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신] 인간시장(6권) 67. 하나님, 두고 봅시다

[물 안 개]

하나님, 두고 봅시다 파리로 돌아갈 날이 바싹바싹 다가오자 다혜와 헤어져 또 몇 개월을 혼자 떠돌아야 하는 신세가 되기 싫어서 다혜의 유학길을 한사코 말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재회는 꿀처럼 진득거리며 달디단 것이었다. 다혜의 방학은 긴 편이었지만 우리는 너무 짧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밤늦게 헤어지고 아침이 되면 열병 오른 사람처럼 또 만나야만 했다. 어떤 때는 다혜라고 하는 한 여자에게 빠져 버린 내 자신이 가엾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다혜의 노예였다. 아무리 그녀 곁을 도망치려고 해도 헤어나올 수 없는 쇠사슬로 묶여 버린 사내였다. 손대지 못하게 하는 여자. 내 갈증은 언제고 폭발할 것 같았다. 완력으로 덮칠 생각으로 으슥한 곳까지 데리고 갔다가는 언제고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는 몸 사리는 여인.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나는 그녀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슬을 풀고 도망치려는 생각을 안해 본 것도 아니었다. 다혜보다 더 예쁘고 상냥한 여자애들은 많았지만 나는 결국 그녀의 노예로 선택되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딱 한 번만 봐 줘요. 다혜를 내 거 만들도록 딱 한 번, 두 번도 아닙니다, 딱 한 번만 봐 줘요. 남들은 걸핏하면 봐 주면서 해도 너무하잖습니까. 하나님 물고 늘어지거나 욕지거리 않을테니 다혜를 주세요. 시쳇말로 먹고 튀는 사내는 아니잖습니까. 하나님, 주례 서달라고 떼 쓰거나 가정법원에서 도장 찍는 짓 않을테니 딱 한 번만 봐 줘요. 높은 자리 있을 때 너무 재는 거 아닙니다. 설마 하나님이 우리나라의 관직에 있는 사람처럼 폼 재는 버릇이 생긴 건 아니겠죠. 희랍신화를 보니까 신 가운데 왕초도 여러 여자 거느리고 살더군요. 나는 그런 부류 아니잖습니까. 하나님, 딱 한 번만 봐 줘요, 씨. 남들 다 갔다 왔을 바닷가 한번 못 간 채 다혜와 나는 가까운 유원지와 산을 확인하곤 했다. 서울이란 사랑하는 사람끼리 아름다운 추억거리를 만들기엔 어딘지 삭막한 곳이었다. 그래서 여관과 러브 호텔이 그렇게 성행하는지도 모른다. 오붓하게 앉아 정담을 나누며 쉴 곳이 없는 곳이었다. 길이란 자동차 위주로 꾸며져 있고 넉넉한 장소는 엉뚱한 임자가 들어가 있는 형편이었다. 여의도 같은 델 그렇게 비참한 몰골로 꾸밀 게 아니라 대단위 공원을 조성하는 안목이 없는 걸 보면 역시 우리나라 관료라는 건 당대적으로 한탕주의가 아니었으면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얼간이들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하기야 뭐 나도 얼간이니까. 난지도의 매립이 끝나면 또 볼품없는 시멘트로 치덕치덕 발라가며 땅 "이상하게 가로등이 밝아지고 아스팔트를 개칠하듯 처바르고 지하철 공사 한다고 시민 따위는 생각지도 않던 길이 단장을 하고......" 다혜가 밤길을 걷다가 갑자기 환해진 가로등을 올려다보고 한 말이었다. "손님들이 몰려온다고 저 야단이지." "우린 손님을 맞는 당당한 주인이지 주인집 시녀는 아니잖아?" 다혜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손님이 오든 말든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땅은 평소에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어야 하는 것인데도 손님만 온다고 하면 새삼스럽게 떠들어대서 평소의 우리 국민을 불결한 민족처럼 소리 높이는 게 왠지 낯간지러웠다. "외국에서 손님 온다니까 갈고 닦자는 발상이 문제야. 오든 안 오든 해야 하고 우리 자존심으로 볼 때, 우리 국민이 훨씬 편안하게 살아야지 손님 편하게 한다는 건 말도 안되지." "텔레비전 보니까 공항택시 운전사들이 영어 못한다고 공박하고 화장실이 불결하다고 떠들던데. 일본이나 파리 가봐. 영어를 하는 사람은 소수고 대개 까막눈투성이란 말야. 영어를 못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이왕이면 좋다는 걸 누가 몰라? 마치 영어 못하면 야만인이나 되는 것처럼 떠드는 그 사람들의 생각이 문제야." "관광한국이란 것도 문제지. 시멘트 문화나 아스팔트 문화는 우리가 도저히 뭐하러 우리나라를 오겠어. 그들이 사는 나라에도 투성인 걸. 우리나라를 찾는 건 우리나라다운 걸 보겠다는 거잖아?" "볼 거 없으면 맑디맑은 가을 하늘 쳐다보고 갈 거고 눈 똑바로 박힌 사람들이면 보여 주려고 쳐바른 건 안 보고 진짜 우리가 지닌 우리다운 걸 볼 거고." 우리는 느닷없이 밝아진 가로등이 고마우면서 가슴 언저리에 그런 응어리가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편리하게 해 줄 생각보다는 외국 손님에게 보여 주려는 의도의 그 발상이 정말 문제였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도 꼭같은 발상으로 청소하고 질서를 지키자고 떠드는 건 참으로 줏대없는 짓이었다. "외국 손님들이 돌아가면 어쩔 거야? 주변을 울퉁불퉁하게 하고 지저분하게 드러내놓고 질서 안 지킬 심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평소에 해얄 거 아냐. 손님들 가고 나면 잘 봐 둬, 이곳 가로등이 어두워질지 모르니까." 우리는 똑같이 무지하게 밝아진 가로등을 올려다보았다. 자동차들이 작은 불만 켜고 달려가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우리나라 교통 문제가 조악하기로 세계적이라니 원." "나는 외국에 나가 있으니까 아주 절실하게 느껴. 여기서 택시타면 무서워 죽겠어. 이건 택시가 아니라 폭탄야. 운전사들이 아마 세계 어디다 갖다놓아도 빠지지 않는 솜씨겠지만...... 그러고도 질서 운운하는 건 모순야. 좌석버스와 마구잡이로 다니는데 어째서 교통경찰관은 뒷짐지고 서 있는지 모르겠어. 아직도 우리나라 교통경찰관들이 돈 먹고 봐주나? 그렇지 않고서야 서울의 전 차량이 무법자처럼 달릴 순 없잖아? 주변에서 돈 주고 위반딱지를 면했단 소리 많이 들은 적은 있지만......" "운전사들 말 들어보면 위반 않고 다닐 수가 없다나. 입금 채워야지, 회차 시간 대야지, 남보다 조금 더 벌어야지. 으레 앞차 꽁무니를 받은 뒤차가 죄를 뒤집어쓰니까 새치기로 끼어드는 게 장땡이란 거야. 그러니 업주의 과욕 때문에 할 수 없이 목숨 걸고 달린다는 거야. 목숨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다행스럽게도 여태 살아 있는 것은 "나도 초보운전 시절엔 남들처럼 면허증 속에다 오천 원짜리 구겨넣고 다녔지만......" "그동안 새치기하는 녀석들이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게 질서가 깨뜨러진 진짜 원인이란 걸 알아야 하는데 말야." 자동차를 세워놓고 우리는 약수터 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 근처에 오면 우리는 산 중턱에 있는 약수터를 찾아가곤 했다. 물 맛이 시원하고 사람이 많지 않아서 좋은 곳이었다. 오솔길은 서울에서도 드물게 울창했고 기분이 내키면 정상까지 올라가 넓게 보이는 서울의 밤거리를 구경하며 우리들의 밀어를 익어가게 했다. 울창한 숲길은 등산객들이 겨우 비켜설 만큼 좁았지만 가파르지 않아서 손잡고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내 꿈은 이런 곳야. 아니 이런 곳보다 휠씬 작고 초라한 시골이겠지만. 과일나무나 이것 저것 심어놓고 꽃밭이나 가꾸면서......" "그럼 뭘 먹고 살아?" 다혜가 익살스럽게 물었다. "나물 먹고 물 마시며." "애들은 어떻게 가르치고?" "네가 힘들 테니까 안 낳을 생각야." "낄낄이다." "네가 필요하다면 내리 열 두어 놈쯤 낳아서 뻑적지근하게 살 수도 있고." "야만인도 웃겄네." "웃으라지 뭐." 정말 내 꿈은 언제나 한적한 시골의 구석진 땅 한 자락이었다. 소도 기르고 밥상에 올리고 매운 고추를 된장에 푹 찍어서 으적으적 깨무는 전원 풍경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조금 여유가 있으면 말을 타고 산자락을 휘젓고 다닐 수도 있고 다혜와 신나는 경주를 하리라는 생각이었다. 몇 번이나 그런 전원생활의 꿈을 다혜한테 말했기 때문에 내가 구상하는 것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제일 공통적인 꿈이지만 실제 시골로 내려가는 사람은 없잖아?" "나는 갈 거야, 널 데리고." "히힛!" 귀여운 몸짓이었다. 나는 그런 다혜를 번쩍 들어 내 가슴에 끌어 당겼다. "내일도 안 돼요, 예요." "넌, 정말 막대기 같애. 감정도 없니? 남자랑 여자랑 만나면 에라 빌어먹을 가볼 데까지 가자, 이런 게 사람 심리 아닐까?" "찬이는 그렇게 못 참겠어?" "그래." "그렇게 참을성이 없어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나갈 거야?" "이건 인내심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 우리들의 확인야." "남들이 그런다고 우리가 자존심도 없이 따라갈 거야? 아까도 그랬지? 나라의 자존심은 지나쳐도 괜찮은 거라고. 우리도 자존심을 지키잔 말야. 나도 호기심도 있고 육체적 욕망도 있어. 그러나 또 오기도 있어. 순결하기 위해서, 윤리 교과서에서 얼마나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오기 말야. 찬이가 나를 사랑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는 별게 아냐. 그런 내가 찬이한테 나다운 거 하나를 보여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 순결일지도 몰라. 순결이 뭐가 중요하냐고 따지면 나도 할 말이 없어." "난 복도 더럽게 없나 봐." 내가 이렇게 말하자 다혜가 내 팔뚝을 힘껏 꼬집었다. 컴컴한 약수터엔 사람 그림자가 없었다. 밤이 늦은 탓이었다. 차가운 물을 우리는 한 바가지 떠서 나누어 마셨다. 뱃속까지 시원한 맛이었다. "이제 그만 내려가. 떠날 준비도 덜 해 놓고 쏘다닌다고 욕먹겠어." "내가 갈게. 파리가 아니라 모스크바라도 따라갈 테니까." "서너 달 있으면 또 올 텐데 뭘." "나더러 참으라는 거야?" "안 참으면 어쩔 거야?" "정말로 한강 철교에 올라가서 다혜를 데려다 주지 않으면 자살해 버리겠다고 쇼를 한판 해 버릴까?" "한번 해 봐. 우리 부모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 "구류밖에 더 살겠어?" "내일 당장 하지 그래. 결혼을 시켜달라고. 플래카드 써 붙이고 성명서 발표하고...... 신문에 날 테고...... 다행스럽게 찬이가 잘 버텨서 소방차로도 못 구해 내면 내가 나가서 불러내면 건가?" "아니지, 일단 구류를 살고 나오겠지." "그럼 우리 부모는 부랴부랴 그 사이에 나를 파리로 보낼 거고...... 찬이는 구류 살고 나와서 하늘만 보겠지." "어쨌거나 한번 해 볼까?" "정말 할 거야?" "그럴 생각야. 까짓 거 신문에 이름 한번 나지 뭐. 내가 어디가 어때서 결혼을 반대한다는 거야. 당신 딸내미는 뭐가 잘났다고?" "누가 뭐래?" 우리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끌어안고 오랜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다혜의 입술은 어째서 이렇게 달콤할까? 나는 이 순간만은 이대로 얼어붙었으면 "이렇게 우리가 딱 붙어 버리면 좋겠다. 떨어지지 말고 말야." "어떻게 밥먹고 어떻게 살려고 그래?" "지금 살고 죽고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잖아."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불끈불끈 내 아랫도리가 일어서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다혜를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금세 무너질 것 같다가도 강철처럼 튕겨 일어나는 여자였다. "이런 여잘 죽자사자 따라다니는 나도 열부상감이지." "말 된다." 서늘한 바람이었다. 하늘 가득하게 별이 깔려 있었다. 한무더기 쏟아질 것 같은 별빛이었다. 초저녁 달이 실눈처럼 떠 않았다. "그럼 내일을 기대하겠어." 다혜가 말했다. "두고 봐. 한강 인도교 위에 버티고 서서 불러낼 테니까. 텔레비전에서 중계를 할지도 모르지." "볼만한 프로그램이겠다." "다혜의 유학을 반대한다, 즉각 결혼식을 올리게 해 달라, 만약 불상사가 생기면 이 모든 책임은 다혜네 부모 탓이다. 그리고 끝에 나를 인도교 꼭대기에서 내려오게 할 사람은 다혜 뿐이다, 뭐, 이 정도면 되겠지." "아주 훌륭해. 기대하겠어. 나도 시집 한번 멋들어지게 가게 생겼네." "만약 굴복하지 않으면 다혜도 뒤따라 "그건 생각해 볼 일인데. 생명보험에도 안 들었는데." "천당 가면 그런 보험은 말짱 도루묵이래." "보험회사라도 바쁘게 하고 죽어야잖겠어?" "그건 그렇지. 나도 내일 아침에 보험부터 들어야겠다." "자살하면 지급되지 않을 걸?" "자살보험 없을까?" "이 다음에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자살보험회사 차릴게." "그때까지 살아 있으란 말야?" "살아 있어 보지 뭐." "아무튼 내일 나는 한강 인도교 꼭대기에 있을 테니까 그런 줄 알라구." 내리는 거지?" "꼭 끌어안고, 뜨겁게 입 맞추고 내려오지 뭐. 다혜네 아버지 속에서 불나게 생겼다." "괜찮은 날이 되겠어." 나는 정말 한강 인도교 꼭대기에 올라가 다혜를 빨리 내 이부자리 속에 넣어달라고 악을 쓰고 싶었다. 그만큼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차라리 나의 행복인지도 모른다. 이해타산으로 주판질해 가며 결혼하는 치들보다야 백배 장한 일이지 뭐. 젊어서는 타산 없이 사랑으로 결혼하겠다던 애들도 나이가 차면 대개는 주판질하는 세상이 되어 버려서 순애보란 말이 신파극을 보는 것처럼 되어 버린 세태에 다혜와 나는 물들지 않은 다혜네 집이 올려다보이는 가게 앞에서 내려 주었다. "그럼 내일 만나. 한강 인도교 꼭대기 근처의 고가사다리에서." 다혜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우린 공개적으로 만방에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폭로하게 되겠구나." "고운 꿈 주고, 꿈 속에서 만나." 다혜는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나도 손을 흔들며 자동차를 돌렸다. 샤워를 하고 응접실로 나와 은주 누나의 복잡한 계산서를 챙기는 데 전화가 걸려왔다. "널 바꾸란다. 어떤 앤지 디게 건방지구나." 나는 수화기를 받아들고 일부러 점잖게 녀석에게 보여 줄 것은 지나치게 친절한 척하는 것이었다. "장총찬 씨인가?" "그렇습니다. 뉘신지요?"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우린 지금 귀한 손님을 모시고 있다. 다혜라고. 너도 알겠지. 조금 전에 집 앞에서 납치했다. 널 잡기 위해선 이 방법이 가장 현명하다는 걸 알았다. 며칠 동안 네 뒤를 미행한 보람이 있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고 되물었다. "믿지 않으시네. 잠깐 기다려라. 다혜란 여자 목소리를 들려 주마."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다혜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찬이, 나야. 살려 줘.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지 몰라.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어. 지하실야." 다급하고 겁먹은 목소리였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몇 놈야?" "여러 명야. 모르겠어. 집으로 막 올라가는데 그렇게 됐어. 나, 어떡하지? 찬이, 나 좀......" 전화를 낚아 챈 아까 그 사내의 웃음소리가 징그럽게 들려왔다. "좀 만나실까?" "어디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장총찬, 지금 나와라. 네 마누라 될 계집애를 구하려면." "어디로 나오라는 거요?" "우리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은가?" "누구요?" 나는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온갖 것이 뒤범벅이 되어 맴돌기 시작했다. 짧은 그 순간에 다혜를 납치해 간 얼굴들이 무섭게 빠른 속도로, 회전판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그동안 내게 미움을 품은 부류는 많았다. 딱정이의 반격은 아닐 것 같았고...... "길게 설명할 틈도 없다. 널 독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란 것만 알고 당장 나와라." "어딥니까?"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타라. 신갈 인터체인지를 돌아나오면 된다." "요구하는 게 뭡니까?" 나는 그들이 돈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 치밀한 계획일 것만 같았다. "만나면 안다." "다혜를 건들지 마십쇼. 내가 금방 가겠습니다." "으흐흐흐...... 혼자 와라. 허튼 수작하면 네 계집애가 어떻게 될지 우리는 책임질 수 없다." "지금 출발합니다. 만나서 얘기합시다. 가능하면 빨리 가겠습니다." "좋다. 기다리마." 나는 전화를 내려놓자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누기 위해 이를 앙다물었다. 전화를 들어 원섭이에게 다이얼을 돌렸다. 내 어이없고 당황하는 표정를 본 은주 누나도 두어 번 무슨 일이냐고 묻어니 침묵해 버렸다. 원섭이는 내 간략한 얘기를 듣고 신갈 즉시 애들을 데리고 떠나겠다고 했다. "나중에 얘기할 테니 누난 일체 모른 척하고 있어. 그리고 비상금 좀 줘." 누나는 내 굳어진 표정을 보더니 두말 없이 돈을 꺼내 주었다. 차고까지 어떻게 뛰어내려왔는지 모른다. 시동을 걸자마자 큰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각오해야 할 일이라면 가능하면 빨리 달려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고속도로까지 무식하게 내달렸다. 비상등까지 켜놓고 무섭게 달리는 내 차 앞에 다른 차들이 길을 비켜서 주었다. 머릿속은 쉼 없이 얼크러들고 있었다. 다혜를 납치할 정도라면 내 사정을 알고 있는 부류일 게 틀림없었다. 다혜가 납치범들에게 참혹한 꼴을 당하고 있을지 주어 밟게 되었다. 이놈들이 다혜를 발가벗겨 놓고 무슨 짓을 한다면 다혜는 꼼짝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나와 흥정거리가 있다면 다혜를 곱게 놓아줄 것이고 그렇지 않고 무조건 내게 복수하겠다는 일념 뿐이라면 다혜에게 무자비한 짓을 할 것만 같았다. 자동차는 정신 없이 달려 주었다. 스쳐 지나가는 경찰차가 쫓아오면 신갈에서 범인들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비상등을 깜빡이며 내게 급한 사정이 있다는 걸 알려가며 달렸다. 가장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신갈까지의 고속도로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고속버스와 승용차들이 돌진하는 차 때문에 비켜설 만큼 나는 내달렸다. 이럴 줄 조명들이라도 달아놓을 걸 그랬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속도계는 백사십을 넘어섰다가 떨어지는 무서운 곡예를 하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데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오단 기어가 부착되어 있어서 급한 내 마음을 그래도 위로해 주고 있었다. 계기판 앞의 시계도 참으로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내 마음처럼 모든 게 급했다. 신갈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왔다. 밝은 가로등이 끝나는 지점에서 속도를 줄이고 좌우를 살펴보았다. 플래쉬 불빛이 좌우로 흔들리는 곳에서 말쑥한 차림의 계집애와 사내가 내 차를 불러세웠다.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자동차가 소리지르며 멈추었다. 여자는 아예 뒷좌석으로 자리잡고 앉았다. 사내는 운전석에 앉아 힐끗 뒷자리를 쳐다보았다. "다혜는 어디 있습니까?" "잠자코 따라와. 잔소리 말고." 사내는 생긴 것과 달리 굵은 목청이었다. "어디로 갑니까?" "아가리 닥쳐." 뒤통수에 섬뜩한 물건이 닿았다. 여자가 내 뒤통수를 겨냥하고 있었다. 내가 기진한 표정으로 기대자 여자는 코 부분만 남겨두고 두건을 씌웠다. "아무 말 말고, 움직이지도 말아라. 미스 민, 여차하면 갈겨 버려." 사내의 말에 여자는 대꾸없이 더 강하게 총구를 뒤통수에 겨냥했다. 포장되지 않은 길로 계속 커브를 틀어가며 달리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나도 왼쪽과 오른쪽의 커브길만 속으로 외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갈길도 끝나고 심하게 요동하는 길로 들어섰다. 엔진소리를 들어보니 일단이나 이단으로 가파른 길을 올라가는 것 같았다. 시내가 피워물었는지 여자가 피워대는 것인지 향긋한 담배 내음을 맡았다. 내 후각은 예민해졌다. 국산 담배 냄새는 분명히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외국 담배를 피우는 부류가 아니라면 평소에 외국 담배를 피우는 부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해결되지 않은 일본 녀석들의 출동인지도 모른다. 나한테 당한 우리나라의 조직이 계획적으로 나를 한방울 들어오지 않고 당할 리 없었다. "내려. 두건 쓴 채." 자동차가 멈추어 서자 사내가 명령했다. 신선한 바람이 느껴졌다. 나는 사내가 잡아끄는대로 계단을 내려섰다. 가파르지 않은 계단이었다. 마음속으로 원섭이가 내 뒤를 제대로 미행해 주었기를 빌었다. "어서 오시게, 장총찬 군." 굵은 목청의 사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겨우 두건을 벗었다. 백열등이 눈부셨다. 대여섯 평쯤 되어 보이는 지하실엔 첫눈에도 제법 날렵해 보이는 사내들이 벽 쪽에 도열하듯 서 있었고 가운데 우묵한 소파에 앉아 있는 사내의 오른손엔 날선 단도가 들려져 있었다. "다혜는 어디 있습니까? 전면에 있는 텔레비전 화면에 다혜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느 방인지 모르지만 얌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결박되지는 않았지만 공포를 느낀 표정이었다. "편히 앉게." 나는 그의 명령대로 자리에 앉았다. "자넨, 위험한 존재지. 수색해라." 두목의 명령이 떨어지자 젊은 애들이 뻔히 알고 있었다는 듯이 허리띠와 안주머니를 뒤져 표창과 무기가 될 만한 것을 꺼내놓았다. "아직도 장난감 가지고 다니는구나. 나한테는 장난감 놀이를 할 생각 마라. 네가 평균 시속 백 삼십 오로 내달리는 것도 알았고 네가 온 코스 약도도 여기 두목이 내민 약도는 내가 마음이 급해서 회전할 수 없는 지름길로 교통규칙을 위반해 가며 달린 그대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유가 뭡니까?" 나는 막상 이들 앞에 나서게 되자 이들과 한판 붙어본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과 다혜의 무사한 모습에 우선 마음이 진정되고 있었다. "이유는 알 필요 없다. 다만 네가 죽어 줘야겠다는 얘기를 하려고 불렀다."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나를 잡기 위해 이용한 여자는 돌려보내야 하잖겠습니까? "건방진 놈. 아직도 이녀석의 기가 살아 있구나." 늘어서 있던 사내 두 녀석이 동시에 고꾸라졌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몹시 매운 주먹질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고 두목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사람 데려왔으면 신사적으로 합시다. 나는 당신들이 누군지 모릅니다. 내가 빚진 게 있다면 까놓고 얘길 합시다. 더구나 연약한 여자를 납치해다 이용한다는 건 너무 하잖습니까? 말로 해 봅시다. 내가 왜 끌려와야 했으며 어째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비겁하게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도 이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큰소리 치지 마라. 한 가지 더 얘기해 주마. 넌 원섭이란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너를 미행해 달라고 했다. 네 바람에 너를 추적하지 못한 채 지금 신갈인터체인지 근처에서 네 종적을 찾고 있다. 자그만치 열두 명이나 동원했다. 믿지 않을테니 보여 주도록 해라." 텔레비전같이 생긴 판 위에 흰 점이 나타나 있었다. "자동차 네 대가 지금 너를 찾고 있다. 그러나 곧 돌아갈 거다. 네 흔적은 없으니까. 우리가 잡아다가 물고를 낼 수 있지만 조용하게 너를 처치하기 위해서 참는 것 뿐이다. 조금 있으면 네 친구가 궁금해서 네 누나네 집으로 전화를 하겠지. 그 내용을 상세하게 중계해 줄 수도 있다. 네 자동차는 어디를 가나 내 손바닥 안에 있는 셈이다. 자동차엔 자동발신 장치가 돼 있고 너는 내가 버튼만 누르면 자동차째 않는다면 네 눈 앞에서 보여 주겠다." "그만둡시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봉투 먼저 살펴봐라." 그들이 내민 봉투 속엔 놀랍게도 다혜와 내 행적이나 통화 내용, 야간망원경으로 잡은 포옹 장면 사진은 물론이고 집 안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정리해 놓은 서류가 들어 있었다. "이만하면 너 하나쯤은 감쪽같이 없앨 수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겠지?" "그렇소."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되냐?" "여기 조직은 아니오." "으허으허으허." 사내가 호방하게 웃었다. 그의 악센트나 사투리가 섞여 있었지만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표준말이 주종이었다. 결코 외국인 냄새는 맡을 수 없었다. "역시 벼락대신답구나." 나는 그 순간에 이들의 배후에 일본의 거대한 야쿠자 조직을 떠올렸다. 그 컴퓨터나 전자장치를 이용할 만한 조직이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젠 짐작할 수 있겠나?" 두목은 손짓으로 방 안에 있던 사내들을 모두 내보냈다. 아까 내 뒤통수에 무성권총을 겨누던 여자와 두목만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성권총이 뒤통수에 겨냥되었을 때 낚아채어 역습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은 무모한 것이었다는 "지금이라도 고향에 있는 네 어머니를 두 시간이면 여기 데려다 놓을 수 있다. 그러나 난 인정이 많은 놈이지. 네 어머니는 최후 수단으로 남겨두었다는 걸 미리 밝혀 두겠다." 소름 끼치는 얘기였다. 다혜를 납치하듯 강제로 어머니를 납치할 필요도 없었다. 자식이 큰 사고를 당했으니 빨리 가자고만 하면 그대로 내 어머니는 데려올 수 있는 일이었다. 이들은 도대체 나를 잡아들인 이유를 아직까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이들의 조직이 얼마나 방대하고 치밀한가 하는 것만을 보여 줬을 뿐이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길 잘 들어라. 거절이란 있을 수가 없다. 모두 오케이 상상했던대로 발가벗겨 놓고 농락할 수도 있었다. 농락 정도가 아니라 처참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린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깍듯하게 모셨다. 이것이 우리의 우정이다." "내가 여기 있는 이상 다혜는 돌려보내는 게 좋을 것 같소. 내일 모레면 떠나야 할 여자고 그 집안에서 몹시 찾을 겁니다. 일이 꼬일지도 모르잖소?" "걱정해 줘서 고맙다. 그러나 우릴 그렇게 눅눅하게 보지 마라. 너희 둘이 증발했기 때문에 사랑의 도피로 낙착이 될 것이다. 진작 너희들을 납치할 수 있었지만 이제야 납치한 것은 시기를 노린 것이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요?" "우리 미스 민이 차근차근 설명할 거다." 테이프처럼 화면에 다혜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우린 당신을 정중하게 초청합니다. 어디로 어떻게 초청하는지는 나중에 밝혀집니다. 당신의 선택은 두 가지 뿐입니다. 죽느냐가 아니면 사느냐입니다. 우린 결코 공갈을 치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전자장치와 컴퓨터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당신을 해치우는 일은 되도록 피할 생각입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당신과 다혜 씨와 당신의 가족들은 무사할 것이며 당신에게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무례는 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실력은 잘 압니다. 주먹과 표창 실력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무기를 보시면 당신의 실력이 얼마나 미스 민이란 여자는 아까 내 뒤통수에 댔던 것과는 다른 총을 꺼내 내 옆구리께 여 있던 표적을 향해 겨냥했다. 퍽! 파란 불꽃이 일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내 옆구리 근처에 있던 표적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무슨 장치가 되어 있었는지 모르지만 무시무시한 무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내가 필요하다는 겁니까? 나는 당신 말처럼 그런 무기 앞에 맥을 출 수 없는 존재가 아닙니까?" "당신이 필요한 이유는 나중에 설명합니다. 당신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린 당신 뿐 아니라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모두 데려갈 주는 것은 당신 마음대로 거절하면 안 된다는 걸 보여 주려는 때문입니다." 미스 민은 꽤 미인이었다. 서울 말씨에 좋은 몸매를 타고난 여자였다. "짐작이라도 합시다." "비밀입니다." "알아야 승낙하든 내 모가지를 내놓더라도 거절을 하든 할 거 아니요?" "당신을 감쪽같이 데려갈 수도 있었어요. 마취탄 한 개면 복잡한 과정이 필요 없었지요. 그러나 당신 같은 사람에겐 본인의 승낙이 필요한 일입니다." "무슨 일인가 알기 전엔 대답할 수가 없잖소?" "한 가지는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당신을 궁지에 몰아넣거나 사상범의 미스 민은 두목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내 의미 있게 웃었다. "당신은 다혜 씨와 빨리 결혼하기 위해 내일 낮에 한강 인도교 꼭대기에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이 일하겠다면 문제는 아주 쉬워집니다. 두 분의 결혼이 이루어지게 만들 것이며 두 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충분한 돈까지 마련되어 있습니다. 첨가해서 말하자면 결코 당신을 범죄자로 만들거나 당신을 이용하는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다혜 씨가 원한다면 파리 유학을 두 분 다 보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이런 제안은 파격적이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겁니다. 이제 당신이 선택할 순간입니다." 미스 민은 냉랭했지만 고운 음성이나 건 변치 않았다. "그렇다면 숨길 것도 없잖소? 내가 어디로 갈 거며 왜 가야 하는지도 알려 줄 수 있잖소. 그리고 다혜를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결코 당신네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요." "호호호...... 대단하시군요. 듣던대로시군요. 그러나 당신은 금방 후회할 겁니다." 미스 민이 이렇게 말하고 버튼을 눌렀다. 화면의 파란 불빛이 흔들리더니 다혜가 화면 가득하게 비추어졌다. 클로즈업되었던 화면이 멀어지면서 건장한 사내 두 녀석이 웃옷을 벗는 게 보였다. 일그러진 고통의 그림자가 깔린 다혜가 외면했다. 사내들은 다혜의 손을 뒤로 꺾었다. 그리고 그녀의 옷을 우악스럽게 잡아내렸다. 겉치마 속으로 하얀 시미즈가 보였고 이어서 그녀의 웃옷까지 벗겨졌다. 짧은 순간에 일이어서 나도 뭐라고 말할 틈이 없었다. 다혜의 비명소리가 내 가슴을 마구 뒤흔들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에 미스 민이 쏜 이상한 총알이 나를 쓰러뜨렸다. "중지해! 원하는대로 하겠다." 미스 민과 두목이 웃었다. 다혜는 재빨리 옷을 주워입었다. 나는 멍청하게 천장을 바라보고 이를 앙다물었다. 하나님, 두고 봅시다!

[묘안당]

한참 석별의 정을 나눔이 아쉽드만 왠 날벼락이 어리벙벙하게 다음을 기다리게 하네요??...ㄳ합니다

[나리아리]

이구~ 큰일났네...

[미혜]

누구에게 청탁을 받은 사람들인지 다혜와 종찬이 걱정 됩니다~!

[새처럼]

잘 봤습니다,, 감사 합니다,,

[그리운남촌]

잘 읽고갑니다~~

[김성갑]

감사

[오아시스]

으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