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로서 병원(의원)을 찾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다. 물론 간단한 치료나 처방이야 그렇지만 좀 심각한 상황이 되면 생각이 깊어진다. 병원의 규모를 따질까? 시설을 따질까? 치료비를 계산할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일 큰 관심은 어떤 의사일까 하는 궁금증이다. 나를 치료할 의사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그가 그 분야에 잘 준비된 사람인지? 실력은 어떤지? 임상경험은 많은지? 주변인들(동료, 환자)의 평판은 어떠한지? 무엇보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어떠한지? 등등 궁금증 목록은 점점 길어진다.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으로부터 이런저런 추천, 권고, 이야기들을 귀담아듣는다.
구도자로서 교회를 찾는 일도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요즘처럼 가나안 신자들, 유목민 신자들, 서핑 신자들이 늘어가는 판에 역으로 제대로 된 교회를 찾아 나서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소리도 들린다. 물론 가축 본능에 따라 세류에 휩싸여 덮어놓고 찾아가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생각이 있거나 믿음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은 교회를 찾아가는 기준들이 위에서 언급한 병원과 의사를 찾아가는 사람의 심정과 과히 다르지 않겠다는 것이 나의 소박한 생각이다. 교회 규모를 보고 갈까? 목회자의 유명도를 보고 갈까? 교회 안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결정할까? 교회 학교의 제도나 시설이 매력적일까? 동향 사람들의 억양이 잡아당기는 자석일까? 강요하지 않을 듯한 교회인가? 교인들의 친절성일까? 설교자의 호소력 있는 메시지일까? 이것 역시 목록이 길어질 것 같다. 교회를 쇼핑하는 사람들 역시 주변 사람으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와 추천을 받는다. 그리고 찾아가기 전 인터넷으로 검색한다.
교회나 병원이나 본질에 가까이 있어야 하리라. 무엇이 교회나 병원의 본질일까? 무엇이 목사와 의사에게 본질적 사명일까? 아마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환자/교인에게 좋은 소식은 “근본적 치유”(우리는 “구원”이라 한다)에 있다. 치유(구원)로 가는 길이 언제나 쉬운 것도 빠른 것도 아니다.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때로는 장기간 약을 복용 해야 한다. 때론 험한 수술실에 들어가야 한다. 아픔과 고통을 견디어 내어야 한다. 격리의 시간도 있다.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해야 한다. 모르핀으로 고통을 잊게만 하지는 않는다. 달리 말해 십자가의 어두운 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부활의 환한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 아마 이것이 병원이나 교회가 추구하는 본질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의료인(의사와 목사)은 무엇이 환자에게 좋은 소식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의과대학과 신학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의 의과대학은 차지하고서라도 한국의 신학교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고 안타깝고 부끄럽기 이루 말할 데 없다. 정말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니 현재의 한국 교회의 추한 몰골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라.
얼마 전 건강 검진 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갔다 온 후에 병원에서 보내온 문자를 받아보고 잠시 입이 얼어붙었다. 충격적인 메시지였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살면서 이런저런 문제로 병원에 들락거리는 일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병원이나 의사로부터 한 인격체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나 하는 의문이 종종 들었다. 한국의 의료 체계 아래 이른바 인격적 대우를 받는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예를 들어, 건강 공단의 의료수가(醫療酬價) 책정 때문에 병원과 의사는 많은 환자를 봐야 하고, 충분한 수입이 있어야 병원도 운영하고 직원도 월급을 주고 해야겠지. 경쟁적 의원들이 얼마나 많은가? 수도권 대로변 건물의 2층 이상을 바라보라. 수많은 병원(의원)이 개업하고 있지 않은가? 예전에는 상가에 들어있는 교회들이 많다고 비난하고 아우성치더니, 요즘 보니 도시에 몰려있는 의원들이 엄청 많다는 것은 나만 아는 기밀인가? 지방에 공공의료원에 연봉 3억 6천만원을 준다 해도 의사를 구할 수 없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경남 산청군 보건의료원). 도대체 이게 뭐지? 이런 한국적 상황에서 환자를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이 어찌 그리 쉽겠나? 마치 중대형교회 목사들이 교인 개인들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위해 개별적으로 진심 어린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시 돌아가 내가 놀란 것은 종합 건강 검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며칠 결과를 기다리는 중에 병원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문자 때문이었다. 사실 과천에 사는 내가 굳이 동네 의원들을 마다하고 거리가 있는 수지까지 병원을 찾아간 것은 신뢰할만한 추천자 때문이었다. “일터 신학”의 중요성을 강의할 뿐 아니라, 실제로 일터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신앙과 실제를 일관성 있게 통합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기독 의사들이라는 추천자의 말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분들이 보내온 문자는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리라 생각되어 충분히 공개할 수 있다고 판단되어 여기에 싣는다.
“교수님, 안** 원장입니다. 우리 병원을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웃사랑 실천과 사회공헌을 목표로 개원을 했습니다만, 심심치 않게 제 마음속엔 이렇게까지 남을 위해야 하는 나쁜 마음이 들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원하시는 것들을 우리병원에 적용하는 데에 지혜가 부족하여. 한계를 느끼기도 합니다. 교수님과 사모님께서 찾아주신 것이 큰 힘이 됩니다. 우리 병원의 기도 제목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 다른 마음을 품거든 망하게 해주십시오-입니다. 세상의 방법과 타협해서 성공하니 그전에 망해서 정신 차리는 게 오히려 이로울 것입니다. 생각나실 때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 중 혈액검사 결과 및 조직검사 결과가 확인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다른 마음을 품거든 망하게 해주십시오!” 세상에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목사를 본 적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부끄러웠고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 그 자체였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여 살지 않겠다는 신앙 고백이 어찌 쉽게 입에서 나오겠는가? 입술을 깨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고, 때론 하늘을 향해 소리치며 외치는 고백이리라. “주님 이 땅에 이러한 목사들, 신학자들, 의사들, 검사들, 판사들, 교수들, 정치가들, 사업가들, 전문가들이 많이 생겨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첫댓글 아멘입니다~!!!
그 병원 어딘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