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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의 조건(신17:14-20)-2019.9.29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방인들처럼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왕의 가이드라인을 정해주십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요, 신정국가의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오,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면 부족함이 없지만 그들은 이방인의 왕정을 부러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하면 섭섭하실 터이지만 하나님은 허락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기준은 ‘말금처’를 많이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나라의 왕은 ‘말금처’를 많이 두는 것이 왕권의 상징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말금처’를 많이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정제도를 싫어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왕정제도를 싫어하신 것입니다. 왕정제도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면 나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제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 제도를 운영하는 시스템이 잘못되면 나쁜 것이니까요. 하나님의 예언대로 대략 400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은 사사시대 말기에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합니다. 사실 사사시대의 사사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의 리더십을 가진 자였습니다. 물론 사사시대에도 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우시사 그들을 견제하고 그들을 이끌어가고 계셨습니다.
때문에 왕이 없어도 부족함이나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사사시대 말기에 사무엘 선지자가 나이 많아 늙고 그의 아들들이 사사가 되었는데 그들이 아버지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며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삼상8:5). 물론 사무엘 선지자는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허락을 명하시면서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아니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삼상8:7).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왕의 제도를 친절히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왕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삼상8:22).
드디어 베냐민 지파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워집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왕을 세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아무 지파에서나 배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49장 10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은 유다지파에서 나와야 합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일찍이 하나님은 야곱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정제도를 암시하셨고, 왕의 지파를 확정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유다지파에서만 배출하도록 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입니다. 왕으로 태어날 수 없는 지파입니다. 이스라엘은 초대 왕부터 실패했습니다. 물론 그가 처음에는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출발하지만 점점 불순종의 죄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사울 왕은 초심을 잃어버리고 교만하여 불순종의 죄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한마디로 하나님보다 더 높은 왕의 자리에 군림하게 된 것이지요. 한순간의 실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눈높이에 맞는 왕을 세웠기 때문에 벌어진 예견된 불상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왕으로 세워진 다윗을 보십시오. 목동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붓는 과정부터 하나님은 개입하십니다. 사람의 눈높이에 맞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에 맞는 왕을 간택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사울 왕을 잘못 세움으로 인하여 실패한 경험들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도록 개입하신 것입니다. 물론 다윗도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왕으로 세워졌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로 여겨주십니다. 다윗은 유다지파입니다. 이른바 왕이 나올 지파입니다. 왕으로 오실 주님의 때까지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서 일거수일투족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왕에게 집착하지 말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세상 나라의 왕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의 왕정제도 아래서 왕의 권한은 무소불휘의 막강한 권력과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왕은 국가입니다. 그래서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비록 제도에 의해 세워진 왕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왕은 일개 백성이요, 종이며, 신하일 뿐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고, 하나님보다 더 할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여 그분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이스라엘 왕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정시대 대부분의 왕들이 이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실패한 것입니다. 분열왕국 시대의 북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선한 왕이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음을 기억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수하에 있는 청지기입니다. 그 사실을 망각하면 실패합니다. 그러면 세상 나라 왕들이 실패한 기본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말금처’입니다. 이는 국방력과 경제력과 외교력을 상징합니다. 대부분의 세상 나라 왕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말금처’를 많이 두었습니다. 이른바 주변의 다른 나라 왕들과 견주기 위해서라도 ‘말금처’를 많은 둔 것입니다. 이것을 그들의 국방력, 경제력, 혹은 외교력의 잣대로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절대 ‘말금처’를 많이 두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의 조건으로 단서를 붙인 것입니다. ‘말금처’를 많이 두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타락의 주된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것들을 의지하면 타락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왕의 타락과 탈선을 방지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왕은 절대 ‘말금처’를 삼가야 합니다. 그러면 ‘말금처’가 의미하는 영적 의미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1) 말을 많이 두지 말라(16절)
왕정제도에서 말은 한 나라의 국방력입니다. 국방을 튼튼히 강화하기 위해서 왕은 말을 많이 두었습니다. 말은 전쟁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자원이고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병기를 끌 때도 말이 필요하고, 병사가 전쟁터에서 싸울 때도 말은 필요합니다. 지금은 말을 전쟁용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상상이 안되지만, 왕정시대의 말은 한 나라의 기동력이고 국방력입니다. 그래서 발전기의 동력을 측정하는 단위도 마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말을 많이 둔다는 것은 한 나라의 국방력을 강화시켰다는 것입니다. 물론 국방력 강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의지하거나 신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래도 말을 많이 두면 하나님보다 자기들이 소유한 국방력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말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나 선지자들은 말을 의지하는 것을 경고했습니다(시33:17,사31:1,겔17:15). 결국 말을 많이 두게 되면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과 멀어지기 때문에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솔직히 언제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능력으로 살았습니까? 자기들의 능력으로 출애굽 했고, 광야를 지났으며 가나안에 들어갔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민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살아 온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거의 빈손으로 출애굽을 했고, 광야를 거쳤으며 가나안에 입성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들은 비무장 상태로 대적들을 물리쳤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반드시 무기를 들고 피 흘리며 싸우는 것만이 아닙니다. 세상사는 것이 전쟁입니다. 솔직히 갖다 붙이면 다 전쟁입니다. 경제도 전쟁입니다. 직장인들은 출근도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전쟁으로 치릅니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려고 줄을 서는 것도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가끔씩 사람들은 이런 농담을 합니다. 6.25때 전쟁은 전쟁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만큼 삶이 힘들다는 표현을 에둘러 말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힘이 있어야 하고, 능력과 실력도 있어야 합니다. 사실 내 힘만 의지할 때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만 의지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른바 왕에게 있어서는 말입니다. 말을 많이 두면 아무래도 든든하겠지요. 믿는 구석이 있으면 사람은 한 시름을 놓습니다. 때문에 말을 많이 둔 왕은 믿는 구석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도와줄 대상을 찾습니다. 이른바 자기의 연약함이 느껴질 때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할만한 어떤 것을 쌓아두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독립하려는 의지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비천한 자를 찾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연약한 자를 찾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가난한 자를 찾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체할만한 어떤 것을 확보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것이 일종의 ‘말금처’입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데 가장 큰 방해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2) 금을 많이 두지 말라(17절하)
이스라엘 왕은 은금을 많이 두지 말아야 합니다. 은금은 경제력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움직이는 신이 있습니다. 이른바 맘몬이즘입니다. 돈의 힘, 금 권력이지요. 특히 현대인들은 은금이 절대적 우상입니다. 사실 금은 세상을 움직이는 통화 가치입니다. 금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중앙은행을 통해 금을 보유합니다. 그것이 경제력입니다. 미 달러는 불안정하지만 금은 안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러는 가치가 떨어지면 그냥 하찮은 종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금은 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금을 확보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세계경제가 불확실하면 사람들은 금을 사재기합니다. 사실 금 시세가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합니다. 때문에 경제를 아는 사람들은 종이로 된 화폐보다 금이 훨씬 더 안정적인 통화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일 화폐개혁을 한다면 아무리 비싼 종이 화폐도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경제가 불확실할수록 영리한 사람들은 금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금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최고의 경제력입니다.
예전에 우리나라가 IMF 구제 금융을 받을 때 금모으기로 국난을 타개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금을 보유하는 것은 한 나라의 경제력을 측정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금은 세계적인 경제수단이요, 화폐입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왕들은 금에 집착한 것입니다. 금을 많이 확보하면 불투명한 미래사회에도 든든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계경제가 출렁대고 요동칠지라도 금을 많이 확보하면 비교적 안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왕은 금을 많이 확보하는데 총력을 다했던 것이지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은 그러면 안됩니다. 왕이 금을 많이 확보하면 하나님보다 금을 더 신뢰할 것입니다. 사람은 보통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경제력이 보장되면 사람들은 경제력을 믿고 은근히 교만해집니다. 그것은 개인이나 국가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해도 금과 하나님이 충돌하면 금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은 금을 많이 두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금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릴까봐서 말입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만일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금을 잃어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차라리 금을 잃어버리고 믿음을 소유한 것이 낫습니다. 당장은 금이 좋아 보입니다. 당장은 금이 없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금이 당신의 영혼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당신의 영원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차라리 당신의 신앙을 지킬 능력이 없다면 금을 포기하는 것이 당신의 영혼에 백배 천배 유익합니다. 금은 없어지나 믿음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왕은 금을 많이 두면 안되는 것입니다.
(3) 처를 많이 두지 말라(17절상)
희한하게도 왕들은 주색잡기를 좋아했습니다. 마치 왕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항상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떤 왕이든지 대부분의 왕들은 향연에 빠져 살았습니다. 왕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향연의 여인들이 항상 있어 왔습니다. 이른바 처첩들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일부일처를 고집합니다. 왕이라도 처첩을 많이 두라는 곳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왕들은 왜 그리 많은 여인들의 치마폭을 떠나지 못했을까요? 아마 그것은 인간의 기본욕구를 잘못 해결하려는 왕들의 권세와 탐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왕들은 처첩을 많이 거느리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마치 자기들의 왕권을 과시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 어떤 왕이든지 대개 많은 처첩들을 두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그러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굳이 많이 두지 말라고 하신 의미는 소수는 허락하신다는 의미는 더욱 아닙니다. 그것을 합리화시켜 해석하지 말기 바랍니다. 악한 사람들은 성경말씀에 약간의 틈만 보이면 자기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 발상이 잘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들에게 처를 많이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일부일처 제도를 통한 성적 순결 그 이상의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보통 왕정시대의 왕들은 이웃 나라와 정략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 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삼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이른바 사돈나라를 삼아서 우호관계를 맺으려는 전략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이웃 나라를 더 의지하고 신뢰하겠다는 인간적인 꼼수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발상을 싫어하십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왕들에게 처를 많이 두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의도는 인간적인 외교력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외교력도 하나님의 수하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원수도 돕는 자로 붙여주십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꼼수에 속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꼼수를 부려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께서 붙여주셔야 화목합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왕은 절대 처를 많이 두는 인간적인 꼼수로 외교력을 시도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왕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의 조건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말금처’를 많이 두고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잠간 있다가 없어질 것들이요, 불타 없어질 것들입니다. 때문에 세속적인 것에 미련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이 될 수 있을까요? ‘말금처’를 많이 두면 안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소극적인 조건에 불과합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8-20절을 읽어보십시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결국 이스라엘 왕의 삶의 지표는 율법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평생 하나님의 율법서를 등사하여 가까이에 두고 읽어서 배우며 행해야 합니다(19절). 그러면 하나님은 왕위에 있는 날을 장구하게 해주십니다. 왕권을 보장해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오,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수하에 있는 대리인일 뿐입니다. 믿는 자에게 영원한 왕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주의 백성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왕과 주로 삼아 그분의 통치를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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