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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 그는 누구인가?
1. 학문적 관심에 따른 화이트헤드의 생애
화이트헤드는 1861년 2월 15일, 영국의 아름다운 전원소도시인 켄트주 램즈게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
공회의 성직자이면서 사립학교의 학교장직도 겸하고 있었는데, 그의 종교적이고도 교육적인 가정환경은 그의
일생에 그 어떤 영속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물론 화이트헤드는 종교적 교리에 귀
속되진 않았다. 교육을 받던 청소년기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고전교육을 배우면서 낭만주의 시인인 워즈워
드나 셀리의 시를 즐겨했으며, 역사책을 탐독하였다. 그렇기에 그의 사상에서 보여지는 학문적 균형은 일찌기
이러한 교육 성장이 바탕이 됨으로써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다. 1880년 가을, 그의 나이 열 아홉 살에 케임브
리지 대학교의 명문인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고, 그는 여기서 활발한 토론과 교육을 받는 가운데 종교,
철학, 정치, 예술, 문학 등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강렬한 지적 자극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1885년에 화이트헤드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수학강의를 담당하게 되었으나 자기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연구를
추진하여 마침내 1898년에 「보편대수론」(A Treatise on Universal Algebra)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그의 처녀
작인데, 나중에는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과의 공동작업으로 수리논리학의 명저로 평가받는 「수학원
리」Ⅰ(The Principles of Mathematics, 1910)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화이트헤드 생애에 있어서 「수학원리」
Ⅱ, Ⅲ(1912, 1913)를 발표하기까지를 흔히 케임브리지 대학의 수학 논리학의 시기라고 불린다.
이후 1910년에는 30년 동안의 케임브리지를 떠나 런던대학으로 옮긴 후, 그가 자연과학의 3부작인 「자연 인
식의 여러 원리에 관한 연구」(An I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Natural Knowledge, 1919), 「자연의
개념」(The Concept of Nature, 1920), 「상대성 원리」(The Principles of Relativity, with Applications to
Physical Science, 1922)를 발표했던 이 시기를 또한 그의 인생에 있어서 런던 대학의 과학철학의 시기라고 한
다. 이 시기의 화이트헤드는 전통적인 자연과학이 은연중에 가정한 기본 전제들의 타당성을 통일적인 관점에서
검증하여 과학적 유물론를 통렬히 반박하고, 그것이 이른바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를 가지고 있음을 밝히
며, 또한 상대성 이론에 관한 과학철학적 고찰도 다루었다.
그리고 그가 63세 되던 1924년에 하버드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취임하여 생의 말년까지, 저 웅대한 형이상학
의 유기체적 세계관을 정초했던 시기를 하버드 대학의 형이상학의 시기라고 한다. 미국으로 간 이듬해에 발표
한 첫 작품이 「과학과 근대세계」(Science and the Modern World, 1925)이며, 뒤이어 「형성과정으로서의 종
교」(Religion in the Making, 1926)와 「상징 작용: 그 의미와 효과」(Symbolism: Its Meaning and Effect,
1927)를 간행하였다. 이 세 저술을 토대로 하여 후기의 대표적 주저인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
1929)를 출간하여 유기체의 철학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계속되는 연구활동으로 「이성의 기능」(The
Function of Reason, 1929), 「교육의 목표」(The Aims of Education, 1932)를 출간하였고, 이후 그는 「관념
의 모험」(The Adventures of Ideas, 1933)과 「사유의 양태」(Modes of Thought, 1938)를 발표하였다. 화이트
헤드는 말년까지 비록 육체적으로는 쇠약해 갔을지라도 지적 활력에 있어서는 지칠 줄 모르는 불굴의 정신의
소유자였고, 죽기까지 평화 공존 사상을 제창했던 평화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는 1947년 12월 30일 86세의 나이
로 하버드의 교외에서 조용히 일생을 마쳤다.
화이트헤드의 저작 가운데서 「과학과 근대세계」, 「과정과 실재」, 「관념의 모험」은 그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형이상학 3부작'으로 불린다. 그는 먼저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이전의 세계관인 뉴턴 물리학이 전
제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의 오류를 그의 철학적 구도에서 명석하게 밝혀내고, 그 다음 작업으로 「과정과 실
재」에서 그 자신의 철학적 구도인 유기체적 세계관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하여 서술하며, 마
침내 「관념의 모험」에서는 그 자신의 형이상학을 인간 경험의 문명세계에 깊숙히 적용시켜 유기체의 철학을
검증시킨다.
그렇기에 그의 사상은 합리적 측면과 경험적 측면을 함께 고찰하고자 하는 바가 잘 드러나 있다고 보여진다.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적 발전을 흔히 3시기로 구분하는 것은 그 시기에 나타난 뚜렷한 학문적 관심으로
서의 색깔을 말한 것이지 그의 학문적 체계가 도식적으로 나뉘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후기 철학 사상은 이미 케임브리지 시대에서도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었으며, 그의 수리 논리학이나
과학에 대한 학문적 성과는 그대로 후기 철학의 사상적 기반으로서 영향을 끼쳤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것을 화
이트헤드사상의 단절된 단계적인 연속으로 볼 것이 아니라 화이트헤드가 가지고 있었던 전체적인 사유의 발전
적인 통일체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2. 화이트헤드철학에 대한 평가
화이트헤드에 대한 평가는 본인의 개인적인 평가보다 화이트헤드사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여러 학자
들의 평가들을 인용해봄으로써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현대 사상가들에게 어떻게 인지되고 있는지를 가늠해보고
자 한다.
화이트헤드에 대한 평가를 늘어놓는 학자들 중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가장 높게 평가하는 학자는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설적인 비판가로 알려진 도올 김용옥이라는 한학자이다. 소신있는 기독교 비판가
로 알려진 그는 말하길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간결명료함과 러셀의 징철(澄撤)함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들도
화이트헤드에 비하면 두서너 줄에도 못미치는 것이다"라든가 "화이트헤드는 21세기의 붇다다. 안타깝게도 서양
인들은 그를 쳐다볼 눈이 없다"와 같은 극단의 칭송을 늘어놓고 있다. 특히 화이트헤드의 저서인 「과정과 실
재」에 대한 그의 평가는 정말 가관일 정도다.
....(중략)....우리 모임은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를 읽고 있는데 내 일생일대에서 동서고금을 통해
내가 접한 가장 난해한 책을 들라면 나는 서슴치 않고, 내가 바로 그곳에서 공부했던 하버드대학의 철학과의
교수였던 화이트형님의 이 「과정과 실재」를 정말 서슴치 않고 들겠다.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이러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까? 한줄 한줄에 모두 들어가 있는 것도 같고,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도대
체 아리숭하면서도 심오한 듯이 보이고, 헤겔이나 칸트의 어려움은 이에 비하면 새발의 피고, 도무지 난해한
도수로 말하면 인류언어 사용사상 챔피온 중의 챔피온이 될 것 같다. 화이트헤드 즉 白頭先生의 「과정과 실
재」앞에서 나는 요즈음 경외감과 모멸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쉽게 써도 될 말은 이토록 어렵게 쓰고 있는
백두가 괫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괫씸한가 하면 잘 따져보면 한줄 한줄에 정확한 명제가 들어가 있고 해
서 도무지 어찌 해볼 수 없다는 뜻이다. 老子부터 하이젠베르그까지가, 플라톤에서 李濟馬까지가 마구 엇갈려
들어가 있는 듯한 白頭선생의 대가리속을 제대로 알고 있는 한국인은 하나도 없다고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우
리는 지금 화이트헤드에 관한 모든 해설서와 또 화이트헤드의 우주관이 깔고 있었던 20세기 과학의 모든 지식
을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탐구해 들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리송하게 헤어지기가 태반인데, 혼자 화이트헤
드를 전공했다는 말은 도무지 語不成說이다 일본사람들은 「과정과 실재」를 번역하기 위하여 개념 하나의 번
역을 놓고 몇 년씩 토론을 벌렸다고 좀 과장된 소문이 들려오는데.....(중략)....
국내에 「과정과 실재」를 비롯하여 화이트헤드철학의 중요 서적들을 가장 많이 번역하여 잘 알려진 오영환
교수는 20세기는 수학과 철학의 분야에서 화이트헤드를 능가할 만한 인물은 낳지 못했다고 보면서 그러한 화이
트헤드 철학의 영향력은 다가올 미래의 세계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국내에서 화이트헤드 철학을
논하는 논객중에 가장 빼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는 문창옥 박사는 심지어 앞으로 인류가 제2의 화이트헤드를
다시 경험하게 되리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까지 고백한다.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신과 물질의 문제, 과
학과 철학의 유기적 관련성, 해체와 구성 둘 다를 포괄하고 있는 화이트헤드사상의 웅혼함을 어쩌면 앞으로의
서양철학사에서는 이를 넘어서기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리핀(D. R. Griffin)은 화이트헤
드 국제학술대회에서 말하길 화이트헤드를 '21세기의 철학자'라고 보면서 화이트헤드안들에게 담대할 것을 당
부한다.
데카르트는 서양의 역사에서 근대라는 시대를 회쳐먹은 사람이다. 그의 전략은 맞아떨어져 근대세계의 인간
관은 바로 그를 빼고서는 결코 논의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의 이론이 오류가 있을지언정 그만큼 그는 한 시
대의 세계관을 지배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허버트 리드는 화이트헤드를 가리켜 '20세기의 데카르트'라고 평
가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 새로운 르네상스는 바로 화이트헤드로부터라는 언급에 다름 아
니다. 즉, 화이트헤드는 바야흐로 제3밀레니움 시대를 회쳐먹을 자라는 얘기다. 아마 이런 평가들은 실질적으
로 화이트헤드 철학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정작 느끼기 힘든 얘기일 것이다. 나 자신이 화이트헤드를 좋
아하는 이유는 별거 아니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사유를 통해서 세계 안의 여러 문제들을 손쉽게 설명하고 해석
할 수 있는 해결을 많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문창옥
1.화이트헤드는 20세기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그에게 영향을 준 특정인을 지적하기도 어려운 철학자이
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이 그 자체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 서두에 있는 당대의 주류철학에 대한 그의 비판적 평가는 그의 철학적 성향에 접
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를 둘러싸고 있던 상반된 두 진영의 철학, 논리실증주의가
구상한 합리주의와 니체와 베르그송 유의 비합리주의를 모두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이런 평가에서
우리는 그가 이들 어느 쪽에도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
이성에 대한 독단적 확신도 독단적 불신도 모두 거부하고 있었던 셈이다.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는 이처럼 화이트헤드가 이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이나 지나친 비관으로
경도됨이 없이, 전통의 철학을 해체하고 당대의 분위기 밖에서 체계로서의 철학을 실험하고 있는 현장으로 나
타나 있다. 이 저술은 분명 지적 경계를 혁신했던 몇 안 되는 사례들 가운데 속할 것이다. 그것은 방대하면서
도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한 신조어로 무장한 다양한 면모의 관념들을 엮어 놓고 있는 이 책은 일
반인이 읽기에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가 근대 철학에 대한 선이해를 조금 가지고 열
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그가 구사하는 특이하거나 낯선 용어들이 어째서 필요했는가를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필요성에 공감하게 된다면 그만큼 우리는 화이트헤드 사상의 경계 안으로 들어서
는 셈이 될 것이다.
『과정과 실재』는 1927-28년 학기에 행했던 기포드 강의(Gifford Lectures) 내용을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사변철학을 위한 강의였다. 그는 사변철학을, '우리의 경험의 모든 요소들을 해석해낼 수 있는 정합적
이고 필연적인 일반관념들이 체계를 축조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한다. 그는 자신의 이런 시도에서, 우리가 향유
하고 지각하고 의지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의식하는 모든 것들이 일반적인 체계적 도식의 특수한 사례임을 보여
주고자 했다. 따라서 그의 체계는 일종의 해석학적 존재론이다. 다양한 영역과 층위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존재기술인 것이다. 동시에 그는 무엇인가의 의미를 포착한다는 것, 곧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다른
것들과 함께 고찰하는 것이며 서로 필요로 하는 것으로 고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립된 존재, 또 그런 것
으로 의미를 확정할 수 있는 존재란 신화의 산물이다. 그것이 신이든 뉴턴 물리학의 물질입자이든 사람이든 사
물이든. 모든 존재는 상호 연관적이다. 따라서 이들을 온전히 기술하는 체계 또한 그 본래적인 의미에서 정합
적일 수밖에 없다.
2.『과정과 실재』는 다섯 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I부는 존재 기술을 위한 기본 범주들을 간략한 설명과 함께
열거하고 제II부에서는 이들 범주를 철학사의 다양한 논의를 배경으로 실험한다. 제III부와 제IV부는 그가 기
장 궁극적인 단위 존재로 구상한 '현실적 존재'를 분석적으로 해명하고 제V부는 신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대략 이 순서에 따라 화이트헤드가 『과정과 실재』에서 밟아간 여정을 개괄해 볼 것이다.
『과정과 실재』의 기본 이념은 표제어 그대로 '실재는 과정이다'라는 언명으로 요약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행하는 과정의 결실에서 생겨나 새로운 요인을 구현함으로써 세계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첨가하는 자기실현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존재 과정의 밑바닥에는 새로운 종합을 끊임없이 산출하려는 힘인 영원한 활동성이 관
통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창조성'(creativity)이라 부른다. 우주는 이 창조성의 산물들 즉 그 개별적 구현
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창조성은 그 다수(many)의 구현체들을 새로운 일자(one)로 종합하는 보편적 에너지이
다. 화이트헤드의 범주적 도식에서 이들 세 관념 즉 창조성, 다, 일은 '궁극자의 범주'(category of the
ultimate)로 나타나 있다. 이들은 그의 다른 모든 형이상학적 범주들에 전제되는 최고의 일반성을 지닌 궁극적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별개로 놓아 각기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은 한정하는 보다 일반
적인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호 연관 속에서 의미를 얻을 뿐이다. 요컨대 '다에서 일로의 창조적 전
진'이 그것이다. 이 창조적 전진의 사태는 그밖의 어떤 것에 의해 설명될 수 없고 직접적인 직관적 경험에 의
해 포착될 뿐이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에서 가장 구체적인 단위 존재로 등장하는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또는 약간의 의
미 차가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 계기'라고도 불린다)는 바로 이런 창조적 전진을 구현하는 기본 사례이다. 그
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실이다. 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없다. 신도 현실적 존재요 우주 속의
하찮은 먼지도 현실적 존재이다. 그 중요성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적어도 원리적 측면에서 보자면 모두 동일
한 지평에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체계에서 초월적·절대적 존재 지평은 사라진다.
현실적 존재는 다수의 다른 존재들을 자기화하는 과정으로 존립한다. 그것은 다수의 타자를 자기의 것으로 만
들어 가는 과정적 존재요 관계적 존재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때의 자기화 활동을 '경험'이라 통칭한다. 그래서
존재는 경험의 구성체라고 할 수 있다. 실재가 경험 그 자체라는 학설은 윌리엄 제임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제임스는 결코 이를 기초로 형이상학을 구상하지 않았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가 경험의 계기
(occasion)이라는 형이상학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가설을 채택하였다. 이런 존재 이해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전통 철학의 문맥에서 급격히 일탈케 하였다. 철학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자아, 모나드, 물질적 원자 등
을 존재의 기본 단위로 실험해 왔다. 화이트헤드는 이제 전혀 다른 유형의 존재, 곧 경험을 통해 생성하는 존
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경험의 계기를 현실적 존재로 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구체적인 직접 경험에 대해 갖고 있
는 애착이다. 직접적 경험은 가장 완벽한 사실인 데 반해 다른 모든 것들은 창백한 추상이다. 물질적 존재나
영혼과 같은 어떤 정태적인 실체가 있고 이들은 이들이 겪는 순간 순간의 경험에서 어떤 역사적 특성들을 획득
해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순간 순간의 경험이 궁극적 실재이며, 정태적 실체는 이 구체적 실재들로
부터의 추상이다.
물론 이 존재 일반의 경험은 의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의식은 고등 유기체가 그 자신의 세계 가운데 어떤
부분을 조명하는 가변적인 요소이다. 우리 인간조차도 의식하기에 앞서 우주를 '경험'하며 우리는 의식에서 우
주의 세부 사실들을 선택 수용할 뿐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에게 의식은 기본적인 범주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것은 인간의 경험에서조차도 항상 내재하는 것이 아닐 정도로 우주 내의 모든 경험의 방울에 본질적인 것이 결
코 아니기 때문이다. 사유나 지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경험 개념에 대한 이런 확대된 이해는 화
이트헤드 철학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주목해야 할, 근대 인식론 철학과의 차이로 자리해 있다.
그런데 현실적 존재가 경험의 계기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일정 부분 타자 의존적인 것이라는 점을 함축한다.
그것은 이미 생성한 존재들을 경험의 객체로서 필요로 한다. 그것의 생성 과정은 이 다수의 타자들에 대한 경
험을 통합하여 하나의 경험으로 통일시키는 과정이다. 타자 각각을 통일된 향유 속으로 이끌어들이는 경험의
사유화(私有化) 작용은 '느낌'(feeilng) 또는 '파악'(prehension)이라 부른다. 이들 파악을 하나의 복잡한 파
악으로 통일시키는 현실적 존재의 내적이고 미시적인 과정은 '합생'(concrescence)이라 부른다. 그래서 말하자
면 현실적 존재의 합생 과정은 그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존재하는 여건들(data), 즉 경험의 객체들을 통합하여
일자인 경험의 주체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셈이다. 그래서 또한 주체-객체 관계는 경험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적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식론 철학에서 주체-객체 관계는 의식적 정신과 인식되는 대상 사이의 관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현실적 존
재의 경험 일반을 범주화한 파악이라는 개념은 훨씬 더 넓고 근본적인 존재론적 관계이다. 그것은 존재가 다른
존재와 맺는 정서적(emotional) 관계이다. 모든 파악은 그 본질적인 요소로 그것의 '주체적 형식'(subjective
form)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주체가 그 대상을 경험하는 방식, 곧 정서적 색조이다. 주체는 이런
저런 가능태로서의 객체를 중요한 것, 사소한 것, 또는 관계없는 것, 바람직하지 않은 것 등으로 느낀다는 것
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는 파악의 주체적 형식을 가치평가라고 말한다. 화이트헤드는 중립적인 대상에
대한 가치 중립적인 경험이 아니라 정서적 느낌이 기본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적 패턴을 제외하
고는 여건은 결코 중립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예컨대 빨간 색은 따뜻함으로, 파란색은 차가움으로 다가온다.
또한 이미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겠지만 파악은 논리적·정태적 관계가 아니라 객체를 주체의 구성 속에 이끌
어들이는 관계활동, 또는 이행(transition)이다. 그것은 정태적인 사태가 아니라 '벡터'(vector)이다. 그것은
저기에 있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파악은 벡터와 마찬가지로 화살표
로 상징될 수 있다. 이때 화살은 저기-과거에서 여기-현재로 달린다. 그래서 그것은 시공간적 연장을 동반하는
관계이다. "저기"는 아무리 미소한 시간차라 하더라도 시간에 있어 지금 이전에 있고, 공간에 있어 "여기" 밖
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품고 있는 실재론을 대변한다. 화이트헤드는 칸트와 반대로 어떻게 주
체적 경험이 객체적 세계로부터 출현하는가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는 우주를 구성하는 미시적 존재로, 우리가 일상적 외적인 감각경험에서 현실적 존재들의
어떤 명확한 원형적 사례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대개의 경우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수의 현실적 존재들
간의 상호 파악에 의해 결합된 하나의 전체로서의 거시적 존재들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들을 '결합체'(nexus)라
부른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사물들은 물론이요 우리가 보다 가까이 직접적으로 경험한다고 할 수 있는 우
리의 신체도 결합체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직접적인 경험의 궁극적 사실은 기본적으로 현실적 존재, 파악,
결합체뿐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경험에 있어 그밖의 모든 것은 파생적인 추상들이다.
추상적 유형의 존재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유형의 존재는 무규정적 창조성과 대별되는 규정자인 영원한 객체들
(eternal objects)이다. 이들 존재는 플라톤의 형상을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현실적 사태를 규
정하는 가능적 형식이다. 이들은 감각적 특성, 기하학적 및 수적 특성, 정서적·의지적 특성 등을 이루는 패턴
들이다. 생성의 과정에 있는 모든 현실적 존재는 무수한 가능성들로서의 이들 특성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여 파
악함으로써 그 자신을 한정한다. 화이트헤드는 선행하는 현실적 존재에 대한 파악인 물리적 느낌(physical
feeling)과 구별하여 이들 영원한 객체에 대한 파악을 개념적 느낌(conceptual feeling)이라 부른다.
그리고 물리적 느낌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적 존재의 측면을 물리적 극(physical pole)이라 부르고 개념적 느낌
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적 존재의 측면을 정신적 극(mental pole)이라 부른다. 이를 통해 화이트헤드는 정신과
신체가 구별되는 별개의 존재라는 학설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정신과 신체의 문제는 일종의 사이비 문제이
다. 왜냐하면 이와 관련한 모든 논란은 현실적 계기 벌이는 두 가지 활동 양태의 어떤 대비로부터 추상된 것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실적 계기는 경험의 계기라 했다. 그렇기에 그것의 물리적 극
은 불변하는 실체라는 의미의 물질로 구성된 것일 수 없다. 각 계기의 물리적 활동은 과거의 현실적 존재를 순
응적으로 수용하는 측면이다. 그래서 비교적 안정적이다. 이에 반해 정신적 극은 계기가 새로운 가능성을 이끌
어 들인다는 점에서 계기가 벌이는 창조적 활동의 측면이다. 정신성의 정점에 놓인 의식은 이런 창조적 활동의
극단을 구현한다. 그래서 의식 중추를 이루는 현실적 계기들은 과거에 대한 순응보다는 그로부터의 일탈을 특
징으로 지니게 된다. 모든 현실적 계기는, 비록 그 정도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두 극의 통합된 활동의
산물이다.
그런데 한정의 형식으로서의 영원한 객체는 한 계기에 실현된 후, 후속하는 계기에 의해 계속해서 재차 파악됨
으로써 반복 실현될 수 있다. 여러 현실적 계기들로 구성된 결합체 가운데 특정의 영원한 개체들을 이렇게 반
복해서 파악하고 있는 결합체를 화이트헤드는 '사회'(society)라 부른다. 그리고 이렇게 파악되는 영원한 객체
는 그 사회의 한정자 즉 '한정 특성'(defining characteristics)을 이룬다. 이 범주를 통해 생성 소멸의 철학
은 실체 철학의 근간이 되었던 사태를 설명한다. 사회와 한정특성에 대한 논의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변화의
철학이긴 하지만 우주의 모든 존재가 극단적으로 유동하고 있는 것으로만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
어도 사회처럼 역사성을 가지는 존재는 어떤 일정한 한계 내에서 반복에 기초한 동일성을 유지한다. 그렇기에
또한 그것은, 생성 소멸할 뿐 변화한다고 말할 수 없는 현실적 계기와 달리 '변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
나 그것이 변화 속에서 어떤 동일성을 띠고 나타나는 것은 밑바탕에 있는 실체 때문이 아니라 한정특성을 구성
하는 그 형상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물리과학이 다루는 물리적 사물과 인격적인 동일성을 뒷받침한다. 물론
이들은 더 이상 형이상학적 절대자가 아니라 가변적인 복합체이다. 모든 사회는 생멸의 운명 아래 있다. 화이
트헤드의 우주는 이렇게 생멸하는 사회들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보다 큰 사회 속에서 생겨나고
소멸하는 사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우주 그 자체도 하나의 사회이다. 자연과학이 논하는 자연법칙은 이
우주시대를 규정하고 있는 한정 특성의 일부를 반영한다. 따라서 그것도 형이상학적 보편성을 지니는 것일 수
없다. 물리적 우주의 쇠퇴는 지금 지배적인 파악들이 보여주는 패턴의 쇠퇴로 해석될 수 있다. 새로운 질서에
의해 한정되는 새로운 사회들이 다른 우주시대에 등장할 것이다. 우리의 우주 자체가 새로움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셈이다.
3.지금까지는 현실적 존재의 체계 내적 지위와 이를 둘러싸고 있는 몇 가지 기본 범주들을 중심의 화이트헤드
의 존재 이해와 우주론을 요약해 보았다. 이제 현실적 존재 자체에 대한 분석적 기술을 간략히 살펴보자. 화이
트헤드는 현실적 존재의 내부에 대한 기술에서 인간의 온갖 활동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기본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만큼 대단히 복잡하고 난해하다. 우리는 기본 골격만을 추려볼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를 두 가지로 분석한다. 발생론적 분석과 형태론적 분석이 그것이다. 이들 두 분석 방식은 각각 『과정과
실재』의 제III부와 제IV부의 논의를 구성한다.
발생론적 분석은 경험하는 주체의 자기 창조 과정인 합생에 대한 분석이다. 그 발생의 첫 위상(phase)에서 현
실적 계기는 단순히 통합을 위한 여건으로서의 선행하는 현실적 존재들을 파악한다. 물리적 느낌을 위한 여건
은 그 현실세계 내의 현실적 계기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 계기를 구성하고 있는 느낌들이다. 이 위상에
서 이들 느낌은 순응적으로, 즉 공감의 형식으로 파악된다. 이런 점에서 계기의 첫 위상은 과거 계기들의 작용
인의 산물이다. 그러나 합생의 중간 위상으로 넘어가면서 현실적 존재는 자신이 구하는 이상(목적)에 비추어
이들 여건에 자신의 색채를 부여하는 보다 주체적인 과정을 진행시킨다. 그래서 합생은 목적론적 과정이 된다.
우선 그것은 첫 위상의 물리적 느낌에서 파생되는 개념적 느낌에 의해 질적인 평가를 수행한다. 그리고 이들
두 유형의 느낌들은 통합과 재통합을 거쳐 합생의 끝에 놓인 '만족'(satisfaction)의 위상에 이르면 하나의 복
잡한 느낌으로 결정된다. 이 최종의 위상인 만족은 사실상 그 첫 위상에서 그 계기가 품었던 이상의 실현이다.
이 최종의 위상에서 현실적 존재는 미래의 존재가 느껴야 할 자신에 대한 예기적(anticipatory) 느낌을 포함한
다. 이것은 생성의 완결로서, 후속하는 계기들에게 주어질 여건, 따라서 미래의 창조성을 제약하는 작용인의
역할을 하게 될 실재적 가능태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이다. 이렇게 현실적 존재의 합생 과정은 새로운
전망 속에 통일되기를 기다리는 환경 속에 객체들로부터 시작되어 계기가 구상하는 이상적인 자기 모습의 달성
에서 종결되고 이어서 후속하는 생성의 새로운 주체들에 객체로 주어진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경험의 주체는 경험에 앞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외적 요인에
의해 창조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스스로 생성하는 주체, 생성하는 존재이다. 이 말은 완전히 결정되
지 않은 과정의 상태에 있는 현실적 존재가 그 자신의 궁극적인 한정성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이트헤
드가 도덕적 책임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이 문맥에서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화이트헤드가 현실적 존재에 유기
체라는 기술적(descriptive term)용어를 적용하고 자신의 철학을 그렇게 부르는 중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유기체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환경적 요인들을 자신의 요소로 만든다는 사실에서 이를 유비적으로 추론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현실적 존재가 작용인뿐만 아니라 목적인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는 화
이트헤드의 발상은 고전적 사유를 이끌었던 목적인과 근대적 사유의 지배자였던 작용인을 화해시키고 있다.
나아가 현실적 존재가 첫째 위상에서 느끼는 작용인으로서의 우주와 마지막 위상에서 주체적으로 느끼는 우주
의 차이는 그것이 발견한 다수의 공적인 실재와, 그것이 자신의 것으로 변형시켜 사적으로 경험한 현상 사이의
차이로 나타난다. 이 차이는 목적인에 따른 개념적 가치평가의 결과, 즉 정신적 극의 산물이다. 이것은 화이트
헤드가 정신성은 통일하고 변형시키는 작인이라는 근대적 학설을 일반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정신성
이 단순화의 작인이라고 역설한다. 강력한 개념적 느낌을 가지는 현실적 존재는 그의 직접적인 환경 속에 있는
다수의 계기들에 공통된 성질들을 하나의 지배적인 인상으로 통합시켜 단순화한다. 그래서 여건들 사이의 세부
적인 차이가 지워진다. 이것은 우리가 고도의 정신적 경험인 의식적 인식에서 다수의 생성의 원자들을 식별하
지 못하고 거시적인 대상들만을 보게 되는 이유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인간의 온전한 지각 경험은 단순한 현상만을 포착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재와 현상간의 어떤
결합을 포착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 경험은 과거의 환경에 대한 물리적 느낌과 이를 계승하는
신체의 물리적 느낌에서 출발한다. 이런 물리적 느낌을 화이트헤드는 '인과적 효과성(causal efficacy)의 지각
'이라 부른다. 이들 느낌을 통해 외부의 인과적 작인은 희미한 정서적 박동의 형식으로 수용된다. 인간 신체의
여러 기관을 구성하는 현실적 존재들은 선택적 증폭기의 역할을 한다. 특히 대뇌의 의식 중추를 구성하는 현실
적 존재들은 이들 인과적 느낌들을 끌어 모아 변환·강화시켜 특정한 색채나 냄새 등의 감각여건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물리적인 인과적 느낌들은 개념적 느낌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현시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의 지각'이라 부른다. 전통 철학은 인과적 효과성을 도외시하고 현
시적 직접성에 주목해왔다. 무엇보다도 후자가 명확하고 명료하여 삶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
는 실천적 유용성에 의해 철학적 사변이 왜곡되는 것을 경계한다. 대표적으로 근대 인식론은 명석 판명성의 유
용성에 현혹되어 현시적 직접성의 지각에만 매달린 결과 유아론적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화이트헤드는 인간의
지각이 현실적 직접성의 지각 내용을 통해 인과적 효과성의 지각내용을 해석하는 작용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
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은 두 양태의 지각, 즉 실재에 대한 지각과 현상에 대한 지각이 상호 연관되어 이
루어진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지각 양태를 '상징적 연관'(symbolic reference)이라 부른다. 이것은
근대 인식론 철학을 비판하면서 화이트헤드가 구상한 감각지각의 인식론이다.
나아가 현상에 대한 이론에서 화이트헤드는 진리관계, 의식적 판단과 인식 등이 어떻게 파악과 이들의 통합에
관한 그의 일반 이론이 제공하는 문맥에서 설명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진리관계는 현상과 실재의 대응으로
이해된다. 의식적 판단 내지 인식은 주어진 사실로서의 결합체에 대한 느낌과, 가능한 사실로서의 그 결합체,
즉 명제에 대한 느낌(요컨대 명제적 느낌,)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의식은 '사실'과 '사실일 수
있는 것' 사이의 대비를 느끼는 방식이다. 대비가 명확한 만큼 의식도 명확해진다. 이런 대비는 부정적 지각에
서 특히 부각된다. 즉 회색으로서의 돌에 대한 지각이 집중된 의식을 동반하지 않고 흔히 일어나는 반면 회색
이 아닌 것으로서의 돌에 대한 지각은 명확한 의식을 동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화이트헤드가 "부정적 지각
은 의식의 월계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부정적 지각은 자유로운 상상과 일맥상통한다. 허위
인식도 유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부정과 상상에 힘입어 우주에 여건으로 주어지지 않은 새로운 것이 우
리의 경험에 도입된다. 상상적 예술과 문학의 가치도 궁극적으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고도 의식의 산물이자
창조적 전진으로서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대표적인 작인이다.
4.현실적 존재에 대한 형태론적 분석은 그 자신의 생성을 끝낸 완결된 현실적 존재에 대한 분석이다. 이 때의
현실적 존재는 후속하는 모든 생성의 주체에 주어진 객체이다. 그것은 주체로서 소멸한 존재이다. 이는 그것이
더 이상 현실태가 아니라 후속하는 생성을 제약할 가능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주의 창조적 전
진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단속적인 창조적 행위들로 이루어진다. 자기구성 중에 있는 현실태로서의 현실적
존재는 원자적인 것으로 분할 불가능하다. 분할할 경우 그 현실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구성을
마친 가능태로서의 현실적 존재는 무한히 가분적이다. 그것이 가지는 이 가분성은 시공간이론의 기초가 되는 '
연장적 연속체'(extensive continuum)의 기본 속성에 속한다.
연장적 연속체는 연장성과 가분성에 기초한 소수의 관계적 특성만을 지닌다. 우리가 익숙해 있는 시공간의 차
원적 성격과 계량적 성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특정한 우주의 국지적인 특성에 불과하다. 이들은 연장적 연
속체를 이 우주가 특화하여 구현하고 있는 우연적 요소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인 연장적 연속체는
그 관계항으로 현실적 계기들이 점유하는(또는 점유하게 될) 영역들을 관계항으로 하여 구성되는 가능적 네트
워크이다. 각 현실적 계기는 그 과거의 현실세계가 현실화한 이런 가능적 관계성의 네트워크를 계승하고 그 관
계항을 이루는 특정 영역을 파악, 점유함으로써 자신의 시공간 양자를 현실화시킨다. 흔히 연속적인 것으로 간
주되는 시공 연속체는 이들 생성의 계기(succession)와 병치 관계로 현실화한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는 시공간
에 존재론적으로 선행한다. 그리고 시공간은 원자적 생성 과정에 선행하는 현실태가 아니라 원자적 생성에 힘
입어 비로소 현실화되는 가능태이다. 그것은 가능적 연속체이다. 시간과 공간은 현실적 계기들의 생성을 떠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5.『과정과 실재』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신학에서 정점에 이른다. 화이트헤드는 그의 우주론에 종교의 섬세한
직관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는 인류가 다양한 방식으로 향유해온 종교적 직관이 유동과 대비되는 영속성의
요소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신을 말하는 이유는 이런 유의 경험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에 따르
면 신은 현실적 존재이다. 다른 시간적 계기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양극성을 갖는다. 정신적 극을 이루는 '원
초적 본성'(primordial nature)과 물리적 극을 이루는 '결과적 본성'(consequent nature)이 그것이다. 전자는
영원한 객체들 전체를 질서지어 파악한다. 이 파악에서 신은 초월성과 영속성을 얻는다. 그리고 순수한 가능태
로서의 영원한 객체들은 신에 의해 파악됨으로써 현실적 근거를 마련한다. 현실적 계기들은 그들의 한정자, 즉
이상을 신의 이러한 파악에서 얻는다. 역으로 말해서 신은 합생의 시초에 그것에 이상을 제공하는 자로서 현실
세계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여에 의해 이상적인 것들이 시간적 세계에 작동되고 질서의 형식이 생겨난
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사물의 기초에는 개념적 느낌의 무제약적 현실태 즉 신이 있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 관여는 강요가 아니라 설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신의 기획은 시간적 세계에서 실패할
수 있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신에게서 전능의 관념을 배제하는 논리이다. 전능한 신은 시간적 세계에 자유와
새로움을 박탈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은 전통적 의미의 창조자가 아니다. 오히려 신이 창조성의 피조물이리고 말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
다. 신은 '창조적 전진'의 근원적 사례로서, 다자로서의 영원한 객체들을 일자로 통일시키면서 탄생(이것은 논
리적 의미이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창조에 선행하지 않으며 다만 영속하는 원초적 본성을 통해 시간적
세계의 자기 창조에 관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창조자일 뿐이다.
그러나 신의 원초적 본성은 신의 일부 특성이다. 존재-신학적 논의가 시도해왔던 것처럼 영속하는 초월적 실재
와 일시적인 시간적 실재를 대비시키는 것은 후자를 부질없는 착각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화이트헤드는 유동하
는 세계가 구현하는 새로움(novelty)과 무관한 영속성은 죽은 영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신을 현실적 존
재라고 했을 때 이미 시사되었던 사실이다. 다른 시간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신은 유동하는 세계를 물리적으로
파악한다. 이런 파악으로 구성되는 신의 측면이 결과적 본성이다. 이 측면에서 신은 세계와 더불어 끊임없이
생성한다. 신 자신이 유동의 한 가운데 들어간다. 여기서 신은 현실적 존재를 규정하는 기본적인 범주적 조건,
즉 경험을 통해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라는 조건을 충족시킨다. 신은 유동하는 시간적 세계를 파악하는 가
운데, 원초적 본성이 제공하는 초월성을 넘어 그 완전한 현실성을 확보한다. 결국 영속하는 현실태는 그 완결
을 위해 유동을 필요로 하고, 생멸하는 현실태는 그 이상을 위해 영속하는 현실태를 필요로 한다는 것,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는 신을 창조한다고 말하면서 역설하는 신과 세계의 상호 의존성이다.
고립된 존재는 신화이다. 신이든 세계이든 인간이든.
출처:『철학과 현실』 2002 가을호
<과정철학>이란 무엇인가?
What is Process Philosophy? 문창옥
화이트헤드는 20세기에 있어 가장 심오한 철학적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대다
수의 다른 철학자들이 사변의 길은 허상 속을 맴돌게 할 뿐이라고 믿고 있던 시기에 거대한 사변적 체계를 구
성하였다.
이는 그가 철학이란 당대 문명의 다양한 영역과 지평에 깔려 있는 여러 전제들을 비판함으로써 이를 창조적으
로 개선하는 데 그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라는 남다른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시대적 조류를 역행하여, 사변의 길로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그는 결코 20세기 사상적 흐름을
주도적으로 대변한 철학자였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단순히 시대의 산물로 전락하지 않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위대한 철학이 대개 그렇듯이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이해하기에 쉽지 않다.
특히 그의 주저 『과정과 실재』에 그려져있는 웅대한 형이상학 체계는 웬만큼 철학적 훈련을 거친 독자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
화이트헤드는 현대의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시와 예술, 종교와 상식 등에 전제되어 있는 실재 해석들을 비판적
으로 융화시켜 생경한 언어로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이런 전제들을 명료하게 하지 못하는 한, 그런 해석을 개선하거나 보완할 수 없다고 보았다.
과학적, 문학적, 예술적, 시적, 종교적, 실천적 사고 방식들은 문제되는 사물들의 어떤 특정 측면에만 관심을
두고, 그밖의 다른 것들은 무관한 것으로 도외시한다.
따라서 우리가 구체적 실재에 대한 완전한 통찰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들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수정 보완하거
나 제거해야 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이따금 철학을 <추상관념의 비판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물론 추상관념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추상관념이 없다면 지식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추상관념은 우리가 그것이 추상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우리는 그것이 갖는 실천적 유용성에 감탄한 나머지 그것을 구체적인 실재로 오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과 철학과 상식에서 흔히 통용되는 환원주의적 사유의 배후에 놓여있는 그릇된 착상으로서 화이트
헤드가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변철학은 적절한 우주론을 구축함으로써 구체적인 실재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기술하려 해야 한다.
『과정과 실재』의 과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자신의 방법을 <기술적(記述的) 일반화>라 부른다.
그는 경험 뿐만 아니라 상상과 이성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일반화하기 위한 1차적인 자료로서 우리의 다양한 경험 사건에 주목한다.
우리의 경험 행위 자체는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사태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실재와 교섭하면서 존재한다.
화이트헤드는 <일반화>라는 전략에 따라 우리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경험의 측면은 배제 한다.
예컨대 의식적 경험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그는 실재를 불편부당하게 형이상학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인간과 세계간의 존재론적 차별을 철폐하고 동물, 식
물, 바위 등과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의 특성을 찾아내고자 한다.
화이트헤드는 경험의 보편적 구조를 객체적인 것이 주체적인 것으로 탈바꿈해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데 주목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구조적 특성를 일반화하여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라는 범주를 구상하고, 이들 세계의
궁극적인 구성요소로 설정한다.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는 대부분 이 개념을 분석하는 데 할애돼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충실한 이해는 '과정과 실재' 전체에 대한 이해와 맞먹는다.
그런데 현실적 존재가 '경험의 계기(moment)'로부터 유추된 것이라는 사실을 토대로 우리는 『과정과 실재』의
핵심적 이념에 어느 정도 다가설 수 있다.
우선 이로부터 우리는 화이트헤드가 고대 그리스 이후 서양의 사유를 지배해온 정태적인 실재관을 거부하고 있
음을 읽어낼 수 있다.
현실적 존재의 구조가 경험의 과정, 즉 <생성>becoming의 과정이라면, 그리고 현실세계가 궁극적으 로 이와 같
은 생성의 과정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라면, <생성>은 <존재>보다 더 기본적인 범주가 될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과정의 원리>로 정식화하고 있다.
현실적 존재는 그것의 생성과정에서 <살아있다>.
그 과정이 종결될 때, 즉 생성이 존재가 될 때, 그것은 과거 속으로 소멸하고 새로운 생성의 과정에 의해 계승
된다.
그래서 우주에는 현실적 존재의 생성과 이로부터 구성되는 현실 세계의 생성이 있다.
전자는 소우주적 과정이요 후자는 대우주적 과정이다.
화이트헤드의 사변철학은 이 두 가지 과정을 분석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고, 흔히 그의 철학을 <과정철학>이
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다음으로 현실적 존재들이 경험의 계기에서 유추된 것이라는 점은 이들 존재가 상호의존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타자를 경험하는 가운데 주체로서 존립하거나, 타자의 경험을 구성하는 객체로서 존립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타자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다.
이것은 <상대성 원리>이다.
임의의 현실적 존재에 있어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는 본질적인 것이며 외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처럼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 존재들을 근본적으로 상호의존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
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을 <유기체(organism)의 철학>이라 부른다.
그는 17∼18세기의 기계론에 대항하여 자신의 철학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기계론의 특징은 그 부분들 사이의 관계를 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데 있다.
그래서 그 부분들 그 자체는 상호독립적이다.
유기체의 경우 부분과 체계 전체는 상호의존적이다.
특정 유기체에 있어 부분과 부분 사이의 관계나 그 유기체와 우주 전체 사이의 관계는 그 유기체의 본질적인
요소인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완벽한 체계를 구성한다는 것이 하나의 이상적인 목표임을 인정한다.
사변철학은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것보다 나은 실재 이해를 추구할 뿐이다.
따라서 『과정과 실재』의 체계는 절대 지식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후일 정정되고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의미에서 개방된 체계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가 그리고 있는 사변적 체계의 독창성과 포괄성을 놓고 볼 때 현대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본래 수학자로서 출발했고, 현대 물리학에도 상당한 식견을 갖추고 있던 그가 전통의 관념과 당대의 연구성과
를 응집시켜 구성해낸 거대하면서도 세밀한 체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다.
사실 화이트헤드가 활동하던 시기는 이미 철학이 과학과 별도로 우주론 체계를 구성하거나 다른 과학의 체계를
심층적,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반성하기에는 벅찬 시대였다.
그렇기에 화이트헤드가 『과정과 실재』에서 보여준 철학적 우주론은 어쩌면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최후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의 우주론은 물리학에서 지식의 전형을 찾고 분석과 실증을 통해 정당성을 추구하던 시기, 그래서 감각을 떠
난 인간의 통찰력은 신화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매도되던 시기에 태어났다.
사변적 구성이 인간의 지식을 혼란과 정체로 점철되게 한다는 비판이 날카롭던 시기에 그는 오히려 사변이 지
식의 지평을 새로이 열어주리라는 믿음을 갖고서, 과감한 체계 구성을 시도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변적인 지적 모험이야말로 문명을 끌고가는 동인(動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형화된 관념적 틀에 안주한 채 분열과 분화의 길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문명은 오래지 않아 소멸한다는 것,
아마도 이것이 이 시대의 우리가 경청해야 할 『과정과 실재』의 메시지일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진리와 아름다움 이해
Alfred North Whitehead, Adventures of Ideas/ 전 철
제17장 아름다움
'아름다움'이란 경험의 계기 속에서 여러 요인들 사이의 상호 적응을 말한다. 그래서 원초적 의미의 아름다움
은 현실적 계기들에서 예증된 성질이다. 이 아름다움을 향한 목표는 이중적이다. 첫째 다양한 파악 간에 상호
억제가 없다는 것이다. 주체적 형식의 여러 강도가 상호 억제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둘째, 다양한 파악을 하
나로 종합하는 결합이 객체적 내용과, 객체적 내용의 새로운 대비를 도입한다. 실로 '아름다움'의 완전성은 '
조화'의 완전성으로 정의되며, '조화'의 완전성은 세부에 있어서 그리고 최종적인 종합에 있어서 '주체적 형식
'의 완전성으로 정의된다.
아름다움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우주 내에서 완전한 실재적 사물인 현실적 계기에 실현되는 '아름다움
'이다. 둘째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이상이다. 오히려 후자는 전자의 측면인 아름다움을 파악하면서, 있는 계기
에 의한 자발성의 다행스러운 행사와 더불어, 다른 여건과의 다행스런 연합에 의해 실현되어 가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주체적 형식의 완전성을 기반으로 한다. 이 주체적 형식의 '완전성'이란, 서로 억제하기 때문에 그
것에 적합한 힘에 이르지 않게 되는 구성요소로서의 느낌이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억제'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완전한 억제이다. 완전한 억제는 주체적 형식의 유한성의 한 예이다. 이러한 완전히 억제
된 구성요소로서의 주체적 느낌이라는 것은 본시 그 주체적 형식의 구성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다른 조건
들 밑에서 구성요소일 수 있었다는데 지나지 않는다. 둘째는 주체적 느낌의 억제이다. 주체적 지향이 단일하게
통합되지 않고 상이한 지향이 공존할 때 제3의 느낌은 출현한다. 이것은 통일성이 상실된 미적인 파괴를 창출
한다. 이러한 것은 바로 '부조화의 느낌'이다. 부조화의 느낌이 강하면 강할수록 완전성으로부터 더 후퇴하게
된다.
완전성 또한 고차원의 완전성과 저차원의 완전성이 있다. 그리고 보다 고차원의 유형을 지향하는 불완전성은
보다 저차원의 완전성보다 상위에 있다. 자유의 사회적 가치는 그것이 갖가지 대립을 산출하는 데에 있다. 일
체의 실현은 유한적이며, 따라서 무한한 모든 완전성이라는 것과 같은 완전성은 없다. 다양한 유형의 완전성은
그 자신들 간에 서로 대립하고 있다. 그래서 부조화가 아름다움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완전성의 단조로움부터
신선한 이상으로 수행하게 하는 점이다. 부조화의 가치는 불완전성의 이점에 기여한다.
특히 고대 그리스 문명에 대한 고찰은 부조화의 가치를 예증한다. 이 민족은 완전성의 위대한 이상을 통해서
진보에 눈뜨게 되었다. 이러한 전진을 통하여 완전성은 성취되었다. 그런데, 영감은 고갈된다. 신선도는 사라
져간다. 이제 학식과 세련된 취미가 모험의 열기를 대체하였다. 부조화의 가치는 완전성을 지향케 한다. 하지
만 완전성의 왕국에 안주하는 문명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창출되지 않는다. 완전성은 있지만 더 이상 새로움
은 없다. 문명을 그 최초의 강력한 열정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학식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모험, 즉 새로
운 완전성에 대한 추구가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자발성, 즉 결단의 독창성은 각각의 현실적 계기의 본질에 속한다. 그것은 개체성의 최상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정한 단계의 완전성을 달성한 후에 열정을 보존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먼저 요구되는 것은, 달성된 완
전성의 유형에 부조화를 끌어들이지 않는 모든 변주를 탐색하는 것이다.
아름다움과 악의 혼합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이상학적 원리의 결합작용에서 발생한다. (1) 일체의 현실화는
유한하다는 것 (2) 유한성이 양자택일적 가능성의 제거를 포함한다는 것 (3) 물리적 실현의 완결성으로부터 제
외된, 당면 문제와 관계가 있는 선택지에 순응하는 주체적 형식을 정신적 기능이 실현시킨다는 것이다. 현상
(Appearance)은 다양한 객체를 통일함으로써 중후함과 강도를 결합시킨다. 그것은 객체를 단순화하며, 그런 단
순화의 선상에서 주어진 세계의 질적 내용을 부가한다. 그것은 선이건 악이건 간에 생생한 정감적 색조의 경험
을 이끌어내는 대신에 강도와 중후함을 보존한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극치와 '악'의 극치를 가능케 한다. 왜
냐하면 그것은 양자를 단조로운 제거 내지 단조로운 체감으로부터 구출해주기 때문이다.
특수한 개체성의 정서적 가치가 단순한 감각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정서의 일반화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의
문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일반화된 정서적 성질은 사랑, 존경, 섬세한 느낌, 가치감, 증오, 공포, 자신의 존
재와 얽혀 있는 특정한 객체와의 연합에 대한 일반적 느낌을 말한다. 영혼의 생명에 있어 계기에 이어지는 계
기의 연속적 내재성은, 그 생명의 현재의 계기에 있어 어떤 특정한 객체의 연속적 파악의 누적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그 다양한 파악에 이어 새로운 성질이 우월성을 확보하게 되며, 원초적 성질은 다소의 차이를 보이면
서 현존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양하고 계속 변동하고 있는, 보다 특수한 유형의 성질은 최종적 파악의 색조에
있어 순응적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부터 점차 제외되어 간다.
제18장 진리와 아름다움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최대한의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서 경험의 다양한 사항들이 상호간에 내적으로 순응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실재'의 다양한 구성요소의 관계와 '현상'의 다양한 구성요소의 내적 관계
및 '현상'과 '실재' 간의 관계에 관여한다. 그러기에 어떠한 경험의 부분도 아름다울 수 있게 된다.
'진리'는 두 측면에서 보다 좁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로, 진리는 현상과 실재와의 관계이다. 둘째로, 진리
의 경우에 있어 '순응'의 관념은 '아름다움'의 경우보다 좁다. 왜냐하면 진리관계는 두 개의 관계항이 어떤 요
인을 공유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증진시키기 위한 '진리'의 일반적 중요성은 압도적이다. 결국 진리관계는 여전히 '조화'를실현하
는 단순하고도 직접적인 방식이다. '아름다움'에 봉사하는 '진리'의 기능을 통하여 '진리' 실현은 그 자신에
있어 느낌의 '아름다움'을 증진하는 요소가 된다.
멀리 떨어진 이상에의 지향으로 정당화되는 변화가 직접적 '현상'을 직접적 '아름다움'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
예술'에 의해 증진되어야 한다는 것은, 신선함을 향한 순수한 갈망의 힘에 대한 찬미이다. 문명에 봉사하는 데
있어 예술이 갖는 장점은 그 인위성과 그 유한성에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한계 내에서 그 자신의 완성을 성
취하는 인간 노력의 유한한 단편을 의식에 전시한다.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유한한 창조적 노력이 인각된 자
연의 단편이며, 그것은 그 막연한 배경의 무한성으로부터 세분화된 개별적 사물로써 자존(自存)하고 있다. 그
래서 '예술'은 인간성 감각을 고양시킨다. 인간의 성취를 위해 준비된 유한한 완전성을 의식 속에 불러일으키
기 위해서는 '예술'이 필요하다.
문명의 예술은 물리적이기도 하고 순수한 상상의 산물이기도 한 많은 원천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필요한 순간에 최초로 일어나는 삶의 생기를 자유로이 향유하려는 단순한 갈망의 승화이며, 승황의 승화이기도
한 것이다. 에술이 번득이는 섬광처럼 '사물의 본성'에 관한 은밀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를 드러냈을 때, 그것은
인간 경험 속에서 치유적 기능을 발휘한다.
'과학'과 '예술'은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단호한 의식적 추구이다. 그것들 속에서 인류의 유한한 의식은
자연의 무한한 다산성을 그 자신의 것으로 사유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정신의 운동에서 여러 유형의
제도와 여러 유형의 직업이 개발되어 나온다. '교회'와 '의식', 한평생을 바친 '수도원', 지식을 탐구하는 '대
학', '의학', '법률', '무역'의 방책 - 이것들은 모두 문명을 향한 목적을 반영하고 있으며, 거기서 인류의 의
식적 경험은 '조화'의 원천을 활용하기 위하여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영혼에 대한 단상/전 철
1.영혼이라는 관념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
2.영혼에 대한 개념정의
* <영혼>은 리얼리티인가 메타포인가?
* 개념의 문제가 등장한다. 도대체 개념이 가능해지는 근거는 무엇인가.
* 혹시 무한한 관계성 안에서 주체의 전망에 의해서 범주화한 개념이 영혼이 아닐까?
cf.영혼은 메타포인 듯 하다. 그런데 더 나아가다 보면 메타포 아닌 것이 없다. 전체 언어의 연장적 연속체 속
에서 개념이 등장한다는 측면에서는 모든 것이 메타포이다. 모든 개념은 언어의 연장적 연속체의 산물이다.
3.영혼의 성질
* 영혼은 인간안에 깃든 선험적인 존재이다.
* 영혼은 인간의 고양된 인격성의 영향력이다.
4.영혼의 다양한 의미
*Geist : 가이스트는 일종의 궁극자의 범주이다. 모든 존재의 활동성이다.[1]
*Seele : 젤레는 인간존재의 자기정체성이다. 고유한 인격성, 혹은 영혼의 계승이다.[2]
*Herz : 헤르쯔는 <영혼>이 현실세계를 만날 때 형성되는 대비의 느낌이다.[3]
*우리의 일상적인 관념 안에는 영혼을 Seele로 의심없이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5.영혼에 대한 이해의 방식
첫째, 우리의 영혼은 하나의 유일한 영혼으로 환원 가능하다는 입장이 있다. 이 입장이 다양한 영혼으로서의
Seele들은 Geist라는 하나의 통합된 일자로 귀환한다. 또한 일자로서의 Geist는 다자인 Seele로 분유가 가능하
다.
둘째, 우리의 영혼은 더 이상 환원이 불가능한 고유한 정체성이라는 입장이 있다. Seele는 고유한 하나의 세계
이다. 여기에서 Geist는 Seele의 활동의 근거가 된다. <바람>의 은유가 매우 걸맞는 듯 한 Geist는 인격적인
Seele의 활동을 유혹하는 목적인이다.
셋째, 우리의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세계와 만날 때 형성되는 대비의 관념만이 존재한다. 이
대비의 관념을 우리는 Seele로 명명한다. 단지 이 대비는 매 순간 명멸한다.
3-1. 명멸의 사건이 계승되어서 '영혼'이라는 고유한 입자적 사회를 구성할 수도 있고,
3-2. 혹은 명멸의 사건의 반복되는 연속으로 마감할 수도 있겠다.
6.영혼은 활동성과 작용성
활동성은 영혼이라는 실재(reality)의 실현을 의미한다. 작용성은 영혼이라는 실재의 주도적인 행사가 마감된
후, <객체적 불멸성>을 통하여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의미한다. 부활은 새로운 차원의 영혼의 활동인가, 아
니면 영혼이 실재하지 않을지언정 세계에 대한 유효하게 미치는 영향력을 의미하는가? cf. 사실과 가치의 관계
7.삶과 영혼에 대한 믿음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책임적 삶을 이끄는 요소이다. 하지만 더욱 책임적인 삶은 영혼의 존재 유무에 대
한 믿음과는 무관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또한 삶의 의지는 영혼에 대한 믿음에 기인하기 보다는, 오
히려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엘랑비탈>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거기에는 삶의 목적과 삶의
의미 이전에 그냥 살아가게 되는 자연(自然)이 존재한다. cf. 김용옥과 조익표의 <꼴림>.
8.화이트헤드의 영혼에 대한 이해.
우선 화이트헤드는 영혼을 존속하는 특징으로 보지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생명이라는 것은 사회에 대한 반작
용이고, 자유를 향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공허한 공간의 특성이지, 어떤 입자적 사회에 의해 점유된 공
간의 특성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진정한 영혼은 어떠한 자리에서 존속하는 성격을 넘어서는, 끊임없는 <독
창성>만을 그의 성격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의 실재성과, 영혼의 장소loci라고 하는 것은 이
미 모순을 안고 있는 개념이 된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에너지이다. 모든 존재는 정신적 극과 물리적 극의 양극성이 있다. 인간이라는 고등의 유
기체는 여타 유기체에 비해서 정신적 극의 활동이 매우 활발한 특징이 있다. 정신적 극의 순수한 가능성인 신
의 원초적 본성을 가장 많이 간직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고등의 유기체이다. 또한 신의 원초적 본성을
향한 자기초월의 구현을 매우 갈망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영혼은 물리적 극에 대한 정신적 극의 반작용을 의미
한다. cf. 혹시 인간에 대한 '신의 원초적 본성'과 '인간의 현재성'의 대비를 우리는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
은 아닐까? 왜냐하면 영혼은 현실을 넘어서려 하면서, 무엇인가(신의 원초적 본성)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
영혼과 양심의 관계.
9.유가의 영혼에 대한 이해
유가는 세계를 일원론적인 차원으로 본다. 세계는 기의 이합집산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500대까
지는 혼의 존재를 인정한다. 혼은 비교적 기의 이합집산으로 와해되는 성격에서는 벗어난 듯 하다. cf. 다른
종교에서 바라보는 영혼에 대한 이해.
10.영혼과 바디의 관계
물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바디body개념은 이 세상에서는 있고, 죽음을 넘어선 다른 곳에서는 용납이 안될 듯
하다. 바디가 있을 때의 시공 개념하고 바디가 없을 때의 시공개념의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이 세계를 넘어서
서 저 세계에까지 뭔가는 계속되지 않을까. 현실적인 세계에 존재하였던 몸과 마음의 '최대공약수'로서 영체는
이후의 세계에도 계속 되지 않을까. 어쨌건 바디개념은 끝난다. 이런 의미에서 육신의 부활은 무모하다. 하지
만 영생이라는 의미가 있다. 새로운 영체의 존속이든, 아니면 영향력의 존속이든간에 무엇인가는 계속 계승된
다.
11.영혼에 대한 논의가 안고 있는 숨겨진 이데올로기
각주
[1] Geist의 뉘앙스는 이성의 측면이 강하다. cf. mind, intellect, spirit.
[2] '영성'의 뉘앙스가 가장 많이 풍겨난다. cf. soul.
[3] 인간이 물리적으로 느끼는 측면이 강하다. 심장의 의미도 있다. 슬프고, 기쁘고 하는 희노애락의 정서가
이 안에 담겨 있다. cf. heart. 이외에도 gemut(심정)이라는 뉘앙스가 있다. 감성적인 측면이 강하다. cf. 심
성이 온화하다. 또한 gefuhl(감정)이라는 뉘앙스가 있다. cf. feeling emotion.
관념, 감각, 시간
전 철
1. 감각-관념의 언어와 클래스 이론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언어를 만나면서 모종의 당혹스러움을 한 두 번쯤은 경험하였을 것이다. 광범위 한 형이
상학적 사유를 축조하는 화이트헤드의 시도 가운데서 등장하는 언어는 매우 감각적이고, 동시에 매우 시적(詩
的)인 측면을 갖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잠시 주춤거리게 된다. 예를 들자면 그의 언어 가운 데에는 느낌
(feeling), 향유(enjoyment), 만족(satisfaction) 등 심리적이면서 감각적인 정서를 유발하는 언어 개념이 등
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어는 관념적 측면이 매우 안정적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맥 락에서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화이트헤드의 언어 는 감각적 측면과 관
념적 측면이 상호 조응된 언어이다. 언어의 기능은 상식을 교란하는 데 있다. 동시 에 언어는 새로운 정서를
유도한다. 이런 맥락에서 화이트헤드의 언어는 사물이나 상황을 기술하는 감 각적인 측면과, 사물이나 상황의
근저를 형성하는 기하학적, 관념적 측면을 동시에 밝힌다고 할 수 있 다. 예를 들어보자. 화이트헤드의 존재의
범주 가운데 하나인 actual entity라는 개념은 구체적이고 개별 적인 사물을 구성하는 궁극적 존재로서 이해되
면서, 동시에 모든 사물의 가장 기본을 형성하는 일반적 관념을 그 안에 담고 있다. 그렇다면 화이트헤드의 언
어세계가 감각적 측면과 관념적 측면을 동시에 포 괄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우선 그는 클래스(class) 개
념을 럿셀과 함께 발견한 수학자였다. 화이트 헤드가 하나의 개별적인 언어와 그 언어의 언어군(言語群;class)
의 관계를 분명히 규정할 수 있었던 근거 는 바로 클래스 개념을 깊이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하나의 언어가 얼
마나 개별적인 사물이나 상황을 구 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언어의 감각적 측면이라고 한다면,
그 언어가 얼마나 분명한 언어군(言語群) 안에서 관계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언어의 관념적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와 언어군의 관계가 모호하지 않은 언어는 구체적이면서 동시에 추상적인 측면을 동시에 내포하
는 언어이 다. 감각적 측면과 관념적 측면을 동시에 만족하는 화이트헤드의 언어는 바로 클래스(class)에 대한
확고 부동한 이해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언어는 매우 구체적인 측면을 포괄한 언어이면서 동 시
에 광범위한 일반성을 바탕으로 한 매우 정합적인 언어이다.
2. 양극단을 동시에 안고 있는 나의 문제
관념과 감각, 삶과 죽음, 자유와 구속, 말과 사물, 언어와 존재, 사유와 삶, 생성과 소멸, 영원과 현재, 초월
과 내재 등등, 결국 우리의 물음의 궁극적인 대상은 바로 위와 같은 대립쌍의 관계가 아닌가 생각 한다.[1] 저
대립의 양극단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저 양극단의 관계를 분명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 운 일이다. 그러나
저 두 양상이 지금 여기의 나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 이다. 그렇다면 김용옥의
말마따나 결국, 저 두 대립의 양극단을 이해하는 것과, 저 양극단의 관계를 분 명히 파악하는 것은 나 자신에
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화이 트헤드는 철학적 사유의 여건을, 우리
자신을 포함한 현실세계로 말하였다(cf. PR, p.51.). 화이트헤드의 "우리 자신을 포함한"이라는 문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저 화해할 수 없는 존재의 양 극단을 해명하는 작업은 바로 그 양극단
을 안고 있는(cf. mental pole & physical pole) 존재에 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을 배제한"
체 현실 세계에 대한 사유를 전개현 것이 기존의 형이상학이었다면, 화이트헤드는 "자신을 배제하지 않고" 오
히려 자기자신 조차도 하나의 현실세계의 여건으로 파악하는 그러한 출발점을 시도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이
자신을 파악하며, 혹은 자신이 자신 에게 파악되면서 동시에 그 구조가 유지될 수 있는 측면이야말로 - 적어도
나에게는 - 비의(秘意)의 차 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하간 이 맥락에서도 화이트헤드의 클래스(class) 개념
에 철저함에 기인한 자연 스러운 시도를 발견할 수 있겠다.
3. 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신학의 두 전통
한 관념 두 감각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설(cf.jjiipp)은 매우 유용한 차원을 제공해 준다. 정신적 극과 물 리적
극이라는 가장 궁극적인 대립의 양극단의 출발점은 신과 세계이다. 도대체 신은 무엇이고 세계는 무엇이란 말
인가? 어쩌면 저 '신'과 '세계'라는 실재 자체도 언어의 유희는 아닐까? 이러한 물음을 접어 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물음은 남는다. 신학은 신과 세계의 관계를 해명하려는 일련의 시도이다. 신학 은 이 신과 세계의 관계
에 대한 두 가지 해명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세계는 신을 포함한다는 주장 (cf.루터, 틸리히)과 세계는
신을 포함하지 못한다는 주장(cf.칼빈, 바르트)을 우리는 만날 수 있다. 그렇 다면 이 두 주장과 위에서 등장
한 감각적 측면과 관념적 측면, 클래스, 한 관념, 두 감각에 대한 논의와 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결론부
터 말하자면 세계는 신을 포함하지 못한다. 세계는 감각이 요소로 구성된다. 신은 관념이 요소로 구성된다. 그
것은 감각적 측면과 관념적 측면은 상호 상이한 역할을 수 행하고 있다는 맥락과 닿아있다(cf.관념의 영역과
감각의 영역). 또한 상위의 클래스는 그 클래스의 구체 적인 집합 개별자들을 배제하지 않지만 그 집합의 개별
자들과는 다른 차원의 논리계형을 점유한다는 클래스 이론과도 닿아있다(cf.럿셀, 화이트헤드의 클레스 이론).
그리고 우리는 한 관념과 두 감각이 동 시에 포개어진 자리에 놓여져 있다는 한 관념 두 감각이론도 세계는 신
을 포함하지 못한다는 차원의 계보에 놓여져 있다. 관념은 오로지 하나만의 감각으로 변환되지 못한다. 신은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 변환되지 못한다. 언제나 관념과 감각은 엇갈려 있다. 신과 세계는 서로 엇갈려 있다.
한 관념 두 감각 은 관념적 신과 감각적 세계가 빚어낸 하나의 실제적인 결과이다(cf. 한 관념 두 감각).
4. 시간 : 문제해결의 출발점
우리는 여기에서 세계의 양극적 측면'만'으로는 도대체 해명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게 되었다. 왜 세계가 신
을 온전히 품을 수 없는가? 왜 관념의 영역과 감각의 영역은 서로 엇갈리는가? 이러한 물음의 해명은 바로 '시
간'과의 관련성 속에서 전개해야 하지 않을까. 이 엇갈림의 근원과 시간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의 범주와 궁극자의 범주의 관계성의 문제 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문제를 논리와 시간의 관계성의 문제[2]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학적으로도 신과 시간의 관
계성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시간에 대한 논의는 이 '양극의 문제'와 양극을 안고 있는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다.
각주
[1] 화이트헤드는 경험이 갖고 있는 양극적인 측면에 대하여 누누히 강조하고 그의 형이상학 안에서 포괄적인
해명을 시도한다. 특히 화이트헤드는 정신적인 극의 출발은 신(神)에서부터 비롯되고 현실적 계기의 성립은 물
리적 극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또한 의식, 사고, 감각지각이라는 요소들은 모두 정신 적인 극과 물리적인 극
의 중간지대에서 빚어지는 합생의 <불순한 국면>에 속한다고 말하였다. 화이트헤 드의 사유를 나름대로 이해한
다면, 양극적인 측면을 동시에 안고 있는 인간존재는 <불순한> 존재이다. 결국 <불순한> 존재가 <순수한 극>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바로 시지프스와 같은 인간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Cf. PR, p.105.
[2] 이것과 관련해서 다양한 문제제기를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제기를 논리론과 시간론이라는 개념으로
일 단 정식화 시켜보자. 논리론은 시간에 대한 논리의 근원을 출발점으로 한다. 시간론은 논리에 대한 시간의
근원을 출발점으로 한다.
첫째, 논리론은 시간의 문제를 논리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시간론은 논리의 문제를 시간으로 이해하
려는 시도이다. 우선 시간에 대한 논리의 우위의 관점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우선 논리에 있어서 시간은 하
나의 불 순한 양상이다. 논리는 시간을, 시간이 있음(a)과 시간이 없음(-a)의 토톨로지로 해소해 버린다. 이러
한 시간은 논리에 의해 포섭된다. 시간의 문제를 논리적 토톨로지로 무화시켜 버릴 때 '시간'은 논리적 토톨로
지를 수행하는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여기에서 시간에 대한 논리의 명제는 항진명제이다. 또한
논리에 대한 시간 의 우위의 관점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우선 논리는 시간성(Zeitlichkeit)을 온전히 반영
하지 못한다. 베이트슨에 서 볼 수 있듯이, 논리는 인과관계를 반영하지 못한다. 논리는 인과관계를 포착하지
못한다.
둘째, 논리론은 현실세계가 연속적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시간론은 현실세계가 불연속적이라는 것을 전
제한다. 논리론에 있어서 현실세계는 연속적이기 때문에 분할할 수 있다. 시간론에 있어서 현실 세계는 불연속
적이기 때문에 분할할 수 없다.
죤 콥 (John B. Cobb, Jr.)의 종교 다원주의와 화이트헤드 (A. N. Whitehead)의 ‘하나’와 ‘여럿’ (the One
and the Many) 개념
정승원
1. 들어가는 말
종교 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두드러진 종교적, 사회적, 또한 사상적 현상이라 하겠다. 여러 종교 다원
주의자들은 이제 더 이상 한 종교가 절대성 혹은 우월성을 주장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외치고 있다. 지금 시
대에서는 화해, 상생, 공존 등의 개념이야 말로 참 종교적이고 박애적이며, 반대로 이것을 거스리는 종교나 사
람은 비종교적이며 잔인하고 비인간적으로 취급되고 있다. 심지어 위 개념들이 극히 합리적이거나 이상적이라
고 믿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기독교의 절대성을 전파하며 가르칠 것인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기독교의 절대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종교 다원주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
신학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라 생각한다. 이에 소고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 중 하나를
지적하여 그 종교 다원주의의 허구성을 밝히고자 한다.
그 문제는 바로 보편성(universal)과 개체성(particular) 관계이다. 한 종교를 한 개체로 보았을 때 여러 종교
들이 다 타당하다는 다원성을 어떠한 보편성으로 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여기 한 종교를 한 개체
로 본다는 것은 그 종교의 특수성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어느 종교가 참되고 거짓되냐는 차원이 아니라 다원
주의에서 주장하는 다원성(plurality)을 파헤치는 의미에서 한 종교를 한 개체로 본다는 것이다.
많은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다원성을 실재(reality)에 주어진 기정 사실로 믿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실재는 다
원성을 이루고 있는 가를 증명하는 일이 종교 다원주의의 가장 중요한 작업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종교 다원
주의자들은 피상적으로 여러 종교들을 비교하는 일과 각 종교들의 교리나 신앙을 다원주의에 맞추어 재해석하
는 데 그치고 있다. 사실 우선되어야 할 작업은 다원성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며, 또한 무슨 근거와 무
슨 보편적 진리를 가지고 다원성을 주장하느냐는 것이다. 또한 어떤 근거나 보편성을 이야기 할 때 그 근거가
맞다는 또 다른 근거는 무엇이며, 그 보편성이 참 보편성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다룰 때도 형이상학적 질문과 지식론적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보편성과 개체성 관계는 고대로부터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고민하여 왔던 또한 고민되어야 하는 주제일 것
이다. 아무리 보편성 혹은 보편적 원리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어떤 개체화 된 예(case)나 사
실(fact)이 없으면 그 보편성은 추상적이고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또한 어떤 주어진 개체성이나 사실을 설명
하기 위한 보편성이나 다른 개체성과 연결되기 위한 보편성이 결여된다면 그 개체성이나 사실 역시 추상적이고
무의미할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만약 다원성을 이루는 여러 개체들을 묶는 보편성에 다다르면 그 일반화된
보편성으로 인해 그 개체들의 차이가 없어진다. 즉 다원성이 파괴된다. 반대로 다원성에만 초점을 두게 되면
모든 사실들이나 경험을 설명하는 일체성 혹은 보편성이 파괴되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에 있어서도 이러한 보편성-개체성 관계가 핵심적 내용이 될 것이다. 특히 다원성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보편성 없이 다원성만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혹 보편성을 얻었다고 할 때 어떻게 각 종교들의
차이를 파괴하지 않으며 다원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각 종교는 다른 종교가 아닌 그 종교가
되기 위한 특수성을 다 지니고 있다. 비록 다른 종교들과 비슷한 요소들이 있다 할지라도 차별화하는 특
2 수성이 다 있게 마련
이다. 그렇다면 그 특수한 개체성을 계속 유지 하여야만 다원성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원성을 위해
그 개체성을 계속 주장할 때 어떻게 무관심(indifference)이나 상대주의(relativism)를 피할 수 있느냐는 것이
다. 다원성 유지를 위해 어떤 합의(consensus)를 세우는 것은 피하겠지만 어떤 보편성(합의가 아니라 할지라
도) 없이 어떻게 무관심이나 상대주의를 피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른 한편 무관심이나 상대주의를 피하기위
해 어떤 보편성을 구할 경우 어떻게 개체성을 유지할 것인가를 물을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직면함에 있어서
어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다른 종교들을 향하여 관용, 이해, 관심 등을 보이기 위해 개체성보다는 보편적인
일체성에 초점을 둔다. 반면에 어떤 자들은 다원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종교들과의 차이를 철저하게 유지하
려고 한다. 아무튼 어떻게 보편성과 개체성의 관계를 타당하게 설명하냐는 것이 모든 다원주의자들의 관건인
것이다. 그러나 정말 추상적이 아닌 보편성과 개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보편성을 찾는 경우로 레오나르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는 모든 종교들 간에 연관성을 ‘구원 중심주의’
(soteriocentrism)에서 찾는다.1) 즉, 모든 종교들은 구원에 최종 목표를 두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스위들러
는 어떤 “초 경험적 실재”(trans-empirical reality)를 전제하며, 이 실재속에 모든 종교들을 포함 시키려
한다.2) 폴 니터 (Paul Knitter)는 “해방” (liberation)에서 종교들의 보편성 내지는 공통점을 찾으려 한다.
그는 모든 인간 세계가 어떤 종류든 해방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여러 종교들도 방법은 달라도 그 해
방을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타종교간의 대화를 해방에 맞추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다.3) 죤 힉 (John Hick)은 神을 ‘궁극적 실재’ (ultimate reality)로 정의하며 모든 종교들이 이러한 궁극
적 실재를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神을 보편성의 근거로 삼고 있다.4) 인격적이든 비인격적이든 간에 그러
한 궁극적 실재 없이는 종교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궁극적 실재가 바로 종교 다원성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힉스가 말하는 궁극적, 초월적 실재란 칸트의 이중 세계 중 ‘본체적 세
계’(noumenal world)에 근거하여 추론한 것 뿐이다. 이렇게 많은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어떤 일반적 보편성을
찾아 각 종교들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서로 연결시킴으로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
성들이 추상적이 아니냐는 것이다. 즉 이 보편성들이란 기존의 여러 종교들(개체적 사실들)로부터 추론한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여러 종교들을 덮을 보편성이라 보기 힘든 것
이다.
개체성이나 특수성을 강조하는 후자의 경우로 우리는 죤 콥을 들수 있다. 콥은 이러한 문제를 잘 인지하고 있
다. 그는 여러 종교들간의 보편적 공통점을 찾는 것을 (그것이 궁극적이든 아니든 간에) 강하게 반대하고 나선
다. 그는 각 종교들의 특수성을 그대로 살려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개체성을 유지
할 수 있고 진정한 의미의 다원성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각 종교의 고유성(uniqueness)을 잃어버리면 종
교 다원주의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콥은 여러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찾는 공통점은 오히려 종
교의 고유성을 파괴함으로 그 존재까지 위협당한다고 주장한다.5) 다른 많은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보편성을 찾
는데 급급하다고 한다면 콥은 오히려 개체성을 지키려고 안달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콥은 어떻게 상대주
의나 무관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그 역시 각 종교들이 서로 상관이 없는 개체로 남아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죤 콥은 종교들의 다원성의 가능성을 과정철학에서 찾고 있다. 그는 종교 다원주의의 인식론적
(epistemological) 가능성과 형이상학적(metaphysical) 가능성을 과정 철학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콥은 화이
트헤드의 과정 철학에 근거하여 자신의 종교 다원주의를 발전시킨다. 특별히 화이트헤드의 유기적(organic) 철
학에 근거하여 자신의 종교 다원주의를 발전시킨다. 이에 본고에서 화이트헤드의 유기적 철학의 핵심인 ‘하나
와 여럿’(the one and the many) 문제를 살펴 봄으로 콥이 믿는 바와 같이 과정 철학이 진정 종교 다원주의의
인식론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근거가 되는지 또한 콥의 종교 다원주의는 보편성-개체성 문제가 해결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유기적 원자론(Organic atomism)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유기적 원자론”이라 불리우기도 한다.6) 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 할 것 없이 모
든 존재하는 것이 (세상, 인간, 하나님까지 포함해서) 더 이상 나누어 질 수 없는 “현실체”(actual
entities)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7) 이 현실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새로운 현실체들을 만들어
가며 과정 한다고 주장한다. 또 화이트헤드는 주장하길 과정철학은 어떤 단일적 실체(substance)를 가지고 세
상과 하나님을 설명하는 스피노자(Spinoza)의 철학과는 달리 다원적이라 한다.8) 또한 현실체는 자체적 창조성
이 결여 되어 있는 라이프니쯔(Leibniz)의 “단자”(monads)와도 다르다고 주장한다.9) 과정철학의 현실체는
변하지 않는 실체이고 자창적(self-creative)이며,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현실체는
과정 됨에 있어서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잃지 않으며 동시에 다른 현실체들과 관계하며 다양성
(self-diversity)을 유지한다고 한다.10) 여기서 콥은 종교 다원주의 원리를 발견 채택한다. 즉 그는 종교들이
자기 정체성(혹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종교와 계속적인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 그 현실체로만 구
성된 것이라면 개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보편성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원리내지는 철학적 근거를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유기적 원자론에서 찾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현실체로 구성되어 있고, 사람 역시 현실체들
로 만들어 졌고, 그 사람들로 구성된 종교 역시 현실체들의 특징을 띠고 있다고 콥은 믿는 것이다. 그러나 설
사 사람이 현실체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어떻게 종교가 현실체의 특징을 지닐 수 있으며, 종교들간의 관계가 현
실체의 원리대로 움직여 지며, 더 나아가 종교 다원주의가 현실체의 과정에 근거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현실체들이 세상을, 인간을, 신을, 또한 종교를 구성한다는 것인가? 과정 철학자들은 주장하기
를 현실체들은 일종의 경험의 부스러기(drops of experiences)라고 한다.11) 즉 죽은 요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체 (actual entities)를 “현실 사건”(actual occasions)이라고도 한다. 이것
들이 서로 연결되어 시간적 과정을 이루는데 이것을 외부적 과정(external process)이라 하고, 또 하나 내부적
과정(internal process)이 있는데 이것을 “합생”(合生, concrescence)이라 한다. 이것은 현실체들 자체속에
생기는 것으로 외부에는 비쳐지지 않는 비시간적(nontemporal) 순간적 과정이다. 그것은 구체화 된다는 뜻으로
서 모든 관련된 현실체들은 서로 엉크러져 새로운 한 현실체가 생성되는 마지막 순간을 의미한다.12)
그러면 어떻게 현실체들이 작동하는 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콥 자신이 이것을 과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
명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초록색 넥타이가 고등색이 길 바 라며 그것을 바라볼 때, 우리의 감각적 경험(sense
experience)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역할은 아니다. 그 넥타이와 우리 사이의 공간을
차지하는 어떤 “초록이라는 것”(green thing)의 경험이 있다고 한다. 또한 그 넥타이 안에 있는 분자들로부
터 나오는 빛의 줄기가 우리의 눈에 들어오므로 눈의 세포를 자극하고 후대부엽(occipital lobe)으로 연결이
된다. 이 때가 되어서야 그 분자들이 위치한 공간으로 투영된 초록의 조각을 우리는 경험한다고 한다. 콥에
의하면 우리가 초록색 넥타이를 보는 순간에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한다고 한다. 그 사건 사건 하나에 인과적
(causal)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눈 속에 있는 사건들은 넥타이와 눈 사이의 사건들을 따르는데 그전에 그
사건들은 넥타이에 있는 분자 사건들을 따랐던 것이라고 한다. 눈 속의 사건은 신경의 사건으로 연결되고 신경
의 사건은 뇌 안의 사건으로 연결되고 이 뇌의 사건들이 인간 의식의 사건으로 연결된다고 한다. 이렇게 이전
사건들을 느끼거나 (feeling) 감지 혹은 포착(prehension)하는 순간적 경험을 “물질적 감지”(physical
prehension)라고 한다. 한편 이러한 과정에서 그 수 많은 사건에 존재하는 질적인 것이(quality) 있고 이 많은
사건들의 배열이 소위 초록 자체(greenness)로 변하는데 이 과정을 정신적 작용이라고 한다. 또한 그 사건들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요소, 즉 초록 자체(greenness)라 할 수 있는 것을 신생(新生, novelty)이라고 한다.13)
이러한 현실체들의 물질적 역할과 정신적 역할에 맞추어 모든 존재하는 것은 (神 도 포함하여) “물질적 극”
(physical pole) 과 “정신적 극”(mental pole)의 양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한편 물질적으로 느끼지 않
는 요소들, 즉 어떤 형상(form), 관계(relation), 질적인 것(quality)을 “영원한 객체”(eternal objects)라
하는데, 이것은 현실체가 아니라 어떤 경험에서도 실현될 “순수한 가능성”이라 한다. 어떤 물질화된 것과 상
관 없이 “영원한 객체”들이 느껴지는 것(enterntain)을 “관념적 감지”(conceptual prehension)라고 한다.
또한 위의 콥의 예에 있어서 우리가 그 초록색 넥타이가 고등색이길 바란다면 그것은 어떤 과거 경우
(occasion)에 있었던 고등색 대상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인데, 이 경험은 물질적 감지(feeling)이지만 그 고등
색 자체(brownness)의 질은 이전 경우의 정신적 경험인 것이다. 이러한 감지를 “혼성 감지”(hybrid
prehension)라 한다.14)
이러한 “현실체” 혹은 “현실 사건”(occasion)에 있어서 무엇이 되려는 것을 “주관적 겨냥”(subjective
aim) 이라고 한다. 또한 초록색 넥타이를 보는 경우같이 어떤 경우에는 최후의 요소들의 종합과 그 종합의 또
다른 종합과 또 다른 종합 등등으로 연결되는데 그 마지막 종합을 “만족”(satisfaction)이라고 한다. 여기까
지의 사건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고 한다.15)
또 한가지 강조해야 할 것은 현실체들은 자창적(self-creative)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의 결과를 결정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체의 과정에 있어서 그 주관적 겨냥의 시작은 神에게서 개념적으로(conceptually)
성취되는 질서로부터 부여 받는다고 한다. 이것을 “최초 겨냥”(initial aim) 이라고 한다.16) 신 역시 양극
성(dipolarity)를 지니고 있는데 물질적 극을 “결말적 성품”(consequent nature)이라 하고 정신적 극을 “원
초적 성품”(primordial nature)이라고 한다. 결말적 성품은 神의 본질(nature)의 일치를 위한 “세상의 현실
화”(the realization of the actual world)를 의미하고 그것은 의식적 (conscious)이라고 한다. 한편 원초적
성품은 개념적(conceptual)이고, 현실적으로 부족하고(actually deficient), 비의식적이라 한다. 이런 양극성
의 神은 또한 양극성의 세상과 상호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고 한다. 神의 원초적 성품은 모든 현실화 될 수 있
는 가능성 자체를 말하는 것이고 신의 결말적 성품은 현실화 된 세상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神과 세상은 똑같이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서로의 존재를 위해 신은 세상을, 세상은 神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17)
3. 화이트헤드의 ‘창조성’ (creativity) 개념과 ‘하나와 여럿’ (the one and the many) 개념
화이트헤드의 ‘하나’와 ‘여럿’ 개념은 그의 과정 철학의 요약이라고 볼 수도 있다. 위에서 논한 그의 유기
적 원자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현실체’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으면서 다
른 현실체를 생성하고 과정 발전해 나가는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기도 하다. 바로 이 화이트헤드의 ‘창조
성’ 개념과 ‘하나와 여럿’개념이 죤 콥의 종교 다원주의의 인식론적 근거와 형이상학적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개체성과 보편성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3-1. 창조성(creativity)
화이트헤드의 ‘하나’와 ‘여럿’ 개념을 설명하기 전에 반드시 다루어야 할 개념이 그의 ‘창조성’
(creativity)이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궁극적 원리”(the ultimate principle)라고 한다. 그는 주장하기
를, “창조성은 여럿이 하나의 현실체가 되게 하는 궁극적 원리다” 라고 한다.18) ‘하나’와 ‘여럿’ 관계,
즉 개체성과 보편성의 관계에 있어서 화이트헤드는 또 다른 원리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저절로 개체성과 보
편성이 서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처음 부터 전통적인 개체성, 보편성 개념을 부정하고
그가 새로 짠 형이상학적 틀에서 시작한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이 현실체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개체성과 보편성 역시 현실체들 가운데서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사용하는
개체성과 보편성, 그리고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거부한다.19) 즉 ‘존재’(being)라는 개념을 부인하고 그 대
신 ‘되어가는 것’(becoming)을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으로 삼는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정체된 존재는 없다
는 것이다. 어떤 변치 않는 정수적(essential) 존재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being'이 아니라 'becoming'이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인 것이다. 그래서 변치않는 어떤 보편적 원리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 becoming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창조성과 더불어 현실체들이 끊임 없이 과정중
에 있고 모든 현실체들은 새로운 것이 생성됨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주장하기를 “여럿은 하나가
되고 또한 그 여럿에 하나가 더 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현실체들은 접합적 일치성으로 되어지는 과정에서
이접적으로 ‘여럿’인 것이다” (The many become one, and are increased by one. In their natures,
entities are disjunctively 'many' in process of passage into conjunctive unity)라고 말했다.20) 많은 현
실체들이 과정을 거쳐 하나가 되는 데 결과적으로 현실체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접적으로
(disjunctively) 많게 되고 (즉 다원적이 되고), 접합적으로(conjunctively) 하나라는 것이다 (즉 일종의 보편
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기적 특성을 근거로 개체성과 보편성 그리고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없애려는 것이다. 한 현실체가 흐
르는 시간적 과정에서 보편적이 되기도 하고 개체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과정 철학의 유기적 원자론에서
는 그 개체성과 보편성 혹은 주체와 객체는 시간적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흐름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럿’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바로 창조성(creativity)이 긍극적 원 리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창조성은 일종의 보편적 개념이지만 그 자체는 우리가 알 수 없고
반드시 현실체들을 통하여만 그 특성이나 역할이 나타난다고 한다.21)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神이 궁극적 실재가 아니고 창조성이 궁극적이라고 주장한다. 단지 神은 창조성의 “無時的 偶有性”
(non-temporal accident)이라고 한다.22) 화이트헤드는 창조성을 모든 현실체들이 지니고 있는 자창성으로 설
명하기도 한다. 또한 神도 이 자창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 자창성이란 현실체들이 (神도 포함하여) 다른
모든 현실체들 (神 자신도 포함하여)을 초월하는 특징을 의미하기도 한다.23)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창조성에 대한 주장은 얼뜻 들어도 모순적이라 할 수 있다. 창조성이란 모든 현실체들이
(神도 포함하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자창성이면서도 자신들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논리는 A이면서 또한 ∼A도
된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의도하는 바는 이것이 아니다.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말하
는 궁극적 실재와 (혹은 神) 그로 인한 우유성(accident)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즉 궁극적 실재는 어떤
정수적(essential) 실체(substance)가 {예를 들어, 스피노자의 단일론적 神이나 헤겔이 말하는 “절대적 정
신”(Geist) 같은 실체} 아니라, 현실체를 통하여서만 나타나고 알 수 있는 실재라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
면, 계속 과정속에 있는 궁극적 실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조성인 것이다. 이 창조성이 바로 ‘여럿’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 일종의 보편적 원리가 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이 창조성은 여러 현실체 속에 내재
해 있는 자창성(self-creativity)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바로 개체성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현실체의 다원성(plurality)을 가능케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체의 다원성이 가능하다는 것은 단
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현실체 차원에서의 이야기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실재(reality)의 모든 현상
들(종교를 포함하여)의 다원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3-2. ‘하나’와 ‘여럿’ (the one and the many)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화이트헤드는 전통적 개념의 보편성과 개체성의 관계를 부정한다. 그 이유를 다
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 현실체는 보편적인 것(universals)으로 전혀 설명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다른 현실체들이 어떠한 한 현실
체의 묘사(description)에 이미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보편성’(universal)이라는 것은 그것이
다른 모든 것과 다르다는 차원에서 ‘개체’가 되는 것이요; 소위 ‘개체성’(particular)이라고 하는 것은 그
것이 다른 현실체의 구성(constititution)에 들어가는 차원에서 ‘보편성’이 된다.24)
화이트헤드는 이런식으로 현실체의 유기적 관계를 정립하여 전통적 ‘보편성’과 ‘개체성’의 구분을 없애려
하고 있다. 각 현실체들은 그들의 유기적 그리고 자창적 특징을 위해서 스스로가 보편성과 개체성의 역할을 하
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정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철학은 다원적이라 할 때, 그 다원성은 숫자적 개념이 아
니라 바로 유기적 개념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실체들의] 이합
(disjunction)에서 접합(conjunction)으로 되는 과정에서 바로 이 이합에 주어지지 아니하는 새로운 현실체가
생겨난다. 이 새로운 한 현실체는 즉시로 자신이 발견하는 ‘여럿’의 합성(togetherness)이 되고 또한 동시에
자신이 떠나는 이합적인 ‘여럿’ 중 한 개체가 된다.”25) 이것이 바로 이미 언급한 “하나가 여럿이 되고 동
시에 하나가 든다”라는 말의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다. 현실체의 유기적 과정에 있어서 그 ‘보편성’은 주어
진 어떤 단정성(definiteness)의 형상(form)이 되고, ‘개체성’은 주어진 사실들의 궁극적 요인이 되는 것이
다.26) 이러한 과정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실재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럿’과 ‘하나’의 유기적 관계를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즉 현실체들은 주
체적으로(subjectively)는 영구히 사라지지만 객체적으로는 (objectively) 불멸한다는 것이다. 현실성
(actuality)은 비록 “주관적 직속”(subjective immediacy)을 잃어 버리지만 객관성(objectivity)은 얻는다고
한다.27)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새로운 현실체가 생성되면 그 생성에 쓰여진 다른 현실체들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니고 어떤 객체적 자료(data)로써 쓰여진다는 것이다. 모든 현실체들은 객관적으로 불멸하기 때문에 새로운
현실체를 위한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현실체들은 새로운 현실체를 생성할 때 주체로
서의 역할을 하지만 그 새로운 현실체가 생성되는 순간 즉시 주체적 역할을 잃어 버리고 대신 객관성을 영원히
간직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체들의 다양성(multiplicity) 내지는 다원성(plurality)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체들의 ‘하나’와 ‘여럿’ 관계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이트헤드가 주장하는 과정 철학
의 두가지 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원리는 “존재론적 원리”(ontological principle)이다. 화이트헤
드에 따르면 존재론적 원리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분명 어떤 현실체에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과거의 한 현실체에서 전가된 것 아니면 바로 ‘합생’(concrescence)이 일어나는 그 현실체의 ‘주관적 겨
냥’ (subjective aim)에 속해 있다”는 원리를 말한다.28) 이것은 바로 모든 현실체들이 보편성을 가지고 다
른 현실체들과 일치성을 이루는 원리를 의미한다. 즉 보편성을 유지하는 원리라 할 수 있다. 둘째 원리로 “상
대 원리” (principle of relativity)를 이야기 한다. 이 원리는 “우주에 있는 모든 항목(item)은 -모든 다른
현실체를 포함해서- 하나의 현실체를 이룸에 있어서 구성 요인이 된다”는 원리이다.29) 이것은 바로 ‘존재’
(being)라는 것은 ‘되어지는 것’(becoming)의 가능성에 불과하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상대
원리는 “존재론적 원리”가 극단적 단일론(monism)에 빠지는 것을 방지해 준다고 말한다.30) 바로 이 상대 원
리는 개체성을 유지하는 원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두가지 원리는 일반성과 개체성을 동시에 가능하게 만드
는 이중적 원리가 되는 것이다.
3-3. 화이트헤드의 ‘하나’와 ‘여럿’ 개념에 관한 비판적 분석
우선 화이트헤드의 ‘하나’와 ‘여럿’ 개념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초월성’ 문제에 있다. 그는 ‘보편
성,’ ‘개체성,’ 그리고 ‘창조성’을 그 ‘하나’와 ‘여럿’을 구성하는 현실체들과 같은 차원에서 놓고
논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같은 차원에서 논하지만 화이트헤드 역시 ‘초월성’의 필요를 인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주장하기를 “모든 현실체는 -神을 포함해서- 현실체가 특징지어 주는 창조성에 의해서
초월되는 피조물이다”라고 말한다.31) 바로 모든 현실체들은 창조성에 의해서 ‘자초월적’
(self-transcendent)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창조성은 반드시 현실체에 의해서 특징지어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성 자체는 현실체를 초월하지 못하면서 다른 현실체를 초월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자가
당착(自家撞着)적이라 하겠다. 과정 철학에서는 현실체라는 것은 바로 실재(reality)가 양극성으로 이룬 이유
요, 또한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성은 바로 현실체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창조성
은 진정한 의미에서 초월적이 아니라 단지 현실체의 어떤 특성 내지는 어떤 국면(aspect)에 불과하다고 하겠
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체의 이러한 특징을 自초월성(self-transcendence)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초월성
이 진정한 의미의 초월성이라 하기 힘들다.
화이트헤드는 ‘여럿’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 있어서 그 ‘여럿’의 自초월성은 ‘하나’가 됨에 있어서
주체로서의 존재는 없어진다고 주장한다. 혹, 이러한 ‘자초월성’을 ‘객관화’(objectification)라는 개념으
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객관화는 결코 자초월적이 될 수 없다. ‘자초월성’이란 주체(subject)
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주체는 남아 있지 않고 합생(concrescence)되는 순간에 영원히 없어진다고 하는 것이
과정철학의 핵심인데 어떻게 그렇게 순간에 없어지는 주체가 스스로 초월성을 이룰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혹, 그 초월성은 그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주장 한다면 그러한 초월성은 초월적이 아니라 오히려 내재적
(immanentistic)라고 하겠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주체와 초월성의 관계를 인지한다. 순간적으로 없어지는 주체에 초월성을 부여하려는 의
도가 그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화이트헤드의 ‘하나’와 ‘여럿’의 개념에 관해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
은 것이다. 그는 초월성을 자신의 형이상학에 도입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의 주체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바로
“superject”이다.32) 이것은 주체(subject)와 다른 개념의 초월적 주체이다. 이 ‘초주체’를 화이트헤드는
다 음과 설명한다. “현실체는 ‘되어지는’(becoming) 과정에서 자신의 직속성(immediacy)을 다스리는 주체
(subject)가 되는 동시에 또한 객관적 불멸성의 역할을 수행하는 원자적 피조물을 의미하는 초주체가 된다.”
33) 이것은 현실체를 초월적 주체로 정의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단지 개념적으로만 가능한 이야기이지 논리
적으로 그리고 실재적으로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순간적으로 영원히 없어지는 주체에 어떻게 초월성을 부여
할 수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초주체’라는 모순적 개념을 도입한 후에는 그것에 상응하는 또 다른 여러 모순
적 개념들만 이어질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이러한 자가당착적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형이상학의 기본 정신은 어떤 정체된 실
체적(substantial) 존재(being)란 없고 단지 ‘되어지는 것’ 혹은 ‘생성’(becoming)만 있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초월적이라는 개념도 어떤 정체된 개념이 아니라 ‘되어지는’ 가운데 혹은 과정되는 가운
데서 정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초월성은 필요하기 한데 그것을 존재(being)의 개념으로 정의하게 되면 그것에
따르는 실체적 존재를 인정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과정 철학이 한꺼번에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후랭크 커패트맄(Frank Kirkpatrick)은 이것과 비슷한 지적을 한다. 그는 지적하기를, “‘되어지는’ 과정이
란 단지 더 근본적인 ‘존재들’(beings)의 기본적 실재 개념으로부터 추론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34)
다르게 표현하면, ‘되어지는’(becoming) 개념도 일단은 정체된 존재(being)에서부터 주어진다는 것이다. 존
재의 개념 없이는 ‘되어지는’ 개념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비록 커패트맄의 이러한 비판은 그의 실존주의
철학에 근거하는 것이지만 화이트헤드의 ‘되어지는’ 개념안의 주체 개념의 모순성을 어느 정도 잘 밝히고 있
다고 하겠다.
제임스 마노이아(James Mannoia)는 새로운 각도에서 화이트헤드의 ‘되어지는 것’ (becoming)의 개념에 관해
비판한다. 그는 화이트헤드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면서 비판한다:
‘어떻게 한 현실체가 되느냐(becomes)는 바로 무엇이 현실체 이냐(is)를 구성한다(constitutes)’[PR 23]는
주장에서 화이트헤드는 불행하게도 동사 ‘구성한다’는 말을 사용함으로 그의 주장을 애매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구성하다’(to constitute)라는 동사를 ‘이다’(to be) 대신에 쓰고 있다. 무엇이 현실체를 현실적으
로 만드느냐를 설명하는 이런 중요한 글에서 ‘과정은 그 현실체를 만든다(create)’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과정은 그 현실체 이다(is)’라는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35)
여기 마노이아는 어떻게 과거 현실체들이(자료들이) 지금 현실체에 주어지느냐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에 따르면 그 원인은 과거 현실체들 자체가 아니면 神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거 현실체들은 주체로서의
(subjective) 존재는 순간적으로 없어지기 때문 에 결국은 神이 그 원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화이트
헤드에 따르면 神도 과정 원리에 예외일 수가 없다. 그것은 神도 어떤 ‘존재이다’(is)가 아니라 어떤 ‘존재
가 되어야 한다’(becomes)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되어지는’ 神이 과거 현실체들이 현재에 주어지는 원
인적 역할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고 마노이아는 잘 지적한다. 그러므로 神은
어떤 현실체가 아니라 인격체(person)이어야만 한다고 한다.36) 부르스 디마리스트 (Bruce Demarest) 역시 비
슷한 비판을 가한다. 그는 지적하기를 “느끼거나 경험하는 주체, 자신, 혹은 ‘나’를 떠나서 어떤 느낌 혹은
경험이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또한 존재하게 되는(comes to be) 어떤 존재(being)가 없이 어떻게 ‘되어지는
것’이 가능한가?” 라고 말한다.37) 디마리스트가 지적하는 것은 과정 철학에 있어서의 주체(subject)란 순간
적으로 없어지는 것인데 어떻게 어떤 주체없이 무엇이 되는 것(becoming)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지적할 수 있는 또 다른 문제는 바로 ‘합성’ (concrescence) 개념 문제이다. 과정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이 합성은 의식할 수도 없는 순간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비록 화이트헤드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현실체들의 생성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만 어떻게 현실체 자체가 존재하게 되는가를 설명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냥 그러한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비합리적(irrational)이라
고 하겠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증명할 수 없는 현실체들의 존재들을 단지 이성에 근거한(rational) 원리를
가지고 설명하려고 한다. 그 증명할 수 없는 현실체들은 비합리적 개체성을 띠고 있고, 그 이성에 근거한 원리
는 추상적 보편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알 수 없는 비합리성과 이성에 근거한 합리성이 동시에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모순의 정점은 바로 ‘합성’의 개념에서 발견된
다. 현실체들이 다른 현실체를 생성하는 순간적 사건이 ‘합성’이다. 물론 어떤 과정에 있어서 변화되는 혹은
생성되는 단계나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는 당연히 합리적으로 그런 개념을 도입한다. 그
러나 화이트헤드는 어떻게 다른 현실체들이 한 현실체를 생성하느냐를 설명하지 못한다. 즉 그 ‘합성’의 순
간이 어떤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설명되어질 수 없는 순간적 발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 수도 없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비합리적(irrational)인 발상이다. 어떻게 한 사실(합성의 사실)에 합리성
(rationality)과 비합리성(irrationality)이 동시에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은 자가당착적인 것이다. 현실체들은
항상 ‘되어진다’(become)고 말하면서 합성은 ‘비시간적’(non-temporal), 즉 순간적이라고 한다. 만약 합
성이 비시간적이라 한다면 그것은 정수적(essential)이라는 말인가? 과정 철학에서는 어떤 정수적 실체는 존재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완전한 ‘되어짐’(becoming)
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되어짐’을 초월하는 그 ‘합성’의 개념을 도
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합성’은 정수적(essential)이기에는 너무 순간적(non-temporal)이라고 한
다면 (화이트헤드 자신은 이렇게 믿는 것 같다) 그것은 단지 개념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지 실재에 있어서는
불가능한 모순에 불과하고 단지 비합리성 (신념)을 구걸하고 있는 것 뿐이다.
또한 화이트헤드의 ‘하나와 여럿’의 또 다른 문제는 바로 ‘양극성’ 문제이다. 이것
12 은 임마누엘 칸트의 이중 세계
(noumena and phenomena)와 별 다를 바가 없다. 현실체들의 자창적 과정은 그들의 ‘객관적 불멸성’으로 인해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그 ‘객관적 불멸성’은 바로 神의 원초적 성품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神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바로 세상(현실체들의 객관적 집합)이라고 한다. 이처럼 과정 철학은 진정한 의미에서
초월을 말하지 않고 단지 양극성이 서로를 위한 초월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 서로가 초월적 근거가 되는 변증
법적 틀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초월성을 발견할 수 없다. 화이트헤드의 ‘개념적 극’(mental pole)은 [神에 있
어서는 원초적 성품(primordial nature)] 칸트의 본체적 세계(noumenal world)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순수한
가능성 (pure potential)만이 존재하는 그 개념적 세계는 사실은 현상 세계(phenomenal world) [화이트헤드에
게 있어서는 ‘물질적 극’]에 들어오기 까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이다. 이렇게 알 수 없는 세계는 단지
필요에 따라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지 그런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세계이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관하여 지적하기를 그는 단지 데카르트의 이원론
을 피하려는 칸트를 따를 뿐이며, 단지 알 수 없는 세계로 뛰어 들어 (leap) 더 깊은 이원론에 빠질 뿐이라고
말한다.38) 물론 화이트헤드는 주장하기를 자신의 철학의 기본 원리는 칸트의 원리처럼 주관성(subjectivity)
에 있지 않다고 한다. 기존의 인식론적 통로는 객관성(objectivity)에서 주관성(subjectivity)였지만, 칸트는
이것을 주관성에서 객관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 변혁”(Copernican revolution)을 화
이트헤드는 다시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 다시 바꾸었다. 즉 현실체들의 객관적 불멸성으로 말미암아 주관성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화이트헤드는 그의 과정철학의 틀에 맞추어 주체와 객체는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간적 단계에 존재한다고 한다. 즉 정체된 주체 혹은 주체성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하는 과정
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적 유기론 역시 칸트의 이원론을 넘어선 것은 아니다. 단지 개념만
바꾸었을 뿐이지 그 철학적 틀은 다를바가 없다.
결론적으로 화이트헤드의 ‘하나’와 ‘여럿’ 개념은 전혀 보편성과 개체성의 철학적 문제를 풀지 못한다. 단
지 유기적 개념으로 하나가 여럿이 되고 여럿이 하나가 된다는 추상적 원리만 제공할 뿐이다. 현실체들이 어떻
게 존재하게 되었고 어떻게 다른 현실체를 생성하는지 설명할 수도 없는 가운데 그 현실체들이 모든 존재하는
실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이론인 것이다. 만약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요소이며 우리가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 논하고 그것에 관한 원리들을 규정한다는 자 체가 모순인 것이다. 실로 화이
트헤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실재(reality)에 있어서 보편성과 개체성의 관계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다. 그
문제를 풀어야 그 실재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것이다. 반틸은 보편성과 개체성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
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개체들(예를 들어, 해, 별, 사람, 나무, 짐승, 중성자, 사랑, 웃음 등등의 존재들)
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개체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더 나아가 개체들이 서로 연결
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원리로부터 추상화
(abstraction)된 추상적 개체에 불과하지 않는가? 또한 반대로 어떻게 개체들을 파괴하지 않고 보편성 혹은 일
치성을 얻어 낼 수 있
13 는가? 우리는 단지 개체들을 어떤 개념속에 집어 넣고 일반화 시킴으로 보편성을 얻지 않는가? 보편성
에 들어간 개체들은 그 개체성을 잃게 마련이다. 그런 보편성은 추상적 보편성에 불과하지 않는가?39) 반틸은
‘하나’와 ‘여럿’ 문제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야 풀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 삼위일체 하나님에
게는 보편성과 개체성의 관계가 추상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구체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에게 주어진 실재에 있어서 ‘하나’와 ‘여럿’ 문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우리는 바로 알 수
가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실재속에는 한 개체가 다른 개체의 궁극성이 될 수 없고 단지 하나님의 피
조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한다.40) 스코트 올리핀트 (Scott Oliphint)는 반틸의 입장에서 주장하기를 “우리
의 임무는 더 이상 다양성 [개체성]을 일반화 한다든지 일치성[보편성]을 다양화 시키는 것일 수 없다. 우리의
임무는 단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등한 궁극성안에서 주어진 피조 세계의 풍요로움을 이해하려는 것 뿐이다”
라고 한다.41)
화이트헤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실재가 하나님이 지으신 실재임을 믿지않으므로 그 궁극성을 삼위일체 하나님에
게 찾으려 하지 않고 피조 세계 내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궁극성을 찾는 데 있어서 단지
인간이 이성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이성이 닿는 것이라면 궁극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이성으로 알 수 없는 ‘현실체’라는 것을 추출하고 우리가 닿을 수
없는 비시간적 개념인 ‘합성’(concrescence)을 추론하고 그것에 의존하여 실재를 해석하려 했던 것이다. 그
래서 그 현실체들의 과정 속에서 ‘여럿’이 ‘하나’가 되고 그 ‘여럿’은 하나가 더 늘게 되었다고 주장한
다. 이러한 모순적이 발상에서 결국 얻는 것은 추상화된 개념들 뿐이다. 그리고 그 추상화 된 개념 뒤에는 인
간 이성의 자율성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4. 죤 콥의 종교 다원주의
그러면 콥은 어떻게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하나’와 ‘여럿’ 개념을 가지고 그의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
며 발전시키는 가를 살펴봐야 하겠다.42) 먼저 콥은 종교를 “존재의 구조”(structures of existence)로 정의
한다. 즉 종교들이 형성되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요소들 (사람, 문화, 역사, 사건, 지형, 전통, 인간 관
계 등등)의 종합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의 과정은 결국 현실체들(actual entities)
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이므로 종교의 발전 과정 역시 현실체들의 특성과 원리대로 발전되어 왔다는 것
이다. 화이트헤드가 주장한 현실체들의 유기적 과정, 즉 현실체들이 다른 새로운 것으로 과정될 때 자신의 정
체가 없어지지 않고(objectively immortal) 다른 현실체들과 연결되어 새로운 현실체가 나온다는 ‘하나’와
‘여럿’의 원리를 종교에 적용하여 다른 종교들이 한 종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종교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더 나은 새로운 종교의 모습으로 변화 될 것이라는 것이다. 콥은 또한 한 현실체가 생성되는 과정에 있어
서 과거 현실체들에 神의 원초적 성품이 ‘최초 겨냥’ (initial aim)을 부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종교들의
변혁되는 과정에 최초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 주장한다. 또한 ‘여럿’이 ‘하나’가 되는 동시에 그 여럿의
정체성은 잃지 않고 하나가 더해지는 것처럼 각 다른 종교들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종교간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 더 풍요롭고 깊이 있는 종교들로 계속 거듭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 현실체들의 ‘하나’와 ‘여
럿’의 상관 관계에서 ‘창조성’(creativity)이 궁극적 역할을 하듯이 ‘창조적 변혁’의 상징인 그리스도가
그 과정에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다.
콥은 믿기를 “기독교 존재 구조”(the structure of Christian existence)는 예수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했다
고 한다.44) 또한 하나의 구조(structure)로서 기독교는 그 자체 의 고유성을 상실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의 개체로서 다른 종교들과 함께 변화되는 과정에 한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종
교 다원주의자들과는 달리 콥은 타 종교들과의 대화에서 어떤 공동의 장(場)을 찾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
러므로 기독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종교들도 자신의 고유성을 간직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주장들은 바로 현실체들의 유기적 과정에 대한 콥 자신의 신념에서 오는 것이다. 종교란
사람, 신념, 신앙, 전통, 사회적 공감, 관념 등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면 이러한 요소들은 현실체들로 이루어 졌
다고 믿기 때문에 결국 종교 역시 현실체들의 과정 원리에 의해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종교가 이
러한 과정 원리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면 역으로 과정 철학은 허구로 남게 될 것이다. 즉 정신적이든 물질적
이든 모든 존재하는 것은 현실체들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콥은 과정 철학에 근거하여 종교 다원
성에 있어서 어떤 초월적 보편성보다는 개체들을 이루고 있는 각 종교들이 유기적 과정속에 보편성을 스스로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위의 화이트헤드에 관한 지적이 콥의 주장에도 바로 적용이 될 것이다.
콥은 다른 종교 다원주의자들과는 다르게 다원성을 위해 종교들의 개체성 혹은 특수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역시 상대주의나 무관심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어떤 보편성을 찾고 있다. 바로 과정 실재의 유기적이고 자창적인
보편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성이 참된 보편성인가? 이것은 단지 현실체라는 꾸며진 개체로부터 추상화된
보편성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타 종교와 대화에 있어서 콥의 이러한 과정철학에 근거한 보편성
과 개체성 관계를 다른 종교가 받아 들일지 의문이다. 만약에 다른 종교에서 받아들이든 받지 않든간에 종교
다원성이 과정 실재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종교 다원주의 정신에 기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그것은 관용이
아니라 종교 다원주의를 미끼로 과정 실재에 관한 자신의 신앙을 주장하는 것 뿐이다.
콥은 주장하길 “총체적 실재”(full complexity of reality) 안에서는 불교의‘無’와 하나님은 조화될 수있
다고 한다.45) 콥 자신은 어떤 공동의 장(common ground)을 거부한다고 하지만 그가 말하는 총체적 실재란 모
든 종교들을 다 집어 넣은 ‘공동의 장’이 아니겠는가? 즉 콥은 자신의 과정 실재(process reality)에 대한
신념에 근거하여 각 종교의 개체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며 공동의 장 내지는 연관성을 부인하지만 그 총체적 실
재, 즉 과정 실재 역시 공동의 장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다른 종교들도 자신들의 실재 (reality)가 진짜 실
재라고 믿는 것이다. 믿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개체성 즉, 그 종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결국 콥의
종교 다원주의도 상대주의(relativism)를 벗어 나지 못하고 있다. 즉 다른 종교들은 나름대로 자기들의 신앙의
길을 가고, 콥 역시 나름대로 과정 신념을 갖고 자신의 신앙의 길을 가는 것 뿐이다. 이것은 콥이 내세운 과정
철학적 보편성은 결국 추상적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가 비록 모든 종교들을 보편성의 예(instance or fact)
로 삼고 싶었지만 사실 종교는 콥이 생각하듯이 묵묵히 과정 실재속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진리라고 믿
는 바를 서로 내세우는 개체들인 것이다. 이러한 종교들의 특징은 주어진 실재가 과정 실재라고 믿는 콥 자신
의 주장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콥은 주장하길 다른 종교들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진리(the universal truth)를 음미함으로 변화되는 기독교인
이야 말로 제국주의 사상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진리를 선포할 수있다고 말한다.46) 그러나 그
보편적 진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불변하는 초월적 진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콥 자신은 어떤 공통
적이고 일반적인 것을 찾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주장면서 보편적 진리를 주장하고 있다. 물론 콥은 과정 철학
에 근거한 원리들이 다른 종교에서 적용된다고 믿고 있다. 과정 철학에서는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고 모든 것
은 과정 중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과정 실재를 신봉하는 콥은 그러한 과정 원리는 변하지 않고 또한 모든 실
재적 사실에 적용된다고 믿는다. 즉 모든 것은 변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런
의미로 콥은 다른 종교에서도 보편적 진리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 기독교가 주장하는 진
리는 보편적 진리가 아니고,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 기독교도 보편적 진리(과정 철학)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은 자가당착적 발상이라 하겠다.
콥은 과정 원리가 보편적 진리이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계시가 보편적 진리이라 주장하면 누구의 진리
가 진짜이고 보편적인 원리인가? 결국 서로의 진리가 진짜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들간에는 서로 대치되
는 반위적 모습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각 종교들의 개체성을 다 포기하고 새로운 종교를 하나
만들어 그것에 연합하는 길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종교 다원성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콥은 그
“원초적 겨냥”(initial aim)으로 상징되는 ‘로고스’(logos) 혹은 ‘소피아’ (sophia)는 어디에서도 발견
되기 때문에 인간 됨 자체가(humanity) 종교 대화의 필수적이며 충분한 근거(basis)라고 한다.47) 이 주장은
인간은 바로 그 원초적 겨냥으로부터 시작된 과정의 결과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가 과정 원
리에 의한 종교 대화의 충분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콥 자신이 처음에 거부한 공동의 장이며, 다
른 종교들로 하여금 자신의 과정 실재를 믿으라는 것 뿐이다.
콥의 종교 다원주의 사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타종교간의 대화를 강조하는 것인데, 일단 여러 종교들이 대화
의 테이블에 오는 것이 우선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대화를 통하여 분명 서로 모르는 것을 발견하고 서로
더 나은 모습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대화 중 “판단 보류”(a provisional bracketing of
judgment)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48) 그러면 바라는 결과가 온다는 것이다. 이런 임의적 주장은 역시
그의 과정철학의 신념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대화 뒤에는 어떤 변형이 오기 마련인데, 그런 변
형은 상대방이 갖고 있는 새로운 진리를 진지하게 듣는데서 오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우
리는 콥이 말하는 새로운 진리는 무엇이고 진지하게 듣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진리란 과
정 실재를 의미하고 진지하게 듣는 것이란 그 과정(process)을 지켜 보라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과정 철학에
근거한 이러한 임의적이고 인위적인 발상은 결코 콥 자신이 원하는대로 종교 다원주의나 타 종교간의 대화를
끌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지적한대로 종교 다원주의가 정당화 되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들의 개체성이 주어져야 하며, 또한 상대주
의에 빠지지 않고 다원성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콥은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를 하나의 개체로 보고 이 종교들을 서로 연결시키기 위해 과정 실재의 보편적 원리로서 그 나름대로
의 그리스도 개념을 도입한 것이었다.49) 만약 기독교가 이러한 보편적 원리를 깨닫고 다른 종교들에게 그들
에게도 이러한 보편적 원리 (콥에게는 그리스도)가 들어 있음을 알려 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
을 무효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의 절대성 내지는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보충
(complement)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50) 그리스도가 과정 실재의 원리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어느 한 종교의
(예를 들어 기독교) 독단적 원리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에서 이러한 과정실재의
궁극적 원리를 나름대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사실 콥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이름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나름대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콥이 과정 실재의 궁극적 원리로서 ‘그리스도’를
내세우는 이유에는 자신이 포함된 기독교라는 개체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인위적 의도가 숨어 있다. 이러한
과정 신념에 근거한 콥의 종교 다원주의 사상이 보편적으로 모든 종교들을 포용할 수 있을 지 매우 의심스럽
다.
5. 나가는 말
우리는 죤 콥의 예를 들어 종교 다원주의를 수립하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살펴 보았다. 그는 다른
종교 다원주의자들과는 달리 종교 다원주의의 가능성을 단지 이론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증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인간 차원에서 개체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해결할 수는 없는 일
이다. 종교 다원주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모든 종교들을 동시에 진리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나 경험으로부터 보편성을 추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콥이 믿듯이 종교들(개체)이 저절로 보편성을 이루
는 것이 아닌 것이다. 분명코 인간과 인간의 모든 현상들(종교를 포함하여)을 초월하는 어떤 절대적 진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절대적 진리가 모든 현상들의 원천과 의미와 관계들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절
대적 진리란 다름 아닌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그의 계시이다. 이 절대적 진리를 떠나서 인간 차원에서
(어떤 원리, 개념, 신념, 신앙 등) 궁극성을 찾는 것은 결국 모순과 혼돈과 멸망인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실재적으로 혹은 형이상학적으로 정립되기에는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종교들간의 궁극
적 문제는 사실 진리의 문제로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반위적 문제인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반위성을 거
부하고 다원성을 주장하지만 그 다원성 주장은 단지 피상적이고 현상적인 비교에 그치고 있다. 구체적이고 확
실한 보편적 원리내지는 진리의 근거없이 단지 자신들의 경험과 이해에 입각하여 다원성을 주장한다. 기독교
입장에서 주장하는 종교들간에 반위성은 절대적 진리이며 기준인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근거하는 것
이다. 절대적 근거와 기준없이 종교 다원성을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피상적으로 다
원성을 주장하는 것도 어떤 차원에서는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절대성과 기독교 절대성은 반위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성보다는 종교간의 반위성이 더 타당한 것이다.
또한 모든 종교들이 각 개체성을 잃지 않은 상태로 다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없는 독단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주의적 발상으로 모든 종교가 맞다든지, 혹은 서로 독립하여 스스로 종교로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른다는 의미이다. 또한 다 틀리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회의주
의적 포스트모던이즘에 입각하여 맞고 그름에 상관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원주의의 해결이 아니라 허무주
의적 책임 회피요, 무관심이라 하겠다. 사실 맞고 그름에 상관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 역시 어떤 가치 기
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종교 다원주의는 어떤 관용과 상생의 원리를 추구하지만 사실은 독단
과 개인 주의와 허무주의를 담고 있는 것이다. 관용이라는 이름뿐인 허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독단으로 모는
또 다른 인본주의적 독단을 종교 다원주의는 품고 있다 (관용을 주장할 때는, 분명 그 관용의 개념뒤에 어떤
독단적 원리가 있기 마련이다). 또한 다원주의 자체로는 어떤 일관성 있는 원리를 세울 수 없으므로 허무주의
에 빠질 것이다.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은 상생이 아니라 자멸을 낳기 마련이다.
고후2:14-16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
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말씀한다. 복음은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향기가 아니다. 망하는 자들에게도 향
기가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른 종교들에게는 악취요 우리에게만 향기가 아니라 모두에게 향기가 되는 것
이다.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 향기가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 진리 자체
가 타 종교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진리는 그들에게도 구원의 소식인 것이다. 단지 그들은 이것을 받아 들이지 않으 므로 그들 스스로 멸
망을 쌓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들의 희망은 종교 다원주의가 아니다. 복음 뿐이다. 참 진리의 향기를 맡는
길 뿐이다. 진리 자체가 동시에 악취이며 향기일 수가 없다. 진리는 언제나 향기일 뿐이다. 문제는 종교 다원
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지 기독교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벨리알이 동시에 참 신이 될 수 없다.
동시에 참 신이라고 하는 것은 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타
종교에도 전해야 한다. 이것만이 그들이 살 길인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相生이 아니라 全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