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3월11일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
계곡 바위 위에 세운 거연정[사진/조보희 기자]
(함양=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줄기에 폭 싸인 함양에는 예부터 학문과 덕이 높은 선비가 많이 배출됐다.
신라 최고 문장가로, 동방 18현이었던 고운 최치원이 함양 태수를 지내면서 홍수를 막으려 조성했던 '천년의 숲' 상림에는 함양 출신이거나 함양과 관련 있는 선비 11인의 흉상을 세워 놓은 역사인물공원이 있다.
고운 선생을 비롯해 성리학 대가였던 일두 정여창, 현감으로 재직하며 함양에 조선 최초 물레방아를 세웠던 연암 박지원, 영남 유림의 중심으로 함양 군수를 지냈던 점필재 김종직 등이 흉상의 주인공들이다.
1656년 함양 개평마을 정수민이 편찬한 읍지 '천령지'에는 함양 관련 한시가 수백 편이나 수록돼 있다. 내용은 대개 함양의 빼어난 경관과 뛰어난 인물에 대한 칭송이다. 함양이 피운 학문의 꽃은 안동과 겨루었다.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이 생긴 연유다. 자연은 사람을 키우고, 사람은 자연을 닮는다. 명산의 정기는 선비를 키웠고 선비는 학문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화림동 계곡[사진/조보희 기자]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데 있다
옛사람들은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데는 없다'고 했다. 자연의 경치와 인공의 운치가 모두 갖추어진 데는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는 뜻도 된다. 그런데 산, 물, 정자가 모두 좋은 데가 있다. 지리산 언저리에 있는 함양 화림동 계곡이 그곳이다.
비단 자락 같은 남강천이 빚은 계곡을 따라 옛 선비들이 멋과 풍류를 즐기던 공간인 정자가 7개 세워져 있다. 산, 숲, 바위, 여울, 못, 소가 어우러지고, 이들을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에 정자가 있다. 거연정, 군자정, 영귀정, 동호정, 람천정, 농월정, 구로정이 그들이다.
화림동 계곡은 멋스러운 정자와 시원한 너럭바위가 많아 '팔담팔정'(八潭八亭)이라 불렸다. 정자가 계곡 따라 줄지어 선 곳은 함양이 유일한 것 같다. 함양을 '정자 문화의 1번지'라고 부르는 이유다.
화림동 계곡은 과거 보러 한양에 올라가던 영남 유생들이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에 지나야 했던 길목이었다. 유생들이 잠시 쉬며 주먹밥으로 요기하던 곳이 이 정자들이기도 하다.
화림동 계곡과 정자의 조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길이 '선비문화탐방로'이다. 2006년 완공된 이 길은 거연정에서 시작해 구로정을 지나 광풍루까지 이어진다. 거리는 10㎞ 정도이다. 1구간은 거연정∼영귀정∼동호정∼농월정 코스로, 6㎞이다. 2구간은 농월정∼구로정∼오리숲(광풍루)까지 약 4㎞이다.
계곡 가장자리를 따라 조성된 탐방로에는 대부분 데크가 깔려 있어 걷기가 쾌적하고 즐겁다. 걷다가 정자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거나 너럭바위에 앉아 마치 선비처럼 시 한 수를 읊어볼 수도 있겠다. 정자 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1구간을 탐방했다. 유유자적하다 보니 두세 시간 걸렸다.
거연정과 계곡 [사진/조보희 기자]
'평화롭고 조용하다'…거연정
거연정은 멀리서 보면 계류 위에 가뿐히 떠 있는 듯하다. 계곡 가운데 큰 암반 위에 세워져서다. 꽁꽁 언 계곡물은 옥색으로 빛나고 남강천이 얼음 사이로 콸콸거리며 세차게 흘렀다. 바위 위에 정자를 짓기 위해 기둥을 절묘하게 깎았다.
거연정에 도착한 순간 여행의 보람이 밀려온다. 그만큼 거연정의 운치는 빼어났다. 거연정 하나만으로도 함양의 품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거연정 편액의 출처는 주자의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 12수 중 제1편의 시이다. '거연'(居然)은 평화롭고 조용하다는 뜻이다.
琴書四十年(금서사십년)
幾作山中客(기작산중객)
一日茅棟成(일일모동성)
居然我泉石(거연아천석)
거문고와 함께 책 읽기 사십 년을 하였더니,
거의 산중의 나그네가 되었구나.
하루 만에 띠 집을 지을 수가 있으니,
그렇게 나는 샘과 돌과 함께 사노라.
고려가 망하자 옛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켜 두문동으로 들어갔던 인물 중 한 명이었던 전오륜의 7대손 전시서가 1640년께 현재 거연정 위치에 억새로 만든 정자를 처음 건립했다. 거연정은 그 후 화재, 훼철, 재건립 등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거연정 현판과 내부[사진/조보희 기자]
선비문화탐방로의 묘미는 꽤 알려져 서울, 대전, 대구, 광주 등 인근 대도시와 전국에서 탐방객이 적지 않게 찾아온다고 이춘철 문화관광해설사는 전했다.
함양은 얼마 전만 해도 내륙 오지로 통했다. 대전-통영 고속도로가 뚫린 뒤에는 서상IC에서 서울 경계까지 2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다. 서상IC는 덕유산 육십령에서 가까운 나들목이다. 해발 734m인 육십령은 백두대간이 덕유산을 지나 지리산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한 험한 고개이다. 옛날 화적 떼가 들끓어 60명이 모여야 안심하고 넘을 수 있었다고도 하고, 고갯길 굽이가 60개나 된다는 말도 있다.
그처럼 접근하기 어렵던 고개를 고속도로 덕분에 자동차로 몇 분 만에 넘게 됐다. 함양은 영·호남 내륙을 횡단하는 유일한 고속도로인 88고속도로 중간에 위치해 광주, 대구와 쉽게 연결된다. 함양-울산을 잇는 함양울산고속도로는 2024년 완공 예정으로 건설 중이다. 이 도로의 밀양∼울산 구간이 2020년 말에 이미 개통했다. 함양은 남해안에서 가까워 수산물 유통에도 유리한 거점이다.
도로가 사통팔달로 놓이면서 함양은 물류 기지로 탈바꿈하고 있고 관광, 탐방객도 증가하고 있다. 토목 기술이 발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도로 투자를 아끼지 않는 한국에서 오지냐 아니냐를 따지는 기준은 자연 지형이 아니라 교통망이 된 시대 변화를 함양에서 절감할 수 있다.
너른 바위를 앞에 둔 동호정[사진/조보희 기자]
자연을 경영하다…동호정과 농월정
문화재에 대한 전문 지식과 애정만으로 국토 사랑과 답사 열풍을 불러일으킨 유홍준 선생의 가르침 중 하나는 한국 전통 건물을 감상할 때 앉음새를 눈여겨보라는 것이었다. 가령 사찰 건축의 진수는 그 사찰에서 가장 좋은 장소인 부처님 앉은 자리에서 주변 자연경관을 둘러봤을 때 절집과 자연이 얼마나 조화를 이루는지에 있다. 정자의 경우도 마루에 올라 주위 풍광을 체험하는 게 묘미다.
동호정 도끼별 계단[사진/조보희 기자]
동호정은 화림동 정자 중 가장 크다. 굵은 통나무에 도끼로 대충 찍어 발디딤대를 만든 '도끼별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 누에 서면 수백 평에 이르는 널찍한 암반들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이 정자 기둥 사이로 보인다. 한 장의 사진 같다. 동호정은 남강천 담소 중 하나인 옥녀담 옆에 있다. 강 가운데는 노래를 부르던 바위(영가대), 악기를 연주하는 바위(금적암), 술을 마시며 즐기던 바위(차일암)가 있다. 차일암은 해를 가릴 정도로 크고 넓다는 뜻이다.
너른 바위에 영가대, 차일암, 금적암 등 글씨가 새겨져 있다.[사진/조보희 기자]
농월정도 1천 평이 넘는 너럭바위 위에 있다. 정자 앞에는 '달의 연못'이라는 월연이 있다. 여기서 '농월'(弄月)은 '달을 즐기다'라는 의미 이상을 품고 있다.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 참판을 지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가 지었다. 그는 병자호란 때 굴욕스러운 강화가 맺어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했다.
중국 전국시대에 제나라가 망하면 "나는 동해로 걸어 들어가 죽겠다"고 맹세한 제나라 선비 노중련처럼 지족당은 동해에 빠진 뒤 달빛으로 떠올라 세상을 밝게 비추겠다는 의지를 실어 농월정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바위에는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之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짚신 신고 지팡이 짚고 찾아왔다는 뜻이다.
농월정과 지족당 박명부의 발자취를 기린 글씨 '지족당장구지소'.[사진/조보희 기자]
시가문학이 발달했던 전남 담양에도 소쇄원, 명옥헌, 송강정, 독수정, 식영정 등 이름난 누각과 정자가 많다. 담양 정자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순응의 원리를 잘 구현했다면 화림동 정자 건축의 특징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데 있다. 유홍준 선생은 호남 정자는 자연과 흔연히 일치하는 조화로움과 아늑함을 보여주는데 영남 정자는 계곡과 경승지에 세워져 자연을 지배하고 경영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고 설명했다.
건축 문화는 집 짓는 기술과 기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건물과 함께 한 사람의 정신에 그 참모습이 있을 것이다. 선비의 문화 공간이었던 정자는 소박하면서도 훌륭한 건축 문화임이 틀림없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2년 3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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