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견성(見性)은 견정(見精)이 아니다.
‘아난’(阿難)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世尊)이시여, 이 묘(妙)한 각성(覺性)이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라면, 세존께서 어찌하여 항상 비구(比丘)들에게 말씀하시되,
「견성(見性)이 네 가지 인연을 갖추어야 하니, 이른바 공(空)을 인(因)하고, 명(明)을 인(因)하고, 심(心)을 인(因)하고, 안(眼)을 인(因)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어떠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그것은 내가 세간(世間)의 인연상(因緣相)들을 말한 것이고, 근본진리인 제일의(第一義)를 말한 것이 아니다.
‘아난’아, 내가 다시 네게 묻겠다. 세간(世間)의 사람들이 「내가 능히 본다.」고 하는데, 어떤 것은 ‘본다’하고, 어떤 것을 ‘못 본다’고 하느냐?”
‘아난’이 대답하였다. “세간의 사람들이 해나, 달이나, 등(燈)의 광명(光明)을 인(因)하여 가지가지의 모습을 보는 것을 ‘본다’고 하는데, 이 세 가지 광명(光明)이 없으면 ‘못 본다’고 합니다.”
“아난아, 만일 명(明)이 없을 때에는 ‘못 본다’고 한다면, 암(暗)도 보지 못해야 할 것이며, 만일 암(暗)을 본다면, 그것은 명(明)이 없을 뿐이지 어찌 보는 견(見)이 없다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암(暗)할 때에, 명(明)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못 본다’고 한다면, 명(明)할 때에 어두운 암상(暗相)을 보지 못하는 것도 ‘못 본다’고 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어두운 모습과 밝은 모습인 두 모습을 모두 ‘못 본다’고 해야 되겠구나.
이것은 두 모습이 서로 밀어내고 빼앗는 것이지, 너의 견성(見性)은 그 중간에 잠시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두 경우 모두 ‘본다’고 해야 할 것이니, 어찌 ‘못 본다’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마땅히 알아라. 명(明)을 볼 적에도 보는 견성(見性)은 명(明)이 아니고, 암(暗)을 볼 적에도 보는 견성(見性)은 암(暗)이 아니고,
허공(虛空)을 볼 적에도 보는 견성(見性)은 허공이 아니고, 막힌 색(塞)을 볼 적에도 보는 견성(見性)은 색(塞)이 아니니, 이렇게 명(明)·암(暗)·통(通)·색(塞)의 ‘네 가지 이치’가 이미 성취(成就)되었다.
네가 이제 분명히 알아야 한다. 견정(見精)을 견(見)할 때에, 견성(見性)은 견정(見精)이 아니다.
견성(見性)은 견정(見精)을 여의어서, 견정(見精)으로는 견성(見性)에 능히 미치지 못하거늘, 어찌하여 다시 인연(因緣)과 자연(自然)과 화합상(和合相)을 말하느냐?
※‘견견지시 견비시견(見見之時 見非是見)’을 직역하면, “견(見)을 견(見)할 때에, 견(見)은 견(見)이 아니다”가 되지만, 이 구절의 해설은 옛날부터 여러 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망견(妄見)을 견(見:眞見)할 때에, 그 견(見:眞見)은 이 망견(妄見)이 아니다.”라고 해석한다. 이 구절도 <선문념송(禪門拈頌)>에서 50번째 공안(公案)으로 들어있다.
‘견견지시 견비시견 見見之時 見非是見, 견유이견 견불능급 見猶離見 見不能及’에서 상식적으로 앞의 견(見)과 뒤의 견(見)이 서로 다른 의미인 것은 쉽게 알 수가 있는데, 종래의 견해는 앞의 견(見)을 진견(眞見)인 진심(眞心)으로 해석하고 뒤의 견(見)은 망견(妄見)인 망심(妄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진견(眞見)과 망견(妄見)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망심(妄心)과 진심(眞心)을 구별하면서 여러 차례 반복하여 설명했으므로 부처님께서 다시 이곳에서 중복하여 밝힐 이유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견(見)을 비유로 하여 진짜 마음인 진심(眞心)을 설명하신 법문을 마무리하시면서, 부처님께서 최종적으로 견정(見精)과 견성(見性)의 관계를 재천명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즉 앞에서 견성(見性)을 ‘묘정명심’·‘제일월’로 설명하셨으나, 견성(見性)과 견정(見精)의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강조(强調)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견유이견 견불능급(見猶離見 見不能及)’이라고 하시어 “견성(見性)은 견정(見精)을 여의어서, 견정(見精)으로는 능히 견성(見性)에 미치지 못한다.”고 양자(兩者)의 차이점을 명확히 강조하셨다.
생각하건대, 견성(見性)은 진심의 묘용(妙用)중 ‘능히 볼 줄 아는 놈’을 설명한 것이고, 견정(見精)은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들이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세계의 주파수(周波數)에만 국한되어 ‘보는 견(見)’을 가리킨다.
‘일수사견(一水四見)’의 이야기에서 천상·아귀·물고기·인간(人間)이 견성(見性)은 같으나, 같은 강물을 각기 다르게 보는 것은, 각자의 업력(業力)이 다르고 소속된 세계의 주파수가 달라서 각자의 견정(見精)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견성(見性)과 견정(見精)이 둘 다 ‘보는 작용’인 점에서는 같으므로 앞에서는 ‘보는 견(見)’이라는 단어로 같이 표현했지만, 엄밀하게 보면 견성(見性)과 견정(見精)은 구별된다.
그래서 진심(眞心)을 열 번 밝히시는 마지막 장면에서 “정각묘명(精覺妙明)인 견성(見性)은 제일월(第一月)로, 제이월(第二月)인 견정(見精)과는 다르니,
육정(六精)의 하나인 견정(見精)은 진망(眞妄)이 화합한 것이라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한 진성(眞性)인 견성(見性)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셨다.※
너희들 성문(聲聞)들이 용렬하고 아는 것이 없어서 청정(淸淨)한 실상(實相)을 능히 통달(通達)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너희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니, 마땅히 잘 생각해서 묘(妙)한 ‘보리’(菩提)를 공부하는 길에서 피곤(疲困)하다고 게으름을 피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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