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아미타불...()()()....
과거에 몇차례 소동파와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지만, 엉성한 구성에 의심이 있었는데,
이번에 아래 소동파의 일화를 실은 후, 몇차례 검색 결과 그나마 사실에 가까운 듯한 글을 발견하고 옮깁니다.
그리고 오조계선사와 소동파를 예로 들어 수행의 정도를 말씀하신 성철 스님의 법문도 함께 옮깁니다...
공부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소동파 이야기
송(宋)의 소동파(蘇東坡:1036-1101)의 이름은 소식(蘇軾)으로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3소'(三蘇)라고 하여, 당송 8대가에 속하며, 혹자는 임제종 황룡파에 속하는 동림상총(1025-1091) 선사의 제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불인요원(佛印了元:1020/1032~1086/1091)선사와의 교유에는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특히 형남 땅 옥천사 승호선사와의 ‘칭(秤)가’ 이야기, 황주 땅에 있을 때 불인요원선사와의 ‘사대(四大)’ 이야기, 그리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흥룡사의 상총선사와의 ‘무정설법’ 이야기 등은 유명하다.
다음은 ‘명여회(明如會)’의 글로써, ‘허민 sscnkr@gmail.com’에 실린 글을 옮긴다.
소동파의 윤회이야기
당신은 윤회를 믿는가? 자신의 전생에 대해 다소 아는 이가 종종 있다. 미국의 유명 팝가수 마돈나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그녀가 처음 베이징 자금성을 산책할 때 작고 외진 골목길조차 매우 익숙했다. 그녀는 자신이 전생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傅儀)의 여종이라고 단언했다. 또 007 첩보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미국 영화배우 숀 코네리도 얼마 전에 자신이 전생에 아프리카에서 무(武)를 숭상하는 토착민족 의사였다고 밝힌 적 있다.
이는 현대 유명 서양인의 사례다. 동양에서 윤회와 환생은 매우 보편화된 관념이다. 중국 고대에서 이를 기록하는 것도 매우 보편화되었는데 유명한 문인 소동파가 바로 그 중 한 사례다.
“나는 세 번의 생(生)에 수행한 적 있다”
소동파의 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으로 동파는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따온 그의 별칭이다. 현재 많은 사람은 단지 그가 북송의 대문호이자 서예가였음을 알고 있으나 그가 전생에 수행을 한 승려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사실 그는 자신의 시문에서 여러 차례 자신의 전생을 언급한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시 ‘남화사(南華寺)’에서 이렇게 읊었다. “나는 원래 수행자로 세 번 생(生)을 수행했네. 그러다가 생각을 잘못 가져 이렇게 백 년 동안 사람으로 태어났네.” 또 ‘장자야와의 삼절구(三絶句)’에서는 “전생에 나는 항주(杭州)에 이르러 긴 시간동안 노닐었노라”라고 했다.
원풍(元豊) 7년 4월 소동파가 균주(筠州)에 가기 전, 운암(雲庵)스님은 자신이 소철(蘇轍)과 총(聰)스님과 함께 오계스님을 마중하러 성 밖으로 나가는 꿈을 꾸었다. 깨어난 후 매우 이상하게 생각되어 이 꿈을 소철에게 말했다. 소철이 아직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총스님이 왔다. 소철이 “금방 운암과 꿈 얘기를 하고 있었네. 자네도 와서 함께 꿈을 말해보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총스님은 “어제 밤 꿈에 우리 세 명이 함께 오계스님을 마중하러 갔다네”라고 말했다. 소철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세상에 과연 세 사람이 같은 꿈을 꿀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이상하군!”
얼마 안 돼 소동파가 도착하자 이들은 자신들이 같은 꿈을 꾼 이야기를 했다. 소동파는 잠깐 사색하더니 “나도 8,9세 때 전생에 내가 한 스님이었는데 섬우(陝右, 지명) 사이를 오가던 꿈을 꾸었었네. 또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을 때 한 스님이 꿈에 나타나 잠자고 가겠다고 청했다네. 스님은 품위가 있었고 한 쪽 눈이 멀었다네”하고 말했다. 운암은 소스라치듯 놀라며 “오계스님이 바로 섬우 사람이었다네. 또 한 쪽 눈이 멀었었지.” 여럿이서 계산해보니 오계스님은 돌아간 지 50년이 됐고 소동파는 현재 바로 49세였다. 시간, 장소 그리고 여러 사람이 같은 꿈을 꾼 것을 보면 소동파는 바로 오계스님이 환생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소동파는 늘 승복 입기를 좋아했는데 이는 아마 전생의 인연 때문일 것이다.
“전생에 나는 항주에서 긴 시간을 노닐었노라”
소동파가 항주에 있을 때 친구 참료(參寥)와 함께 서호 수성사(壽星寺)에서 노닐었다. 소동파는 주변 정경을 둘러보고 “나는 살아생전에 이곳에 와 본적이 없네. 하지만 지금 본 것은 마치 직접 겪은 듯해. 이곳에서부터 참회당까지 92개의 계단이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사람을 시켜 세어보니 정말로 그가 말한 대로였다. 소동파는 참료에게 말했다. “나는 전생에 산에서 도를 닦던 스님이었지. 바로 이곳 사원에서였어.” 그 뒤 소동파는 늘 이 불당에 머물러 쉬어가곤 했다.
어느날 소동파는 대(大) 시인 황정견(黃庭堅)과 함께 한 노인을 만나러 갔다. 노인은 소동파를 만나서 대뜸 소동파가 전생에 오계스님이며 황정견은 전생에 한 여자였다고 말했다. 소동파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이 없었으나 황정견은 전혀 믿지 않았다. 이에 노인이 말했다. “자네가 부릉(涪陵)에 도착하면 누군가가 알려줄 걸세.” 부릉은 좌천된 관리들이 가는 곳임을 아는 황정견은 생각했다. ‘내가 어찌 그런 곳으로 갈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그는 과연 부릉으로 좌천됐고 몇 차례 꿈에서 한 여자가 그에게 전생의 일을 알려주었다. 그제야 황정견은 노인이 한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일념을 잘못 가져 백년 인생을 살게 되다
오계스님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한쪽 눈이 멀었으며 명오(明悟)라는 사형과 함께 도를 닦고 있었다. 오계는 일념을 잘못 가져 홍련이라는 여자와 간음계를 범했다. 이는 공능이 있는 명오에게 발견됐고 오계는 부끄러운 나머지 다시 속인으로 환생했다. 명오는 오계가 인간이 되어 부처를 비방하고 승려를 비방할 것을 예견했다. 그렇게 되면 오계는 벗어날 길이 없게 되기에 그도 오계를 따라 속세로 환생했다. 이번 생에 오계는 소동파로 환생했고 명오는 소동파의 좋은 친구 불인(佛印)스님으로 환생했다.
처음에 소동파는 정말 명예와 금전에 눈이 멀고 불법(佛法)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불인스님은 포기하지 않고 항상 그를 따르며 마음을 다해 그에게 불법을 권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과 불인스님의 끊임없는 권고로 소동파는 마침내 깨달음을 가졌다. 소동파는 윤회를 깊이 믿었을 뿐만 아니라 불법을 숭상했으며 마음을 조용히 하고 수련했다.
불인선사와 소동파는 후세에 재밌는 이야기를 남겼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마주하고 좌선했는데, 소동파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불인선사에게 물었다. “내가 좌선한 자세가 어떠한가?” 불인선사는 “부처님 같구만”하고 답했다. 소동파는 득의양양해졌다. 불인선사도 소동파에게 반문했다. “그럼 자네가 보기에 내 자세는 어떠한가?” 소동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자네는 마치 한 무더기 소똥 같네!” 불인선사는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아미타불!”
소동파는 집에 돌아와 어깨를 으쓱이며 여동생에게 자신이 한층 더 높다고 자랑했다. 여동생은 연유를 듣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오라버니, 오늘 너무 비참하게 패하셨네요! 불인선사는 마음속이 모두 부처이기에 어떤 중생을 보아도 모두 부처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전부 더럽고 깨끗하지 못한 오라버니는 육근이 청정한 불인선사를 소똥으로 보셨네요. 이는 크게 참패한 것이 아니고 뭡니까?” 소동파는 그제야 부끄러워했다.
송나라 휘종 건중 정국원년 7월 28일, 소동파는 세상과 하직하면서 세 아들에게 말했다. “나는 평생에 무슨 나쁜 일을 하지 않아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너희들은 너무 상심 말라.” 그러면서 그는 “극락세계는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젠 어찌할 방법이 없구나”라고 말했다.
글: 명여회(明如會)
허민 sscnkr@gmail.com
< 저작권자 © 바른 중국뉴스-시사중국 sscn.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오조 계선사의 후신 소동파 거사 이야기
소동파 학사는 오조 계선사(운문종 靑原 下 8세) 후신으로 알려져 있다. 재주가 뛰어 나서 고관이 되어 한 부인과 두 첩을 데리고 살면서 오욕락에 빠져 벗아나지 못하더니, 불인선사가 소동파를 제도하려고 어느날 그의 집에서 자는데 동파가 첩을 보내어 시봉시켰다.
선사가 그 첩으로 하여금 화로 일곱 개를 가져와서 불을 피우게 하고, 한 차관에 물을 부어 넣고 화로에 넣지 않고, 둘째 화로, 셋째 화로, 여러 화로에 옮기면서 차례로 끓였다. 그 첩은 무슨 생각인지 알지 못했고, 선사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차관은 너무 오래 끓어서 물이 다 말라, 결국에는 폭음이 나며 깨졌다. 선사가 웃으면서 그 첩에게 말하기를 밤이 깊었으니 가서 잠을 자라고 했다.
다음날, 새벽에 동파가 그 첩에게 묻되 어제 밤에 선사는 무슨 말씀이 있었는가? 첩은 밤에 본대로 대답했다. 동파가 생각하니 애욕이라는 것은 끊지 못하면 반드시 생명을 잃을 것이, 마치 차관에 물이 마르면 차관이 터지는 것과 같음을 보여주신 것을 깨닫고, 선사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익힌 욕심은 선정의 힘이 아니면 막을 수 없다’ 하고 선정공부를 하였다.
소동파 이야기 관련 성철스님의 말씀
[법어집] 제4편 1장 오매일여(寤寐一如) 01. 영겁불망(永劫不忘)
우리가 도를 닦아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는 영혼이 있어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와 동시에 무한한 고(苦)가 따릅니다. 미래 겁이 다하도록 나고 죽는 것이 계속되며 무한한 고가 항상 따라 다니는 이것이 이른바 생사고(生死苦)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한한 고를 어떻게 해야 벗어나며 해결할 수가 있는가?
그러기 위하여서는 굳이 천당에 갈 필요도 없고 극락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사람마다 누구나 갖고 있는 능력, 곧,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활용하면 이 현실에서 대해탈의, 대자유의, 무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원리입니다.
불교에서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불성(佛性)’이니 ‘법성(法性)’이니 또는 ‘여래장(如來藏)’이니 ‘진여(眞如)’니 등등으로 말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이것을 평등하게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개발하면 곧 부처가 되므로 달리 부처를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생사해탈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일찌기 선문(禪門)에서 조사(祖師) 스님들은 말씀하셨습니다. ‘活句下 薦得(활구하 천득) 산 법문 끝에서 바로 깨치면 永劫不忘(영겁불망) 영겁토록 잊지 않는다.’ 곧 불교의 근본 질리를 바로 깨치면 그 깨친 경계, 깨친 자체는 영원토록 잊어버리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배운 기술이나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잊기도 합니다만, 도를 성취하여 깨친 이 경계는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금생에만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생에도, 내내생에도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동시에 생활의 모든 것을 조금도 틀림없이 모두 다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영겁불망(永劫不忘)이라는 것입니다.
마조(馬祖)스님께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一俉永俉 (일오영오)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서
不復更迷 (불복경미) 다시는 미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깨쳤다가 매(昧)했다 또 깨쳤다 하는 것이 아니고 한번 깨치면 금생, 내생, 여러 억천만 생을 내려가더라도 영원토록 어둠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원오스님도 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一得永得(일득영득) 한번 깨치면 영원히 얻어서
億千萬劫 亦只如如(억천만겁 역지여여) 천겁, 만겁을 두고 그와 똑같을 뿐 변동이 없다.
깨친 경계에 조금이라도 변동이 생기면 그것은 바로 깨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에 따르는 그 신비하고 자유자재한 활동력인 신통묘력(神通妙力)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니, 참으로 불가설 불가설(不可說 不可說)입니다.
대자유에 이르는 길, 곧 영겁불망(永劫不忘)인 생사 해탈의 경계를 성취함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것이 참선입니다. 참선은 화두(話頭)가 근본이며,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하여 바로 깨치면 영겁불망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영겁불망은 죽은 뒤에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습니다. 생전에도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숙면일연(熟眠一如)하면, 곧 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절대 매(昧)하지 않고 여여불변(如如不變)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숙면일여가 여래(如來)의 숙면일여가 되면 진여일여(眞如一如)가 되지만, 보살의 숙면일여는 8지 보살의 아라야(阿梨耶 ; Alaya) 위(位)에서입니다. 제8아라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는 보통 우리가 말하는 나고 죽음에서, 곧 분단생사(分段生死)에서 자유자재합니다. 그러나 미세한 무의식이 생멸하는 변역생사(變易生死)가 남아 있어서 여래와 같은 진여위(眞如位)의 자재(自在)함은 못 됩니다. 그러므로 아라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는 바로 깨친 것이 아니며, 여래위, 진여위에서의 숙면일여가 되어야만 참다운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8지 이상의 아라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만 되어도 결코 죽음으로 인하여 다시 매하지는 않습니다. 영원토록 퇴진(退進)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라야 위에서의 불망(不忘)과 진여위에서의 불망은, 차이는 있지만, 다시 매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은 같습니다. 오매일여도 여래 위에서의 오매일여와 아라야 위에서의 오매일여가 다르면서 또한 같은 것과 흡사합니다.
숙면일여라고 하여 잠이 깊이 들어도 여여한 것이라고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대종사, 대조사치고 실제로 수면일여한 데에서 깨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깨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식심분별(識心分別)이므로 앞 못 보는 영혼에 불과합니다. 봉사 영혼이 되어서 수업수생(隨業受生)하니 곧 업따라 다시 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김 가가 되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되고, 박 가가 되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중처변추(重處便墜)로서 곧 자기가 업을 많이 지은 곳으로 떨어집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입니다. 자기의 자유가 조금도 없는 것을 수업수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유자재한 경계가 되면 수의왕생(隨意往生)하니 곧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습니다.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 김 가가 되든 박 가가 되든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의왕생으로, 불교의 이상이며 부처님 경전이나 옛 조사스님들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의왕생이 되려면 숙면일여가 된 데에서 자유자재한 경계를 성취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부처님 이상가는 것 같아도 그것으로 그치고 맙니다. 몸을 바꾸면 다시 캄캄하여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송나라 철종(哲宗) 원우(元祐) 7년(1092)이었습니다. 소동파(蘇東坡)의 동생이 고안(高安)에 있을 때 동 산문(洞山文)선사와 수성 총(壽聖 聰)선사와 같이 지냈습니다. 그 동생이 하루 밤에 두 스님과 함께 성밖에 나가서 오조 계(五祖戒) 선사를 영접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 이튿날에 형인 동파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동파의 나이가 마흔 아홉이었는데 계(戒) 선사가 돌아가신 지 꼭 오십 년이 되던 때였습니다.
오십 년전 그의 어머니가 동파를 잉태하였을 때 꿈에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여윈 중이 찾아와서 자고 가자고 하였더라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계선사였습니다. 계선사는 살아서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여위었더랬습니다. 동파 자신도 어려서 꿈을 꾸면 스님이 되어서 협우에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계 선사가 바로 협우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들로써 동파가 계 선사의 후신인 줄 천하가 다 잘 알게 되어서 동파도 자신을 계 화산(戒和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동파는 자주 동산(洞山)에게 편지를 해서 ‘어떻게 하든지 전생과 같이 불법(佛法)을 깨닫게 하여 달라’ 하였으나 전생과 같이는 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오조 계(五祖 戒) 선사는 운문종의 유명한 선지식이었는데, 지혜는 많았지만 실지로 깊이 깨치지 못한 까닭에 이렇게 어두워져 버린 것입니다.
실제로 옛날의 고불고조(古佛古祖)는 오매일여가 기본이 되고, 영겁불망이 표준이 되어서 수도하고 법을 전했습니다. 여기에 실례를 들어 이야기하겠습니다.
|
첫댓글 나무아미타불...()()()...아마도 위에 옮긴 소동파의 이야기가 전하는 이에 따라 약간씩 와전되거나 첨삭된 것이 아닌가 싶네요... 읽으실 때 참고하십시요....ㅎ...고맙습니다...그리고 성철스님의 말씀도 함께 싣습니다...공부에 도움이 되시기를....()...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합장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맙습니다 ........._()()()_...
중국의 그 유명한 소동파의 무정설법
화심거사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