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호남인물에 대한 기피현상의 첫 출발점으로 삼는게 바로 훈요십조이다.그러나 훈요 십조에 호남을 상징 하는 조항이 제8조 '차현車峴이남과 공주강(금강錦江) 이외의 지역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는 형세이며~~벼슬을 주지 말라"는 유언이다.
이 차별의 근거는 풍수지리에 의한 배산역수背山逆水 즉, 임금(도성)이 있는 반대쪽으로 산맥과 물이 흐르는 땅을 나타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나 풍수지리적으로나 지금의 호남은 고려 개경에 대한 배역背逆의 땅이 될수없다.
훈요십조가 위서일수 밖에 없는 의혹을 몇 가지 제시하면
1. 신라의 후예인 최항에 의해 왕건의 사후 80년이 지나서 고려사에 끼어 넣어졌다는 것이다. 그때 당시의 고려사는 현종(1010~1011)시대에 거란군의 침략으로 모든 고려사 사초가 불타고 없어졌다. 이때 신라 계열의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발견한 문서를 고려 태조의 유서라고 하며 고려사에 끼어 넣어다는 것이다.
이미 불타고 없는 훈요십조가 80년의 세월을 지나 복원되고 왕실의 중요한 문서가 어떻게 개인 사가에 보관되어 있었을까? 더구나 이를 복원한 신하들이 신라의 후예들이란데 문제가 있다. 시대적으로 이때는 백제계열과 신라계열의 신하들이 정권 다툼에 열을 올리고 있던 시점이란데 있다.
고려 초기에 고려의 중앙정권에 권력을 잡고있던 세력이 백제계열이었다.
2. 왕건이 이런한 유언을 남길만큼 백제인을 미워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이 되지 않는다.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원한 관계로 인하여 호남을 미워했을 것(문맥상 그대로 받아 들린다면 충청도와 전라도이다.)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데 있다. 왕건에게 크나큰 상처를 준 것은 지금의 청주일대의 호족 저항 세력이었고 그 지역 사람들에게 성씨를 내릴 때 동물에 관련된 성씨를 내렸다는데 있다.
반대로 호남지역은 고려 태조의 건국때부터 중앙정부에 입신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이 많다는 데 있다.
왕건이 평생의 사표師表로 삼은 사람이 도선국사이다. 또한 살아서는 상주국上柱國이며 죽어서는 태사太師가 된 최지몽과 동진대사 경보는 영암 출신이며 왕건의 2번째 왕후이며 2대 혜종의 모후인 장화왕후 오씨가 나주인이며 왕건의 말년에 함께 산 동산원부인과 문성왕후는 승주(순천 박씨) 태생 박영규의 딸이며 견훤의 외손녀들이다. 또한 고려의 창업 과정에서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개국공신 신숭겸은 곡성출신이다. 더구나 훈요십조를 받은 사람이 박술희이며 그는 후백제 당진 사람이다. 강진의 선각대사 형미, 광산의 김길, 영광 출신의 김심언등등
이러한 정황을 살펴보건데 왕건의 호남인에 대한 기피는 허구란걸 알수가 있다.
3. 만약 호남인에 대한 기피가 고려왕실에 존재 했다면 거란의 침략시 영남으로 몽진을 했어야 함에 불구하고 현종이 전주로 몽진을 했다가.
전주는 후백제의 서울이라하여 나주로 몽진하게 된다.
나주는 고려 태조의 처향(장화황후 오씨의 고향이란 뜻)이자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의 탄생지이면서 친고려의 세력이 많은 지역이다. 더구나 나주는 왕건이 나주에서의 견훤과의 패권다툼에서 승리를 함으로 고려 건국의 초석이된 곳이다.
4. 풍수지리에 의한 배산역수는 호남이 아니라 오히려 신라의 젖줄이며 생활터전인 낙동강과 태백산맥이 배산역수이다. 호남의 젖줄인 금강과 차령은 신라의 경주에 대한 배산역수의 땅이며, 또한 경주는 고려 개경의 배산역수의 땅이다.
훈요십조의 위서일 가능성을 조금 더 요약하면
1.도선의 영향력이 강조되고있는 2,4,5조의 내용이 실제 고려초기의 상황이라기보다는 후대에 풍수지리사상이 가미된 것이다.
2. 4조의 내용중 거란을 모방하는 사례를 강조하고 경계한 것은 태조왕건 당시의 상정할수없는 비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이다.
3. 8조의 호남인 차별이 실제의 인재등용과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4. 최제언의 조부인 최승로는 981년 성종에게 시무책 28조를 올렸는데 최승로가 훈요십조의 내용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5. 이 중요한 문서가 하필 정쟁의 와중에서 개인의 저택에서 발견되었는가 하는 점들이다.
이 훈요십조가 발견 된 이후 전라도 세력이 중앙정계의 진출이 크게 둔화 되었다고 한다.
신라계로 대표되는 문벌귀족세력의 종말과 무신정권의 때를 맞추어 전라도 세력이 새롭게 중앙에 진출 하였으며 삼별초의 대몽항쟁기간 전라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