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역 근처를 거닐다 보면 가끔 부딪치는 아줌마가 있어요.
뇌졸중으로 몸의 한쪽이 마비되어 찔뚝찔뚝 걷는데도 얼굴은 항상 밝아요.
알고보니, 가까이에 있는 작은 빌라에 살고 있다더군요.
길을 가다 잠깐 지나치던 그 아줌마를 다시 만난 건 동네 목욕탕에서였어요.
늘 혼자 목욕탕을 가기 때문에 손이 닿는 곳만 때를 밀고 그냥 나오기 일쑤인데....
그 날도 손 닿는데까지만 뻗어 등을 밀고 있는데
누군가 제 등을 뻑뻑 밀어주는 것이었어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그 아줌마였어요.
마비되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제 등을 밀어주는 그 아줌마에게 됐다고, 그만 하라고 했더니
"괜찮아. 난 시간이 많아.
집에 가서 아들 밥만 차려주면 되는데 뭘." 하면서 계속 밀어주는 것이었어요.
어찌나 미안하고 황송한지.....
등을 밀어주겠다고 했더니 자기는 이미 밀었다면 괜찮다며 나가라는 것이에요.
밖에 나와서도 계속 안절부절...
목욕탕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그 아줌마는 한손으로 혼자 온 할머니들 등을 죄다 밀어주는 게 아니겠어요?
너무나 깜짝 놀랐어요.
그 아줌마는 일요일이면 목욕탕에 와서 할머니들 등을 다 밀어주고
부평중부교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또 목욕봉사를 한다는군요.
부평중부교회에는 복지관 안에 목욕탕을 만들어 노인들 목욕을 시켜드리는데
그 아줌마가 와서 노인들 등을 밀어준다는 거예요.
그런 아줌마의 얼굴은 밝고 환했어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이 닿는 한도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 그 아줌마를 보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요.
"두 손 말짱한 너는 무엇을 하였느냐?"
하느님의 말씀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한동안 괴로웠답니다.
그 후, 저는 이 아줌마를 모델로 동화 한 편을 썼어요.
아줌마에게는 누가 될 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한손아줌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이 아줌마처럼
이 지구상 곳곳에는 누군가를 위해 묵묵히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겠지요.
큰빛을 내지는 못하지만 누군가의 깜깜한 길을 밝혀줄 반딧불이 같은 사람들.....
<동화 감상>
한손아줌마
오랫동안 비어있던 아랫방에 한손아줌마가 이사 온 건 목련이 뚝뚝 떨어지던 날이었다. 아빠의 먼 친척이라고 했다. 아빠는 생판 모르는 남을 들이는 것보다는 그래도 먼 친척이 낫다고 하면서 두 팔 벌리며 한손아줌마를 환영했다.
‘하필이면…….’
아줌마를 보자마자 나는 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내가 돌보아 주어야할 할 것 같다는 좋지 않은 예감 때문이었다. 내 한숨을 눈치 챈 아줌마가 눈치 없게 말했다.
“나, 난 괜찮아. 뭐든지 할 수 있어.”
아줌마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 왼쪽이 완전히 마비되어 걸음걸이도 시원찮았다. 비척비척 걷는 것을 보고 있자면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아줌마는 뭐가 좋은지 늘 웃었다. 아니 웃는 게 아니라 꼭 우는 것 같았다. 내 눈에는.
“이 한 손으로 못하는 게 없다니까.”
아줌마가 오른손을 내게 흔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투덕투덕 살이 오른 손은 마치 거북 한 마리가 누워있는 것 같았다. 쫙쫙 갈라지고, 금이 간 등껍질을 가진 작은 거북. 그런 손으로 무얼 한단 말인가.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도대체 무얼 할 수 있을까?
“아빠, 저 아줌마. 우리 집에 꼭 있어야 해?”
“저 아줌마가 얼마나 부지런하고, 싹싹하고, 인정도 많은데. 너 혼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아빠가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들겼다. 엄마의 급작스런 수술로 아빠가 병원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아지자 나 혼자 있는 날이 많아졌다. 그게 누구의 탓은 아니었지만 화가 났고 슬펐고 외로웠다. 하지만 내 투정을 받아줄 사람이 내 곁에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아빠가 나를 돌봐 주라고 데리고 온 사람이 저 아줌마라니. 가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 차라리 나 혼자 있는 게 낫겠어. 혼자 있는 게 무섭다고 아빠한테 투정부린 게 후회가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줌마가 마당 청소를 하고 있었다. 말끔해진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빗자루가 지나간 자리가 마치 왕골 돗자리 같았다. 구겨진 목련 꽃잎들이 나무 밑에 수북히 쌓여 있었다.
아줌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난, 할, 할 일이 없어. 그래서 하, 하는 거야. 그,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
그냥 가만히 있으면 얼마나 좋아. 부담 갖지 말라고? 어떻게 부담이 안 되겠어? 공짜로 와서 산다고 누가 눈치준 줄 알거 아냐? 내 얼굴빛을 보고 아줌마가 또 말했다.
“가, 가만히 있으면 난 시체나 다름없어. 난, 난 벌써 시체가 되긴 싫거든.”
내 얼굴빛을 보기만 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맞히는 아줌마. 마주치긴 싫었지만 왠지 다시 쳐다보게 되는 묘한 느낌을 주는 아줌마였다.
“내, 내가 필요 없으면 말 해. 그러면 나, 난 언제든지 내 집으로 갈 테니까. 그러니까 걱정 마.”
무슨 소리야? 내가 어떻게 가라고 말할 수 있겠어? 그랬다간 아마 아빠한테 죽도록 야단맞을 걸? 그렇게 날마다 나는 퉁퉁 부은 얼굴로 아줌마를 대했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마구 흔들어대는 우악스런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얼, 얼른 일어나 밥 먹어.”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온 집안을 헤집고 다녔다. 얼마 만에 맡아보는 이 냄새인가? 마지못해 식탁에 나가 앉으니 한손아줌마가 된장찌개를 들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서 설설 끓고 있는 뚝배기가 기우뚱기우뚱 흔들렸다. 저러다 홀라당 쏟는 거 아냐? 그러면 저 아줌마 델 지도 몰라.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그러겠어? 내가 혹시 일이라도 시켜먹는 줄 알 거 아냐? 나는 후닥닥 일어나 쟁반을 받았다.
“머, 먹어 봐. 한, 한손으로 끓였어도 맛은 정말 좋아.”
그러면서 한손아줌마는 식탁 건너편에 척 앉았다. 그러자니 저절로 아줌마를 똑바로 보게 되었다. 왼쪽 얼굴도 일그러졌고, 왼쪽 어깨도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아줌마가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좀 무안하긴 했지만 아무도 없는 식탁에서 혼자 먹을 때보다는 맛이 꽤 있었다.
“밥 먹고 나서 가, 같이 목욕갈래?”
내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더니 한손아줌마가 급히 말했다.
“아니, 싫으면 관두고. 서, 설거지는 할 수 있지?”
내가 대답을 안 하자, 한손아줌마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한손으로 하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할 수 있을 거야. 너는 예쁜 두 손이 있으니까. 알았지?”
아니, 뭐야? 이젠 나를 마구 시켜먹네. 나는 입을 퉁 내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 숙제하고 노는 것 잊지 말고. 나, 동네 할머니들이랑 목욕탕에 갔다 올게.”
“할머니들하고 목욕탕에 간다고요?”
“응, 나, 일요일이면 꼭 할머니들하고 목욕탕에 가. 그러니까 나 기다리지 마.”
기다리긴 누가 기다린다는 거지? 비척비척 목욕가방을 들고 나가는 아줌마를 보며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왜 하필이면 할머니들이야? 할머니들은 기운도 없을 텐데. 저 아줌만 덩치가 커서 할머니들이 등 밀어주려면 힘깨나 써야할 텐데.”
아빠는 나 때문에 아줌마를 우리 집에 오라고 했다지만 그건 절대로 아닐 것이다. 저 아줌만 분명 아빠가 먼 친척이라는 이유로 신세를 지고 싶은 거야. 내 핑계로 와 있다지만, 분명 엄마가 퇴원하고 나서도 눌러 불어 있으려고 할 걸. 방세도 안 나가고 얼마나 좋아? 인정 많은 우리 엄마, 아빠는 저 아줌마 불쌍하다고 계속 돌봐줄 걸?
혼자 있는 일요일은 스물 네 시간이 아니라, 서른 시간쯤 되는 듯 길게 느껴졌다.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아줌마는 오지 않았다. 내가 알게 뭐야? 어디 가서 놀다 오는 모양이지 뭐.
‘아참, 월요일에 체격검사 한다고 했지. 목욕이나 갔다 오자.’
나는 털레털레 목욕탕으로 향했다. 혼자 목욕 오는 사람은 별로 없다. 더군다나 나 같은 어린애가 혼자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럴 때는 꼭 고아가 된 기분이다. 이럴 때 엄마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서로 등도 밀어주고. 괜스레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찰나, 누군가 다가와 내 등을 밀기 시작했다.
“어, 누구세요?”
고개를 들어보니 한손아줌마였다. 목욕탕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두 뺨이 홍시처럼 빨갰다. 이마에선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 어, 됐어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이래봬도 이 손이 얼마나 힘이 있는데. 이게 한손으로 할 수 있는 것 중 내가 제일 잘 하는 거야.”
아줌마가 한손으로 등을 쓱쓱 밀어주었다. 왠지 황송하고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내가 몸이 불편한 아줌마 등을 밀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웠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몸이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가, 가만있어 봐. 비누칠 해 줄게.”
아줌마의 한 손이 지나가자 등이 시원해졌다. 이런 느낌 처음이었다. 마치 박하사탕을 입에 물고 있는 듯한 느낌.
목욕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도 아줌마는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체, 황급히 목욕탕을 나오는데 할머니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손으로 어찌나 시원하게 등을 밀어주는지 몰라.”
“난, 그래서 일요일마다 목욕 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며느리도 같이 오기 싫어하는 목욕인데, 저 이는 얼마나 열심히 따라 오는지.”
“수요일마다 목욕봉사도 다닌다지 아마. 어르신들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며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와서 봉사한다고 하더구만.”
나는 수증기로 꽉 찬 목욕탕 안을 흘낏 들여다보았다. 한손아줌마가 또 다른 할머니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아줌마의 위대한 한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한손이 움직일 때마다 얼굴 가득 행복이 피어나고 있었다.
집에 오는 길에 나는 내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줌마가 예쁘다고 한 이 두 손.
“아참 아줌마가 설거지 해놓으라고 했는데 안 했다! 숙제도 안 했고!”
나는 집 쪽을 향해 뛰어갔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끝>
첫댓글 정말 그런 아줌마가 생존하고 있군요. 한손아줌마 이야기를 동화로 쓴 내용이 감동적이고 재미있네요. 짧고 간결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마음을 일깨우는 것 같아요. 안선생님의 두 손도 훌륭하고요.
평창의 여름은 어떤지 너무 궁금해요. 냇물이 졸졸졸 재잘대며 흐르고, 샘이 심으신 여러 가지 식물들도 잘 자라고 있겠죠?
마음에 확 와닿는 그 무엇이 아~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