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는 고3인데 그래 놀아도 되나?
지난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7년전에 종친회를 마치고 영모당 문턱에서 잠시 쉬시는 장군할배의 사진을 발견했다. 물론 바늘이 가는데 실이 않갈소냐? 영자 조자 형님과 함께.
그 두분은 국민학교 다니실때 부터 극진히 친해셨던 모양이었다. 형님은 대구에 일찍 나오셔서 경북중학을 다니셨는데, 장군할배는 포항서 동지중학을 다니셨다. 그당시 동지중학은 3류 중학이라고 할수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형님이 장군할배에게 경북고등학교에 같이 입학시험을 치자고 권유한것이다.
할배가 동지중학교에서 경북고등에 지망한것 자체가 대단한 용기였지만, 거기에 합격하셨다는 사실이 하나의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영자 조자 형님이 무슨 말로 장군할배를 설득하신건지
궁금하기도하다. 하여튼간에 형님의 권유로 장군할배가 경북고등학교로 가셨고, 다음은 육군사관학교를 가셨고 수도경비사령관까지 역임하신 인생의 역사가 이루어진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에 남들은 대학입시 공부준비 한다고 절에가는 친구들도 있고
특별수업을 받는다고 하는데, 나는 입암에 들어왔다. 아예 대학은 사범대학에 가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그 당시 사밤대학은 특차였고 또 성적이 좋으면 등록금 면제였다. 나는 집안 형편이 그러니 사범대학 문리과를 졸업하고 중학교 문리선생을 하기로 결씸했었다.
3학년 1학기 까지 내 성적이 이과에서 일등이였으니까, 이젠 수험공부도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고향에 와서 매일 매일 개천에 나가 물에서 놀고 물고기 잡아먹고 가끔 막걸리도 마시며 신나게 놀아뎄다. 우리가 즐겨 놀던 곳이 국민학교 밑에 얼마 않가서 인데, 하루는 육군사관학교에 다니신다던 할배가 신작로를 걷다가 갑자기 내이름을 크게 불으면서 신각로로 올라오라하셨다.
병자 식자 할배는 우리 또리인데는 어려운 존재였다. 나이는 몇 살 밖에 위가 아니지만, 우선 학렬이 할배고 거기다 워낙 과묵하시고 육사 유니폼을 입고 동네를 거느시면 위웜이 넘쳤다.
그런 할배가 갑자기 나를 신작로까지 부르셨다.
한참 쳐가 보시더니 갑작이 하시는 말이 “영진이 니 고3인데 이래 놀아도 되나?”
그리곤 갈길을 가버리셨다. 나는 그 신작로 한복판에 서서 한참 정신을 잃었다.
내가 국민학교 일학년부터 고3까지, 공부 잘한다, 공부 너무하지말아라, 몸 약해진다, ….이런 말은 흔히 들었어도 내 보고 공부 더하라고 힐책한 사람은 여태껏 아무도 없었다.
기분이 울쩍해서 놀던거 다 팽개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그래, 할배가 육사에 갔지만 고등학교때 내 같이 일등도 못한 사람이 내인데 공부 않한다고 질책을 하니…
밤새 생각을 해보니, 지금까지 일등을 했으니 일등으로 졸업하는게 맞는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대학입시가 문제가 아니라,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 같았다. 그래서 다시 책을 들기 시작했다.
만약 그때 할배의 비난을 듣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됬을까?
아마 사밤대학을 갔었겠지. 문리선생이되었겠지.
내가 할배의 충고를 받아드렸기에 경고 이과에서 뛰어나게 일등으로 졸업했었고, 모교의 명예을 걸고 서울공대에 입학원서를 낸것이었다. 비록 합격을 했어도 서울대학은 가지 않고 우선 모교 명예를 살려줬으니 일년 쉬다가 다시 사밤대학으로 갈려고 했다.
그러나 나의 일생은 내 생각과 계획데로 된것은 아니었다.
“영진이 니 고3인데 이래 놀아도 되나?”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게 울린다. 할배의 말 한마디에 내 인생이 바뀌었다.
장군할배의 추모비를 세운지도 3년이 넘었구나!
사진을 보니 할배가 더 보고싶구나.
첫댓글 좋은 추억을 갖고있어 기쁘겠씁니다.
인생의 앞길이 우연한 기회에 말 한마디가
바뀌어 지게하는 경우가 있는데 행운의 사람입니다.
병식 할배, 영조 형님, 그 또래와 우리 쥐띠 36년생이 클 때.
그 때가 우리 문중이 제일 좋을 때인 것 같습니다.
70년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많지 않은 나이지만 살아보니 사람의 인생중에 우연한 작은 자극이나 조언이 이후의 전 생애를 바꾼 경우가 꽤 있는 거 같습니다. 장군할배의 그 말씀도 그런 경우이네요.
저도 어쩌다 비슷한 학교를 다니는 과정에 종손아재의 영항도 좀 받은거 같습니다.
동암장학회 학생들 중에도 일부는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을 수 있고요.
문중이 해야할 사업이 있다면 그 중에 훌륭한 사람을 키우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나. 건축사업이나 장학회와 같이 큰 사업도 물론 대단히 중요하지만, 포상제도를 활용하거나 젊은 층의 의견을 수렴해서 좋은 아이디어를 낸다면 큰 자금을 들이지 않고도 인생의 긍정적 큰 변화를 이끌 자극제 역할을 할 방안도 찾을수 있을겁니다.
예를들어
"자랑스런 안동권문 인재(가칭)"
"효자상" "효부상" 또는 "효행상"
또 다른 상 등
이런상은 돈이 얼마들지 않더라도 명예로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며 더욱 그렇게 되도록 정진시킬겁니다.
혹 나중에 정계에 나가더라도 내가 문중에서 효자상을 받았다 등등
자네가 문중포상위원장이니까, 좋은 아이디어를 정리해서 종회에 재출해주면 좋겠다.
동암장학회도 소 규모나마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는데, 전 처럼 장학위원들을 각 집안대표로 구성하는건 이제 하지 말고, 포상위원에서 자네가 맡아 해주면 좋겠다. 일년에 한, 두명 생각하고 있으니, 카페가 주관해서 application을 받도록 하면 좋겠다. 만약 장학위원을 둔다면 동암장학생들 중 몇명 (봉사할 뜻이 있는) 선택하면 좋겠다.
@권영진(종손) 이번 가을 아재께서 서울 오셨을때 동암장학생 몇몇을 불러서 의견을 청취해보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젊은 이들이 자랑스러워할 상의 명칭을 정해 일년에 몆명씩이라도 상을 주는 방안을 논의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