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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의 노래
1951. 3. 1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왕십리 일대 모습. 멀리 고려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과 후암동 일대.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경복궁과 중앙청 일대.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1951. 3. 16 지붕 한쪽이 내려앉은 세종로 칭경기념비전.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대한제국 시대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칭경기념비전
1951. 3. 16 폐허가 된 종로일대. AP통신 맥스데스퍼 촬영
1951. 3. 17 전쟁중에 열린 서울의 노천시장.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1. 3. 19. 구호 양곡을 먼저 탄 소년과 양곡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주민들의 표정이 밝다.
1951. 3. 23 폐허로 변한 명동, 충무로 일대.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1. 4. 3. 한국전쟁에 참가한 미군 전선시찰. 왼쪽부터 리지웨이 중장, 히키 소장, 맥아더 총사령관
1951. 4. 23. 중공군 춘계 대공세로 다시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1951. 4. 25 지게에 아이와 짐을 지고 세종로를 건너는 아버지.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3. 4. 26 중앙청 앞 휴전반대 시위.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3. 4. 26 휴전반대 시위.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1. 4. 29 한강 인도교 아래 부교를 건너 서울로 돌아오는 피난민 들. AP통신 맥스데스퍼 촬영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내일 무슨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가 없었다. 영화 '금지된
장난' 처럼 언제 적의 포격이 떨어질지도 모르기에 간단한 세간을 지고, 이고, 정처 없이 남으로 향하며 흔들리는
부교에 몸을 맡껴야 했다.
1951. 5. 3 거리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들.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1년 5월 22일 - 국군 6사단, 용문산 전투 대승
용문산 전투- 이 전투는 1951년 한국군 제 6사단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막아내는 방어전투의 모범으로서
6.25전쟁 최대의 전승으로 기록된 전투다. 중공군의 춘계대공세때 중공군 작전사령부는 UN군이 포진하고 있는 지역을
피하고 자기네들이 판단하길 비교적 열세한 한국군 지역을 택해서 용문산 일대에 주저항선을 구축중이던 6사단 지역에
중공군 제 63군 예하 3개 사단이 공격해 옴으로 전투가 시작 되어 우리군은 5월18일 부터 5월 21일 까지 나흘간을 버티
며 반격을 가해 적을 섬멸하고 가평 북방까지 추격하여 60km를 북상시키는데 기여했다. 미 포병의 지원을 받기도 했는데...
1951. 5. 22. 국군 제 6사단 2연대 1대대 중화기 소대(81mm 박격포 반) 장병들이 용문산 전투
사격중인 81mm 박격포
1951년 5월 파로호와 화천댐 모습.
1951. 5. 29. 화천 전투에서 생포된 중공군.
1951. 6. 27. 다리부상으로 소를타고 피난길에 나서다.
1951. 7. 4. 철원. 군트럭에 실려 피난을 떠나고 있다.
1951. 7. 6. 서울, 전쟁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도 시장은 열리다.
1951. 7. 11. 서울시민들이 덕수궁에서 정전회담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다.
1951. 7.19. 강원도 화천의 감자를 캐던 화전민들을 수용소로 데려가고 있다.
1951. 7. 27. 문산, 정전회담 유엔군측 한국인 옵져버들, 좌로부터 손원일, 김정렬, 유재헝, 백선엽
피의 능선전투는 1951년 8월 18일부터 9월 5일까지 강원도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공격과 후퇴를 거듭하며
9월 초가 되도록 능선에서의 공격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능선 왼쪽에서 공격하는 한국군과 오른쪽에서
공격하는 미군의 공격이 성공하자, 적이 점령중인 983고지는 포위 위기에 있었다.
결국 9월 3일 적은 983고지에서 후퇴하였으며, 미군은 9월 5일 14시경 983고지를 점령하였다. '피의 능선' 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능선이 피로 넘쳐 흘러 종군기자들이 이 능선을 '피의 능선(Bloody
Ridge)'라는 이름으로 보도하면서 생겨났다.
1951년 8월 대대적인 지원 포격과 함께 피의 능선 공격이 개시되었다
1951년 8월 피의 능선
951년 8월 피의 능선
1951. 8. 피의 능선
1950. 8. 수만발의 포탄이 작렬하여 민둥산이 된 983m의 피의 능선
피의능선 전투에 대해 기록을 옮겨 본다. 1951년 8월 피의 능선이라는 명칭의 수리봉 983고지 쟁탈 전투로 말 그대로
혈전이였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해발 983m의 고지가 북한군과 한국군 미군간에 치열한 혈전의 무대로 변한것은 곧바로 휴전회담 기간을 이용해 진지를 강화하고 보급물자를 반입하는 통로였던 양구 북방의 계곡일대를 이곳에서 감제 할 수
피의 능선전투의 교훈 - 피의 능선 전투에서 국군 제 36연대는 전사 및 실종 307명, 부상 899명이
발생하였으며, 미군은 전사 및 실종 740명, 부상 2000명이 발생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1만5000여명의
인원손실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산악지역의 조그마한 능선 하나를 탈취하기 위하여2만여 명의 인원손실이 발생하였으니, 고지쟁탈전
의 소모성을 짐작할 수 있겠다. 쌍방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서둘러 시작한 휴전회담이 오히려 수많은 인원손실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었다.
피의 능선 전투에서 또 하나의 현상은 어마어마한 포탄의 소모였다.전투를 지원하는 미 제2사단의
포병단은 하루 평균 105말리 및 155밀리 포탄 3만여 발을 적 진지에 퍼부었다.
따라서 이 기간 중 발사된 포탄은 105밀리기 32만여 발, 155밀리 약 9만여 발이었다. 이를 2.5t 트럭에
적재할 경우 5000여대 분량으로 포진지 주변에는 포탄상자와 탄피가 산을 이룰 정도였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으나. 포로 교환을 위한 이송인지? ..
북한군으로 보이는 자들이 탈의 한 상태에서 트럭에 실려 가고있는 모습이다.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 (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1951. 9. 20. 총구 앞에 한 북한군 병사가 수풀속에서 짐승처럼 기어 나오고 있다.
1951. 11. 27. 판문점 정전회담에서 북한군측 장춘산대표와 유엔군측 머레이대표가 지도를 펴놓고
휴전선 확정을 협의하고 있다.
인민군 포로.
고지점령 후 상,하반신이 잘려진 인민군 시체를 바라보고 있는 유엔군.
1952. 12. 3 꼬맹이들이 중앙청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2. 12. 4.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에 앞서 한국전선을시찰하고 있다.
뒤에 동승한 사람이 클라크 주한 유엔군 사령관.
1952. 12. 4.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에 앞서 한국전선을시찰하고 있다.
1952. 12. 4.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에 앞서 한국전선을시찰하고 있다.
1952.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경.
거제포로수용소 철조망에 걸린 스탈린 김일성 초상화
1952년 5월 9일 한국전쟁 중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중이던친공포로들이 수용소 소장인 도트(Todd)준장을
납치 강금한뒤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16만명에 달하던 인민군 포로들 중 이념상으로 북한에 송환되길
거부하는 반공포로들과 송환을 희망하는 친공 포로들간에 갈등이 점차 심화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임 수용소 소장에 도트 미 육군 준장이 부임하자 친공포로들은 음식에 독극물이 들어갔다고
억지를 쓰면서 단식투쟁을 벌였다. 친공 포로들은 수용소장과의 면담을 요청해 왔고, 그때까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던 도트는 아무 생각없이 그들의 수용동을 찾아 갔다가 순식간에 감금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탱크와 장갑차로 중무장한 유엔군이 투입되어 수용소를 완전히 포위하고 강경진압으로 맞서자 사태의 불
리함을 깨달은 포로들이 72시간만에 도트준장을 풀어주고 스스로 해산했다.
도트준장은 이 사건으로 종신 대령으로 강등된 뒤 불명예 제대를 하고 말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사건은 수용소 내에서 포로들간의 교전이 벌어지고 수용소 소장이 포로들에 의해 포로가
되고 포로수용소 역사상 전후무후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1952. 2. 18.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폭동을 진압하고 있는 유엔군
1952. 2. 18.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을 진압하고 있다.
(위와 같은 이미지인데 왼쪽은 조금 잘려 나갔고 출입문이 조금 더 보인다)
1952. 2. 23 풍선껌을 부는 방법을 소년에게 가르고 주고 있는 미군. AP통신 맥스데스퍼 촬영
1953. 4. 26 중앙청 앞 휴전반대 시위.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3. 4. 26 휴전반대 시위.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3. 5. 8.정전회담 북한측 남일대표가 회담장을 떠나고 있다.
1953. 6. 11. 부산, 학생들이 정전회담 반대시위를 하고 있다.
1953년 최후의 휴전선이 된 백석산 진지
1953. 7. 26.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정전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1953. 7. 27 정전 협정문서 김일성과 클라크 대장의 싸인
남한측의 이름이나 싸인은 그 어디에도 없는 정전협정문.
1953. 10. 23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서울거리
1954. 1. 24 반공포로 귀환 환영.
1954. 2. 16. 귀환을 거부하는 북한포로를 북측 대표들이 설득하고 있다.
6.25란 남·북 그 어느쪽의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모한 전쟁이 아니였던가?..
강대국 간의 얽힌 복잡 미묘함 때문에 38도 선이 그어 졌고, 저들 공산세력은 조국 해방이란 미명으로 남침을
했고, 우리는 자유 민주주주의를 위해 이에 맞써 싸웠다. 기왕 벌어진 싸움이니 내친김에 남북통일을 하여 한
민족끼리 얽혀 살려고 했다. 동족상잔의 무모한 전쟁으로 인한 그 큰 비극을 어찌 말로 다 하랴!.. 전쟁은 종식
된게 아니고 휴전이 된 상태다. 쉬운말로 땅 따먹기 할려다 평행선의 38선이 이름만 바뀌여 대신 휴전선 이란
이름으로 155마일 (약 249.5킬로미터) 삐딱하게 대신 그어져 있다.
여기 실린 사진들은 6.25 가 발발하자 종군기자들에 의해 당시 생생한 기록물을 전세계에 알리게 되었고,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5층 사진자
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사진들과 그 외의 자료입니다. 이미지 날짜의 순서 배열이 약간 틀린
것은 연결되는 사진의 이해를 돕고자 함 인점 양해 바랍니다. 생과 사를 오가는 전쟁터에서 당시의 상황을 사진
으로 기록해 주신 모든 종군기자님들께 진심으로감 사드립니다.
인터넷을 하며 써핑중 간간히 넷상의 흩어져 있는 사진을 수집하여 보관했던 자료중 상태가 양호한 376개를
한국전쟁 63주년을 맞아 6.25를 상기하자는 의미에서 재구성 편집하여 이 게시물을 작성했으며, 자유수호를
위해서 목숨을 받친 호국영령들과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목숨을 잃은 많은 용사들께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해 주신 숭고한 정신을 가슴깊이 기리며 이 작성을 끝맺습니다.
첫댓글 ~우리는 전쟁 직후의세대~ 이흔적들을 안고 살아왔던세대~지금아이들은 이전쟁이 북침인지 남침인지도 모린다 카네~ㅉㅉ
귀한자료 잘봣다~
규대야, 오랫만이다.
언제 족구 또 함 해야 될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