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기 한국외국어대 교수(일본문화사)의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라는 책이 이 논란에 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한반도인이 일본열도에 이주하고 그곳에 선진문물을 전파해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같은 추론은 일단 가능하다. 홍교수는 다양한 사료와 유물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최초로 일본을 지배한 백제천황은 백제인의 후손인 오진(應神 4세기)천황과 닌토쿠(仁德 5세기)천황부자라고 말한다. 잠시 단절됐다가 6세기 무령왕의 동생이 게이타이(繼體)천황이 된 이후 백제왕족의 후손들이 7세기말까지 천황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홍교수 주장이다.
무령왕은 일본에 있는 동생이 게이타이 천왕이 되자 동생의 장수를 기원하기위해 503년(계미년) 청동거울인 人物畵像鏡(현재 일본의 국보)을 만들어 보낸다. 연대와 내용은 동경에 새겨져 있다. 홍교수는 이동경이 무령왕과 일본천왕이 형제임을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본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게이타이천황의 등극이 507년으로 되어있다.
이 4년의 오차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에 대해 홍교수는 6세기까지의 일본기록은 연대가 부정확해 이정도의 오차는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홍교수는 닌토쿠천왕릉에서 발굴된 동경이 백제무령왕릉에서 나온 의자손수대경과 모양이 똑같다는 점을 들어 백제에서 건너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닌토쿠천왕릉의 주인공 역시 백제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닌토쿠릉에서 나온 동경이 백제에서 만들었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없다. 이에 대해 홍교수는 당시 일본에선 청동거울을 제작할만한 기술이 없었다고 했다.
홍교수는 또 백제성왕이 540년간 고구려를 공격하다 실패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긴메이(欽明)천황이 되었다는 일본학자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은 554년까지 백제왕이었다. 이대목에 대한 홍교수의 설명이 없다.
정효운 동의대교수(한일관계사)는 일본천황가에 한국계의 피가 섞였다는 것은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천황가를 한국인이라고 보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설령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지나간 역사적 사실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국수주의적인 견해는 곤란하다. 이런 주장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홍교수는 결코 국수주의가 아니다. 역사는 숨길 수 없는 것이고 나의 작업은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고대 한반도인이 일본 열도에 이주하고 그곳에 선진 문물을 전파해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어서 한일 고대 사학계에서 천황과 백제 사이의 관련설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관련된 역사 기록의 내용과, 지금까지 발표된 한국과 일본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해 본다.
◆ 일본 천황=한국인론의 내용
최초로 일본을 지배한 천황은 백제인의 후손인 15대 오우진(應神·4세기)천황과 16대 닌토쿠(仁德·5세기)천황 부자다. 일본 역사학자 미즈노 유우(水野祐)는 그의 저서 ‘일본 고대 국가 형성’(고단샤·1978)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아울러 오우진 천황이 백제 복식을 입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온다. 이들 천황 부자에 의해 고대 일본의 가와우치(河內)왕조가 세워졌다.
6세기 백제 무령왕의 동생이 26대 게이타이(繼體)천황이 된 이후 백제 왕족의 후손들이 7세기 말까지 천황 자리에 올랐다. 백제 성왕 역시 일본 천황이다. 백제 성왕이 540년 고구려를 공격하다 실패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29대 킨메이(欽明)천황이 되었다.
33대 스이코(推古·6세기말∼7세기초)천황은 백제 왕족의 순수한 혈통을 이은 일본 최초의 정식 여왕이다. 그의 남편 30대 비다쓰(敏達·6세기)천황도 백제인 왕족이다. 815년에 일본 왕실에서 편찬한 왕실 족보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엔 1182씨족의 가계(家系)가 기록되어 있는데 수록된 대부분의 씨족들은 한반도인이 주축이다. 여기엔 스이코여왕의 남편이었던 비다쓰천황이 백제인 왕족이었다는 사실도 담겨 있다.
일본 고대 왕조사인 ‘부상략기(扶桑略記)’엔 비다쓰 천황이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엔 비다쓰천황의 친손자인 34대 죠메이(舒明· 7세기)천황이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서 살다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아키히토(明仁) 천황 발언으로 화제가 된 50대 간무천황(재위 781~806)의 생모는 화씨(和氏)부인이다. 왜 왕실에서 백제조신(百濟朝臣)이라는 벼슬을 지낸 화을계(和乙繼)의 딸이었다. 화을계는 백제 무령왕의 직계 후손이다. 간무천황은 혼란한 정계의 기풍을 혁신하고 율령체제를 재편하기 위해 794년 현재의 교토(京都)에 헤이안쿄(平安京)를 조성해 도읍을 옮겨 헤이안시대를 열었다.
헤이안시대는 간무천황 후 약 400년간 지속됐다. 그의 어머니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으로 외래인이었기 때문에 황후에는 오르지 못하고 후궁의 지위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간무천황의 초상화를 보아도 다른 일본 천황들과 달리 대륙인적인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간무천황은 이런 출신 성분 때문에 정치적으로 실권을 장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 관련 유적가 유물
일본 교토에 있는 히라노신사(平野神社)에는 백제인 간무천황 때부터 백제 조상신들의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이마기노카미(今木神·백제의 성왕), 구도노카미(久度神·백제 성왕의 조상), 후루아키노카미(古開神·백제 비류왕과 근초고왕), 히메노카미(比賣神·간무천황의 어머니인 백제인 화씨부인) 등의 신위가 봉안돼 있다. 백제 무령왕은 일본에 있는 동생이 케이타이 천황이 되자 동생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503년에 만들어 보낸 청동거울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현재 일본의 국보)도 존재한다.
◆ 일본 천황=한국인론을 바라보는 시각
일본에서 처음 한일동족설을 제기한 사람은 14세기 정치사상가였던 기타바타케 치카후사(北白田白親房)였다. 그 이후 한일동족설은 에도(江戶·1603∼1867)시대를 지나 메이지(明治·1868∼1912)시대, 한반도 침략기를 거쳐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도 역사학자인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 가토 에이코(加藤瑛子) 교수 등이 킨메이 천황은 백제 성왕이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한일동족설은 극우 역사학계에 밀려 주류로 편입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과 일본이 동족이었기에 일본의 한국 지배는 정당했다는 논리로 활용되고 있는 편이다.
한국에서는 18세기 역사학자 한치윤과 20세기의 신채호가 한일동족론을 간단히 언급했고 1980년대 들어 재야사학자 김성호씨가 성씨 비교를 통해, 홍윤기 한국외국어대교수가 각종 사료와 일본 현지조사를 통해 일본 천황가는 백제인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국내에서는 일본 천황가에 백제의 피가 섞였을 가능성에 대해선 일단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천황가가 한국인이라고 보는 것은 비약이라는 신중론 혹은 비판론도 만만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