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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원불교법문
원기 107년 8월 27일
설교 : 규산 이광규 교무님
타이핑 : 김성환
오래간만입니다. 한 3주 만에 뵙나요? 법회시간에? 그렇네요. 지난주는 법인절이라고 함께 기념식을 했고, 지지난주에는 성현교무님과 함께 훈련을 다녀온다고 여러분들을 직접 뵙지는 못했던거 같습니다.
대종경(大宗經) 제5 인과품(因果品) 6 |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천지의 일기도 어느 때에는 명랑하고 어느 때에는 음울한 것과 같이, 사람의 정신 기운도 어느 때에는 상쾌하고 어느 때에는 침울하며, 주위의 경계도 어느 때에는 순하고 어느 때에는 거슬리나니, 이것도 또한 인과의 이치에 따른 자연의 변화라,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그 변화를 겪을 때에 수양의 마음이 여여하여 천지와 같이 심상하나,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그 변화에 마음까지 따라 흔들려서 기쁘고 슬픈 데와 괴롭고 즐거운 데에 매양 중도를 잡지 못하므로 고해가 한이 없나니라.] |
도영교우님의 법문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인과품 6장에 관한 말씀인데, 앞서 우리 원도교우님의 일기를 통해서도 들어진 생각이기도 하고, 사실이 그렇죠? 우리가 실상 경계를 당하면 무슨 마음부터 먼저 나오죠? 요란한 마음 어리석은 마음 그른 마음이 먼저 나오는 것이 대체적인 우리 모습들입니다. 근데 그 나오는 마음이, 그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마음은 충분히 나올 수도 있어요. 내가 검은곰팡이를 보고 있으면 싫은 마음이 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싫은 마음이 왜 나오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이 문제에요. 그것을 못 알아차리면 공부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초등학교 들어가서 기역니은, 가나다를 알고, 그런 어린이가 바로 수려한 문장이 나오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있는 그 모습 그대로를 써보고 맞춤법에 따라서 기록해보고 그런 과정에서 내 감정을 조금 더 넣어보고, 거기에 형용사를 붙여보고 부사를 붙여보고 그렇게 문장을 늘려가면서 저희들은 수려한 문장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경계를 처음 대할 때 일어나는 삼독심이나 오욕의 그 마음들은 아주 당연한거에요. 그것이 원불교를 다니는데 이런 마음 내도 돼? 내도됩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려야하죠.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우리가 공부를 안하는거에요. 그것은 원불교를 다녀도 가방만 들고 왔다갔다하는 것밖에 안되는거랑 똑같아. 경계가 다녀갔을 때 일어난 마음을 멈추는데서, 언젠가 지었던 원인을 좋은 결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어떤일이든지 그것이 내 마음속에 다가와서 무슨일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릴 때 선연으로든지 악연으로든지 바꿔갈 수 있어요. 우리가 무엇을 하나 들고 이것은 싫어 버릴때는 나와 멀어지는 인연이에요. 근데 이것이 좋아. 같은 것을 만지고 있어도 좋은 사람이 있는가하면 싫은 사람이 있어요. 그것이 내가 마음을 어떻게 가져가느냐에 따라서 바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 주위에 일어나는 것은 결코 원인 없이는 그 무엇하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어떤 인연과 어깨를 부딪혀도 불편하지 않기도 하지만 어떤 인연과는 같은 공간안에 있어도 굉장히 불편해요. 그런 인연들이 있어요. 그것은 상대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원인이 있었기에 그렇습니다. 그 마음을 멈춰서 알지 못하고, 풀지 못하면 늘 같은 경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죠. 도영교우님의 법문을 보고 밝혀준대로 세상의 모든 관계는 인과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그 인연을 선연으로 돌릴 것인가 악연으로 돌릴 것인가,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를 알아차려서 선연으로 돌려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 우리 공부인들이 해야하는 마음공부라고 생각합니다. 도영교우님은 인과라는 것을 통해서, 교당에 가보니 인과 그것은 짓는것이지, 내가 지어서 받는것이지 그것을 알아차린거같아요. 그것을 알아차리고 챙기고 챙기고 또 챙기다보면 그것을 선연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연마하다보면 주위의 모든 인연들은 상생하는 선연으로, 고마운 인연으로 바뀌어갈것입니다.
오늘 제목은 수확할 것이 있는가에 대해 잠깐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농식물이 성장하고 수확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요소들을 많이 필요로 하죠.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필요로 하고 그런 환경들이 주어져야 그런 결과들을 얻을 수 있죠. 그중에서도 농부들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뭘까요? 시기와, 다시 말해 타이밍을 이야기합니다. 음력으로 얘기하면 24절기를 이야기하죠. 그래서 어느 때에 씨앗을 심고 어느 때에 걷어야 적절하게 심어지고 환경영향에 따라서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고. 그 시기가 중요한거에요. 그래서 그 24절기를 이야기할 때, 음력 2월에는 봄기운이 일어난다고해서 입춘이 있고 비가 물이되어 내린다는 우수라는 절기가 있고. 2월에는 경칩과 춘분, 3월에는 청명과 고부 등 12달을 통해서 24절기가 있다고 합니다. 한 달에 2번꼴로 보름에 한 번꼴로 절기가 나타나죠. 근데 음력 7월에 나타나는 절기는 입추와 처서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처서가 지났는데 처서가 지난 저녁부터 선선해지는거에요. 뭔가 꺾이는 기운, 변하는 기운이 이런거구나 우연히 알게되었습니다. 처서라는 절기를 맞이하면서 처서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속담으로 이야기한 것이 있어요.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답니다. 그렇게 기운차게 피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던 모기도 그 때가 되면 입이 삐뚤어진대요. 사람을 물어도 힘이 없답니다. 또 다른 말로 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져서 풀이 더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에 논두렁에 풀을 깎거나 산소를 찾아서 벌초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추석 앞둬서 벌초한다고 많이 한다고가죠? 벌초를 많이 하게 됩니다. 농사에 있어서 처서무렵은 한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정하는 중요한 시기라고 합니다. 처서가 지나면 벼의 이삭이 차는 때인가봐요? 이때 강한 햇살을 받아야 벼가 성숙할수 있다고합니다. 무엇이 한꺼번에 성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처서에 장벼패듯이’라고 표현한 것도, 처서무렵에 벼가 얼마나 성장하는 것을 그 무렵이 되면 부쩍부쩍 벼가 영글어져가는 그런 모습들이 보이는가봐요. 다시 말해서 사람이 절기에 맞춰서 벼를 심고 자연은 때를 맞춰서 강한 햇빛과 신선한 바람이 불어야 알찬 결실이 맺어질 수 있듯이 이것이 결국 자타력의 조화로 종자를 잘 심고 그리고 자연이 주는 은혜를 함께 어우러져야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듯이 사람의 모습도 자타력이 함게 어우러져야 좋은 결과를 얻게되는데, 그것을 얻게 위한 4가지가 요소가 있다고 정산종사님께서 이야기하세요.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제2부 법어(法語) 제9 무본편(務本編) 56 |
조 전권(曺專權)에게 말씀하시기를 [저 과수도 종자가 좋고, 땅을 잘 만나고, 우로지택이 고르고, 사람의 적공이 잘 들어야 훌륭한 결실을 보게 되는 것 같이, 사람도 훌륭한 인격을 완성함에는 이 네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되나니라. 사람은 습관성이 종자가 되나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마음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게 태어나는 것은 익힌 바 습관의 종자가 각각 다른 까닭이라, 그대들은 각자 각자가 좋은 습관을 들여서 좋은 종자를 장만하기에 힘쓰라. 사람의 땅은 부모 형제 사우(師友)등과 회상의 인연이니, 이러한 인연을 잘 만나야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요, 만일 잘못 만나서 바른 지도를 받지 못하거나 옳은 일을 하려할 때에 반대하고 막거나, 설사 그렇지 아니하여도 서원의 종자를 심을 때에 정법 회상이 아니면 좋은 싹을 발하지 못하고 말 것이니, 그대들은 좋은 인연을 많이 맺는 데에 전력하라. 사람의 우로(雨露)는 곧 법의 우로니, 자주 성경 현전을 보고 이상 사우의 법설도 들어야 마음의 좋은 싹이 잘 자라서 향상 진보할 수 있을 것인즉 그대들은 종종 법의 우로를 잘 받으라. 인격 완성에 있어서 인공(人功)이란 곧 자기의 공력이니, 사람이 좋은 습관을 가졌고 좋은 인연을 만났고 또 좋은 법설을 들었다 하더라도 각자의 적공과 능력이 들지 않고는 훌륭한 인격을 이룰 수 없나니라. 그러므로, 범부가 변하여 부처 될 때까지 각자 각자가 하나 하나 실지의 공을 쌓아야만 성불 제중하는 큰 인격을 이루게 되나니라.] |
첫 번째가 성근종자를 발견해야합니다. 사람 마음에서 성근종자를 발견해야 합니다. 정산종사께서는 사람은 습관성의 종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습관을 가지고있느냐. 그 습관에 관련된 성질이 좋은 종자가 된다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마음과 행동이 다른 것은 익힌바 습관의 종자가 각각 다른 까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올 한해를 살면서도, 연초에 생활하면서 수없이 많은 경계를 겪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럴때마다 공부심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내 마음을 챙겨야하는지, 어떤 것이 더 원만하고 구족해지는지를 챙겼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경계를 당해서 탐진치 삼독심과 기본욕망인 오욕, 다시 말해서 식욕 색욕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으로 경계를 맞이했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챙긴 사람과 빼앗긴 사람의 차별은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분명히 차별이 생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대종사께서는 습관성을 기르기 위해서 무엇을 저희들에게 주셨느냐, 선물로 무엇을 주셨느냐, 30계문을 주셨어요. 고치기 위해서. 우리가 좋은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원불교에서 하지말라는게 많아’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30계문을 주셔서 좋은 습관을 길들이게 하셨습니다. 대종경 교의품 25장에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계율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를 해서 말씀을 드리죠.
대종경(大宗經) 제2 교의품(敎義品) 25 |
목사 한 사람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대개 계율(戒律)을 말하였으나 저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도리어 사람의 순진한 천성을 억압하고 자유의 정신을 속박하여 사람을 교화하는데 적지 않은 지장이 되는가 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어떠한 점에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목사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종교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공연히 배척하는 수도 없지 않지마는 대개는 교리의 신성함은 느끼면서도 사실로 믿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 이면에 계율을 꺼리어 주저하는 수도 적지 않사오니 이러한 사람들은 계율이 없었으면 구제의 범위에 들었을 것이 아니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귀하는 다만 그러한 사람들이 제도의 범위에 들지 못하는 것만 애석히 알고 다른 곳에 큰 영향이 미칠 것은 생각지 아니하는가. 우리에게도 서른 가지 계문이 있으나 한 가지도 삭제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그대로 지키게 하노라. 다만 계율을 주는 방법에 있어서는 사람의 정도를 따라 계단적으로 주나니, 누구나 처음 입교하면 저 세상에서 젖은 습관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에게 능히 지킬 만한 정도로 먼저 십계를 주고 또 계단을 밟는 대로 십계씩을 주며 삼십계를 다 마친 후에는 계율을 더 주지 아니하고 자유에 맡기나니, 그 정도에 이른 사람은 부당한 일과 당연한 일을 미리 알아 행하는 까닭이니라.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그대로 방임할 수 없나니 자각있는 공부인과 초학자 다스리는 방식이 어찌 서로 같을 수 있으리요. 세상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더 많거늘 방금 귀하의 주장은 천 만인 가운데 한 두 사람에게나 적당할 법이라 어찌 한 두 사람에게 적당할 법으로 천 만인을 등한시하리요. 또는, 사람이 혼자만 생활한다면 자행 자지하여도 별 관계가 없을지 모르나 세상은 모든 법망(法網)이 정연히 벌여 있고 일반 사회가 고루 보고 있나니, 불의의 행동을 자행한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나서면 일동 일정을 조심하여 엷은 얼음 밟는 것 같이 하여야 인도에 탈선됨이 없을 것이며, 그러므로 공부인에게 계율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하노라.] |
[세상 사람들이 종교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공연히 배척하는 수도 없지 않지마는 대개는 교리의 신성함은 느끼면서도 사실로 믿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 이면에 계율을 꺼리어 주저하는 수도 적지 않사오니 이러한 사람들은 계율이 없었으면 구제의 범위에 들었을 것이 아니오니까.] 인과의 이치는 맞다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내가 하고는 싶은데, 대종사님께서 30계문을 내놓으셔서 지키지 못해 종교를 꺼리는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대종사님께 여쭈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귀하는 다만 그러한 사람들이 제도의 범위에 들지 못하는 것만 애석히 알고 다른 곳에 큰 영향이 미칠 것은 생각지 아니하는가. 우리에게도 서른 가지 계문이 있으나 한 가지도 삭제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그대로 지키게 하노라. 다만 계율을 주는 방법에 있어서는 사람의 정도를 따라 계단적으로 주나니, 누구나 처음 입교하면 저 세상에서 젖은 습관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에게 능히 지킬 만한 정도로 먼저 십계를 주고 또 계단을 밟는 대로 십계씩을 주며 삼십계를 다 마친 후에는 계율을 더 주지 아니하고 자유에 맡기나니, 그 정도에 이른 사람은 부당한 일과 당연한 일을 미리 알아 행하는 까닭이니라.] 대종사님께서도 30계문을 지키고 성근종자가 만들어지면 자유에 맡긴다고 하셨어요. 또 이어서 말씀하시죠.
[사람이 혼자만 생활한다면 자행 자지하여도 별 관계가 없을지 모르나 세상은 모든 법망(法網)이 정연히 벌여 있고 일반 사회가 고루 보고 있나니, 불의의 행동을 자행한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나서면 일동 일정을 조심하여 엷은 얼음 밟는 것 같이 하여야 인도에 탈선됨이 없을 것이며, 그러므로 공부인에게 계율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하노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이고 걱정할 것이 없는 사람이면 대종사님 교법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에게 보통급 10계문을 처음부터 잘지켰냐라고 한다면 저는 지금도 연고 없이 살생하고 해요. 무심코 잡는 모기도, 벌레들도 있어요. 그 습관을 고쳐나가가기가 쉽지 않아요. 챙기고 또 챙기고 그러면서 성인의 인품을 만들어가는 종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겠느냐. 성근종자를 갖추는 것은 선악귀천이 따로 없고 남녀노소가 따로 없습니다. 대종사님 교법에 근거하여 오래오래 계속하면 그 성근종자는 생겨날 수 있습니다. 정산종사님께서 훌륭한 인격을 갖추는 두 번째는 종자를 채우는 땅이 좋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씨앗을 심는데는 좋은 땅이 있어야하지만 사람의 인격을, 성근종자를 어디다 심어야 좋은 땅을 만났다고 이야기할까. 정산종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결국 사람의 땅은 부모 형제 사후들과 회상의 인연이니 이러한 인연을 잘 만나야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만일 잘못 만나서 지도를 받지 못하거나 옳은 일을 하려할 때 막거나 설사 그렇지 아니하여도 서원의 종자를 심을 때 정법회상이 아니면 좋은 싹을 바라지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인연을 맺는데 정성을 다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불연을 맺게하고 불연을 권면하고 불연을 촉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본인 스스로 좋은 종자를 가지고 그렇게 인연을 걸었다고 하더라도, 이것 좀 해보면 재밌는데? 라는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오죠. 이거하면 즐거워. 특별한 기분이야 특별하게 뭐가 생기기도해. 이런 유혹이 끊임없이 들어옵니다. 그럴 때 내 스스로 정도를 행하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죠. 그리고 그런 인연들이 주변에 늘 함께 한다고하면 걱정할 것이 없죠. 그런데 그런 인연들이 늘 다가오진 않습니다. 그런 인연들이 내 주변에 없다고 한다면 내가 그런 인연들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겠죠. 어떤 인연을 만드는게 좋은것일까. 좋은 인연이라는 것은 어떤 인연인가. 이것에 대해서 정산종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원리편 55장에서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2부 법어(法語) 제5 원리편(原理篇) 55 |
말씀하시기를 [인연에는 좋은 인연과 낮은 인연이 있나니, 좋은 인연은 나의 전로를 열어주고 향상심과 각성을 주는 인연이요, 낮은 인연은 나의 전로를 막고 나태심과 타락심을 조장하며 선연을 이간하는 인연이니라.] |
내가 뜻하는 것을 하고자 할 때 힘을 북돋아주고 조언도 해주며, 감사한 마음을 일깨워주고 화합하게 해주는 것이 좋은 인연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인연도 과하면 낮은 인연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는 좋은 인연이 오래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 저에게 각성을 일으켜주고 향상심을 일으켜주는데, 옆에서 작용을 할거냐. 분에 넘치는 향상심을 불러일으켜버린다면, 지쳐 쉬고 싶은데 교무님이 향상심을 불러일으켜도 때로는 ‘쉬었다가자’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는 뜻한 것을 이루도록 옆에서 권면할 수 있는 그런 인연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잘해야한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는 좋은 인연을 이어가는 방법으로 원없는 일을 과도히 권하지 말고 이기려고만 하지말고 남의 시비를 알아 그허물을 말하지 말고, 친해갈수록 더욱 공경하여 모든 일에 예를 잃지 않는 그런 인연일수록 좋은 인연이 오래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주위에 좋은 인연들을 두어야 그래서 성근종자가 잎도 피고 뿌리도 내릴 수 있는 그런 땅이, 내 주변에 인연들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인격을 갖추는 세 번째 요소는 좋은종자가 좋은 땅을 만났을 때 척박해서 우로의 도움이 없으면 자라지 못하듯이, 사람의 인격에도 우로의 도움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있어서 이슬과 비와 같은 요소는 무얼까. 그것은 정산종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인의 경전과 나보다 지혜가 출중한 스승이나 도반에 지혜를 자주 읽고 듣고 실천하는 모습을 함께함으로써 성근종자가 커나갈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내 주변의 인연이더라도 나보다 못한사람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 못한사람이 나보다 나은 부분도 있어요. 그 못한 부분을 발견해서 두 번 실천하고, 세 번 실천하고, 저도 원도교우보면서 때로는 마음이 격분할 때도있어요. 그렇지만 이번에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 스스로를 돌이켜보게도되요. 나는 과연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원도교우같은 그런 봉사심이 나겠는가.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이 나겠는가 내 스스로를 돌이켜봅니다. 그런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주변 인연과 만남에 있어서 우로와 같은 요소를 작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잘 잊어버립니다.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완전히 내 것이, 대종사님같이 큰 깨달음을 얻어서 완전히 이 세상을 알기 전에는 또 잊어버립니다. 원점이 되기도 합니다. 중생심이 또 일어나기도 합니다. 앞서 원도교우의 진솔한 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현장에 우선 다가서면 같은 마음이 들 수도 있고, 더 못한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봉사가 한번 한번 쌓여가고 여러 번 지속될 때, 봉사의 마음이 그 봉공의 마음이 마음으로 직접 와닿고 그 사람들의 삶이 직접 제 모습처럼 다가설 때.
처음이 두려워요. 우리가 늘 겪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처음이 두렵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을 만지면 병균이 묻을까봐 걱정이되죠. 그런데 이사람을 만지고 와서 그사람들을 만나고 와서, 내 스스로를 만나고 와서 내가 그런 모습들이 안되면 되는거에요. 그런 것이 결국은 스스로의 주변 인연들을 통해서 나보다 나은 것을 익히고 배우는 우로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요소로 인공을 이야기합니다. 공력을 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격완성에 있어서 인공이란 곧 자기의 공력이니, 사람이 좋은 습관을 가졌고 좋은 인연을 만났고 또 좋은 법설을 들었다 하더라도 각자의 적공과 능력이 들지 않고는 훌륭한 인격을 이룰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처 될 때까지 각자 각자가 하나 하나 실지의 공을 쌓아야만 성불 제중하는 큰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종자가 꽃을 피우고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그만한 농부의 노력과 정성이 필요합니다. 내일 어른들께도 비슷한 얘기를 전해드릴까해요. 우리는 당장 다음에 일어나는 일들을 믿고 의심하지 않을 뿐이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내일하면되지라고 미룰 수 있지만 미루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요. 마음을 챙기는 수양은 절대로 미뤄서는 안된다. 제가 최근에 천도제 지낼 때 천도법문을 봉독하다가 저 역시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듣고 듣느냐. 아무야 또 들으라. 네가 이 때를 당하여 더욱 마음을 견고히 하라. 만일 호리라도 애착 탐착을 여의지 못하고 보면 자연히 악도에 떨어져 가나니, 한 번 이 악도에 떨어져 가고 보면 어느 세월에 또 다시 사람의 몸을 받아 성현의 회상을 찾아 대업(大業)을 성취하고 무량한 혜복을 얻으리요. 아무야 듣고 들었느냐 이말씀을 하셨습니다.
대종경(大宗經) 제9 천도품(薦度品) 5 |
대종사 천도를 위한 법문으로 "열반 전후에 후생 길 인도하는 법설"을 내리시니 이러하니라. [아무야 정신을 차려 나의 말을 잘 들으라. 이 세상에서 네가 선악간 받은 바 그것이 지나간 세상에 지은 바 그것이요, 이 세상에서 지은 바 그것이 미래 세상에 또 다시 받게 될 바 그것이니, 이것이 곧 대자연의 천업이라, 부처와 조사는 자성의 본래를 각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천업을 돌파하고 육도와 사생을 자기 마음대로 수용하나, 범부와 중생은 자성의 본래와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한 관계로 이 천업에 끌려 무량 고를 받게 되므로, 부처와 조사며 범부와 중생이며 귀천과 화복이며 명지장단(命之長短)을 다 네가 짓고 짓나니라. 아무야 일체 만사를 다 네가 짓는 줄로 이제 확연히 아느냐. 아무야 또 들으라. 생사의 이치는 부처님이나 네나 일체 중생이나 다 같은 것이며, 성품 자리도 또한 다 같은 본연 청정한 성품이며 원만 구족한 성품이니라. 성품이라 하는 것은 허공에 달과 같이 참 달은 허공에 홀로 있건마는 그 그림자 달은 일천강에 비치는 것과 같이, 이 우주와 만물도 또한 그 근본은 본연 청정한 성품 자리로 한 이름도 없고, 한 형상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죽고 나는 것도 없고, 부처와 중생도 없고, 허무와 적멸도 없고, 없다 하는 말도 또한 없는 것이며,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 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無爲而化)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변화하고, 만물은 생·로·병·사를 따라 육도와 사생으로 변화하고, 일월은 왕래하여 주야를 변화시키는 것과 같이 너의 육신 나고 죽는 것도 또한 변화는 될지언정 생사는 아니니라. 아무야 듣고 듣느냐, 이제 이 성품자리를 확연히 깨달아 알았느냐. 또 들으라. 이제 네가 이 육신을 버리고 새 육신을 받을 때에는 너의 평소 짓던 바에 즐겨하여 애착이 많이 있는 데로 좇아 그 육신을 받게 되나니, 그 즐겨하는 바가 불보살 세계가 승(勝)하면 불보살 세계에서 그 육신을 받아 무량한 낙을 얻게 될 것이요, 또한 그 반대로 탐·진·치가 승하고 보면 그 곳에서 그 육신을 받아 무량겁(無量劫)을 통하여 놓고 무수한 고를 얻을 것이니라. 듣고 듣느냐. 아무야 또 들으라. 네가 이 때를 당하여 더욱 마음을 견고히 하라. 만일 호리라도 애착 탐착을 여의지 못하고 보면 자연히 악도에 떨어져 가나니, 한 번 이 악도에 떨어져 가고 보면 어느 세월에 또 다시 사람의 몸을 받아 성현의 회상을 찾아 대업(大業)을 성취하고 무량한 혜복을 얻으리요. 아무야 듣고 들었느냐.] |
여기서 호리라는 것은 자와 저울의 호와 이를 말하는 것으로, 호라는 것은 모피의 털끝을 이야기한대요. 모피의 털끝이라면 정말 얇아서 보일락 말락한 그런거죠. 리는 소수 단위의, 하나의 아주 작은 단위의 길이는 나타내는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길이나 무게를 나타낼 때 호리라는 표현을 쓰는데, 다시 말해 호리라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극히 미세한 착심을 여의지 못하다보면 아주 순간이라도, 착심을 놓고살다보면 악도에 떨어진다. 잠깐이라도 착심을 가지면 악도에 떨어진다는 말씀을 하신거에요. 저희들 순간순간 일어나는 마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잠깐의 착심을 놓지 못하면 악도에 떨어질 수 있다. 훌륭한 인격은 차재의 도구라도 다른 사람의 몸을 받을지 못 받을지 이 절체절명의 순간을 이생을 진 여러분들은 보내고 있는겁니다. 사람의 몸을 받아서, 우리는 원불교를 믿었으니 여러분들이 죽으면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겠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이 회상 당연히 만나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호리라도 착심을 여의지못하면 사람의 몸을 못 받을수있어요. 이회상을 다시 못 만날수도있어요. 성불제중의 인연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 공부, 이 사업을 어느 세월에 또 다시 하게될지 모르게 때문이에요. 이러한 시기에 지금이라도 성근의 종자의 씨를 뿌려서 좋은 인연맺기에 정성을 당하고 성현의 말씀 듣기를 게을리하지않고 그 말씀을 따라 부지런히 적공하면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않았습니까. 진리께서도 여러분과의 인연의 끈을 놓지않고 계속 이어갈 것입니다. 그 호리라도 착심을 놓지 않는 공부를 끊임없이 해나간다는 것. 그것이 이 시기에 우리가 놓치지말고 살아가야하는 올 한해 여러분들이 남은 4개월정도를, 마음을 챙기면서 수확해야하는 결실이지 않겠느냐. 자칫 내 스스로가 조금 잘한다고해서 조금 뭘 많이 가졌다고해서. 그래서 방심했다가는 또 어느 악도에 떨어져서 어느 생을 헤매고 다닐지 모르겠다는 거죠 그것이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신 천도의 법문이고 그 말씀을 스스로 다시 이순간을 통해서 명심하고 각성해서 이 공부를 놓지않는 모두가 되어가기를 부탁드리면서 오늘 제 얘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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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규산님 법문이 꼭 저 들으라고 한 것 같았는데 덕분에 도움이 됩니다 항상 감사드려요 성환 교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