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이민숙
이름 외
이름에 당신이 있다
이름에 그날이 있다
이름 속에서 핏물이 튄다
이름과 이름을 흰 무명無名으로 엮어 던져버린 역사의 비명을 들었는가
이름을 쏘는 총소리
이름을 태우는 불길
태워진 이름, 아버지, 삼촌, 엄마, 그 엄마의 아가!
그 속에는 육체와 정신과 삶과 사랑과...... 그 모든 것을 학살해버린 비열한 권력이 있다
불꽃 튀는 저항 첫 언어, 꽃!
붉은 동백은 청춘을 끌어안고 피다 못해 불처럼 타 버렸다
하늘도 땅도 바다도 함께 타오르던 빨갱이라는 낯선 손가락질!
아이에게 손가락질을 시키던 어른
이웃에게 손가락질을 하던 이웃, 인간은 그때 이웃이라는 다정을 포기했다
역사가 시키고 이념이 시키고 야비한 총칼이 시킬 때
사람은 사람의 이성을 포기했다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은 야비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은 악마
또 다른 침략자 또 다른 이름은 조드*처럼 광폭하다
휩쓸리는 소와 말과 양처럼 처참한 소돔과 고모라의 벌판,
하늘땅 붉은 연기로 뒤덮인 만성리 형제묘**
숨죽인 이름들 입 다문 이름들 셀 수 없고
바람도 햇살도 쐴 수 없이 끌려가 총살당했다 태워졌다
항쟁이었으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고
항쟁 아니었으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곱 살 아기가 무슨 항쟁?
지아비 얼굴 보러 간 지어미가 무슨 항쟁?
밥 지어준 연민은 빨갱이 숨겨준 혈육의 정이 국가반란군?
이름없는 이름은 어디로 갔을까
이름 지워진 이름들 어디에 묻혔을까
거대한 이름도 아니며 생명 아닌 것처럼 시들어 버린 이름들은
살아있음으로 이 땅의 저주를 물리쳐야 할 권리도 빼앗기고
흑두루미처럼 날개 저어 하늘 훨훨 휘저어야 할 자유의 혼도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 무엇 하나, 존귀한 이름 하나 지킬 수 없이 핏물 속에서 피어난 동백이었다
동백은 뜨겁게 진다 툭! 젊음 아닌 절망으로 떨어졌다 투툭!
그 이유를 밝히러 오고 있는 영혼과 육체, 그대라는 세계 누구인가!
*몽골에 불어오는 눈 폭풍
**여수시 만성리에서 자행된 여순1019 학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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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도서관
우리들의 공부는 논어도 중용도 플라톤도 아니다
먼먼 인류의 전쟁사를 가져와 펼쳐놓은 역사 공부는 더더욱 아니다
머리를 뱅뱅 도는 총소리다 가슴을 훑는 비명소리다
우리들의 공부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학교운동장*, 그 곁의 또 다른 학교운동장, 그곳에서 들려오는 군홧발 소리, 개머리판으로 선량한 청년의 머리를
얼마나 잔혹하게 쳐댔는지 들어야 하는 끔찍한 증언이다
눈물을 훔치며 눈물을 먹는 무덤 이야기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메마른 천둥 번개 명령과 침묵뿐이었던
만성리의 파도 소리가 들리는 그곳에서 건너오는 시체 냄새에 관하여,
백 명도 넘게 이미 타버린 육체의 탑이
바윗덩이로 짓눌려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 얽혀버린,
가족도 영원히 볼 수 없게 암매장한 무덤**,
우리들의 공부는 턱없이 논리적이지 못 한
언어와 숫자들이 한순간 다만 죽어버린 생명들을
수습할 수 없는 캄캄한 실존의 구렁텅이다
가족이 있는 집에 있지 말고 운동장으로 나와!
집에 있으면 그건 반란군이야!
철없는 어린아이 말간 눈빛의 청춘 모두 나와 죽임을 당한 어처구니 공부다
우리들의 공부는 ‘왜?’도 ‘무엇 때문에?’도 없는
손가락총의 총소리 공부, 군사재판에 대한 법의 공정한 공부는 아닌,
인간이 인간을 밥 먹였다고 묶어서 감옥에 보낸 공부다
아버지의 죄를 뒤집어쓴 아들이 끌려가고
형 따라 엄마 따라 갔다가 동생이 총에 맞고
끝없는 골목길을 막다른 곳까지 헤매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게거품 공부다
그 사이에 국가와 정의와 합리는 어디로 갔는가?
끝까지 굽힐 수 없이 일본제국주의에 맞섰던 독립투쟁사의 수십 년이
‘일본도’로 돌아와 무참히 목 베어 붉게 물든 흰옷들
죽이고 죽여 파묻으면 묻히는 게 역사인가?
70년 동안 썩히고자 했으나 썩지 않는 ‘진실’ 이곳에 왔는가?
“한 마디 항변도 하지 못하고 완벽히 침묵했다”***는 절멸의 땅 19481019!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우리는 하룻날 온 나라의 썩고 썩어버린 가슴 속 언어들을 되살려
사람을, 하늘을, 땅을 공부한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한(大) 꽃밭에 심으려 한다
이순신 도서관을 둥가 둥둥 박수친다
펜을 들었으니 햇살을 찍어 노래하려 한다
도래할 인내천人乃天, 사람 살리는 시대를 밝히고자 한다
*여수중앙초등학교, 동초등학교 등 1019 진압군의 만행으로 민간인이 처형된 장소
**여순사건 때 켜켜이 쌓인 시체, 아무도 알아볼 수 없이 태워진 형제묘
***칼 마이던스의 사진 기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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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숙|1998년 《사람의 깊이》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나비 그리는 여자』, 『동그라미, 기어이 동그랗다』, 『지금 이 순간』이 있다. 샘뿔인문학연구소에서 책읽기, 문학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