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문(不二門)
오후 1시 42분, 불이문 앞에 당도했습니다. 관음봉과 오봉이 어우러진 불이문이 아름답습니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굴암길 519(교현리) 오봉산 서남쪽에 있는 관음봉(觀音峰) 중턱에 자리잡은 오봉산 석굴암(五峰山石窟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나한기도 영험도량이라 합니다.
<석굴암 홈피>의 글을 인용하여 석굴암을 소개해 봅니다.
불이문 앞의 염화님
「오봉(五峰)의 서남쪽에 있는 관음봉(觀音峰) 중턱에 자리잡은 석굴암은, 위로는 도봉(道峰)이 치닫고 아래로는 삼각산(三角山)이 모여서 마치 여러 별이 모여 북극성(北極星)을 떠받들고 있는 것 같아 그 산세가 크고 뛰어나며, 물 또한 맑고 골이 깊어 수행하는 사람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사찰입니다.
도봉산(道峰山)은 주봉인 자운봉(紫雲峰)에서 남쪽으로 만장봉(萬丈峰). 선인봉(仙人峰)이 있고, 서쪽으로 오봉산 석굴암(五峰山 石窟庵)이 있으며, 우이령(牛耳嶺)을 경계로 북한산(北漢山)을 접하고 있습니다. 도봉(道峰)은 풍수지리상으로 왕관(王冠)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의 오봉(五峰)은 주봉을 호위하는 장군기마상(將軍騎馬像)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염화님과 미소님
석굴암 창건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으나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때 의상대사(義相大師. 625~702)께서 창건하셨으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 당시 왕사(王師)였던 나옹화상(懶翁和尙. 1320~1376)께서 3년간 수행정진 하셨다고 합니다.
『봉선사본말사지(奉先寺本末寺誌)』에 세종(世宗) 25년(1443)에 설암(雪庵) 관익대사(寬益大師)가 중창하여 지장보살상과 나한상을 조성하였으며, 단종(端宗. 1441~1457)의 비(妃)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가 단종을 위한 원찰(願刹)로 중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미소님과 비니초님
그후의 역사로는 <오봉산 석굴암 홈피>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초안(超安) 스님의 은사이신 동암(東庵) 선사께서는 조국광복을 위해 끊임없이 상해 김구(金九)선생의 임시정부를 도와 광복 운동을 하시면서 틈틈이 석굴암에 오셔서 수행정진 하셨고, 조국은 해방이 되었지만 1950년 6ㆍ25사변으로 인하여 석굴암의 전각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창건주 초안(超安. 1926~1998) 스님의 세수 28세 1954년 6월 5일 석굴암에 오셨을 때에는 대지 한 평도 없었고, 법당은 완전 전소되고,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석굴 안에는 전화로 인해 아미타불, 지장보살, 나한님과 수구다라니 목판만 남아 나뒹굴고 파손되어 있었다.
초안스님께서 모두 소중히 수습하는 동시에, 모친 조 삼매심 보살님, 화주 윤 일광심보살님과 함께 폐허가 된 경내지에 임시로 움막을 짓고 주변에 널려 있던 수많은 전사자들의 시신을 화장 또는 안장해 주셨다.
그리고 석굴암의 중창복원 불사를 일심으로 발원하는 천일기도에 들어가셨다.
이로써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초안 스님과 두 분 보살님의 뼈를 깎는 헌신과 간절한 기도 원력 덕분으로 차근차근 불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염화님과 함께
「이처럼 폐허 위에 맨손으로 오직 중창불사에 대한 일념만 갖고 지극정성으로 천일기도에 들어가니, 기도에 동참했던 신도들의 입에서 입으로 석굴암의 수승한 기도영험이 널리 알려지면서 복원불사에 동참하려는 새 신도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쌀 한 말, 기와 한 장도 일일이 십리 길을 걸어서 이고 지고 날라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세 분의 원력과 신도님들의 지극정성으로 불사는 하나 둘씩 이루어져 나갔다.
그리하여 1954년부터 시작된 복원불사는 대지조성 152평, 축대, 석굴확장, 요사채 복원, 삼성각 신축, 대웅전 신축, 석가모니 본존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 보살상 신 조성, 범종(500관) 및 범종각 낙성, 쌍사자 석등, 전기시설, 삼성각 신축, 봉향각 신축, 진입로 확장보수 불사 등의 차례로 이루어져 현재와 같이 손색이 없는 가람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비니초님과 함께
「오봉산 석굴암의 현 주지이신 오봉 도일(五峰度一) 스님은 1954년 초안 큰스님으로부터 시작된 복원불사를 지극정성으로 이루어 나가 현 가람의 모습을 만들어 내셨고 대지 2만평 매입하셨으며 나머지 5만5천평도 매입 추진 중에 있습니다. 또한 요사체 겸 수련장을 85평 건축과 5백평 대지조성 하였습니다.」
불이문(不二門)
이 불이문은 석굴암의 첫 관문으로 일주문 역할을 하는 문입니다. 일주문에는 ○○산 ○○사라는편액이 붙게 되는데 이곳은 불이문 편액을 올렸네요. 작년인가 금강산 건봉사에 갔을 때도 일주문에 불이문 편액을 단 것을 본 바 있습니다.
불이(不二)란 모든 분별이 소멸한 마음자리를 말합니다. 모든 망상으로 인한 시시비비(是是非非)가 사라진 자리입니다. 일(一)은 '진리'를 말하고 이(二)는 '거짓, 가짜'라는 말이니 불이(不二)란 거짓이 '아니다. 가짜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망상으로 인한 분별이 끊어진 자리이니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거짓망상을 걷어냈으니 그 자리는 해탈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불이문은 해탈문(解脫門)으로도 불립니다.
불이문(不二門) 편액 -도일(度一) 스님 글씨-
석굴암 주지 도일(度一) 스님은 원력만 큰 것이 아니라 팔방미인이신가 봅니다. 서화(書畵)에도 능통하신 스님으로 여겨집니다. 편액은 신묘년 중추절(辛卯年 仲秋節)에 쓰셨으니, 불기 2555년(2011). 음력 팔월에 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편액은 염화님 사진으로 올렸습니다.
불이문을 통해 본 관음봉과 오봉의 모습
일주문을 통과했지만 더 가야 합니다.
관음봉 아래의 전각이 보입니다.
석굴암에 들어서자마자 그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축대 하나만 보아도 얼마나 큰 공사였는지 짐작하게 합니다만 상상을 초월합니다. 6.25이래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서 시작한 불사는 지극한 원력의 소산이었을 것입니다.
오봉산석굴암토지불사공덕비
아직 내용이 새겨지진 않은 백비(白碑)입니다. 토지불사한 내용은 차차로 새겨지리라 생각됩니다.
대웅전 가는 길
석굴암에 들어서자 조성된 경관에 놀랐습니다. 석굴암은 어디나 비경이었습니다.
사진을 담느라 여념이 없으시네요.
조끔씩 모습이 드러납니다.
미소님께서 추억을 담으시네요.
이 건물은 공양간입니다.
전각안내표(殿閣案內標)
각종 전각으로 오르는 계단
대웅전으로 가기 전 오른쪽에 조성된 윤장대 풍경입니다.
오봉산 중창불사 기본계획 안내도
전각 배치도를 찍어 보았으나 현재의 배치와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불필요해 생략했습니다. 우리는 윤장대의 풍광이 눈길을 끌어 우선 윤장대로 갔습니다.
윤장대(輪藏臺)는 경북 예천 소백산 용문사가 유명합니다. 이 곳의 윤장대가 원조라 할 것입니다. 고려 명종(明宗) 3년(1173)에 제작 되어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근래에는 이를 모델로 삼아 도처에 윤장대를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윤장대 안에는 경전과 다라니를 봉안해 놓았는데 이를 돌리면 경전을 읽는 공덕과 같고, 다라니를 독송한 공덕과 같다고 합니다. 이 윤장대를 돌리면 이 같은 공덕이 있으니 많은 선남선녀들이 이 윤장대를 돌립니다. 이 윤장대를 돌리면 불심이 증장할 것입니다. 선한 마음이 생길 터이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윤장대만 돌리고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돌린 공이 허사일 것은 분명합니다. 윤장대는 그 옛날 문맹도 많고 무지한 사람도 많았는데 어떻게든 불교와 인연을 맺어 주려는 선지식들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탄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윤장대를 세 바퀴 돌려 봅시다. 우선 미소님부터...
비니초님과 미소님이 함께 도셨네요. -염화님 사진-
그 다음은 염화님
백우도 돌려 봅니다.
돌리고 돌리고 돌리면서 회광처(回光處)를 찾아야겠습니다.
四大各離如夢中 사대각리여몽중 사대 각각 흩어짐은 간밤의 꿈과 같고
六塵心識本來空 육진심식본래공 육진과 심식은 본래가 공함이라
欲識佛祖回光處 욕식불조회광처 불조께서 깨달은 경계를 알려는가?
日落西山月出東 일락서산월출동 서산으로 해 지고 동녘에서 달 뜬다오.
대웅전 모습
대웅전은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하여 주변에 잘 가꾸어진 꽃나무와 어우러져 그윽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대웅전 옆의 조그마한 건물은 석굴암 종무소입니다.
대웅전 모습입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초안(超安) 스님이 불기 2516년(1972) 6월 낙성한 건물이라 합니다. 앞에는 쌍사자석등이 있고,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여 좌우보처로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 편액 -우봉(又峰) 선생 글씨 -
대웅전 편액의 글씨는 낙관에 경술추(庚戌秋) 우봉(又峰)이라 했으니, 불기 2514년(1970) 가을에 우봉(又峰) 선생이 쓴 글입니다. 대웅전이 낙성되기 전에 편액을 써 두었던 것 같습니다.
우보처 지장보살 본존 석가모니불 좌보처 관세음보살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과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산중탱화(神衆幀畵)
상단에 석가화현 예적금강성자(穢跡金剛聖者. 穢跡明王)을 중심으로 좌우에 범천(梵天)과 제석(帝釋), 그리고 하단에 동진보살(童眞菩薩. 韋駄天)을 배치한 신중탱화입니다.
양주 석굴암 석조불좌상(楊州 石窟庵 石造佛坐像)
양주 석굴암 석조불좌상(楊州 石窟庵 石造佛坐像)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1호-
「양주 석굴암 석조불좌상은 높이가 42cm, 무릎 폭이 25cm인 조선 후기 제작된 소형 불상이다. 불상은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린 길상좌(吉祥座)를 하고 있으며, 머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하고 있다.
방형(方形)의 각진 얼굴에 반쯤 뜬 눈은 눈꼬리가 약간 올라갔고, 코는 원통형이며, 입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大衣) 안쪽에 편삼을 입고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 한 가닥의 옷자락이 짧게 U자형으로 늘어져 있다. 승각기(僧脚攲)는 수평으로 묶어 상단에 앙연형(仰蓮形) 주름이 잡혀 있지 않다.
석굴암 석조좌불상은 발원문이 없고 관련 기록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불상의 신체 비례와 대의(大衣) 처리 등에서 시기적인 양식을 반영하여 18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쌍사자석등
대웅전 앞에 두 기(基)의 쌍사자석등이 있는데, 이 석등은 불기 2518년(1974) 초안(超安) 스님에 의해 조성되었습니다. 이는 아마 국보 제5호 법주사 쌍사자석등을 모범(模範)으로 삼아 약간의 변화를 주어 조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웅전 앞에 만발한 불두화
불두화가 아름답습니다.
대웅전 오른쪽 옆의 종무소
이 건물은 불기 2516년(1972) 6월에 낙성된 대웅전과 함께 지어진 맞배지붕건물입니다.
종무소의 편액 인생선(人生線) -우봉(又峰) 선생 글씨-
을묘춘정(乙卯春正)이라 하니 불기 2519년(1975) 정월(正月)에 쓴 우봉(又峰) 선생의 글씨입니다.
그런데 인생선(人生線)이란 편액을 왜 달았을까...?
선(線)이란 무엇인가? 선(線)이란 점(點)들이 무수히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죠.
그렇다면 인생선이란 무수한 인연이 모여서 인생을 이룬 것이라 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선은 아름다운 인연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며 굴곡진 선은 아름답지 못한 인연이 만나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인생은 선연과 악연이 혼재되면서 이루어지지요. 악연은 나를 단단하게 해 주는 동력이고 선연은 나를 증장시켜 주는 동력일 것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말하기를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라 하였습니다. 선악을 스승 삼아 살아간다면 우리의 인생선은 퇴락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인생선(人生線)이란 편액을 왜 달았을까...?
소중한 인연 아름답게 살아가라는 뜻은 아닐까...? ^^
다음은 석굴암의 핵심인 석굴 나한전(羅漢殿)으로 안내하겠습니다. _(())_
감사합니다. 백우 _()_
첫댓글 경주의 석굴암과 군위군 부계면의 제2석굴암은 다녀봤지만 오봉산 석굴암은 생소하였는데, 찾아 마주 대하니 빼어난 주변경관과 한국전쟁으로 폐허가된 터에 큰 법의 연꽃을 피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지극한 불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_(())_
석굴암을 찾아서 우리는 세 번 놀랐죠. _()_ _(())_
처음에 경관에 놀라고, 그 다음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규모에 놀라고, 나중엔 사람에 놀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