까.
 
  『왜 없었겠어요. 동포 구출에 어려운 지역이 있고 쉬운 지역이 있는데, 정주는 어려운 지역에 속했죠.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구해올 때 우리 가족 생각이 엄청났어요. 김인도라는 대원은 고향집에 찾아가 애들 옷을 미리 가져오면서 곧 데리러 오겠다고 가족들과 약속을 했는데 결국에는 가족을 구출하지 못했죠. 그 속이 오죽했겠습니까』
 
  ―우리 정부에 바라는 것은 합당한 보상입니까.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쳐 일했다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하는 겁니다. 늙어서 얼마를 더 살지 모르는데 정부가 우리의 소망을 들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소한 우리에게 고마운 마음이라도 가졌으면 좋겠어요』
 
  7인의 老兵들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제 전쟁터에서 산화한 유격백마부대 전우 570명을 기억해 줄 사람은 전우였던 우리들밖에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한 일도 우리만이 스스로 기억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국가도 국민도 우리를 잊었잖아요? 우리가 오래오래 살아야 그분들을 오래 오래 기억해 주고 우리를 오래 기억하는 일이 되겠죠?』
 
  증언을 마치고 돌아가는 老兵들의 어때가 무거워 보였다. 단지 세월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 崔成龍 납북자가족 대표 부친 崔元模씨
 
  유격백마부대 유일한 동력선 함장 맡아 보급과 병력 수송 , 1967년 납북돼 악질반동분자로 총살당했다.
 
 
  북진호 함장 崔元模
 
위령제에 참석해 묵념하고 있는 崔대표.

  지난 5월25일 오후 1시, 인천시 중구 용유도에 있는 유격백마부대 충혼탑에 崔成龍(최성룡·55) 납북자가족 대표가 도착했다. 이날 충혼탑 앞에서 유격백마부대원들의 위령제가 열렸다. 崔대표는 군복을 입은 70~80代 노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유격백마부대 출신 노인들은 그를 같은 부대 출신인 것처럼 반갑게 맞아줬다.
 
  韓鳳德(한봉덕·80) 회장은 『자네 어른의 활약이 없었으면, 우리 부대가 그만한 功을 세울 수 없었을 거야』라며 崔대표의 등을 어루만졌다. 입을 꼭 다문 崔대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1967년 납북돼 북한에서 총살된 부친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崔成龍 대표의 부친 崔元模(최원모·1910년생)씨도 유격백마부대원이었다. 그는 다른 부대원들과 마찬가지로 평북 정주가 고향이다. 崔씨는 정주 오산학교를 중퇴한 후 정주시 갈산면 애도리에서 어업에 종사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崔元模씨는 고향에서 치안대장을 하면서 공산군에 맞섰다. 최씨의 아내 김애란씨는 국군에게 밥을 해주며 남편을 도왔다. 전쟁 초기 북한군에 연합군이 밀려 퇴각하자, 정주 일대는 공산군 세상이었다.
 
  치안대장이었던 崔씨는 인민군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유격백마부대에 합류했다. 당시 유격백마부대는 서해안 도서 지역을 옮겨 다니며 전투를 했는데, 崔씨는 유일한 동력선인 「北進號(북진호)」의 함장을 맡았다. 40t 급 「북진호」는 UN 군 소속 함정으로 유격백마부대의 보급과 포로 수송, 부대원 대피 등을 담당했다.
 
 
  UN사령관으로부터 두 차례 표창
 
  崔元模씨는 인민군과 중공군의 감시를 피해, 유격백마부대의 본진이 있는 백령도 美군사령부부터 신의도 일대 섬까지를 넘나들었다. 그가 모는 북진호가 없었다면, 섬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던 유격백마부대는 고립될 상황이었다.
 
  崔씨는 功을 인정받아 백령도에 있던 UN군사령관으로부터 2차례 표창을 받았다.
 
  수백 차례 전투를 치르고 살아남은 崔元模씨는 전쟁이 끝난 후 인천 만석동에 있는 미군부대에서 1년간 근무를 했다. 정주에서부터 어업을 했던 그는 1954년 서천 군산지역으로 내려갔다. 崔씨는 그곳에 있던 피란민 거주 지역에 터를 잡고, 어선 세 척을 모는 船主(선주)가 됐다.
 
  1967년 6월4일 崔元模씨는 7명의 선원과 함께 「풍덕호」를 타고 백령도 조기 어장으로 향했다. 보통 선주인 崔씨가 직접 배를 타지는 않지만, 이날 아침 선장이 나타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6월5일 인천 연안부대에서 잠시 정박한 「풍덕호」는 백령도를 향해 떠났고 이날 밤 납북됐다.
 
  3개월 후 「풍덕호」 선원 6명은 풀려나 다른 배를 타고 귀환했지만, 崔元模씨는 돌아오지 못했다. 유격백마부대에서 「북진호」를 탔던 前歷(전력)이 문제가 된 것이다. 崔成龍 납북자가족 대표는 돌아온 선원들을 통해, 「풍덕호」 납북 이후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崔대표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악질 반동 죽여라」
 
  1967년 6월5일 납북될 당시, 崔元模씨는 자신의 이름이 담긴 서류를 몽땅 바다에 버렸다. 납북 이후 북한에서 자신의 신분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최씨와 「풍덕호」 선원들은 황해도 해주로 끌려간 이후, 며칠간 심문을 받았다.
 
  이때 崔씨는 자신의 전력을 감추려 했지만, 崔씨는 북한에서 유명한 「반동분자」로 관리되고 있었다.
 
  崔元模씨가 유격백마부대원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평북 정주 일대에서 崔씨에게 당한 인민군 가족들이 대거 몰려왔다. 그들은 崔씨가 감금돼 있는 건물 앞에서 데모를 일으켰다. 그들은 「반동분자 崔元模를 당장 죽이라」고 했다. 데모가 있던 그날 저녁 崔元模씨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풍덕호」 선원들은 3개월 후 풀려날 때 『선주인 崔元模씨와 배는 어디로 갔냐』고 물었다. 북한 당국은 『崔元模는 악질 반동분자라서 내보낼 수 없다. 배도 못 돌려준다』고 했다.
 
  『아버지께서 사라지기 전에 기관장에게 「난 틀렸어. 성구(長男)에게 동생들과 어머니 잘 돌보라고 전해 줘」라고 하셨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총살당했다고 하시더군요. 날짜가 언제인지 몰라, 납북된 6월5일쯤 제사를 지냅니다.
 
  아버지는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한 죄밖에 없습니다. 북한에서 「악질 반동분자」라는 의미가 뭔지 아시잖아요. 그런데도 대한민국 정부는 아버지 부대를 정식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있어요. 대한민국은 자신을 지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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