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221) - '사랑의 쌀독'이 많아졌으면
어제(9월 7일)는 밤에 기온이 내려가 풀잎에 맺힌 이슬이 하얗게 보인다는 백로(白露)다. 아침에 운동하러 가면서 전날까지의 반바지차림이 서늘하게 느껴져 트레이닝복을 받쳐 입고 나섰다. 테니스볼을 찾으러 나가 밟은 풀잎에 맺힌 이슬이 차다. 언제 더웠나 싶게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에 접어들고 있다.
교분이 있는 직장여성이 점심을 대접 하겠다고 연락을 해와 충장로의 깔끔한 음식점에서 아내와 함께 대구탕을 맛있게 들었다. 하얀 쌀밥에 정갈하게 차린 반찬들이 입맛을 돋운다. 어릴 적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큰누님은 시골마을의 부자 집으로 시집갔다. 그 집에는 항상 손님이 끊이지 않았는데 어느 겨울에 한 과객이 들었다. 쌀밥 한 공기를 깨끗이 비운 그는 배가 덜 찼는지 '나 저 맛있는 김치에 밥 한 숟가락만 더 먹었으면 좋겠다.'고 청하였다는 일화다. 북한의 김일성이 원한 것은 배고픈 백성들에게 쌀밥과 고기 국을 배불리 먹이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와 그 아들이 가고 난 지금도 쌀밥에 고기 국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닌 것이 안타깝다.
나는 노인요양시설 천혜경로원 안에 있는 작은 교회에 출석한다. 6.25 후의 가난한 시절, 설립자 강순명 목사는 헐벗고 병든 노인들을 데려다가 가족처럼 보살피며 어려운 때를 온몸으로 견뎌냈다. 하늘의 은혜를 입었을까, 지금은 쌀밥과 고기 국은 물론 맛깔스런 반찬들이 늘 풍성하다.
우리 교회는 해마다 추석 명절에 즈음하여 주변의 어려운 가정에 작은 선물을 보낸다. 경제가 어려울까, 동사무소에 확인한 기초생활수급자는 300명이 넘는다. 금년의 선물목록은 전라남도 지도에서 생산한 김 선물세트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만 양로원 안에 있는 작은 교회의 도움받기에 익숙한 어른들이 더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음도 하늘의 은혜라 하겠다.
오늘(9월 8일) 아침 신문에는 누구나 쌀을 넣고 누구나 퍼가는 어느 교회의 마르지 않는 항아리 기사가 눈길을 끈다. 서울 서대문구 원천교회의 '사랑의 쌀독' 이야기다. 이 교회에는 높이 1미터 쯤 되는 쌀독 하나가 놓여 있다. 그 옆에는 쌀을 담아갈 수 있는 비닐봉지가 준비돼 있다. 그곳은 항상 불이 꺼져 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누구든 쌀을 퍼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쌀독 옆에는 조그만 쪽문도 있어 쌀독을 찾는 사람이 교회 안쪽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다.
쌀독은 지난 7월 생겼다. 담임목사가 "누구든 퍼갈 수 있는 쌀독을 만들어 밥 굶는 사람이 없게 하자"며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처음에 사람들은 "요즘 밥 굶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하면서 목사가 괜한 일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쌀독이 놓인 지 2개월이 된 요즘 교회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다"고 말한다.
두 달간 교회 측이 쌀독에 넣은 쌀이 10㎏들이 100포대다. 교회 신도들이 개별적으로 집에서 퍼다 부은 쌀도 적지 않다. 최소 1t이 넘는 쌀을 누군가 퍼간 것이다. 비닐봉지 하나에 쌀이 2㎏가량 들어가니 어림잡아 수백 명이 '사랑의 쌀독'을 이용했다는 계산이다.
쌀은 누가 퍼갈까. 교회 관계자들이 종종 목격하는 '쌀독 이용자'는 60대 이상이 많은 편이지만 20·30대도 적지 않다고 한다.
쌀이 없어지기 시작한 건 7월 10일 이후부터다. 이날 교회에선 서대문구 구청 관계자들과 사회복지사, 생계가 어려운 서대문구 주민들이 간담회를 했다. 간담회에서 주민들은 "당장 내일 먹을거리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곁에 있던 교회 관계자들이 "그러면 우리 쌀독에서 퍼가라"고 했다. 사회복지사들은 각 동으로 돌아가 교회에 있는 쌀독을 홍보했고, 이때부터 쌀독의 쌀이 줄기 시작했다.
원천교회의 쌀독은 우리 사회에 복지 사각지대가 여전히 많고, 이들을 위한 국가·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이 100만 명이 넘는다.
지난여름, 인도의 북부에 있는 임랏차르의 시크교 사원을 찾았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아침 6시에 사원에 들어서니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큰 호수를 둘러 싼 넓은 사원 안에 가득하였다. 어느 코너를 돌아가니 떡을 두 개 씩 나눠주고 물도 퍼준다. 더 깊숙이 들어가니 양재기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큰 강당이 보인다. 호기심으로 양재기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여러 줄로 둘러 앉아 있다. 그 틈에 끼어 주전자로 따라주는 따끈한 짜이(양젖 스프)를 한 사발 받아먹었다. 이를 마시고 나니 밤새 기차타고 와서 피곤한 몸이 확 풀린다. 이날 아침 식사는 떡 두 개와 짜이 한 사발로 때웠다. 나오는 길에 살피니 모금함이 놓여 있다. 감사한 마음으로 적은 돈을 그 안에 넣었다.
엊저녁에는 큰비가 내리더니 아침은 맑은 하늘이다. 아내와 함께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기에 나섰다. 한 시간 가량 걸은 후에 김밥 집에서 아침을 들고 농협 앞에 전을 편 채소장수들 쪽으로 향하였다. 그 중에는 아내가 단골로 찾는 이들이 여럿 있다. 대부분 나이든 농촌아주머니들이다. 단호박 두 개에 3천원, 땅콩 큰되에 만원, 고구마줄기 한 묶음에 3천원을 주고 샀다. 아내가 땅콩의 품새가 좋다고 말하니 '좋은 것을 상품으로 가지고 나오니 집에서는 처진 것만 먹어요.'라고 말한다. 단호박 등을 파는 아주머니는 모녀가 함께 장사하는데 딸이 신부전증으로 치료중이라 아내는 고달픈 모습이 안쓰러워 지날 때마다 한 가지 씩 사게 된다고 말한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의 쟁점은 어려운 경제를 누가 더 잘 해쳐나갈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석 달 후면 우리도 대선을 치른다. 후보마다 정당마다 더 많은 일자리를 마련하고 복지혜택을 늘리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팍팍한 가계부에 주름이 가지 않도록 넉넉한 삶을 살게 해줄 화수분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도 '사랑의 쌀독'을 채우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교회와 사원은 물론 사회 각계에 더 많이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추신,
천혜경로원에서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소식지에 실린 따뜻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곳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닭으로 요리해 드리는 음식 가지 수는 꽤 많은 편이다. 삼계탕, 닭볶음, 닭다리튀김, 달 날개볶음, 닭 날개튀김, 닭곰탕,,,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맥반석 통닭구이는 대접해 드린 적이 없었다. 통닭이 꼬챙이에 꿰어져 빙글빙글 돌아가며 구워지는 장면을 더러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몰라도, 처음 보는 어르신들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 말복 날이었다. 그날은 오후 간식으로 맥반석 통닭구이를 대접해 드리기로 하였다. 드디어 통닭을 구울 수 있도록 설비를 갖춘 차량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즉시 원내방송을 하였다.
"오늘 오후 간식으로는 맥반석통닭구이라는 것을 들게 되겠습니다. 아주 연하고 부드러운 영계로 준비하였습니다. 물론 통닭구이 요리는 공짭니다. 마음껏 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통닭 굽기 구경 값은 내셔야 합니다. 마당으로 나오셔서 통닭 굽는 구경을 하시면서 드시는 분들에게는 천 원 씩을 받겠습니다. 이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 형편이 안 되시는 분은 외상으로 구경하셔도 됩니다."
재미로 말씀드렸더니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재미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당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관람석에 자리를 잡은 분은 직원의 도움을 받아 휳체어를 타고 나온 복순(78세) 할머니였다. "천 원 씩을 내야 한담서라우? 에쑈." 할머니는 꼬깃꼬깃 접어진 천 원짜리 한 장을 자랑스러운 듯이 내밀었다. "나는 구경 값 외상이오 잉." 순단(88세) 할머니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날은 어지간히 더운 날씨였는데 마침 며칠 전폭우로 받아놓은 빗물이 몽땅 있어서 그 물을 살수기로 관람석 주위에 계속 뿌려댈 수 있었다.
맥반석 통닭구이는 처음이라서 그런지 또 다른 맛이 있었고 인기 만점이었다. 외상이 아니라 현찰로 구경 값을 내셨던 열 한분에게는 새 돈으로 천 원짜리 석 장씩을 상금으로 드렸다. 명목은 '맥반석 통닭 굽기 구경 적극 참여자 격려금'
겁나 많이들 잡수셨는데 뱃속이 괜찮으셨을까 하고 그 다음날까지도 확인해 보았더니 감사하게도 잡수시고 탈난 이는 한 분도 없었다.'
아, 실크로드 여행 때 말복을 맞아 통닭구이를 먹고 싶어 별렀는데 너무 먼 곳에서 잔치가 벌어졌구나. 우리는 그날 저녁 키르키스스탄의 산간에 있는 흐르는 강물 옆 휴양지에서 쌀밥에 멸치와 깻잎을 얹어먹으며 말복가름을 하였다.
* 지난달에 적은 실크로드 탐방기로 인생은 아름다워 197 - 220을 가름하고 이번 달부터 221회로 이어집니다.
첫댓글 늘 감동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