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3일(주일) 낮 설교 - 주현 후 마지막 주[변화주일] -
위의 것을 찾으라!
( 골로새서 3 : 1~10 )
Ⅰ. 「 탐심 」
73세의 ‘무타박 아타머’와 79세의 ‘프랭크 세바스키’는 오랫동안 돈독한 우정으로 소문난 노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두 노인 친구는 호화유람선(크루즈)을 타고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친구 아타머는 평소 슬롯머신을 엄청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유람선에 탑승한 후 시간만 나면 슬롯머신 앞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친구 세바스키도 아타머와 함께 가끔 슬롯머신을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슬롯머신을 즐기던 아타머는 며칠이 못가서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잃었습니다.
아타머는 세바스키에게 1달러짜리 코인 3개를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친구에게 3달러를 빌린 아타머는 코인 세 개를 넣고 슬롯머신을 당겼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최고 상금인 110만 달러짜리 잭팟(jackpot)이 터졌습니다. 순간 아타머는 기쁨에 겨워 거의 졸도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뿐, 110만 달러짜리 잭팟을 한 손에 거머쥔 아타머에게 친구 세바스키는, 자신이 빌려 준 3달러 코인으로 잭팟이 터졌으니 상금이 자기 거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타머는 세바스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 동안 유별난 우정을 자랑했고, 모두 70세를 넘긴 고령이었습니다. 게다가 한 사람은 전직 ‘혈액학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기계 제조업체’ 사장이었기 때문에 은퇴한 후에도 유람선을 타고 여행할 만큼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해온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잭팟 상금 때문에 마치 원수지간처럼 혈투를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하여, 평소 이들의 우정을 알고 있었던 주변 사람들은 어이없어 혀를 찼습니다.
탐욕은 시기와 질투를 부르고, 결국은 모든 관계를 깨뜨립니다. 인생의 진정한 만족은 물질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오는 것입니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6-17) 성경은 탐심(貪心)을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오직 주님과 함께 함이 참된 행복입니다.
Ⅱ.
우리는 지난 중에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란다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려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유명한 의사를 명의(名醫)라고 합니다. 옛날 중국(후한 말에서 위나라 초기, ?~208)에는 ‘화타’라는 명의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요즘 말로 내과, 부인과, 소아과 등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특히 침술이 뛰어나서 침 하나로 고치지 못하는 질병이 없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 당시에 외과 수술을 할 정도였습니다. 화타가 아무리 대단한 의사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질병을 치료받으려면 화타를 찾아가서 만나야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라게 하시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라게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의 효력이 다다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원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디모데전서 2: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요, 소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만들어 놓으셨지만, 구원받는 그 길로 가라! 그 길로 가야 구원을 받는다고 아무리 외쳐도 그 말을 듣지 않고 굳이 다른 길로 가는 사람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려면, 우리가 주 안에 있어야합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악령과 함께 하면 당연히 악의 열매를 맺습니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저절로 거짓말을 배웁니다. 그래서 좋은 스승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자라나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땅의 것을 벗어 버리고, 위의 것을 찾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저절로 자라게 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십니다.
Α. 우리의 관심을 위의 것에 두어야합니다(1-4).
위의 것과 땅의 것으로 나누면, 마치 이원론(二元論)적으로 설명하는 것 같은데, 모든 것을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으로 보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선과 악이 서로 싸우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언뜻 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빛과 어두움을 같은 가치나 등급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두움은 빛을 물리칠 수 없지만, 빛은 어두움을 물리칩니다. 어두움이란 스스로의 능력이 아닙니다. 어두움은 ‘빛의 결여’입니다. 빛이 없으면 어두움입니다. 빛만 비치면 어두움은 일순간에 사라집니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대립한다기보다, 악(惡)이란 선(善)의 결여(缺如)입니다. 선이 있는 곳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이 없으면 악이 판을 칩니다. 그러나 이원론은 선과 악을 같은 가치와 등급으로 봅니다. 우리가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서로 팽팽하게 대립할까요? 욥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한 범위 안에서 활동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1)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늘(위)의 것을 찾으면서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땅의 것에 관심을 두면, 우리 심령은 땅의 것들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러면 구원받았음에도 지극히 육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의 것들을 찾으며 살아가면, 우리 심령은 하늘의 것으로 가득합니다.
Β. 우리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5-8).
위의 것을 찾으면서 살려면, 당연히 땅에 속한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왜 땅의 속한 지체가 문제일까요? 5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땅에 속한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이 음란입니다. 부정(impurity)이나 사욕(lust)이나 악한 정욕이나 탐심(greed)은 모두 욕심과 관계 되어 있지만,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욕심인데, 모두 음행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홍수심판 이후 불 심판이 임하는데,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입니다. 소돔의 죄악을 이는 말이 있는데, 바로 ‘sodomy’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 하면 ‘동성연애자’를 이르는 말입니다. 성적 타락으로 치달으면, 동성연애로 향합니다. 소돔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로마도 그랬고,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땅에 속한 지체가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땅에 속한 지체를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8절에 보면 벗어 버려야 할 것이 다시 나오는데,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입의 부끄러운 말”입니다. 다섯 가지가 나오는데 분노의 감정을 가지면 악의(惡意)를 가지게 되고, 입에서 비방의 말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또 그 비방의 말을 정당화하려고 하다보면 ‘부끄러운 말’을 하게 됩니다. 다섯 가지가 서로 따로따로 같지만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이 씨앗이기 때문에 그 씨앗이 자라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심어놓는 분노와 악의의 감정을 가지면, 그것이 씨앗이기에 추잡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땅에 지체를 죽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려면 먼저 비워야합니다.
Γ. 우리는 하늘의 지식으로 무장해야 합니다(9-10).
거짓은 거짓을 낳습니다. 거짓말을 자꾸 하다보면 점점 거짓말이 늘어납니다. 그것을 교훈하는 것이 ‘피노키오의 코’ 이야기입니다. 한번 거짓말을 하면 그것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로 덮어야합니다. 그러니 점점 거짓말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9a)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옛 사람의 모습, 옛 사람의 행위는 거짓투성이입니다. 씻으려 해도 씻을 수 없고, 고치려 해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예 벗어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벗어 버렸으면 새 것을 입어야 합니다. 무엇이 새 것일까요? 이 세상에는 새 것이 없습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 1:9-10) 그렇습니다. 이 세상 것은 새 것이 없기에, 우리는 이 세상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입어야합니다.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10)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 것이 바로 정답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배워서 얻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 지식은 배워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 중에는 ‘거짓 지식’도 많습니다. 세상에는 거짓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거짓은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이십니다. 하나님께는 거짓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식’이라야 참된 지식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기 경험이나 배운 지식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Ⅲ.
어느 초등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렸습니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장애물 달리기였습니다. 출발신호와 함께 아이들은 힘차게 앞을 향해 달렸습니다. 그 중 한 아이는 육상선수였습니다. 그는 제일 앞장서서 달렸습니다. 뜀틀도 가볍게 뛰어넘었고, 사다리도 날렵하게 통과했습니다. 또 그물 밑도 잽싸게 기어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탁자가 있었습니다. 그 탁자 위에는 밀가루가 담긴 쟁반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제일 먼저 밀가루에 얼굴을 파묻고 그 안에 들어있는 쪽지 하나를 입에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쪽지를 펼쳐보는 순간 그 아이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졌습니다. 거기에는 ‘할머니’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 할머니나 찾아가서 그 할머니 손을 잡고 같이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야만 했습니다. 그 아이가 육상 선수라 아무리 잘 달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할머니가 제대로 뛰지 못하는데. 결국 그 아이는 다 이긴 경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꼴찌로 달려온 아이는 키 작고, 몸집도 작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밀가루 안에 있는 종이를 펴는 순간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그 쪽지에는 또렷한 글씨로 ‘체육선생님’이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체육선생님은 그 아이와 함께 뛰다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 등에 업혀라.” 체육선생님은 그 아이를 자기 등에 업고서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1등으로 달려온 아이는 육상선수인 아이가 아니라, 바로 키 작고 몸집도 작은 아이였습니다. 인생은 경주와 같습니다. 누구와 함께 달리느냐가 중요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의 앞길에도 많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손을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들어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안아주시고, 우리를 업어주셔서 우리를 안전하게 목표까지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주님과 함께 승리하시길 축복(祝福)합니다.