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시기, 조선 최대의 은광인 단천 은광을 탐 낸 왜장 가토 기요마사
가토기요마사 초상(사진=위키피디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 장수 중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우리나라에선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고니시와 마찬가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의 시종 출신 영주로 일본 내에서는 그다지 대단한 위명을 날리던 장수는 아니다.
히데요시와는 애초에 혈연으로 얽힌 사이다. 그의 어머니인 이토와 히데요시의 어미니 오만도코로가 사촌지간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일찍부터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들어간 기요마사는 꽤나 명석한 편이라 히데요시의 시종이 됐으며 밑바닥부터 올라가 규슈 지역의 영주가 됐다.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 이후 일본 서부의 병력을 징집하기 위한 차원에서 자신의 시종출신 가신인 가토와 고니시를 규슈 지역의 영주로 삼고 임진왜란을 준비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1군 선봉장인 고니시와 함께 이동하며 공로를 다퉜다. 원래 사이가 안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점차 경쟁관계에 놓이면서 사이가 불편해졌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서로 원수지간이 된 것은 한양에 첫 입성한 공로를 놓고 다투면서 시작됐는데 기요마사는 자신이 먼저 한양에 처음 입성한 것처럼 장계를 꾸며 본국에 보냈으나 이러한 부정은 곧 탄핵됐고 고니시와 불편한 관계가 됐다고 전해진다.
개경 이후부터는 고니시의 1군은 선조를 쫓아 평양으로 진격했고 기요마사의 2군은 함경도로 이동했다. 기요마사가 애초 목표로 삼은 곳은 함경도 단천 은광으로 이곳의 은을 캐서 전비로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히데요시에게 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단천 은광은 세계 최초로 연은분리법이 개발된 탄광이고 일본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은광이었다고 한다.
함경도로 진군하던 도중 국경인, 국세필 등 여진족 출신 반군이 내통해 조선 왕자인 임해군, 순화군을 넘기면서 큰 공을 세운다. 이후 단천 은광을 찾고 두만강 건너 여진족 부락 일부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재빨리 철수했다. 명나라로 향하는 길을 찾다가 실패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명군의 참전으로 일본군이 대거 남하하기 시작하자 역시 남하해 왜성을 쌓고 장기항전에 들어가기도 했다.
특히 울산성 전투에서는 거의 죽을 뻔했다. 조명연합군에게 포위돼 연합군이 물길까지 다 끊어버리자 아군의 시체를 뜯어먹고 말피를 마실 정도로 처참한 농성을 벌였다. 스스로 자결하려는 찰나 고니시가 보내준 원군 덕에 겨우 귀환할 수 있었다. 이후 고니시가 이를 계기로 화해를 청했지만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이때의 끔찍했던 경험을 토대로 극악의 축성술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일본의 3대 성 중 하나로 꼽히는 기요마사의 거성, 구마모토성은 그가 임진왜란에서 귀환한 뒤인 1601년부터 개축해서 1607년에 완공했다. 난공불락의 요새임과 동시에 성벽에 조롱박을 기르게 하고 성안의 우물은 120개를 팠다. 더구나 성 바닥에 까는 다다미도 모두 식용이 가능한 토란 줄기로 짜게 만들어 비상시를 대비했다.
평상시 밖에 소풍 나갈 때조차 항상 쌀과 된장을 넣은 군량주머니, 은전 3백냥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왜 그러고 다니냐는 질문에는 "내가 이렇게 모범을 보여야 부하들이 보고 배워 전투 대비를 철저히 할 것이다"라고 대답했으며 군량을 허리에 안 찬 부하를 면직시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울산성에서의 기억이 아주 끔찍한 트라우마로 남았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