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설 32회로부터 시작된 송설산악회가 전국적인 조직으로 뻗어나감에 따라 오늘은 경남지구 송설산악회 창립대회를 창원에서 갖게 되어서 구미지구의 윤상규사무총장과 창원을 방문하였는데 생각보다 훨씬 큰 경남지역의 행정 산업 교육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중국의 당나라시대 세계의 문물이 모여드는 장안성의 주작대로와 같이 20km에 달하는 10차선의 창원대로를 달려보니 정돈된 계획도시임을 알 수 있었다.
창원은 역사적으로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초기에는 금관가야에 속하였다가 후에 신라에 병합되었으며 지리적으로는 볼모산, 천주산, 장복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이고 남으로는 진해만과 마산만을 접하고 있어 기후와 풍토가 생활하기에는 적합하여 선사시대부터 정착하여 살아왔다고 하는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창원은 왜군으로부터 집중적인 피해를 입었으나 이 지방의 모든 군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성을 굳게 지키고 용감하게 싸워 한 사람도 왜적에게 항복한 사람이 없었으며 이 사실이 높게 평가되어 왜란이 끝난 후인 선조 34년(1601년)에 창원은 대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이후 창원의 본격적인 발전은 1973년부터 시작된 국가기간산업이자 중화학공업의 핵심인 기계화공업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함으로써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는데 1400만평에 달하는 국내최대의 기계화공업단지를 조성하여 군수용방위산업체를 포함한 대우중공업, 효성중공업, 삼성중공업, 두산중공업, 현대정공, 만호제강 등의 큰 공장에서부터 500여개가 넘는 업체가 입주해있다고 하며 1980년에 창원출장소가 시로 승격되었고 1983년에는 도청이 옮겨오면서 명실상부한 경남의 중추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지나간 대통령 선거때에는 어떤 후보는 인근의 마산,진해와 합쳐서 산해원이라는 거대도시로 만들려고 한 적도 있었다.
인접한 마산이 어떤 곳인가? 노산 이은상선생의 가고파의 주무대이기도 한 푸른 바다 마산은 우리 현대사의 획을 긋는 고비마다 즉 김주열군의 죽음으로 인한 4.19혁명이나 부마 민중항쟁 그리고 내란의 수괴로서 엄정한 법의 심판을 받은 전두환 일당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6.10민주화투쟁의 진앙지가 아니던가? 마산의 민심이 요동치기만 하면 북상하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그런 곳이었다.
또 창원은 산업단지의 발전과 더불어 계획된 전원도시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용지호수와 전국제일의 철새도래지인 주남저수지와 달천계곡 그리고 마금산 온천 등 휴식처가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시가지의 발전된 모습들을 보고 얘기하면서 명곡지구에 있는 천외천숯불갈비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삽겹살과 갈비살을 참나무숯불에서 1차로 구워서 내어오니 참나무 향기가 고기에 배어서 더 구수하고 연하며 감칠맛이 있었다.
창립대회에서 3년선배인 경창방제(주) 대표인 최재선선배님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알고보니 봉산면 덕천동의 고향선배로서 김고졸업시 전체석차 7등으로 서울대를 목표로 학업에 정진한 후 창원에서 일찍 자리를 잡아서 시의원을 연임하기도 한 분이었으며,한해 선배인 (주)대창부사장인 김상록선배님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총무에는 20년 후배(김고36회 졸업)이며 삼성자동차에 근무하는 이종화 동문이 뽑혔는데, 모두 적재적소의 인물로서 선출되었으며 앞으로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경남산악회의 많은 활동을 보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두산중공업 등 주요업체에도 동문들이 요소요소에 있다고 하며 기계공업단지를 지원하는 본산인 한국기계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있는 10년 후배(김고26회졸업) 이종오 동문이 회식비를 흔쾌히 찬조하였으며 선출된 회장님과 오늘의 모든 대회를 주관한 김정우 산악회장님도 찬조를 아끼지 않았고 이어서 뒤풀이를 가진 2차의 가요주점에서 흥겨운 여흥을 즐겼는데 부회장님이 다른 회원 몰래 계산을 해놓았다고 하였다.
그 후 구미까지 올라가야 하는 일정으로 아쉬운 작별을 하였는데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주5일제 근무여파로서 부담없고 제일 좋은 웰빙운동인 등산붐이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다고 하니 7월부터 예정된 각종 산행에서 많은 동기들과 동문들을 만날 때까지 장마철과 무더위를 이겨 내고 건강과 행운을 빌면서 이만 필을 놓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