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재수를 했고, 3년 간 학보사에서 일했습니다.
학보사에서 일하던 시절 이야기를 적어볼랍니다.
학교마다 체제가 다르긴 하지만,
학보사의 임직원 승진 체제를 따라 글을 풀어 봅니다.
(임직원이라고 하는 것은 회사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기자들도 자신의 언론사를 가리켜 "우리 회사"라고
부릅니다. 대부분 학보사의 체제는 언론사의 체제를 좇고 있습니다)
처음에 입사한 기자를 수습기자라고 부릅니다.
대개 짤막한 정보전달 위주의 단신 기사를 송고하며,
신문사 내 갖은 잡일들을 도맡아 합니다.
신문사 청소, 식사 주문, 기자 모집 플랜카드 부착 등등
다채로운 잡일들이 기다리고 있죠. 군대로 치면 이병이겠습니다.
1학기 뒤 정식 기자로 승진합니다.
이때까지는 살만하죠. 좀 실수해도 "니가 수습이니까 그렇지..."
하며 봐주니까요.
다음은 기자입니다.
기자부터는 모양 그대로 카메라 들고 뛰어다니고, 갖은 취재의 현장에서
발바닥에 굳은 살을 박게 됩니다. 말이 좋아 취재지 사실 막노동입니다.
총학생회의 선거나 등록금관련 긴급 회견 등에는 새벽을 넘기기 일쑤입니다.
저같은 경우 3일 연속으로 꼴딱, 말그대로 한숨도 못 잔적 있습니다.
첫날 총학생회에서 사건이 터졌고, 둘째날 회견이 있었으며, 셋째날 학교본부와
총학생회가 치고받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수업?
당연히 못들어가죠. 언제 일 터질지 모르는데... 덕분에 학점은 2점대를 고수하게 됩니다.
아, 수업을 안듣는데 어떻게 2점대가 되냐구요?
신방과나 국문과 같은 경우 교수님들이 가끔 봐주시기도 하고, 재수좋으면 동문 교수님의
경우 학보사 선배이신 분들도 있거든요. 그런 분들에 의해 B0, B-를 맞으면 로또 터진거죠.
취재를 하면서
취재원이 날 놀려먹거나, 막말에 욕설 등 갖은 모독적 상황에서도 침착해야 합니다.
내가 취재원을 도발해서 긁어와야지 내가 흥분해서 팔팔 뛰면 기사를 못쓰니까요.
기자 생활 1년만 하면... 그야말로 해탈의 경지에 오릅니다. 그래 너는 지껄여라 나는 듣겠다.
특히 교수가 보직을 맡는 처장들을 취재할 경우 욕설은 필수옵션으로 들어갑니다.
왜냐면 처장 만날 일은 방만운영 등 구린 일 터졌을 때 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면, 군대에서 말하는 사수가 됩니다.
네, 후임을 받는다는거죠.
수업은 못들어가, 날마다 밤은 꼴딱 새, 집에만 들어가면 코피가 쏟아져...
그러면서도 수습기자로 들어온 후임들에게 열심히 인수인계를 해줘야죠.
이 시기 개인의 사생활은 완전히 없어집니다.
밥도 편집국에서 먹어, 모자란 잠도 편집국 야전침대에서 때워, 눈만 뜨면 취재에
기사 작성 해야 돼...
모든 학보사는 군대식입니다. 나이 학번 그딴 거 다 필요없습니다.
학보사 입사한 순서대로 선후배 매겨지고 매우 엄격합니다.
저는 재수해서 대학 들어갔습니다만...
수습기자 때 한 살 어린 사수에게 멱살 잡히고 쌍욕을 들어먹은 적 있습니다.
기자 때는 역시 한 살 어린 차장에게 깨져보고, 차장 때는 동갑인 부장에게 깨졌지요.
부장은 제 첫사랑(짝사랑...ㅋㅋ)이랑 같은 과 동기였습니다. 동갑인 여자애한테 혼나는 기분이란
이런거군 싶었더랬죠.
예전에 크라우스 옹이 위에 사수한테 "네 마누라는 너 같은 자식한테 왜 시집왔대냐" 식의
모욕을 받고 식식거렸던 것 같은데... 그 기분 알만하더이다.ㅋㅋ
마지막으로 저에게 줄빳다를 선사한 편집국장은... 제 고등학교 동창의 친구였습니다.
뭐 이런 것도 회사와 다를 바 없겠지요?ㅎㅎ
아, 데드라인 이야기를 안했군요.
기자에게 데드라인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왕에 일정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학보사의 한 주 일정은 대개 이렇습니다.
월 - 편집회의 및 2차 실무회의
화 ~ 목 - 취재
금 - 데드라인
토 - 조판
일 - 편집위원회 회의 및 1차 실무회의
주말에도 늘 직장에 매달려 있습니다. 죽죠 아주.
오히려 주말이 제일 중요합니다. 토요일에는 신문을 찍고,
일요일에는 다음주 신문 제작을 위한 회의를 해야되거든요.
그걸 월요일까지 이어서 하구요.
웬만한 능력이 있지 않고선 학보사 바깥의 인물과 연애는
꿈도 꿀 수 없는 구조가 되버립니다.
주중에도 바빠 주말엔 더 바빠... 직장인이 따로없죠?
직장 생활 한 오년 십년 일찍 해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데드라인 deathline , 말그대로 죽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죽습니다.
취재 결과가 시원찮다? 간부들에게 혼납니다. 편집국장이 남자라면?
줄빳다를 맞기도 하죠. 기사가 잘 안써진다?
(글은 그냥 쓰는 게 아닙니다. 문맥에 맞게 써야되고, 팩트 전달이
충실하게 되야하므로 수백번의 교정을 거칩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깨지는 거죠. 이러니 '기사가 잘 안써진다'고 하는 겁니다)
조판하러 인쇄소 가기 전까지 붙잡아야죠. 그래도 못쓰면 왕창 깨지고...
그래도 걔중에 글 잘쓰는 놈은 축복입니다.
왜냐면 동기들 피 토하고 있을 때 혼자 당당하게 퇴근(?)을 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런 놈들은 거의 십년에 한 번 꼴로 본다고 합니다만...
데드라인의 매력은 일단 자기 것만 다 잘쓰고, 간부들의 교정을 통과하면
끝이라는 겁니다. 그럴 일이 없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래도 걔중에 그렇게 하는 애들은 간부들도 아주 함부로 못 대하긴 합니다.
왜냐면 열악한 근무조건에 이직률(?)이 높아서 나가버리면 어쩌나 싶은거죠.
사실 요새는 학보사를 지원하는 애들이 적어서, 인력난이 심각합니다.
제가 있을 때만 해도 임직원이 채 스무 명도 안됐으니까요.
어쨌든-
낭중지추라잖습니까. 잘난 놈은 죽어가는 판에서 외려 도드라져 보입디다.
기자생활의 백미는 술입니다.
내가 술을 먹는건지 술이 나를 먹는건지 모릅니다.
학보사의 스트레스 해소는 무조건 술입니다.
치고받고 싸운 취재원과의 화해? 네, 역시 술이죠.
그래도 교수나 학교 직원과 마시면 법인카드로 술값 계산해줘서 땡큐죠.
언젠간 14일 연속으로 깡소주 쳐마시다보니 각혈을 해본 적도 있습니다.
저와 14일을 함께했던 동기 여자애는 피똥을 쌌다고...
이거 뭐 코피에 각혈에 피똥에 아주 피터지는 일상이군요.
이러다보니 차장 쯤 되면 저절로 주당이 되어 있습니다.
주당 간부들은 당연히 후임들을 쳐 죽입니다.
술자리가 새벽 2시에 끝나면 정말 일찍 끝난거고, 보통 네 다섯시에 파토를 칩니다.
제 몸 못가누는 여자 간부가 맛이 가면?
네, 당연히 후임 기자가 업고 자취 하숙집까지 모셔다 드려야죠.
취재를 하기 전날 술 쳐먹느라 술병이 났다?
그래도 취재하러 나가야죠. 그러게 누가 술 잘 못 마시래?
사실 여자 기자들은 술병 때문에 고생하는 일이 적잖습니다.
1년의 기자 생활, 미션 컴플리트.
축하합니다, 당신은 차장이 되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간부군요.
차장은 임기가 한 학기 입니다. 왜냐면 부장 및 편집국장으로 승진하기 전
간부가 되기 위한 견습과정의 성격이 큽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정치싸움이 시작되죠.
대부분의 학보사들은 편집국장 선임을, 전임 부장단과 현직 차장단의 회의로
결정합니다. 그러니 편집국장이 되기 위해선 평소 라인을 잘 타야겠죠.
학보사 국장급은 취업에서 유리한 스펙을 갖습니다(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특히 여자들은 대놓고 취직할 때 써먹겠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죠.
이러니 라인을 탄다는 말이 현실성 있죠. 굳이 안그렇게 따져도, 부장단 사이에서도
함께 기획운영을 할 사이인데 좀 더 말 잘 듣는 녀석한테 이쁨 주는 건 당연하구요.
안 그런 곳도 많겠지만, 제가 있던 곳은 저 때와 제 윗 때 이런 싸움이 좀 심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차장이 되서는 나가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남자들은 특히 그렇죠. 군대 문제도 있지만, 라인 못타서 말도 안되게 치이고 하니
환멸을 장난 아니게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절 갈구던 사수는 차장까지 하곤 그만뒀는데... 라인을 못타서 그랬습니다.
그 사람이 글 하나는 기막히게 쓰고 데드라인 때 유일하게 집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었더랬죠.
능력 하나는 최고였지만 정치에서 능력 먹고 삽니까? 아니죠.
자신이 능력을 인정받았음에도 라인을 못 타 국장 내정을 못받고, 엉뚱한 여자애가
내정되자 바로 나가버렸습니다. 솔직히 울분이 말도 아니었을겝니다.
결국 그 해 바로 군대 가버렸다고 하더군요.
이것 역시 기업과 다를 바 없지요? 살벌합니다.
자, 이렇게 한 학기를 마치면 드디어 부장단이 됩니다.
여기선 학보사들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학보사의 경우, 임기가 이렇습니다.
수습기자 - 1학기
기자 - 1년
차장 - 1학기
부장 - 1년
즉 3년의 기간이 있는 셈이죠. 그리고 각 부서의 부장들과 편집국장은
같은 기수입니다. 여기서 차이가 있는데, 부장 1년을 마친 뒤에 편집국장이 될
자격이 주어지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 곳은 대학 4년 내내 신문만 만들어야겠죠.
부장이 되면 드디어 여유가 생깁니다.
직접 취재를 하는 일이 적어지니까요. 보통 교정을 많이 봐줍니다.
취재를 적게 하는 대신에 비중있는 사람들과 하게되니 좀 더 긴장하고, 또 노련해집니다.
예컨대 대학 총장이나 학장들을 만나는 사람들은 부장들입니다.
이 밖에 사회의 유명인사들 역시 마찬가지구요. 대기업 CEO, 언론인, 기관장 등등.
저는 직책이 취재부장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만날 일이 더 많았습니다.
3년 전에는, 편집국장과 취재부장이 동행하여 이명박 - 박근혜 - 정동영 - 권영길과
인터뷰도 했었으니 그 비중이 어떠한지는 알만하겠죠.
삐끗해서 오보 내버리면... 뭐 설명 안해도 되겠죠?
드디어 모든 임기를 끝마쳤을 때, 꼭 사회생활을 마치고 은퇴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돌아보고나니 아 이게 사회였구나 싶었죠. 후련하면서도 이젠 뭐하나 싶은 섭섭함?ㅎㅎ
뭐랄까요, 이렇게 고생을 하고 나니까 나중에 취업 할 때는 좀 편한 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한 번 고생을 해봤으니, 또 고생하기 싫은거지요.
날마다 야근해, 나보다 어린 간부들 눈치 봐, 정치싸움에 정신은 피폐해지고 술병에 몸은 축나...
그래도 나중에 또 기자하라면 할 생각은 있습니다. 그래도 매력이 있으니까요.
기자를 하고 싶어 학보사에 지원한 거고.
(요샌 스펙 쌓는답시고 오는 것들 때문에 분위기 망치는 일도 많지만)
아무튼, 돌이켜보면 힘들고 짜증나는 일도 많았지만
추억으로 남은 학보사 생활이었습니다.
혹시나 학보사 혹은 언론사 지원할 분들께
눈요깃감이라도 되었길 바라며...
재미 없는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첫댓글 도움되고 유익한 글 잘봤습니다. 전 대학시절에 학보사란게 상당히 아마추어틱하고도 풋춧한 추억꺼리로만 여겼었는데, 경험하신 님의 글을보니 사회에서의 메이저신문사의 축소판이군요...처음 알았답니다.
학보사 혹은 언론 쪽엔 별 관심 없지만 개인의 체험수기라 재밌게 봤어요..^^ 긴 글 노인정에 선물 해 주셔서 감사 드리구요~ 앞날에 행운이 가득가득하길 빌께요~^^
요즘은 학보 혹은 학교신문 출신에게 언론취업할 때 인센티브 없나? 우리때는 있었는데....
실례지만 학번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80년대 학번까지는 편집국장 경력이 있으면 언론사에서 따로 전형을 통해 특채하기도 했었습니다. 메이저 학보사(서연고 + 한중이경)의 경우 부장급도 전형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이런 특채가 없어졌고, 지금은 언론관련으로 관심 좀 있었군 하는 식으로 봐줍니다. 딱히 인센티브라... 글쎄요. 서울대학보사라면 모를까 고려,연세 쪽도 국장이라고 봐주진 않더군요.ㅎㅎ
고대92학번입니다 스카이 학보사 및 신문사 국장정도면 언론취업시 인센티브가 확실히 있던데요^^ 요즘은 바뀌었나 보군요...바람직하네요
요새도 이런게 있나?? 학보사는 맨날 사람모잘라서 365일 사람모집하던데... 두들겨패고 갈구다가 한명 그만둬버리면, 나머지가 다 힘들텐데... 글쓴이 진짜 고학번이신듯 ㅋ
학보사가 항상 사람 모자라는건 맞지만, 두들겨 패는건 못봤음
정식 신문사도 아니고 학보사면서, 지들끼리 수습 기자 차장 국장 이러는거 외부인들이 보면 졸라 웃기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유치하다
애들 등록금 쪼개서 그걸로 신문 펴내는 거다. 그러니 치밀하게 운영을 해야지... 그냥 동아리처럼 "아 형님~ 술이나 한 잔?ㅋ" 이런 식으로 운영하면 쓰겠냐. 유치한 게 아니라 저렇게 운영하는 게 맞는거다.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